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0
회귀자 사용설명서 490화
악마는 악마다워야 악마다(2)
사천왕은 리무르아, 도노반, 발리토스, 마지막으로 카르페디악으로 결정됐다.
로노베가 사천왕에 들지 못한 것을 섭섭해하기는 했지만 이게 가장 최선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얘는 그동안 많이 나와서… 이미지 소비가 너무 심했으니까.’
익숙한 것도 좋지만 역시나 신선한 인물을 내세우는 게 좋다는 판단이었다.
이 음마는 그동안 어그로를 너무 많이 끌어 분노가 집중될까 걱정되기도 했으니 어떻게 봐도 적절한 판단이라고 할 만했다.
여러모로 평범해 보이기는 했지만 카르페디악이라는 악마가 보여준 연기가 임팩트 있었다는 게 유효했다.
아무튼, 그 외에도 크고 작은 배역을 정하는 데 제법 힘을 썼다.
현세에 소환된 악마 군단은 크게 4개로 나누어 운용하려고 하기는 했지만, 구석구석을 쑤셔주는 조연의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박진감 넘치는 전투를 위해 전투력 측정기들부터 보급관이나 기동타격대, 심지어 지원중대까지 모두 배역으로 집어넣을 수밖에 없었다.
세세한 역할 배정이 조금 귀찮기는 했지만, 이런 디테일이 완성도를 높여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미장센 역시 허투루 볼 수는 없었다. 어떻게 보면 제일 중요하다고 할 수도 있었다.
27군단을 이끄는 벨리알의 사천왕이 꽃밭에서 싸울 수는 없지 않은가.
그네들이 가지고 있는 분위기에 어울리는 배경을 설정해 줘야 한다는 걸 모르는 이들은 없으리라.
대륙 전역으로 뻗어나갈 영상을 찍는다고 가정한다면 더욱더 그렇다.
인간들과 처음 만나게 되는 장소부터 클라이막스가 일어나는 장소까지.
각 사천왕마다 가지고 있는 이야기와 공략법이 다르다 보니 여러 가지고 신경이 쓰였다.
오죽했으면 제법 신경이 곤두섰을 정도.
커다란 이벤트를 앞두고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조금 신경질적으로 변한 이쪽의 태도에 만인장들이 당황스러워할 정도였다.
오늘도 역시 마찬가지.
“아, 여기는 조금 더 신경을 쓰셔야 합니다. 몇 번이나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발리토스 님이 전투를 펼칠 곳인데. 혹시나 해서 와봤는데. 아…. 정말로…. 아….”
-뭐,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십니까.
“발리토스 님. 발리토스 님과 벌레같은 인간들이 격전을 벌여야 하는 장소가 어딥니까?”
-식, 식량 창고입니다만….
“제가 허투루 식량 창고를 배정해 드린 것 같습니까? 분위기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아시지 않습니까. 캐릭터에 대한 이해가 있다면 이 장소를 이런 식으로 마감할 수 없는데. 제 입으로 말씀드리기는 뭣 하지만 발리토스 님은 사람 고기를 즐기는 쓰레기 같은 악마란 말입니다.”
-이, 인간 고기는 맛이 없….
“실제로 드시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저도 기본은 인간이라 그런 꺼림칙한 주문을 드리지는 않습니다. 그냥 정체불명의 고깃덩어리 몇 개 걸어주세요. 가져온 마수 고기 많지 않습니까. 어차피 여기 온 놈들도 대충 보면 사람 고기구나 하고 생각할 겁니다. 여러 가지 조리도구나 가마솥 같은 곳에 뭣 좀 채우시고요.”
-네, 넷.
“체력이 딸린다 싶으시면 이곳에 있는 고기들을 삼키시고 체력을 회복하시고, 그게 발리토스 님께서 부여받은 기믹입니다. 벌써 몇 번이나 말씀드렸잖습니까. 드실 게 있어야 조금 더 오래 인간들에게 공포를 심어줄 수 있지 않습니까.”
-죄… 송합니다. 이기영 님.
“제가 괜히 이런 소리를 하는 게 아닙니다. 벌레 같은 인간에게 이런 말을 듣는 것도 기분 나쁘시겠지만 전부 다 발리토스 님을 위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진심으로요.”
-어떻게 이기영 님의 뜻을 의심할 수 있겠습니까. 그 누구보다 27군단을 위해 힘써주시는 것 정도는 저 발리토스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또 그만큼 저를 위해주시는 것 역시.
“후우. 아직 안심하실 때가 아닙니다. 발리토스 님. 아마 알고 계실 거로 생각합니다만, 최근 울카록스 님이….”
