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9
회귀자 사용설명서 449화
우리 현성이(1)
상징적인 의미가 아니라 정말로 원정이 끝났다.
물론 나머지 한 번의 기회를 버린 것은 아니었다. 당장 기분은 나빴지만 정해진 횟수는 채워야 했고 혹시나 다음에는 전설 등급의 아이템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과는 비참했다.
또 한 번의 희귀 등급의 아이템.
마지막 네임드 몬스터 사냥에서 온갖 추한 꼴을 보여준 것치고는 무척이나 초라한 결과물이었다.
막대한 손해라고 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
이들이 거의 전 재산을 건 모험은 희귀 등급의 아이템 두 정과 천재검사와 연금술사가 사랑하는 법 무삭제판을 끝으로 비참하게 마무리되었다.
그야말로 상처뿐인 원정.
분위기가 거지 같았다는 건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으리라.
나 역시도 일이 이렇게 될 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당연하다.
우정 클랜 애들이 운이 없는 건지, 박물관의 현실이 이렇게 지독한 건지는 한번 알아 봐야겠지만 적어도 눈앞에 있는 이들에게 닥친 시련은 현실이었다.
‘사업자 입장에서는 개이득이라고 할 만하지만….’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는 패잔병들의 모습은 똑바로 쳐다보기가 힘들 정도.
모두가 하나 되어 이 위기를 해결하고자 머리를 맞대도 부족하건만, 앞서 일어난 사소한 다툼은 아직도 이들을 과거 냉전시대로 들이밀고 있었다.
‘우정 코인 떡락.’
계속해서 클랜을 운영할 힘이 남아있는지가 궁금할 지경. 아니, 그보다 이 클랜이 제대로 유지될 수 있을지도 장담할 수 없다.
국민지를 제외한 여성 3인방의 눈빛이 심상치 않은 것을 보니 저들 역시 나름대로 생각이 남아진 모양이다.
‘떡락은 손절이다’라는 지고의 격언을 잊지 않았는지 손절 타이밍을 보려는 것이 눈에 띄었다.
순진한 이철우는 저들의 탈주를 예상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탈주의 냄새가 이미 코끝을 찌르고 있다.
장님도 우정 클랜의 마지막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건 끝났네.’
정말로 확신할 수 있다.
근 일주일 내에 우정 클랜이 완전히 침몰할 거라는 걸. 아니, 어쩌면 지금 이 순간부터 가라앉을 수도 있다.
“…….”
“…….”
‘나도 빨리 손절해야겠는데.’
약간의 책임감이 생기기야 했지만 고개를 한 번 흔들자 그런 마음도 말끔히 사라졌다.
내 할 일은 전부 해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중간중간 작은 사고가 있었지만 네임드 몬스터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내 지분이 70%가 넘어간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저… 이제 어떻게 하실 건가요? 오빠들.”
입을 연 것은 국민지.
“글쎄. 일단 숙소에 가서 생각해 봐야지. 아직 며칠 묵을 돈은 남아있으니까. 아이템도 여기서 처분하는 게 더 좋을 테고. 대출이라도 해서 다시 한번 들어오든지. 아니면 다른 노선을 찾든지 해야겠다. 손해를 많이 보기는 했지만…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으니까.”
‘대출은 하지 마라.’
“조금 문제가 있는 거 아닌가요? 애초에 박물관에 어째서 이런 책이 있는 건지는 모르겠고….”
“말 들었잖냐. 소장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대륙의 물품들도 가지고 있다고. 베스트셀러의 원고판이라면 박물관에 전시될 가치가 있었다고 판단한 거겠지. 나도 납득이 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가격은 꽤 쏠쏠 할 거다. 수집가들 사이에서 얼마나 먹힐지는 모르겠지만… 최대한 가격을 받을 수 있는 곳에서 팔 수 있도록 해봐야지. 제길.”
“어렵겠네요.”
‘경매에 붙이는 게 쉬운 건 아니지.’
확실히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조금 비싼 가격에 팔릴지도 모르지만, 그것도 전부 희망사항이다.
아무리 그래도 이번 손해를 메우기에는 부족할 것이 분명.
경매 수수료도 어마어마하다는 걸 생각해 보면 실제로 먹을 수 있는 건 얼마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 수수료 정도는 내가 처리해 주마.’
“그 정도는 제가 처리해 드릴 수 있어요.”
“네?”
