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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468화 (1,010/1,590)

# 468

회귀자 사용설명서 468화

대륙 합동 훈련(3)

‘얘 또 맛탱이 간 거 아냐?’

순간적으로 좀 쫄리기는 했지만 다행히 걱정해야 할 정도는 아니다.

조금 기분이 안 좋은 것 정도로 끝났다는 생각에 긴장이 풀렸다.

굳이 분류하자면 극소노 상태.

이 정도라면 충분히 안심할 수 있다.

입술이 삐죽 튀어나오기 시작하는 중노와 안색이 새하얗게 변하고 4번 이상 말을 더듬는 대노.

혼잣말을 시작하는 극대노에 비교하자면 웃으면서 넘어갈 수 있을 정도였다.

아마 본인이 보기에도 매력적인 여성이 훅 들어와 친근하게 대한 게 기분 나빴던 것이 분명하리라.

보통의 여성들에게도 견제 아닌 견제를 하지만 미인에 대해서는 그보다도 엄격했으니까.

저 카일리 예일이라는 마법사가 김현성이 아니라 내게 달라붙었다면 중노로 발전했을 것이다.

다행히 그녀는 나에게 별 관심이 없다.

그녀에게도 나에게도 고개를 끄덕일 만한 이야기였다.

‘도사 다 됐네. 도사 다 됐어.’

몇 년간 정하얀이라는 혹 아닌 혹을 달고 다니다 보니 이제 눈치까지 볼 수 있게 된 스스로에게 박수를 보내주었다.

이제는 정하얀 사용설명서라는 책을 집필할 수 있을 정도로 그녀에 대해 잘 파악하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다.

자연스럽게, 관심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지구에 있을 때 유명한 배우였던 것 같은데… 이름은 잘 몰라. 워낙 그런 데 관심이 없어서.”

“아… 그렇구나. 본 적 있어요. 저 사람…. 자,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영화 같은 거 많이 보지 않아서….”

“그래?”

“네. 그, 그런데 오빠… 지구에 있었을 때 호, 혹시 조, 좋아하는 연예인이라든가…. 있, 있으셨나요?”

뜬금없이 날아든 질문이지만 이게 공명의 함정이라는 사실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멍청이 같이 고개를 끄덕인다면 그 연예인은 물론이거니와 그녀를 닮은 이들까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게 되리라.

“아니. 사는 게 바쁘다 보니까 누가 누군지도 잘 몰랐어.”

“아아…. 그, 그렇구나아.”

“응. 하얀이는 어땠어?”

“저, 저도 그랬어요. 집에… 티비 같은 것도 없었고 영화관… 같이 갈 사람도 없었으니까요.”

‘햐… 또 짠해지네.’

“그래?”

“네….”

괜스레 코끝이 찡해지기 시작했다.

부모님과 언니 두 명에게도 버림받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정하얀의 얼굴을 보니 다시 한번 짠해진다.

저 슬픈 사실을 아무렇지도 않게 입 밖으로 내뱉는다는 게 포인트.

이제는 별로 상관없다는 말투지만 받아들이는 사람은 영향을 받게 마련이다.

‘정하연, 정하은이라고 했던가.’

첫째 언니가 정하연 둘째 언니가 정하은.

연락이 끊기게 된 시점이 조금 애매한 것 같아 대륙으로 소환되지 않았을까 찾아봤지만 성과가 없었다.

정하얀이 두 언니들과 어머니에 대해 언급하는 걸 병적으로 싫어한다는 이유도 한몫했고, 실제로 소환자 기록소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정말로 연락을 끊어버린 듯하다.

저 짠한 마법사가 내게 집착하는 이유도 버림받지 않을까 하는 불안에서 비롯된 거라는 걸 생각해 보면 더욱더 가슴 아파진다.

‘아즈모단도 기립박수 보낼 년들… 혹시나 만난 일 있으면 통수나 시원하게 쳐줘야지.’

안타까운 마음에 정하얀의 머리를 쓰다듬자 기분이 좋다는 듯 입꼬리가 히죽 올라간다.

여기서 더 하면 뭔가 이상해질 것 같아 급하게 손을 떼고 마무리.

그 와중에 파란 길드의 직원들과 함께 온 교국의 병사들은 거대한 건축물 안으로 들어섰고 조혜진의 통제에 따라 각자 배정받은 장소를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물론 쉼터로 향하는 것은 간부를 제외한 길드원이 전부.

