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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454화 (453/1,590)

# 454

회귀자 사용설명서 454화

결과 및 평가(1)

잠깐의 유희는 끝났다.

곧바로 쓰러져 잠들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 있을 리 만무.

처리해야 할 일도, 생각해야 할 일도 많았기 때문이다.

일단 가장 중요한 것은 증거를 태우는 것.

처음부터 이기연이라는 사람이 없었던 것보다는 타 대륙으로 이동했다고 꾸미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곧바로 방을 옮기는 한편, 그동안 사용했단 물품들 역시 모조리 폐기.

행정적인 처리를 위해 이지혜에게 연락을 넣고 나서야 어느 정도 상황이 마무리 됐다고 판단했다.

아마 내일 새벽 즈음이면 이기연이라는 인간은 저 멀리 있는 왕국 연합에 있는 것으로 처리되어 있으리라.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따위의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기왕이면 조심하는 게 좋다.

조금 꼼꼼하게 일을 처리한다고 돈이 나가는 것도 아니니까.

‘더군다나….’

김현성이 비치렐라가 흘리고 간 신발을 버리거나 내버려 두면 별 상관이 없겠지만 아무래도 그런 장면은 잘 상상이 가지 않는다.

약간의 호감도 느끼고 있다고 본인의 입으로 고백했으니 아침이 되면 직접 찾아올 확률이 높을 거라고 생각하는 게 맞다.

물론 본인이 너무 늦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내가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뒤일 터.

편지라도 남기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해 봤지만 괜한 여지를 주는 것 보다는 깔끔하게 손절해 버리는 게 녀석에게도 도움이 되리라.

‘좋은 추억으로 남겨줘야지. 으음. 그렇고말고.’

너무 끈질기게 달라붙는다면 던전에서 죽었다고 처리를 해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은 느낌.

아무튼 간에 이번 일은 내 기억 속에서도 날려 버리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지난 일에 연연하기에는 밀린 일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정하얀의 탐지 마법에 혼선을 주던 요정 마법이 풀렸으니 아마 정하얀도 내가 이곳에 있다는 걸 느끼고 있을 터.

시간이 늦었으니 지금은 꿈나라에 가 있겠지만 그녀 역시 아침이 된다면 곧바로 이곳으로 향할 것이다.

조금 일찍 일어나 곧바로 파란 길드의 지부로 가는 게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대충 정리만 하고 빨리 자야겠네. 끄응….”

조금 커다란 일을 끝낸 이후에 상황을 다시 한번 정리해 보는 것은 습관이 된 것 같은 일과 중 하나다.

머리가 좋지 않다 보니 이런 식으로 한 번쯤은 되새김질을 해주고 행동방향을 결정해야 한다.

‘일단….’

균열 박물관부터.

‘이건 나쁘지 않았지.’

확실히 모험가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구성이었다.

생각보다 반응도 좋았고 시스템 자체도 잘 자리 잡았다는 걸 금방 느낄 수 있었다.

가격대도 딱 적당한 수준.

조금 비싼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여러 가지 서비스가 포함되어 있으니 충분히 합리적인 가격이라고 할만 했다.

개인적인 별점은 먹인다면 5점 만점에 4점 정도.

완벽한 정답이라고는 하기에는 애매 했지만 정답에 가까웠다. 여기서 더 쳐낼 필요도 더 할 필요도 없다. 드랍률이나 피어오르는 불만에 따라 여러 가지 콘텐츠나 서비스를 내놔야겠지만 민폐 여신의 빈자리를 급하게 매우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문제는 오히려 다른 쪽에 있다.

걱정이 되는 부분은 다름 아닌 우정 클랜.

정확히 말하면 현재 린델에 포진 중에 있는 모험가들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사실 관계를 한번 확인해 봐야 했지만 우정클랜, 본인들의 말대로라면 녀석들은 이제 막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유력 클랜 중에 하나.

그 정도 수준이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유력 클랜이란다.

한숨이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물론 우정 클랜은 우리 파란 길드의 동맹도 아니고 뭣도 아니지만 미래에 같이 싸워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걱정이 되는 게 당연하리라.

‘수준이 너무 낮아. 아니, 수준 문제가 아니야.’

녀석들이 보였던 꼴사나운 모습을 떠올려 보니 떠안고 있던 불안함이 점점 더 커지기 시작.

균열박물관이 등급이나 스펙적인 부분을 메워줄 수는 있겠지만 다른 부분에서는 아니라고 자부할 수 있다.

1회 차에서의 현 상황이 어땠는지 생각해 보면 내가 어째서 이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그 답이 나온다.

정확히 1회 차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내 예상이 맞다면 지금 이 순간에도 전쟁 중이었을 확률이 높다.