“경매장에 조금 연줄이 있어서요. 맡겨주시면 판매하고 대금은 따로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양도 계약서를 따로 작성해도 되고요. 아무래도 수수료가 만만치 않아서…. 따로 말씀을 잘 드리면 어느 정도 이해해 주시는 부분이 있을 거예요.”
“아니요. 아닙니다. 따로 계약서를 작성할 필요까지는 없는 것 같습니다. 연줄이 있으시다면 오히려 부탁드리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그보다. 기연 씨는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뭘 어떻게 해. 나는 내 할 일 하러 가야지.’
이쯤해서 손절하는 게 타이밍상 맞다.
“글쎄요….”
“일단은 식사라도 하러 가시죠. 실패한 원정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몇 가지 드릴 말씀도 있고….”
‘영입 제의는 아니길 빈다, 이 새끼야. 어떻게 니들이 나를 품을 생각을 하냐? 이 양심 없는 놈. 그건 아니지.’
막 거절의 뜻을 내비치려 했을 때였다.
국민지외 여성 3인방이 먼저 타이밍을 빼앗아 온 것.
“오빠, 저희도 따로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어?”
“안 좋은 상황에 이런 말씀 드리기 정말로 죄송하지만… 아무래도 저희는 여기까지인 것 같아요.”
“뭐?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야?”
“사실 계속해서 생각하고 있었던 거였는데 타이밍이 이게 맞을 것 같아서요.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그냥… 어차피 딱히 계약기간 같은 것도 없었으니까. 이쯤에서 찢어지는 게 맞는 것 같아요.”
“너무 갑작스럽지 않나?”
클랜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김태건 역시 화들짝 놀라는 모습.
침착함을 유지하려고 하지만 표정을 보니 쉽지 않을 것 같다.
클랜이 존망의 기로에 서 있는데 총원 6명인 클랜에서 3명이 갑작스레 빠져나간단다.
저런 표정을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하지만 저 여성 3인방을 뭐라 욕할 수도 없는 상황.
갑자기 들어온 불여시에게 미쳐 내정을 소홀히 한 클랜마스터와 부클랜마스터의 책임.
우정 클랜이 겪어야 할 뜨거운 홍역이었다.
“따로 정산은 안 받아도 돼요. 여러모로 힘드실 테니까. 다만 희귀 등급의 아이템 한 정은 따로 챙겨갈게요. 그건 괜찮죠?”
“그건 상관없지만, 아니, 이게 아니라. 우리 조금 더 이야기를 해보는 게 어떨까. 이대로 대책 없이 떠나버리면… 조금. 너희에게도 그리 좋지는 않을 것 같은데. 제대로 된 거취가 정해지고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아뇨. 오빠들 마음은 이해하지만 우정 클랜이랑 저희와는 상성이 안 맞는 것 같아서요. 오늘 사냥에서도 조금 그랬고. 또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다는 것도 한 몫 하고요. 정말로 죄송하다는 말씀밖에 드릴 말씀이 없네요.”
“언니들, 이러는 게 어디 있어요. 갑자기.”
“민지야, 너도 잘 생각해 봐. 정말로 계속 몸담고 있을 만한 곳인지. 그럼 저희는 먼저 가볼게요. 그래도 밖에서 만나면 서로 아는 체해요, 오빠들. 가끔 비정기적으로 만나서 사냥 같은 걸 해도 되고요. 민지는 꼭 따로 연락하고…. 기연이 언니도 저희가 따로 연락드릴게요.”
빠르고 냉혹한 손절이었다.
뭐라고 말할 틈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전 우정 클랜의 여편네들의 마음은 홀가분해 보였지만 다시 한번 우정 클랜의 심장에 비수를 꽂아야 하는 내 입장에서는 다소 민망한 상황이 펼쳐졌다.
나라라도 잃은 것 같은 얼굴의 김태건과 이철우.
물론 빛기연이 저들의 처지를 봐줄 만한 인성의 소유자는 아니다.
손절은 빠르게.
애송이들에게 선수를 빼앗겼다는 게 은근히 자존심 상한다.
“죄송합니다. 저도 따로 해야 될 일이 있어서요.”
“네?”
“그… 원정은 즐거웠어요. 철우 씨, 태건 씨. 민지 씨도 조금 오해가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즐거웠고요.”
“이렇게….”
“아무래도 여기는 제가 있을 곳이 아닌 것 같아서요. 사실 저 같은 경우에는 어딘가의 소속되는 걸 불편하게 생각하기도 하고… 죄송해요.”
