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7
회귀자 사용설명서 457화
조혜진 사용설명서(2)
조혜진, 아니, 그녀뿐만이 아니다.
박덕구가 만들어놓은 개소리는 김현성 하렘에 포함된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갑작스러운 이야기로 들릴 것이다.
옆 동네 집안 사정이 정확히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솔직히 순조로울 거라고 생각하기는 힘들었다.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아도 그 정도는 알 수 있다.
그나마 가장 적극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검은 백조의 박연주와 우리 꼬맹이 김예리일 터.
구석에서 매혹의 춤이나 연마하고 있는 김예리는 아직 꼬맹이라 논외로 칠 수 있다지만 박연주는 그렇지 않다.
몇 킬로미터가 떨어진 곳에서 봐도 매력적인 여성으로 보인다는 거다.
그런 박연주조차 돌덩어리 바라보듯 바라본 게 바로 철벽남 김현성.
둔감한 건지 병신인 건지 모르겠지만 녀석의 성벽이 견고하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 박연주가 이럴 터인데 다른 이들의 상태가 어떨지에 대해서는 불 보듯 뻔하다.
유니콘에게 정식으로 선택받은 완전무결한 처녀 조혜진.
코웃음도 안 나오는 매혹의 춤 전승자 김예리.
샤를롯트 얘는 뭘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저 둘과 비슷하면 비슷했지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튼 간에 4명의 트롤러들이 모여 팽팽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 옆 동네의 사정일 터.
그런 배경에 엄청난 지각 변동이 일어났다.
정황상 김현성의 여자친구라고 의심되는 새로운 인물이 등장한 것.
평화에 취한 것은 대륙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익숙함이라는 평화에 취해 적당히 사이좋게 지내며 현재의 상황을 유지하려는 평화조약에 도장을 찍었겠지만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외부에 침략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쯧. 미리미리 준비를 해놨어야지.’
애초에 서로가 항상 전투태세에 들어가 있었다면 이런 슬픈 결과는 나오지 않았으리라.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는 조혜진의 얼굴은 가관.
이 충격적인 소식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정신을 못 차리는 것처럼 보였다.
일단 입을 연 것은 당연지사.
계속해서 밖에서 서성거릴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합니까? 별거 아닐 테니까 일단 들어가요. 밖에서 이렇게 서성거리면 안 좋습니다. 덕구가 한 이야기는 거의 뇌피셜이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요. 아직 뭐가 딱 하고 정확히 결정된 게 아닙니다. 연애한다는 것 자체도 황당한 이야기고.”
“그렇지만 정체불명의 여성과 끈적한 시간을 보냈다는 건 사실이잖습니까.”
“원래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는 소문은 부풀려지게 마련입니다. 실제로는 끈적이고 뭐고 없었을 거예요. 사람들은 항상 자극적인 소식을 좋아하니까. 그리고 현성 씨가 데이트 좀 하면 어떻습니까. 따로 여자친구가 있는 것도 아닌데. 혜진 씨가 걱정할 일은 아니지 않아요?”
“…….”
“…….”
“저, 저는 그저 걱정돼서 그렇습니다.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 길드마스터가 걱정돼서….”
“뭐가 걱정이 되는데요?”
“혹시나 질이 안 좋은 여성일 수도 있으니까요. 길드마스터의 부관으로서 당연한 걱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길드의 운영 방향도 그렇고 또 갑작스럽게 외부인, 그러니까 그 묘령의 여성을 내부로 들인다는 건 위험부담이 있을 수 있으니까요. 걱정하는 게 당연한 겁니다.”
“내부적인 일은 제가 거의 다 처리하고 있으니 크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혜진 씨. 애초에 그 여자가 길드로 들어온다고 결정된 것도 아닐 뿐더러, 만약 뭔가 다른 뜻이 있는 사람이라면 제 선에서 알아서 처리하면 됩니다.”
“그렇지만….”
“덕구 말은 일단 신경 쓰지 마세요. 그리고 덕구야, 너도 쓸데없는 말은 조금 자제해야지. 그렇게 웃으면서 꺼낼 만한 주제는 아니야. 대중에게 주목받는 만큼 안 좋은 소문 같은 것들은 최대한 막아야지.”
“아….”
“파란 길드는 기업이나 다름없어. 그리고 파티 멤버들은 곧 그 기업의 얼굴이고. 우리 길드마스터는 굳이 두 번 말할 필요도 없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지?”
“거…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소. 나, 나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니까. 이런 말을 하는 것도 길드 직원들한테만 했고…. 절대로 외부인한테 이야기 한 적은 없다니까.”
