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8
회귀자 사용설명서 458화
조혜진 사용설명서(3)
조금 당황한 것 같은 얼굴이 눈에 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차분한 얼굴을 하고서는 조심스레 입을 뗐다.
“글쎄요. 어떤 의도로 질문을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길드마스터는 훌륭하신 분입니다. 목표를 향해서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도 그렇고, 평소 행실도 그렇고, 옆에서 보고 있자면 정말 존경할 만한 요소가 많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현대인의 관점으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도 웃기지만 따를 만한 가치가 있는 분입니다.”
“아니, 그런 형식적인 대답 말고요.”
“네?”
“이성으로서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여쭌 겁니다.”
“네?”
“이성이요. 이성.”
“갑자기 그게 무슨….”
“길드마스터 좋아하는 거 아닙니까?”
“어, 어째서 그런 걸 묻는 건지 궁금합니다, 부길드마스터.”
“다 이유가 있어서 물어보는 거 아니겠습니까. 솔직하게 이야기해 주세요. 중요한 일이니까.”
“이게 뭐가 중요한 일입니까. 지금 저를 놀리려고 하시는 거라면… 정식으로 항의하겠습니다. 무례한 장난은 삼가해 주세요.”
“아니, 놀리는 거 아닙니다. 친구로서 궁금해서 드리는 질문이지. 솔직히 얼굴에 전부 보이는데 뭘 그렇게 빼고 그러십니까. 현성이 좋아하잖아요.”
“제가 어떻게 감히…. 생각해 본 적도 없습니다. 어째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지만 길드마스터를 존경하는 마음을 착각하신 것 같습니다. 그런 경솔한 마음은 품은 적도 없고 품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어디까지나 길드마스터의 부관으로서….”
“아니. 그런 말 하지 말고. 솔직히 좋아하잖아요.”
“아닙니다.”
“좋아하잖아요.”
“아닙니다.”
“아니, 좋아하잖아!”
“아, 아니라니까! 아니라고!”
당황했는지 순간적으로 빼액 소리를 질러오는 모습.
민망했는지 괜스레 목소리를 가다듬는 모습이 보였다.
나 역시 당황한 것은 당연지사.
반응이 조금 격정적이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부정할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생각보다 더욱더 강경한 것 같은 느낌.
뜻밖의 질문에 정하얀마저 입을 살짝 벌리고 있었는데, 반응을 보니 조혜진이 김현성에게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 같았다.
‘얘는 원래 다른 애들한테 관심 없으니까.’
아마 김현성과 조혜진이 평소에 뭘 하고 다니는지도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를 보는 눈이 한층 더 부드러워진 것을 보니 저쪽과 내가 엮이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 마음에 드는 모양.
정말로 단순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후우. 후우….”
“…….”
“후우. 큼큼. 갑작스레 소리를 질러 죄송합니다. 하지만 정말 부길드마스터께서 생각하시는 그런 게 아닙니다. 아까의 일 때문에 오해하신 것 같은데 그건 정말 길드마스터와 파란 길드를 걱정해서 드렸던 말씀이었습니다. 결코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말씀드린 게 아닙니다.”
“아니, 뭐가 이상한 겁니까. 도대체. 남녀가 서로 붙어 다니다 보면 그런 감정이 생길 수도 있는 거지.”
“그러니까 그런 게 아니라고….”
“솔직히 지금 부정하는 게 더 이상해 보입니다. 초등학생도 아니고, 얼레리꼴레리 하는 것도 아닌데. 이러니까 유니콘이 그렇게 환장을 하는 거 아닙니까. 나이가 몇 갠데 이런 걸로 얼굴 붉히고 그래요.”
“그것도 오해가 있는 겁니다. 지구에 있을 때 제가 얼마나….”
“뭐요?”
“이것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신여고 테크니션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강원도 연애박사 박덕구 같은 소리하고 있네. 또.’
본인이 입을 열면서도 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다.
사실 조혜진이 우신여고 테크니션이든 아니든 간에 그런 것들은 이쪽과 하등 관계없다.
중요한 것은 조혜진이 김현성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으냐.
사실 답은 정해져 있다. 본인이 나에게 말을 꺼내기 부끄러워할 뿐이지, 아마 자기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으리라.
애초 조혜진이 김현성에게 은밀하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건 길드원 모두가 알고 있는 이야기.