“기연 씨, 잠깐 이야기 좀.”
‘구질구질하게 달라붙지 말자.’
“아뇨.”
“기연 씨, 어떻게 이런 식으로….”
‘뭐, 인마. 우리가 무슨 사이였다고 갑자기 이런 식으로야?’
“기연 씨, 저희 클랜과 함께하는 원정이 불편하셨다면 정식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부디 다시 한번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제 얼굴을 봐서라도 부탁드립니다.”
니 얼굴이 도대체 무슨 상관이야.
철우야, 니 얼굴은 아무 상관없어.
“사실은 이렇게 드릴 말씀이 아니지만 다음 원정. 그리고 가능하시면 함께 클랜을 꾸려 움직였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저희가 많이 부족하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만 부디 긍정적으로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조금 그렇네요. 저도 함께하고는 싶지만… 정말로 다음 일정이 있어서요.”
“일단 함께 숙소로 가서 식사라도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이번에 도움도 많이 받았고 뭐라고 감사의 인사라도 드리고 싶은데.”
장담컨대 숙소로 들어가 식사를 하는 순간 빠져나올 수 없는 늪에 걸려들고 말리라.
저들의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나를 붙잡아 놓으려고 할 것이 분명.
만약 여기서 우정 클랜이 빛기연이라는 재원을 얻는다면 모든 손해를 메우고도 남을 막대한 이득을 얻게 된다.
내가 어느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이미 두 눈으로 직접 확인했으니 다른 말이 필요할 리 없다.
“그, 그래요 언니…. 같이 가요. 제가 죄송해요.”
심지어는 국민지까지 이상한 소리를 지껄이기 시작.
지금 당장 대형 길드에 들어가도 이상하지 않을 재원을 공짜로 영입하겠다는 도둑놈 심보에는 헛기침이 나올 정도였다.
“기연 씨.”
‘이제 그만해라, 이 새끼야.’
심지어 덜컥 손을 잡아오는 꼴은 가관.
얼굴이 왠지 모르게 굉장히 진지하다.
“그… 제가 뭔가 잘못한 게 있습니까?”
“아뇨. 그런 건 없는데.”
“제 착각일지는 모르겠지만 더, 던전 안에서 뭔가 기연 씨와 제가 같은 감정을 교감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무슨 감정.’
가끔 이렇게 착각하는 놈이 있다.
잠깐 잘해줄 뿐이었는데 대단한 감정이라도 주고받은 것처럼 달라붙는 이들.
순진하게 생긴 녀석은 굉장히 붉어진 얼굴로 이상한 대사를 내뱉지만, 겨우 이런 수단이 철옹성 같은 빛기연의 마음을 흔들 리 만무하다.
오히려 조금 더 기분이 나빠진다.
남자새끼가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으니 오히려 소름이 끼친다.
“저는 철우 씨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불편하기도 하고요. 손 좀 놔주시겠어요?”
“기연 씨.”
“그 손 놔라, 철우야.”
심지어 덩치 큰 녀석도 이 난장판에 등판했다.
도시 한복판에서 펼쳐진 사랑과 전쟁.
김태건 자식도 갑작스레 등판해 나와 이철우 사이에 마주 선다. 덜컥 다른 손을 붙잡고 공주를 지키는 기사인 양 이철우와 대립하는 모습은 꼴불견 중에 꼴불견.
시선이 점점 모여들고 있는 것 같아 당혹스럽다.
“두 분 다 이것 좀 놔주시겠어요?”
“기연 씨, 제발 한 번만 더 생각을…. 따로 이야기를 나눴으면 합니다.”
그때였다.
다소 강경한 수단을 사용하려던 순간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놓으시죠.”
자연스럽게 뒤를 돌아본 순간 시야에 비친 것은 두 오징어와는 레벨이 다른 외모.
조각 같다는 표현 말고는 달리 형용할 수 없다.
허리춤에 차고 있는 한 자루의 검.
무장은 조촐하지만 가슴에 박혀 있는 휘장은 갑작스레 등장한 인물의 신분을 알려주고 있었다.
더 이상의 외모 묘사는 나 자신이 비참해져 입에 담을 수 없다.
‘이 새끼, 뭐야. 왜 이렇게 잘생겼어.’
파란의 길드마스터.
사랑스러운 회귀자.
김현성이었다.
“두 번 말하지 않겠습니다. 놓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