국가와 국가 간의 전쟁이든, 이방인과 대륙인과의 전쟁이든 간에 끊임없이 싸우고 있었을 것이다.

우정 클랜의 이철우나 김태건도 전장터의 한 가운데 있었음이 분명, 경험치를 쌓지 않으려고 해도 저절로 쌓였을 거라 자부할 수 있다.

매일 불안감에 하루를 보내야 했을 거고 피와 고통으로 얼룩진 삶을 살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루 종일 싸워야 하는 것은 물론, 동료의 죽음을 딛고 일어서야 했으리라.

1차원 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당연히 2회 차가 1회 차보다는 낫다.

적어도 쓸데없는 손실을 줄이고 힘을 모으긴 했으니까.

하지만 조금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 본다면 현재의 상황도 썩 좋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1회 차의 환경은 싸울 수 있는 인구를 줄이는데 기여했지만 쓸모없는 녀석들을 담금질하는데 커다란 손을 보태기도 했다.

장담컨대 여러 가지 사건에서 살아남아 김현성과 마지막까지 싸웠던 이들은 일당백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베테랑들이었을 것이다.

그에 비에 현재의 모험가들은 어떠한가.

영웅 등급의 네임드 몬스터를 잡는 데도 한심한 행태를 보이고 있다.

우리 사랑스러운 회귀자가 그런 역전의 용사들을 데리고도 1회 차에 실패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아무리 병력이 많다고 한들, 우정 클랜 같은 놈들을 데리고 성공할 수 있을 리 없다.

“이건 문제야….”

심각하게 생각해 보지 않는 것이 이상하리라.

위협이 언제 어디서 터지는지는 알아 봐야겠지만 김현성의 반응을 보자면 근시일 내에 터진다고 말하기에는 어렵다.

그렇게 바빠 보이지는 않았으니까.

문제는 그 시간까지 준비된 이벤트가 없다는 것.

갈등도 없고 전쟁도 없다. 다툼도 없고 성장도 없다.

균열박물관이나 악마 던전 같은 이벤트로 스펙적인 부분은 맞출 수 있겠지만 멘탈적인 부분은 맞춰줄 수 없다.

위기에서 피어나오는 선택받은 용사 같은 놈들도 없을 거고 동료의 죽음에 각성하는 영웅 같은 놈들도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왜?

평화로우니까.

난세는 영웅을 만들고 군대를 더 강하게 만든다. 개소리처럼 들리지만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없는 갈등이라도 만들어야 될 것 같은 느낌.

‘가면이라도 써?’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해봤지만 현재의 대륙은 인위적인 갈등이라도 감지덕지.

조금 더 위기를 맞을 필요가 있다는 거다. 문제는 위기를 어떻게 뿌리느냐에 대한 것.

‘박물관에 있는 신화급 몬스터라도 풀까?’

그건 기각.

그 촉수 같은 고대신 놈이나 머리에 뿔 달린 놈이 풀려난다면 수습이 불가능하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호랑이 사냥에 대비한다는 명분으로 곰을 잡겠다고 말하는 것과 진배없다.

‘전쟁이라도 일으켜 봐?’

이건 그나마 생각해 볼만하다.

찢어진 상처를 봉합하고 다시 찢는다는 게 조금 모양새가 그럴 뿐이다.

하지만 이 선택지 역시 기각.

어떤 놈들을 희생양으로 삼을지에 대한 가이드라인도 없고 현재의 상황에 초를 치는 것은 최대한 지양해야 할 일이다.

이제 막 대륙이 하나가 된 타이밍, 갈등 하나 뿌리자고 내 손으로 치료한 환자의 죽빵을 날릴 수는 없지 않은가.

아니면.

‘벨리알을 섭외하는 건 힘드려나.’

마침 악마 놈이기도 하고 왠지 모르게 협력해 줄 것 같은 기분도 든다.

하지만 녀석한테 뒤통수를 맞았던 걸 떠올려 보면 불안한 부분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다.

여러 가지를 떠올려 봤지만 머리만 아픈 상황.

침대 위에 털썩 하고 몸을 눕혀도 딱히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는 않는다. 아니, 애초에 이건 나 혼자 결정할 수 있는 부분도 아니다.

“현성이가 필요하지.”

김현성과의 커뮤니케이션이 절실하다는 생각이 든 것은 당연지사.

정확히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현재의 상황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괜찮다고 생각한다면 그 이유는 뭔지, 개선해야 될 방향이 있다면 그 이유와 해결책을 가지고 있는지도 알아봐야 했다.

지금 당장은 본인의 무력을 키우는데 집중하고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녀석 역시 무언가 플랜을 가지고 있을 터.