“조금 더 조심하자는 이야기야.”
슬쩍 까칠하게 반응하자 왠지 모르게 풀이 죽은 얼굴이 보였다.
‘이 자식 이거….’
안 그래도 양심이 슬슬 찔려왔던 타이밍에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어깨를 툭툭 건드리자 슬그머니 미소를 되찾는 게 보였다.
“나는 완전히 모르고 있었는데… 아무튼 알려줘서 고맙다.”
“커흠…. 뭐, 당연한 거요. 이런 소식이라면 나한테 맡기라니깐. 없는 정보도 물어올 수 있으니까.”
‘없는 정보는 물어오면 안 되지.’
“그래. 그래도 이번 일에 대해서는 불문에 붙이는 게 낫겠다. 길드원들 입단속 잘하고…. 특히 예리한테는 정확한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따로 관심 가지지 말라고 전해. 김미영 팀장님한테도 길드 직원들 입에서 함부로 쓸데없는 소문 도는 일 없도록 하라고 전해줘. 이번 일 처리는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거, 맡겨주쇼.”
아무렇지도 않게 반응하기도 쉽지가 않다. 의연한 척, 사태를 정리하는 척, 월드 클래스인 척하고는 있지만 솔직히 내 심정도 조혜진과 다르지 않다.
‘시바….’
꼬리가 너무 길면 밟힌다.
‘김현성의 입이 무거워서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드는 게 당연했다.
애초 박덕구 안기모 김예리에게 이기연에 대해서는 숨기라고 전달 사항을 걸어놓지 않았더라면 일이 꼬여도 단단히 꼬였으리라.
아마 지금 이 순간에도 김현성은 묘령의 여인에게 사과의 편지와 신발을 전달하기 위해 균열 여관을 돌아다니고 있을 터.
한 번만 삐끗해도 일이 틀어질 수 있다는 생각에 조금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더 담백하게 마무리 지었어야 됐는데.’
미안함이라는 감정이 남아 있음이 분명했다.
제대로 된 사과를 하기 전까지 이 일에 집착할 김현성을 생각하니 머리가 다 아파올 정도였다.
‘이건 아니야….’
혹시라도 왕국 연합까지 직접 찾아와 비치렐라에게 구두를 돌려주는 그림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따로 이지혜에게 행정적인 처리를 부탁해야 될 것 같은 느낌.
조금 더 먼 곳으로 떠나야 했다.
안기모와 박덕구의 입을 잘 관리하고 김예리도 매혹의 춤을 빌미로 삼아 입을 막는다.
비치렐라에 쏟아지는 사랑스러운 회귀자의 관심이 조금 멀어지다 보면 평소와 같은 하루가 찾아오게 되리라.
좋은 추억으로 남기고 비치렐라가 기억 속에서 페이드아웃 된다면 모든 게 완벽하다 말할 수 있으리라.
문제는 외골수인 녀석의 성격.
뭔가 김현성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쏠리게 만들 만한 떡밥이 있다면 조금 더 무난하게 일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다만.
‘그러기가 쉽지가 않은데….’
아니, 그 전에 지금 상황이 이렇게 여유를 부릴 때인지 궁금해진다.
세상을 구하는 막대한 사명을 짊어졌다면 조금은 더 빡세게 움직여야 하는 건 아닌지 의구심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의식의 흐름대로 생각하며 녀석을 비난하려 했을 때였다. 갑작스레 김현성의 현 상태에서도 생각이 미친 것.
‘아니야. 이것도 아니지. 이렇게 생각하면 또 위험하지.’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에 혼자서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여 봤지만 김현성의 스케줄을 떠올리자 절로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하루 종일 훈련 또 훈련.
훈련이 끝나면 업무를 보고받고, 다시 한번 훈련을 하는 게 녀석의 전형적인 하루 일과였다.
1회 차의 미래에 대비하려고 홀로 바깥을 싸돌아다니는 것은 물론, 혼자 떠안은 과제가 수십 가지.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는 것을 보고 걱정 아닌 걱정을 한 적이 많았다는 걸 생각해 보면 현재 녀석에게 필요한 것은 절박함이 아니라 휴식이리라.
잠깐의 평화도 즐기지 못하는 김현성을 나무라는 것은 최대한 지양해야 할 일.
1회 차에서 수 십 년, 2회 차에서도 몇 년을 자신을 돌보지 않고 극한까지 몰아붙였다.
