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5
회귀자 사용설명서 445화
선즙필승(2)
선택지가 딱 이것밖에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채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눈에서 흘러나온 즙은 이것이 가장 정답에 가깝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지금 와서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을 리 만무.
계속해서 닭똥 같은 악어의 눈물을 뽑아내자 이철우와 김태건의 동요하는 얼굴이 시야에 비치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당황했다는 표현이 어울리리라.
“그런 게 아니라….”
“하….”
당연하지만 국민지 4인방의 표정은 썩어 들어가는 중.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냐는 얼굴이다.
선즙필승이라는 과감한 스킬을 사용할 거라곤 예상하지 못한 모양.
분위기를 살피며 태세를 정비하고 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확실하지 않으면 승부를 걸지 마라. 이 계집애들아.’
마음속으로 그리고 있었던 그림은 분명 이런 그림이 아니었을 터.
공개적으로 개망신을 준 이후에는 모든 것이 무난하게 진행될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철우와 김태건의 지지를 받은 이후에 정식으로 파티에서 추방할 것을 건의하고, 만약 그게 불가능할 경우에는 다소 강경하게 나왔을지도 모른다.
그 모든 계획이 선즙 한 방에 무너지는 순간.
너무나도 서럽게 들리는 내 울음소리는 어느새 조용해진 장내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내가 들어도 서럽다.’
“흐으윽.”
물론 그녀들이 선택한 것은 예상하고 있었던 예의 그 강경책.
무척 뾰족한 목소리가 다시금 귀가 들어와 내리 꽂혔다.
“와 진짜… 어이없네. 뭘 잘했다고 울어요?”
“히끅….”
“이런다고 뭐가 달라질 것 같아요? 진짜 어이없네.”
“완전히 미친년 아니야? 저거?”
“진짜 내가…. 하.”
하지만 통할 리가 없다.
이미 이철우와 김태건은 이미 선즙 오오라의 영향을 받고 있다.
국민지외 4인방과 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 모습은 마치 베를린 장벽, 캐슬락 성벽보다 든든한 그 모습은 내가 어떤 트롤짓을 해도 보호해 줄 수 있을 것처럼 느껴졌다.
이미 여론이 이런 식으로 돌아가고 있는데도 화끈한 목소리를 쏘아내주기까지 하니 감사한 것은 당연지사.
철저하게 피해자로 위장한 위장전술은 빛기영의 몸보다는 비치기연의 몸으로 펼치는 것이 더 편하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너희 지금 뭐 하는 거야?”
“오빠도 방금 들었잖아요. 저 여자 오빠들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 아니에요. 처음부터 조금 이상했다니까. 아무것도 없이 파티 신청한 것도 그렇고요. 저런 여자랑 같이 던전에 들어가라고요? 더 위험하면 위험했지 도움도 안 될 거예요.”
“내가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어, 국민지?”
“쓸데없는 짓이 아니라니까요? 그게 더 파티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이러는 거지. 오빠들 속고 있는 거예요.”
“기연 씨, 괜찮으십니까? 진정하시고….”
“히끄으윽.”
여러 말이 소란스럽게 들려오지만 당연히 눈물을 멈추지 않는다.
이쪽을 위로하는 이철우부터 국민지 포함 4인방과 대치하고 있는 김태건까지.
선즙은 절대로 지는 일이 없다는 오랜 격언이 다시 한번 심장 속에 틀어박혔다.
“와, 진짜 황당하네. 진짜로.”
“이렇게까지 하고 싶어요?”
“국민지.”
“우리 잘못 아니라니까요! 아까 한 이야기 못 들은 거 아니잖아요?”
“너희가 뭔가 오해했겠지. 기연 씨는 그런 사람 아니야.”
‘니가 날 언제 봤다고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하냐, 철우야. 아무튼 고맙다. 잊지 않으마. 근데 사람 너무 쉽게 믿는 거 아니다.’
“오해는 무슨 오해예요. 미정이 언니가 직접 눈으로 확인한 게 있는데. 이봐요, 기연 씨. 제 말이 틀려요? 오늘 새벽에 우리 언니랑 마주쳤잖아요?”
여기서가 중요하다.
물론 조금 억지스럽기는 하지만 적절한 변명은 이미 준비되어 있다.
