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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499화 (496/1,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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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 499화

주저앉기는 했지만 이내 성장하게 되는 클리셰(2)

전쟁에서 진 군대의 모습은 어떻게 봐도 비참한 법이다.

당연하지만 둥지 탐험을 강행했던 대륙연합의 본대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제대로 몸을 움직일 수 없을 정도의 부상한 이들은 셀 수도 없다.

위치가 발각될까 봐 신성력도 함부로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라 포션으로 응급처치를 하는 게 고작이었다.

극도로 민감해진 감각들 때문인지 모두가 예민해진 것 같이 보였다.

목소리를 크게 낼 수도 없는 상황이라 목 놓아 울부짖을 수도 없는 상태.

여기저기에서는 간헐적으로 끅끅거리는 목소리만이 울려 퍼지고 있었지만, 딱히 그걸 지적하는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애초에….

‘통제한다고 통제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니까.’

뻔한 표현이지만 몸의 상처보다 마음의 상처가 더 클 것이다.

가족 같았던 이들을 리무르아의 둥지 안에 두고 올 수밖에 없었던 이들을 떠올리자 괜스레 고개가 숙어진다.

여기저기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와 도망치라고 외치는 커다란 목소리들.

사방에서 들려오던 악마들이 울부짖는 소리와 그들의 속으로 파묻히듯 끌려간 이들의 숫자는 일일이 셀 수도 없다.

그 지옥에서 빠져나갔으니 병력 전체가 의기소침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교국의 상징이라고 불리는 부길드마스터가 악마들에게 세뇌당했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커다란 정신적 충격을 주기에는 충분했다.

공격대의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구성된 일부 공화국 병사들이나 왕국 연합의 네임드들, 드워프들과 다른 이종족들은 그 충격이 크지 않은 것 같았지만 교국의 병사들과 엘프들의 표정은 지금 그들이 얼마나 절망감에 빠져 있는지 말해주는 것 같았다.

베니고어와 엘룬의 상징. 그들의 자식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가 바로 부길드마스터가 아닌가.

인류의 편에 앞장서 이해할 수 없는 기적을 보여준 인물.

분열되어 찢어진 대륙의 상처를 치유한 것을 물론 인류를 하나로 모은 평화의 상징.

그리고 파란 길드원들의 정신적 지주이자 어머니 같은 사람.

상황은 상상 이상으로 최악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정연 언니.”

“예리야.”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 자리해 있는 것은 길드의 막내, 김예리였다.

아까 있었던 전투로 인해 다리와 팔에 붕대를 감은 모습이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다.

천천히 입을 연 것은 당연한 일이다. 곧바로 대답해 오는 그녀의 얼굴이 눈에 보였다.

“다리랑 팔은 어때. 조금 괜찮아졌어?”

“응. 움직이는 데 문제없을 것 같아.”

“겉으로 치료가 된다고 해도 안에 있는 피로도까지 회복시켜 주는 건 아니니까. 무리하게 움직이지 않게 조심해. 더군다나 신성력으로 치료한 것도 아니니까 더 불편할 수도 있을 거야. 오늘 하루는 최대한 조심하고, 17거점에만 도착하면 엘레나 님이나 희영 씨한테 말씀드려서 다시 한번 잘 살펴보자.”

“응. 만약 악마들이 다시 오면….”

“착란 마법이 통한 것 같아서… 지금 당장은 문제없을 거야. 그런 생각하지 말고 일단 지금은 푹 쉬어. 쉴 수 있을 때 체력을 보충하는 것도 중요하니까. 다음을 생각해야지.”

“응.”

눈치채기 힘들 정도이기는 했지만, 확실히 눈시울이 붉어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매번 부길드마스터와 티격티격대긴 해도 기본적으로 사이가 좋았던 만큼 마음이 편하지는 않은 모양.

주변에 별 관심이 없는 것 같기는 해도 은근히 정이 많았으니 저런 모습을 보이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특히나 안 좋은 과거가 있는 만큼 이런 상황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을 것이다.

그나마 김예리는 상태가 나은 편.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다른 이들을 떠올리자 자연스럽게 한숨이 나오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눈물을 멈추지 못하고 있는 엘레나 님이나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희영 씨.

마음이 약한 아영이나 안기모 씨, 창렬 씨 역시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길드원 중에서 가장 커다란 충격을 받은 것은 초창기 멤버라고 할 수 있는 3인이리라.

