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2
회귀자 사용설명서 442화
조신한 이미지(1)
“그건….”
“아암. 파란 길드에 우리 형, 아니, 파란 부길드마스터이자 교국의 명예 추기경인 이기영이라는 분이 한 말씀이지. 위협은 실존한다.”
“…….”
“우리 같은 무식한 놈들이야 그게 무슨 소리인지. 또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온 이곳의 상태가 대관절 뭐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 건지는 잘 모르지만… 현재 대륙 상황을 보고 있자면 그게 꼭 터무니없는 거짓말은 아니요. 갑자기 일부 퀘스트도 먹통이 되어버렸고 던전도 말을 듣지 않으니까. 실제로 교국과 공화국, 왕국 연합, 심지어는 이종족 연합까지 공동의 목표를 위해 연합하고 있소.”
“그런….”
“갑작스러운 소식에 혼란스러워진 대륙을 잠재우기 위해 억지로 그런 분위기를 만들지 않을 뿐이라는 거요. 이미 여러 대형 길드와 국가들이 위협에 대비한 훈련을 하고 있고 그걸로도 모자라 비밀리에 여러 회담이 오가고 있다니까. 아마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점 더 정보가 풀리겠지 않겠소?”
“악마 소환사 진청 이후에 많은 악마 던전들이 생겨난 것도 그 위협의 여파인 겁니까?”
“그렇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니까. 아무튼 간에 현재의 배경이 이렇다는 거요. 그동안 잠적해 있던 우리 클랜 역시 그런 대륙의 위기를 나 몰라라 할 수 없어 이번에 모습을 드러낸 거고. 어찌 됐건 우리의 터전 아니요. 할 수 있는 만큼 해 봐야지.”
“무거운 이야기를 들어버린 것 같은 기분입니다. 부끄럽습니다. 저희 클랜은 당장 먹고 사는 것만 생각했었는데….”
“뭐, 다들 그런 거 아니겠소. 그래서 이기영 명예추기경님이 대단하다는 거 아니요? 자기 자신을 돌보지 않으니까.”
“잘 알고 계시는군요.”
“아암. 잘 알다마다. 어디 그것뿐 인가? 분명히 이 균열 랜드도 손해 보는 장사를 하고 있는 거라니까. 소문으로는 공화국에 빚을 지고 들어가고 있다고 하던데… 거기에 군자금까지 모으려면 얼마나 빠듯할까. 거 생각해 보쇼.”
“음….”
“우정 클랜마스터가 파란 길드, 검은 백조, 붉은 용병 또는 다른 대형 길드의 입장이라 생각해 보라 이 말이요. 당신들 같았으면 이 균열 박물관이라는 걸 민간인들에게 개방 했을까?”
“그건.”
“몇몇은 그런 선택을 했겠지만 대부분은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다니까. 당장 여러 대형 길드에 소속되어 있는 파티만 계속해서 굴려도 아이템을 얻을 수 있는데, 뭐 하러 이렇게 젖과 꿀이 흐르는 던전을 겨우 요정도 가격만 받고 빌려준단 말이요? 어떤 미친놈이 대륙에서 남이 더 강해질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냐, 이 말이오. 어째서인지 뻔하지. 그 무엇보다 대륙의 균형적인 성장이 우선이라고 생각한 거요. 우리 명예추기경님은 그렇게 생각한 게 틀림없다니까!”
“균형적인 성장….”
“그거요! 균형적인 성장. 던전에서 얻을 수 있는 경험 그리고 아이템. 어떻게 봐도 이건 이 던전 관계자들이 손해 보는 장사라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여기에 있는 거요. 할 수 있는 일이 뭐겠소. 열심히 성장해서 이후 일어날 위협에 한 손이라도 보태는 것. 그게 우리 클랜이 균열 박물관에 온 목적이요. 아마 다들 그렇겠지. 그렇지 않소? 여러분!”
“말 한번 잘한다, 바크 세르게이! 공화국 놈 주제에 좋은 소리만 하는 구나!”
“당연히 그렇지! 그렇고말고! 여기 와서 한 잔 받아가게나!”
“옳소! 무조건 옳지!”
갑작스레 대중에게 의견을 구하는 녀석의 목소리에 다시 한번 주변이 떠들썩해졌다.
대부분의 모험가는 바크 세르게이의 발언에 고개를 끄덕이는 중.
심지어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보내는 파티도 있다.
얼굴이 벌게진 것이 술주정 부리는 것 같지만 이런 자리에선 저런 놈들의 목소리가 도움이 된다.
이번 일로 혹시나 평판에 금이 갈까 걱정하기는 했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거라 확신할 수 있었다.
‘이 돼지 새끼 진짜….’
회귀한 거 아니야?
나도 모르게 이런 생각을 해볼 정도였다.