어쩌면 이번 비치렐라 사태는 쉬고 싶다는 무의식이 만들어낸 집착 일지도 모른다.
녀석이라고 왜 달콤한 연애를 하고 싶지 않겠는가.
놀고 싶고, 쉬고 싶고, 인생도 즐기고 싶을 것이다.
20대 젊은 청춘에 영문도 모르는 곳에 끌려와 개고생을 했고 심지어는 두 번째 인생에서도 막중한 책임감을 지며 살아가고 있다.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한계를 맞이했다고 할 수 있는 타이밍.
지난 밤 즐겁게 웃던 녀석의 모습을 떠올리자 솔직히 조금 측은하다는 생각도 들기 시작했다.
‘휴식. 맞아. 휴식이 필요해.’
정신적으로 마모되고 있다는 증거도 가까운 곳에서 찾을 수 있다.
가장 절친한 친구이자 형제를 의심하고 있다는 현 상황도 그렇다.
본인이 자각하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마구니가 머릿속에 들어가 있다는 게 궁지에 몰렸다는 증거.
내가 만약 사랑스러운 회귀자의 정신과 담당의였다면 휴식을 권했으리라.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생각이었지만 나도 모르게 점점 더 고개가 끄덕여 지기 시작했다.
조금 더 여유가 생긴다면 넓은 시선으로 현 상황을 바라볼 수 있고 굳이 내가 어떤 조치를 취하기 전에 마구니 역시 자취를 감출 것이다.
“혜진 씨.”
“네?”
“최근에 길드마스터 스케줄의 변화는 있습니까?”
“아뇨. 매번 똑같으십니다. 훈련과 업무를 병행하시고… 그것 외에는 다른 특이사항은 없습니다.”
‘그래…. 그렇겠지.’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다. 아마 어젯밤은 녀석에게는 일탈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나 역시 이번에 충분한 휴식을 취하지 않았던가.
녀석이라고 휴식을 취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아니, 오히려 좀 쉬어야 된다.
문제는 그 휴식 방법에 대한 것.
기왕이면 비치렐라와의 데이트를 즐기라고 권해보고 싶었지만 세상에 없는 사람과 데이트를 즐길 수는 없다.
아쉽지만 그 대용품이라도 물색해 봐야 할 것 같은 느낌.
연애 말고 다른 선택지가 있기야 하겠지만.
‘여자 문제는 여자 문제도 덮는 게 효과적일 것 같기도 하고….’
가장 간단한 방법이기도 하다.
애매하게 접근한다면 또 훈련과 업무에 미쳐 자기 자신을 몰아붙일 테니까.
슬그머니 오른쪽을 바라보자 보폭을 맞추며 걸어가고 있는 조혜진이 괜스레 눈에 띈다.
“혜진 씨.”
“네?”
“잠깐만 머리 한번 풀어보세요.”
“갑자기 무슨 말씀을….”
“잠깐 확인해 볼 게 있어서 그렇습니다. 머리 한 번만 풀어보세요.”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갑작스러운 제안에 슬그머니 표정을 찌푸린 조혜진.
하지만 순순히 머리를 푸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꽁지머리에 있던 머리끈을 풀자 긴 머리카락이 목과 어깨를 타고 흘러내린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그녀와 블랙마켓을 돌아다닌 적도 있다.
‘드레스도 꽤 잘 어울렸던 것 같았는데….’
평소에 너무 선머슴처럼 하고 다녀서 빛이 바래졌을 뿐이지 그녀 역시 충분히 미인이다.
“예쁘네요.”
“불쾌합니다, 부길드마스터.”
“아….”
“아니야, 하얀아. 당연히 우리 하얀이가 더 예쁘지.”
‘시바 X될 뻔했네.’
“지금 사람 놀리는 겁니까.”
“아닙니다, 혜진 씨. 그런 게 아니에요.”
‘시바.’
갑작스레 찾아온 짧은 위기에 고개를 저으며 필사적으로 수습했지만 조혜진의 얼굴은 똥이라도 밟은 것처럼 구겨져 있었다.
물론 정하얀은 미묘하게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고.
당연히 이해가 간다.
머리를 풀어보라고 해서 풀었더니 자기 여자친구보다 못생겼다는 욕을 면전에서 먹은 셈이었으니까.
아무리 이런 부분에서 별 관심이 없는 조혜진이라도 충분히 기분 나쁠 만한 빌드업이었다.
하지만 똥 씹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던 것도 잠시.
이윽고 나온 내 목소리에 깜짝 놀라는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혜진 씨.”
“네?”
“현성이 어떻게 생각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