특히나 하얀 씨는 깨어 있는 시간보다 기절해 있는 시간이 더 많았을 정도다.

정신을 차린 후에도 혼잣말을 하거나 손톱과 머리카락을 쥐어뜯은 뒤, 비명을 지르며 다시 혼절했고 심지어는 자해를 시도할 정도였다.

소라 씨가 옆에 있어주지 않았더라면 커다란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물론 그이 역시 상황은 다르지 않았지만….

그나마 가장 정신을 차리고 있는 것 같기도 했지만 무리하고 있다는 느낌이 계속해서 전해져 온다.

자신을 자책하거나 몰아붙이는 모습을 보이거나 애써 눈물을 참는 모습을 보였으니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이 당연하리라.

그리고….

“길드마스터는 조금 어때?”

“오빠는….”

“응.”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아까 그 악마와의 싸움에서 마력을 많이 사용하기도 했고, 특히나 마지막에는 머리를 다친 것 같아서…. 엘레나가 정신적인 충격이 큰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전부 다 자기 탓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고. 꼭 그렇지는 않은데….”

“많이 힘드실 거야. 두 분 사이를 생각해 보면….”

“그래도 외상은 크지 않대. 마력을 회복하려면 시간이 좀 걸리기는 하겠지만. 그것보다는 다른 부분이 문제인 것 같아서…. 도통 말을 걸어도 대답하지도 않고. 일단은 혼자 놔두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해서…. 그래도… 괘, 괜찮겠지?”

“괜찮을 거야. 길드마스터는.”

“아니. 오빠 말고, 기영이 아저씨.”

“아… 물론, 괜찮을 거야. 기억하지? 마지막에 부길드마스터가 캐스팅했던 마법.”

“응.”

“그이가 말하기로는 잠깐 정신이 돌아오셨던 것 같아. 덕구 씨 말고 다른 사람들도 봤었던 것 같고. 아마 그것 때문에 주문이 취소됐었던 것 같기도 해.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내면에서 싸우고 계실 가능성이 커.”

“그럴까?”

“악마들이 정확히 어떤 식으로 부길드마스터를 그렇게 만들 수 있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평범한 세뇌 마법이라고 하기에는 확실히 의아한 점이 많지. 그전에 지속적인 고문으로 부길드마스터를 압박했던 것과 그 촉수 아, 악마와… 촉수 악… 초, 촉수… 촉수… 아니, 이건 말하면 안 되겠구나. 미, 미안.”

“나도 알 건 다 알아.”

“아, 아무튼 그런 일련의 과정들도 모두 부길드마스터의 정신을 망가뜨리기 위한 작업의 일환이었던 거겠지. 평범한 세뇌 마법이 통했더라면 그런 방법은 굳이 사용하지 않았겠지만, 그들도 여유가 없었던 거로 생각해.”

“그렇구나.”

“물론 확실한 건 아니지만….”

“아니, 아마 당신의 말이 맞을 거예요.”

왠지 모르게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눈에 보인 것은 머리 위에 커다란 뿔을 달고 있는 여자.

조금 깜짝 놀라기는 했지만,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현재 그녀가 이곳에 있다는 건 17거점의 공략이 완료되었다는 뜻과 다름없었으니까.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쳐 있는 공격대가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장소가 생긴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엄지를 치켜올릴 만했다.

“디아루기아 님.”

“아직 연결이 끊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 말씀은….”

“네. 당신의 그 추측이 맞아요. 점점 더 엷어지고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아직도 그 인간은 벨리알의 힘에 저항하고 있을 겁니다. 시간이 정확히 얼마나 남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정신력 하나는 지독한 인간이니 아마 어느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거예요.”

“다행이군요.”

“그보다 17거점으로 향하는 병력은 이게 전부인 겁니까?”

“네.”

“조금 이동 속도를 높이는 게 좋겠다고 전해주시면 감사할 것 같습니다. 희미하게나마 적 군대가 근처에 있는 것 같아서. 저는 조금 더 상황을 살펴봐야겠습니다. 적 병력이 더 접근하지 못하도록 견제도 해야 하니….”

“감사합니다.”

“제게 감사할 필요는 없습니다. 저 역시 그… 그 인간이 죽으면 안 되는 입장인 건 마찬가지이고…. 파란 길드 여러분들께는 신세진 것도 많으니까요. 루리아의 일로….”