교국의 중요 인물인 빛기영과 파란의 길드마스터인 김현성은 잠시 후에 회의에 참여해야 한다.

조혜진이 잠깐 다른 볼일을 보고 있는 사이 길드원들을 책임질 수 있는 선임은 선희영.

슬슬 떠나야 하기에 입을 열었다.

“희영 씨, 길드원들 데리고 배정 받은 장소에서 대기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네.”

“훈련을 하셔도 되고… 주변을 한 번 둘러보셔도 되는데 타국의 병력이랑 접촉하는 것만 자제해 주시면 됩니다. 사실 별 상관없지만 괜한 분란을 만들 필요는 없으니까요. 정치적으로 예민한 국가도 몇 있고…. 식사는 따로 하셔도 되는데 웬만하면 일반 병사들과 함께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네. 알겠어요, 기영 씨.”

“감사합니다.”

“아뇨. 감사할 일도 아닌데요. 당연한 일인걸요. 잘 다녀오세요.”

얘도 살짝 맛탱이가 간 사람이지만 저렇게 웃으면서 말하는 걸 보니 괜스레 마음이 편해진다.

아무래도 미친 짓을 온몸으로 받아내느냐 아니냐의 차이인 모양.

솔직히 이쯤 되니 선희영은 정상인처럼 보인다.

상대적으로 정신 나간 여자들이 주변에 많은 효과라고 할 수 있으리라.

“하얀이도….”

“어, 어디 가시는데요?”

“회의. 현성 씨랑 엘레나 님이랑 같이 다녀오게 될 것 같아. 아무래도 조금 오래 걸릴 것 같고….”

“에, 엘프는 왜요?”

“이종족 연합의 간부 자격.”

“아아…. 그… 렇구나. 차, 차희라도 같이 가나요?”

“아마도.”

‘중노 진입.’

입술이 삐쭉삐쭉 튀어나오기 시작한다. 심지어 얼굴에 핏기가 가시고 있다.

‘대노 진입 직전.’

더 이상 쓸데없는 생각을 하게 내버려뒀다간 자연스레 대노에 안착하게 되리라.

대노에 안착하는 순간 극대노로 향하는 건 순식간일 테니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춰주는 걸로 막아섰다.

이제는 떨어져 있는 걸 참을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고 생각했는데, 엘레나와 차희라만 함께 갈 수 있다고 하니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마 차희라와 같은 공간에 있는 걸 반기지 않는 거겠지.

“너무 늦지 않게 돌아올게.”

“네….”

조금 시무룩해지기는 했다.

마음 같아서는 정하얀을 데리고 가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 문제.

자리에 모인 모든 간부급 인원들이 부관까지 데리고 나서면 회의장이 시장바닥이 될 게 확실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다는 걸 이해했는지 입술이 삐죽 나온 상태로 고개를 끄덕이는 정하얀의 머리를 쓰다듬자 조금씩 입술이 들어가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와중에 이 엘프는 기쁘다는 듯 밀착하고 있고.

아직도 그녀에게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정하얀은 딱히 엘레나를 제지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탐탁지 않아 했다.

둘 사이에 김현성이 껴 있었다면 그나마 조금 나았겠지만 눈치 없는 김현성은 그 여자와 먼저 회의실로 향한 상태.

왠지 모르게 뒤에서 계속해서 시선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별일 없겠지.’

왠지 모를 불안감을 애써 억누르며 회의실로 향한 것은 순식간.

사실 회의실이라고 하기에는 규모가 무척 크다.

워낙 모이는 사람이 많다 보니 이런 장소를 마련한 듯.

전 대륙에 있는 권력자와 유력 길드의 마스터들이 모인 자리.

마치 국회의사당 같다고 하는 게 어울리리라.

중앙은 커다란 마력홀로그램과 함께 회의를 진행할 사회자가 서게 될 단상이 있었고 중앙을 중심으로 둥근 형태의 커다란 책상과 고급스러운 의자들이 즐비해 있었다.

교국은 중앙 가장 위쪽에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자 익숙한 얼굴들이 시야에 비쳤다.

교국 8좌, 천관위와 위란과도 잠깐의 인사를 나눴고 카스가노 유노와도 눈인사로 안부를 주고받았다.

차희라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모양.