함께 있을 때 묘하게 얼굴을 붉히는 것도 그랬고 부관이라는 위치를 변명삼아 은근히 옆자리를 사수하는 것도 그랬다.
본인은 잘 숨기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겠지만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건 김현성뿐이리라.
‘확 다른 애를 밀어볼까.’
여러 그림을 그리고 있는 사람으로서 검은 백조 박연주로 시작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지만, 왠지 모르게 얘는 보면 볼수록 짠하다.
‘우리 혜진이 고생 많이 했지….’
1회 차에 가면 쓰레기에게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도 그랬고 죽어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것도 그랬다.
개인적으로 마음이 맞는 친구라고 생각하는 만큼 기왕 누구 하나를 민다면 얘를 밀어보는 게 가장 좋을 것 같은 느낌.
아마 김현성의 정신건강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으리라.
그 무엇보다 본인이 녀석을 아끼기도 하니 여러모로 도움이 될 거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심지어 초개처럼 자신의 목숨마저 집어 던질 정도였으니 김현성의 짝으로도 결코 나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우신여고 테크니션이든 뭐든 관심은 없는데. 솔직히 도와주고 싶어서 물어본 겁니다. 아니, 도와준다기보다는 필요한 일처럼 느껴져서요.”
“뭐가 필요한 일이라는….”
“현성 씨 관련된 일입니다.”
“네?”
“옆에서 보면서 그런 생각 해본 적 없어요? 현성 씨가 정신적으로 많이 몰려 있다는 거.”
“그건….”
“저도 대충은 알고 있어요. 굳이 숨길 필요 없습니다. 쉬는 거 본 적 없죠?”
“그렇지는 않습니다. 길드마스터께서는 항상 적절한 휴식을….”
“훈련 사이사이에 몸을 쉬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업무가 끝나고 중간에 잠깐 식사를 하거나 차를 마시는 것에 대해 묻는 게 아니에요. 말 그대로 정상적인 사람이 갖는 휴식에 대해 묻는 겁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늘어져 있다든지, 문화생활이나 취미생활을 즐긴다든지. 그 것도 아니면 개인적인 여가 시간을 가지는 것도 상관없고요. 옆에서 항상 같이 행동하면서 눈에 보이는 게 있을 거 아닙니까.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있는지 말씀드린 거예요.”
“어, 없습니다.”
‘그럴 줄 알았지.’
본래부터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최근에는 딱 달라붙어 생활한 적이 없어 혹시나 물어봤는데 역시나 별로 달라지지 않은 모양.
김현성 내부에 많은 변화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근본적인 부분은 그다지 달라지지 않은 것 같았다.
슬쩍 고개를 돌리자 괜스레 심각해진 조혜진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이제야 뭔가 이상한 점이 있다는 걸 깨달은 거겠지.
“혜진 씨가 길드에 오기 전에도 쭉 그런 상태였어요. 지금은 그나마 조금 나아진 편이고요. 본 적 없는 게 당연할 겁니다. 솔직히 길드원끼리 식사를 할 때 말고는 뭘 먹는지도 모르겠는데 간단한 전투식량으로 식사 때우거나 하고 있지는 않아요?”
“비슷한 것 같습니다.”
“저도 지금까지는 애써 외면해 왔지만 생각해 보니까 상황이 심각한 것 같더라고요. 몇 년이 지나도 달라질 낌새가 없다는 것도 그렇고 아마 본인도 자각하지 못하고 있을 겁니다. 본인이 안전하지 못하다고 느끼는 건 이해는 가지만 우리 길드마스터 같은 경우에는 정도가 조금 심한 편이죠. 끊임없이 걱정하고 끊임없이 대비하고 끊임없이 움직이잖아요. 어디 그게 사람 사는 것처럼 보입니까. 기계도 그렇게는 살지 않을 거예요.”
“…….”
“그래서 말입니다만… 솔직히 저는 어젯밤에 현성 씨가 따로 여성분과 만남을 가졌다는 소식에 박수라도 보내고 싶은 심정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스트레스를 푸는 데 도움이 되지는 않을까 하고요.”
“그건!”
“물론 저도 혜진 씨가 무슨 걱정을 하시는지 압니다. 이름도 얼굴도 제대로 모르는 여자가 갑자기 튀어나온 것도 의심스럽고 정황상 찝찝한 부분이 없지는 않죠.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그래서 따로 우리 길드마스터가 쉴 수 있는 구석을 만들어줬으면 좋겠다 싶어서요. 마침 그 후보로 혜진 씨 얼굴이 생각난 거 아닙니까.”