“클, 클랜 영입 제의를… 히끅. 받았을 뿐이에요. 저도 깜짝 놀라서… 정말로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런 일은… 히끅. 없었어요. 없….”
‘음란한 것은 내가 아니라 너희 머릿속에 있는 그 더러운 생각이다.’
“그 새벽에 클랜 영입제의? 그런 변명을 누가….”
‘누구긴 누구야. 니네 오빠들이 믿지.’
“새벽 일찍부터 떠난다고 하셔…. 히끅.”
“말을 좀 제대로 해주시겠어요?”
“죄송합니다. 흐그읍. 죄, 죄송합니다.”
“아니요. 기연 씨가 죄송할 일이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죄송….”
실제로도 목이 멘다.
누가 이 광경을 보고 연기라고 말 할 수 있을까.
얼마나 억울했는지 터져 나오는 울음소리가 입가에서 새어나오는 말을 전부 막아주고 있었다.
물론 어리숙해 보일 것이다.
자기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해 제대로 말도 꺼내지 못하고 있는 꼴은 답답하게 느껴지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저 4인방 한정.
이철우와 김태건은 정말로 뭔가 잘못 됐다는 듯이 빛기연을 달래주기에 여념이 없다.
“굳이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말을 믿는 거예요? 그 새벽에 영입제의를 하러 왔다고요? 새로운 클랜원 영입하는 데 클랜마스터는 어디에 있었던 건지 모르겠네. 그 말, 믿으라고 하는 말은 아니죠? 정말 말도 안 되는 말이라는 거 본인도 인지하고 있죠?”
“죄송합니다. 히끅. 제가… 잘못했습니다.”
“기연 씨 잘못이 아닙니다. 사과하실 필요 없습니다.”
“아니요…. 제가 잘못….”
‘내가 바로 정의다.’
“잘못했습니다….”
‘이게 바로 빛기연이다!’
“끝까지 지가 피해자지? 끝까지?!”
“죄송….”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이철우의 품에 살짝 안긴 것은 당연지사.
순진한 녀석은 잠깐 깜짝 놀란 듯싶었지만 병신은 아닌지 어깨를 두드려주기 시작했다.
‘이것도 못 하면 병신이지.’
얼굴을 보지는 않았지만 아마 무척 붉어져 있을 것이다.
물론 여기서 끝낼 생각은 없다.
슬그머니 눈을 흘긴 것은 당연.
조금 더 확실한 한 방을 위해 비웃음을 일발 장전한다.
저쪽이 흥분하면 흥분할수록 유리해지는 것은 나니까.
이철우의 품에 살짝 안긴 채로 슬그머니 고개를 돌린 것은 당연.
정확히 국민지와 눈이 마주친다.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지만 다른 여성 3인방은 김태건과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다.
계속해서 우는 소리를 내고는 있지만 입꼬리를 올리기 시작.
아마 국민지의 눈에는 눈을 반달로 뜬 불 여시가 미소를 흘리고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부들부들 떨고 있는 얼굴.
나름대로 화를 잘 참고 있어 칭찬해 주고 싶은 심정.
움직이는 도발 토템 같다는 평가를 받은 이후라 조금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악마 관계자들도 이 비웃음에는 화를 참은 적이 없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순진한 사제 이철우의 드넓은 가슴에 본격적으로 머리를 가져다 대며 아양 아닌 아양을 떨기 시작하자 천둥과도 같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불여시가! 오빠한테서 안 떨어져!”
“…….”
“…….”
“입 조심해. 국민지!”
“이 시발 걸레 같은 년이! 방금 못 봤어요? 방금 나보고 비웃었잖아. 시발! 나 비웃었잖아!”
“국민지!”
“너!!”
‘너무 추하다, 민지야.’
갑작스레 달려온 그녀는 누가 봐도 정신이 나간 것만 같다.
이철우가 나를 보호하기 위해 앞을 막아섰지만 연약한 사제의 몸으로 민첩한 도적을 막을 수 있을 리 만무.
결국에는 그녀가 내 팔을 정확히 가격했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악!”
단순히 밀어내고 싶을 뿐이었겠지만 받아들이는 쪽은 그렇지 않다.