중견 길드의 마스터들 역시 자리해 있었는데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는 게 인상적이었다.

그야 긴장할 만하다.

그나마 이런 자리에 익숙했던 기존 인물들과는 다르게 쟤네들은 이런 자리 자체가 처음이니까.

이 회의가 대륙의 운명을 결정짓는 첫 번째 발걸음이라는 걸 떠올려보면 더욱더 그렇다.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이 웅성이기 시작했다.

아직은 회의 시작 전, 서로 인사를 나누거나 지들끼리만 아는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 놈들이 대다수다.

어떻게든 인맥을 만들어보겠다고 무거운 엉덩이를 일으킨 놈들과 본래 쌓아놓은 인맥이 꽤 되는지 비밀 이야기를 주고받는 놈들.

사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라이오스와 공화국, 이종족 연합에서 온 이들과 간단한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고 쓸 만해 보이는 사람에게 다가가 괜스레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내게 먼저 찾아온 이들을 향해 친한 척 미소를 날려주는 것 정도야 당연한 거고.

중견 클랜 같은 경우에는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받아먹을 게 없나 간을 보고 있었다.

김현성도 마찬가지.

자신을 찾아온 이들과 악수를 하기 시작했지만 얼굴에는 불안감이 감돌고 있었다.

‘참….’

대륙의 위기를 막아보겠다고 모인 것치고는 대부분이 속물적이다.

아마 진심으로 이번 사태에 심각성을 느끼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으리라.

심지어 공화국과 라이오스, 교국과 이종족 연합에서도 미래에 닥칠 위협을 먼 미래 보듯 보는 사람들도 있었으니 타국의 인원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뻔할 뻔 자.

‘언젠가 대륙에 운석이 떨어진대!’

같이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받아들이고 있는 인원도 있을 수 있다는 거다.

공화국과의 전쟁에서 빛기영의 몸에 친히 강림해 주신 베니고어가 너무 두루뭉술하게 이야기했다는 게 원인이라면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

겨우 ‘위협은 실존한다’ 정도로 말한 게 끝이었으니까.

솔직히 자세히 말했더라도 그다지 달라지지는 않았을 거다.

본래 인간이란 족속은 위기가 턱 끝까지 닥쳐야 움직이게 설계되어 있으니까.

‘진심으로 움직이기는 쉽지 않지.’

아마 휩쓸리는 입장에 있는 이들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것이다.

김현성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 표정이 별로 좋지는 않아 보였다.

‘이제 실감이 나는 거지, 뭐.’

아마 본격적인 훈련에 들어가면 더 할 거라고 생각했다.

1회 차에 일어났던 모든 이벤트를 막아내 이제 힘을 모으는 것밖에 남지 않았다 확신했겠지만….

‘상황을 보니 개판일 것 같거든.’

마음의 눈으로 볼 수 없어도 느끼는 게 있을 것이다.

전사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비대한 돼지가 묵직하게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박덕구 같은 느낌이 아니다.

근육덩어리와는 다르게 저 돼지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몸의 성분은 90% 이상이 지방덩어리.

솔직히 숨 쉬는 것도 힘들어 보인다.

녀석뿐만이 아니다.

온갖 사치품으로 치장한 남자도 있고 싸우는 게 불가능해 보이는 사람도 드문드문 보인다.

‘이딴 게 대륙의 운명을 결정하는 집단의 수장이라고?’라고 의심되는 이들이 한 트럭은 되는 듯하다.

김현성이 이 꼴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지,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나마 상황이 조금 나아 보였던 린델에 틀어 박혀 있었기 때문에 보지 못했던 그림들이 자꾸만 눈에 들어오고 있는 게 분명했다.

‘불가능해.’

이 꼴로 위협을 맞이하는 건 불가능하다.

내 망상에 불과하지만 김현성은 틀림없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여기에 들어오기까지만 해도 희망으로 가득 찼던 얼굴이 완벽하게 절망으로 가라앉고 있는 게 눈에 보이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첫 번째 회의가 시작됐다.

상황의 심각성에도 불구.

회의는 단 2시간 만에 막을 내렸고 그날 각 대륙의 수장들은 친목도모를 외치며 4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사치스러운 회식을 가졌다.

대륙인들이 벌어다 주는 세금으로 말이다.

‘개판이구나. 개판이야!’

어떤 나라의 축소판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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