-그, 그건….
“배역을 땄다고 해서 끝난 게 아니라는 거. 전부 아시지 않습니까. 후우. 여기까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세 시간 이후에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만약 그때까지도 제대로 마무리가 안 돼 있으면 벨리알 님께서 무척 유감이라고 생각하실 겁니다.”
-네.
“그리고 여기 오기 전에 들어오는 입구도 너무 깔끔하던데 조금은 더럽혀 주세요. 있던 긴장감도 사라지는 것 같았습니다. 깔끔한 걸 좋아하시는 성격은 이해가 가지만 역할에 조금만 더 충실해 주세요. 청소 좋아하는 악마를 무서워할 인간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명심, 또 명심하겠습니다.
대충 이런 상황이다.
‘하, 우리 얘들 들어오기까지 얼마 안 남은 것 같은데. 얘는 진짜 너무 준비가 안 돼 있다.’
약 10일 정도 걸릴 거로 생각했지만 돌아가는 상황을 보자니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무슨 약을 빤 거야….’
안쪽의 사정을 아주 자세하게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겉으로만 봐도 보이는 게 있는 법이다.
병력들이 결집하는 속도는 상상을 불허할 정도였고 보급 물량 같은 건 옛날 옛적에 맞춰놓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연방 놈들이 중간에 훼방을 놓을 거라고 계산했건만 지옥불의 게르한이나 자밀라 이놈, 년들도 대세에 편승하기로 마음을 먹었는지 기존 병력과 잘 조화된 것처럼 느껴졌다.
공화국이 눈에 불을 켜고 있다는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실제로 최근에는 꽤 높은 수준을 가지고 있는 정찰대도 연방 내 주요지역에 대한 정보를 모으고 있었다.
원활한 진행을 위해 군단 측에서 일부 정보를 흘리기는 했지만, 흘리는 족족 주워 먹는 정찰대는 이게 내가 아는 대륙 연합이 맞는지 의심하게 할 정도.
유기적으로, 또 동시다발적으로 움직이는 이들의 모습은 어떻게 봐도 유능하다고 말할 만했다.
물론 예상보다 인류가 하나가 되는 시기가 빠르다는 건 반가운 이야기였지만 한편으로는 걱정스러웠다.
뭐든 급하면 부작용을 떠안기 마련이었으니까
지금이야 함께 싸우자고 협의해 힘을 모으기야 했지만,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잡음이 나오지 않을 리 없다
이 전투가 끝난 이후에 불편한 관계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조금 찝찝함이 남았다.
물론 그 찝찝함보다 더 찝찝한 것은 현재의 내 상황.
‘그래도 아직 시간이 남아 있기는 해.’
기본적으로 벨리알이 영역으로 삼은 연방의 대도시들이 모두 암흑 상태가 되어 있다 보니 신성력으로 불을 켜고 올 수밖에 없다.
중간중간 거점이라고 생각되는 곳들을 모두 공략해야 한다는 걸 생각해 보면 아직 아메라에 도착하기에는 이르다.
굳이 중간 관리자와 보스들을 넣은 이유라 할 수 있으리라.
연방탈환 공략의 기본 골조는 차근차근 한 계단씩 공략해 들어가 맵을 밝히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벨리알의 영역이 아닌 장소에서는 27군단의 기본 능력치가 하락한다는 기믹도 사전에 깔아놨다.
대륙 연합의 전략팀이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차근차근 공략을 진행할 것이다.
‘완벽하게 준비해야 돼. 완벽하게.’
그럼에도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해지는 상황이다.
나답지는 않지만 걸려 있는 게 많다 보니 그만큼 압박받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확실히 리무르아, 얘를 보면 조금 안심이 됐다.
아메라 지역을 관리하게 될 사천왕.
촉수라는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버리지 않고 캐릭터에 대한 이해도까지 완벽.
모든 게 나무랄 데 없이 완벽하게 표현된 모습이었다.
-조금 어떠신지….
“리무르아 님은 딱히 뭐라고 설명해 드릴 게 없군요. 대단하십니다. 맵 자체를 전부 촉수로 덮을 줄은 상상하지 못했는데… 적당히 그로테스크한 느낌도 있고 적당히 잔인한 느낌도 있는 게… 아마 심장이 약한 인간이라면 이 장소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자지러질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아직 많은 게 부족합니다. 디테일적인 부분을 제대로 손보지 못해서… 혹시 시간은 얼마나 남았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조금 촉박하게 생각해 보면 대략 4일 정도가 남았다고 생각하면 될 겁니다. 빠르면 이틀 정도일 수도 있고요. 전체 리허설은 하루 전날에 시작되겠죠. 음. 혹시나 해서 묻는 겁니다만 리무르아 님의 역할이 뭔지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당연히 숙지하고 있습니다. 이기영 님. 설정상으로는 제가 군단에서 소환된 모든 악마를 유지할 수 있는 마력을 아메라에 있는 인간들과 이기영 님의 몸에서 뽑아내고 있는 게 맞습니까?