마음 같아서는 김현성만 믿고 편하게 여생을 보내고 싶었지만 이런 부분에서는 굉장히 감이 안 좋은 녀석을 믿을 수 있을 리가 없다.

“너무 믿는 건 안 좋아.”

그 동안의 김현성이 보여줬던 행적을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온다.

오히려 모든 게 완벽하다 생각하고 고개만 끄덕이고 있지는 않을지 걱정된다.

차라리 불안해하는 게 더 나을 지경.

아무튼 이것도 문제라면 문제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다. 정보가 제한되어 있다는 것. 현 상황에서 가장 베스트는 김현성이 회귀자라는 사실을 밝히는 거겠지만 그런 선택을 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 만큼 아쉬워 할 수만은 없다.

심지어 이쪽에 대한 의심이 떠나지 않는단다. 마음속에 있는 말을 털어주기만 해도 다행이라는 거다.

‘고백만 해준다면….’

회귀자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앞으로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 미리 들을 수만 있다면….

일이 얼마나 쉬워질지에 대해서는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꿈 같은 이야기지. 슈바….’

장래희망 같이 막연한 이야기다. 내가 먼저 마음의 눈 있다는 사실을 밝혀도 상관없을 것 같기는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현 시점에서는 무리수.

어떻게든 김현성과의 대화로 정보를 빼내야만 했다.

‘어차피 조만간 대화할 테니까.’

제한적이지만 카스가노 유노도 있고 앞으로 들어오는 정보를 바탕으로 방향을 결정하는 게 나을 것 같은 느낌.

해답이 없는 상황에 괜스레 방안을 서성거리다 뜨거운 물로 간단히 샤워를 한 이후 다시 한번 침대에 몸을 눕혔다.

잠깐 눈을 감았다 뜬 것 같은데 벌써 아침.

‘시바… 너무 무리했나 보네.’

최근에 몸을 심하게 굴렸는지 삭신이 쑤신다.

뭔가 근본적으로 피곤한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숙취가 없는 것 하나는 다행이라 할 수 있으리라. 시간은 아직 이른 아침.

간만에 정하얀 꿈을 꾼 것 같았는데 제대로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조금 부끄러웠던 것은 내용이 꽤나 야했다는 것.

딱히 욕구불만이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꿈을 꾼 걸 보니 오랜만에 남자의 몸으로 되돌아온 부작용인 것 같았다.

“에취! 으….”

심지어 감기 기운도 있는 것 같았다. 슬쩍 옆을 바라보니 창문이 열려 있는 모습.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제 잠깐 열어놓은 이후에 닫지 않고 그대로 잠든 것 같았다.

“너무 안일했네. 시바… 암살자라도 들어오면 어떻게 하려고…. 이기영 멍청한 새끼.”

물론 현재 내 몸에는 이상이 없으니 아무 문제없다.

가볍게 얼굴을 닦은 이후에 차를 한 잔 마시고 괜스레 창문 밖을 한 번 바라본다.

쏟아지는 햇빛을 몸으로 받으니 괜스레 건강해지는 것 같다.

여유로워지는 것 같은 기분에 마음이 조금 차분해지는 상황.

순간적으로 멍을 때리다 보니 갑작스레 어젯밤에 꿨던 꿈이 생각나 얼굴을 붉힐 수 밖에 없었다.

‘오늘도 깨끗하게 하고 왔으니까. 깨, 깨끗하게.’

이게 무슨 개꿈이야. 고개를 흔들어 봤지만 흐릿한 기억이 점점 더 생생해지는 듯한 느낌에 점점 더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

이건 또 무슨 부작용인 건지 모르겠다.

혹시나 요정이 마법을 걸면서 다른 마법을 집어넣은 건 아닌지 의심이 될 정도였으니 다른 말이 필요 없으리라.

밖에서 똑똑 하는 목소리가 들린 것은 바로 그 때.

“오, 오빠아….”

“하얀이야?”

“네, 네.”

“혼자 왔어?”

“네.”

천천히 문을 열자 시야에 비치는 것은 무척이나 오랜만에 보는 정하얀.

기분이 좋은지 히죽히죽 웃고 있는 모습이 조금은 꺼림칙하기는 했지만 이윽고 덮치듯 달려들어 나를 껴안는 모습에는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평소와 조금 달랐던 건 자꾸만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는 것.

‘왜 이러지.’

장담컨대 지금까지는 느낄 수 없었던 감정이었다.

‘얘가… 왜 이렇게 섹시해 보이지.’

아니 감정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하다. 뭔가에 길들여진 것만 같은 느낌.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몸이 정하얀에게 반응하고 있었다.

‘이런 적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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