“네.”

“그럼 부탁드립니다.”

“네.”

“나도 같이 갈까?”

“아냐. 예리는 여기에서 쉬고 있어. 어차피 금방이니까.”

“응….”

“후우.”

디아루기아 님이 인파 속으로 사라지고 난 이후 조금 더 빠르게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앞서 있던 붉은 용병의 차희라를 따라잡는 것은 금방이다.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는 듯한 얼굴들.

오래간만에 기쁜 소식을 전해줄 수 있다고 생각해 조금 더 빠르게 발을 놀렸을 때, 누군가가 어깨를 팍 하고 밀치는 것이 느껴졌다.

“희영 씨?”

어깨를 밀치고 간 인물은 길드의 원년 멤버라고 할 수 있는 선희영.

스쳐 지나간 얼굴이 구겨져 있는 것을 보고 뭔가 안 좋은 일이 생길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니나 다를까 커다란 고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당장 병력 돌려요.”

“이러시면 안 됩니다.”

“당장 병력 돌리라고 했잖아요!”

“이러시면 안 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마음은 이해하지만 일단은 상황을 조금….”

“이거 놔. 이거 놔! 내 몸에 손대지 마요. 내 몸에 손대지 말라고! 병력 돌리라고 말했잖아. 이 개 같은 년. 내 말 안 들려?”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이 상황에!”

“병력 돌려. 병력 돌리라고!”

“붙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해!”

“이거… 놔!”

“더 이상 소란을 일으킨다면 명령 불복종으로 징계하겠습니다. 선희영 님. 마음은 이해가 가지만 힘든 것은 모두가 마찬가지입니다. 부디 진정하시고….”

“징계? 정말로 죽어야 하는 게 누군데… 누가 누굴 징계해? 차희라 그 씨발년이 그래요? 반항하는 연놈들은 전부 쳐넣으라고? 호랑이가 없는 곳에서는 여우가 왕이지 그래. 우리 부길드마스터를 그렇게 이용하고 좋을 대로 써먹었으면서 정작 중요한 상황이 닥치니까 살겠다고 내빼겠다 이거네.”

“상황이 상황이었지 않습니까. 어쩔 수 없는….”

“최소한 구하려는 시도는 해봐야겠다고 생각 안 해? 쓰레기 같은 인간들. 너희들은 전부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야. 한 놈도 빠짐없이 전부. 명예추기경, 명예추기경, 앵무새처럼 중얼거리면서 간이고 쓸개고 전부 빼줄 것처럼 행동할 때는 언제고, 인제 와서 내치시겠다. 영악한 년들, 무능하고 영악한 연놈들.”

“차희라 님도 많이 힘들어하고 계십니다. 자꾸 여기서 이러지 마시고, 일단 진영으로 돌아가 계시면 추후 내용을 전달….”

“진짜 힘든 게 누군지 알아요?”

“…….”

“진짜 힘든 게 누군지 아냐고 물었잖아요.”

“그러니까….”

“얼마나 고통스럽고 얼마나 힘들지 상상해 봤어요? 한 평생을 타인을 위해서 살아왔던 사람입니다. 자기 자신의 안전은 내팽개치고 연방민들의 피난을 돕다가 잡혀간 사람이 그 사람이라고요. 여기 있는 인간들 전부 구해보겠다고 자기 몸이 어떻게 되든 신경 쓰지도 않고…. 끄윽, 후유증에 매일 시달렸던 사람이라고요. 신성 주문과 약을 달고 살 정도로 몸을 망가뜨리면서 자기 몸을 희생했는데. 그 대가가 겨우 이거야? 끄윽.”

“…….”

“이게 그 결과냐고! 얼마나 슬펐을지 상상이라도 해봤어? 자기를 구출하러 온 줄 알았던 아군 병력이 몸을 돌려 도망치는 걸 눈으로 봤을 때, 자기 자신이 얼마나 비참하다고 생각했을지 상상이나 할 수 있겠어?”

“…….”

“전부 쓸모없는 인간들이야. 당신들은 전부, 전부 쓸모없는 인간들입니다. 대륙에 불필요한 인간들이라고….”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선희영 님. 하지만….”

“이해하고 있으면 병력 돌리라고! 병력 돌리라고 말했잖아!!”

절규에 가까운 비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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