오랜만에 헐리웃 액션을 선보이며 땅바닥으로 떨어져 나가자 황급히 나를 부축하는 이철우가 눈에 띈다.
씩씩거리는 표정의 국민지는 본인이 실수했다는 걸 깨달은 모양인지 아연실색.
국민지 외 여성 3인방의 얼굴도 그리 좋아보이지는 않았다.
어찌됐건 몸에 손을 댔고 결국에는 상처를 입힌 것이다.
내가 잘못했어도 결국에는 그녀들이 잘못한 것이다.
누가 봐도 가해자와 피해자는 명백한 상황. 베를린 장벽들이 흥분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미, 미아….”
“지금 이게 뭐 하는 짓거리야!”
결국에는 커다란 노성이 울려 퍼졌다.
“오, 오빠….”
“아직 원정도 끝나지 않았는데… 이런 식으로 해야겠어?!”
“그게 아니라….”
“지금 네 모습이 어떤지 자각하고 있는 거야? 작작 좀 해라, 국민지. 작작 좀 하라고!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잠깐인데… 그것 하나 참기 힘들어? 너 이런 애였어?”
‘명대사 나왔다. 키야. 너 이런 애였니!! 철우야! 연기자로 영입해도 되겠다! 드라마 대사 오졌다!’
“오빠, 그게 아니라 저 여자가….”
“듣기 싫다. 민지야, 지금 네 얼굴 보기도 싫어.”
“오, 오빠.”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한 민지의 모습은 조금은 측은하게 느껴졌다.
보잘 것 없는 애송이들을 상대로 선즙이라는 가드 불능기를 펼친 것이 미안할 정도.
뒤늦게 즙을 짜고 있는 것 같지만, 후즙은 선즙에 비해 그 효과가 미비하다.
부모에게 배신이라도 받은 얼굴을 보니 국민지에게 이철우라는 사람은 제법 중요하게 여겨지는 모양.
하지만 냉랭한 철우 씨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은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사과해.”
“어…?”
“당장 기연 씨에게 정식으로 사과해.”
“하지만.”
“나를 더 실망시키지 마, 민지야. 지금 최대한 좋게 이야기하고 있는 거야. 사과해.”
자존심을 굽히라는 말과 진배없는 발언.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결국에는 국민지는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혹시나 단검이라도 날리는 것은 아닌지 걱정 아닌 걱정이 들기는 했지만 입을 꽉 다문 채 고개를 숙이는 것을 보니 그 정도로 미친년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순간의 화를 참지 못해 일을 벌인 상황.
“죄… 송합니다. 끄으으윽.”
“…….”
“제, 제성합니다. 끄으으으으으윽. 잘못… 했습니다.”
‘그래. 잘못한 거 알면 됐다, 민지야. 언니한테 함부로 깝치는 거 아니야. 이게 사회생활이다. 즙은 뒤에 짜는 게 아니라 앞에 짜는 거야. 무조건 선즙이 유리한 거야.’
사실 조금 더 궁지로 몰아넣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다.
하지만 국민지가 이 정도까지 해줬다면 나 역시도 뭔가 액션을 보여줘야 한다.
이후 원정을 들어가야 하기도 하고 이렇게 감정의 골이 상한 상태에서 서로의 등을 맡겨야 한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으니까.
“아뇨…. 제가 더… 죄송합니다. 부족한 게 많아서… 여러 가지로 오해하게 만든 것 같아서.”
손을 만지고 살짝 껴안아주기까지.
이쯤 되면 작은 전쟁은 끝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여성 3인방 역시 순서대로 고개를 숙여 왔다는 것은 굳이 설명이 필요 없으리라.
“제가 오해를 한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기연 씨.”
“정말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아뇨. 괜찮아요. 정말로 괜찮으니 그렇게 고개 숙이실 필요 없어요. 제가 행실을 똑바로 하지 못한 탓도 있으니까요.”
‘진짜 착해져도 너무 착해졌다, 기연아.’
평소였다면 이 버르장머리 없는 년들을 완전히 박살 내버렸을 것이다.
겨우 이 정도로 끝내준 것만 해도 진심어린 사과와 함께 감사의 인사를 받을 자격이 있다.
“마음씨도 예쁘네.”
김태건이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귓가에 내려앉았다.
어떻게 생각해도 옳은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