“만든다고 해서 만들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사람의 감정이라는 게… 혹여나 제가 길드마스터에게 마음이 있다고는 해도 길드마스터께서는….”
“그건 모르는 거 아닙니까. 제가 이런 말 하는 게 우습게 들리겠지만 솔직히 혜진 씨 정도면 어디서 꿀리지 않습니다. 우신여고 테크니션인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현성 씨랑 시간을 많이 보내기도 하고 누구보다 유리할 겁니다. 그리고.”
‘잘 이해하고 있기도 하니까.’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는 대충 이해가 갑니다만… 사실 어째서 도와주신다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제안이 너무 갑작스럽기도 하고요. 물론 제가 길드마스터에게 마음을 품고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그저 궁금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사실 그 묘령의 비치렐라가 바로 나고 그래서 아주 난감한 상황이야.
우리 현성이가 자꾸 헛물켜고 헛짓거리 할까 봐 불안하니까 네가 등판해줬으면 좋겠다.
겸사겸사 현성이 멘탈도 좀 잡아주고. 걔 힘들어 하잖아. 옆에 누구라도 있어야 좀 쉬겠지.
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렇게 말할 수 있을 리 만무. 결국에는 적당한 변명을 입에 담을 수밖에 없었다.
“저 욕심 많은 거 잘 알잖아요. 굴러들어온 돌이 갑자기 파란에 들어온다는 것도 조금 이상하고, 솔직히 덕구 말은 거의 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영 실현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니까. 기왕 현성이가 짝을 찾는다면 아는 사람이면 더 좋을 것 같아서… 사실 이게 제일 큽니다. 개인적으로도 혜진 씨를 응원하고 있었는데 마침 딱 좋은 타이밍인 것 같아서요. 그래서 할 거예요. 안 할 거예요?”
“부길드마스터가 도와줄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런 도움이 필요한 상황도 아니고요. 애초에 저는….”
말은 강단 있었지만 표정은 복잡했다.
말과는 다르게 속은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고 싶은 심정이었을 터.
년에 날렸다는 둥, 우신여고 테크니션이었다는 둥 여러 개소리를 펼치기는 했지만 조혜진이 남자 손 한 번 잡아본 적 없는 모태솔로라는 건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뭘 어떻게 진행해야 하는지, 어떻게 가까워져야 하는지,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여러 가지로 혼란에 빠져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주변에는 아름답고 능력 있는 여자들이 아주 넘쳐나고 심지어는 정체불명의 임신녀까지 등장한 상황.
어떻게 해야 하냐고 애잔하게 쳐다보던 몇 분 전의 자신의 모습은 벌써 잃어버린 모양이다.
“아쉽지만 그럼 어쩔 수 없네요.”
“…….”
“검은 백조 연주 씨한테나 연락 넣어봐야지.”
“아니, 애초에 그런 걸 돕는다는 게 조금 이상한 겁니다. 부적절한 방법이라면 제가 막겠습니다.”
“별로 부적절한 방법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합리적으로 조언을 해드리는 거지. 그리고 이건 어디까지나 길드마스터를 위한 겁니다. 갑자기 나타난 불여시한테 순진한 현성이가 낚이면 누가 책임진답니까? 우리 길드의 아버지 같은 사람인데 제가 또 그런 꼴은 조금 보기 그래서… 솔직히 혜진 씨도 이건 같은 생각이잖아요. 부끄러우시겠지만 그렇게 부정 안 하셔도 됩니다. 친구 좋다는 게 뭡니까. 이래 보여도 제가 현성이랑 밥도 먹고 사우나도 가고 고마 다 한 사인데… 장담하건데 팍팍 밀어드릴 수 있습니다.”
장내에 약간의 침묵이 가라앉았다.
고개를 돌려 바라본 얼굴이 복잡했다는 건 너무나도 뻔했다.
왠지 모르게 긍정적인 신호를 보이고 있다.
결국 한참의 시간이 지나서야 조심스레 입을 여는 조혜진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네가 그럼 그렇지.’
“어, 어떻게 도와주실 수 있는 겁니까?”
“스타일링 바꾸고, 화장도 좀 바꾸고, 행동도 교정하고….”
“네.”
“무엇보다 제 말만 잘 들으면 됩니다. 며칠 동안은 제 인형이나 아바타처럼 움직인다고 생각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