“아, 정답입니다. 제가 괜한 걱정을 했군요.”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걱정하시는 게 당연하 건데요. 뭐. 무엇보다 이기영 님께서 짜주신 캐릭터 설정이 마음에 들기도 했고요. 제 사랑스러운 촉수들과도 어울리는 기믹이기도 하니 정말 좋아할 수밖에 없네요. 이런 기회를 통해서 드리는 말씀이지만 이렇게 따로 새로운 설정을 만들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기영 님.
“능력 있는 배우에게 좋은 역할을 드리는 게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게까지 감사하실 필요 없습니다. 하하, 항상 드리는 말씀입니다. 이번 계획에서는 리무르아 님의 역할이 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합니다. 인간들을 모아놓은 창고가 털리면 소환 자체가 성립되지 않으니. 사실상 이번 계획에 시작이자 끝이나 다름없습니다.”
-배역에 대한 그 막중한 책임감은 항상 느끼고 있어요. 정말로 이런 기회를 주셔서 감사드릴 뿐입니다. 만약 이번 일이 잘 풀리게 되면 정말로 촉수로 마력을 흡수하는 권능을 한번 만들어 보려고요. 그만큼이나 실적을 쌓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하하하. 상상만 해도 잘 어울리는 권능이십니다.”
-아, 그보다 이기영 님. 그러고 보니 도노반 님은 딱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으신 것 같은데, 혹시 비협조적이거나 그러지는 않습니까? 만약 그게 맞다면….
“아. 그렇지는 않습니다. 사실 도노반 님께는 딱히 지역을 배정하지 않아서 말입니다.”
-네? 어째서….
“도노반 님의 역할은 수비가 아니니 딱히 이곳에서 따로 준비하고 계실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음, 리무르아 님에게만 먼저 말씀드리는 건데 사실 도노반 님께서는 합동훈련소에 모여 있는 인간들의 본대를 직접 타격할 예정입니다.”
-아….
“최대한 시간을 끌어주시고 첫 전투에 임팩트를 잡아주시기에는 도노반 님만큼 어울리는 사람이 없으니까요.”
-확실히 어울리기는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조금 걱정됩니다. 나쁜 분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성향 자체가 많이 다르다 보니. 솔직히 이번 일에 합류한다는 것 자체가 신기하게 느껴지셨거든요. 본래 이런 일을 즐기시는 분이 아니라.
“하하하. 저도 그런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벨리알 님께서도 도노반 님을 한 번쯤 믿어봐도 괜찮을 거라고 판단하셨습니다. 그동안 군단을 위해 힘써주신 분이니까요.”
-역시 그럼 다른 지역은 준비가 다 된 겁니까?
“아직 부족하기는 하지만 어떻게든 전부 끝내놓은 것 같습니다. 전체적인 그림은 모두 완성하기도 했고요. 하지만 아직 손을 봐야 하는 부분이 많아서….”
-혹시라도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다면….
“아니요. 리무르아 님은 맡은 역할에만 집중해 주시면 됩니다. 굳이 다른 일까지 신경 쓰실 필요가 없죠. 이 프로젝트의 주역이신데….”
-그렇게 말씀하시니 부끄럽습니다.
“리무르아 님이 직접 쟁취한 자리입니다. 조금은 당당히 어깨를 펴셔도 됩니다.”
관리자들이 깔아놓은 판 위에서 열심히 하면 당연히 인정받게 되어 있다. 리무르아는 딱 그 경계를 알고 있는 사람이었고.
조금 불안했던 마음에 조금씩 행복 회로가 들어간 것은 당연했다.
그 행복 회로가 타격을 입게 된 것은 정확히 3시간이 지난 이후였다.
-이기영 님.
“네.”
-저… 인간들의 군대가 벨리알 님의 영역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어, 어떻게 할까요?
“네?”
‘뭐가 이렇게 빨라? 씨발.’
상정하고 있던 범위를 아득히 뛰어넘을 정도였다.
‘얘네 갑자기 왜 이렇게 빠릿해졌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