농담 삼아 던진 생각이긴 하지만 왠지 모르게 지난 행적이 의심된다.
쓸데없는 타이밍에 미친 듯이 유용한 이 돼지의 위력은 가히 발군.
물론 평소에는 트롤짓 아닌 트롤짓을 하기는 하지만 정말로 필요할 때 어김없이 달려와 킬 패스를 넣어준다.
이번 역할도 균열 박물관에 대해서 선동하는 것으로 역할이 끝이 아닌 모양.
이지혜가 어느 정도까지 지시를 했는지 모르나 그 이상을 해주는 느낌이었다.
아마 오늘 자리에서 후반의 나온 이야기들은 대부분은 지시받은 것이 아닌, 녀석이 직접적으로 하고 있는 생각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한참이나 떠들던 녀석이 갑작스레 입을 연 것은 40분 정도가 지난 이후였다.
이만 자리를 마무리하자는 뉘앙스를 풍겨온 것이다.
“큼. 시간도 오래 됐는데 이만 올라가는 게 좋겠구만.”
조금은 뜬금없는 타이밍.
하지만 잘 생각해 보니 이르다고 할 수도 없다.
우리 파티가 내일 원정을 나간다는 걸 알고 있을 테니 나름대로의 배려한 것이 틀림없으리라.
이쪽에서 먼저 자리를 끝내자는 이야기를 하기가 어려울 거라는 걸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인성 보소….’
절로 존경심이 들 정도.
녀석의 호의를 깨달았는지 이철우의 눈에도 고마움이 감돈다.
“저희도 내일 일찍부터 준비해야 하는 터라…. 오늘 좋은 말씀 그리고 도와주신 것까지 너무 감사했습니다, 바크 세르게이 님.”
“모험가끼리 돕고 돕는 거지, 뭐.”
누가 봐도 훈훈한 장면.
“올라가시죠, 기연 씨.”
“네. 철우 씨.”
선배와 후배가 서로 서로 인사를 나누고 고개를 끄덕인다.
개인적으로는 조금 찜찜한 만남이기는 했지만 적어도 우정 클랜에게는 도움이 되는 시간이었다.
여러 정보도 얻은 것은 물론 올바른 생각과 정신을 머리와 가슴속에 새길 수 있었으니까.
‘그렇지. 그렇고말고. 이런 기회가 흔하지 않지.’
나 역시 작별인사를 나누는 그룹에 합류에 열심히 손을 흔든 것은 당연.
바크 세르게이는 묘한 표정으로 나를 보다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또 볼 수 있으면 보자니까.”
무사히 위기를 잘 넘긴 것 같은 느낌.
하지만 그건 개인적인 희망사항에 불과했다는 걸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똑똑-
거리는 소리와 함께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
슬쩍 문을 열자 시야에 비친 것은 술병을 흔들고 있는 안기모와 박덕구.
특히나 박덕구는 강아지 같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들어와라.”
함박웃음을 보내고 있는 녀석.
“오랜만이요, 형님.”
정말로 오랜만인 것 같다.
* * *
“예리는 왜 안 왔어?”
“매혹의 춤 때문에 안 왔다는 거 아니요. 아마 지금쯤 숙소에서 이불을 발로 뻥뻥 차고 있을 거요. 아니, 그나저나 형님 방이 왜 이렇게 작은 거요? 조금 더 커다란 곳으로 옮겨도 되나?”
“아냐. 이정도면 충분해. 불편하기는 한데… 지금 와서 방 바꾸는 것도 웃기고. 여기에 짐도 다 풀어놨으니까.”
“뭐, 그렇다면 할 수 없지만. 그나저나 그… 형님 말씀대로면 사찰인가 뭔가 때문에 이기연 상태로 보내고 있다는 거요?”
“음. 뭐 그렇지. 사실 간단한 변장만 하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일반 변장은 힘들 것 같아서. 그리고 이 몸도 생각보다 크게 불편하지는 않더라구.”
“어쩐지 어디서 자꾸 본 것 같은 얼굴이었다니까. 아니, 얼굴은 미묘하게 다르긴 한데 자꾸만 냄새가 나는 거 아니요.”
“무슨 냄새?”
“거, 형님한테 나는 냄새가 뭐겠소. 희미한 약품 냄새랑. 뭐 이것저것 섞인 냄새지.”
“겨우 그걸로 알아차렸다고?”
“사실 다른 게 있지! 가방 아니요, 가방. 형님이 매일 들고 다니는 가방을 보니까 나도 모르게 형님 생각이 나더라니까. 그리고 이름도 너무 비슷하지 않나! 솔직히 처음에는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한 번 형님이라는 생각이 드니까 묘하게 맞아떨어지는 게 있어서 눈치챈 거 아니요! 귀신은 속여도 박덕구 눈은 못 속인다니까!”
“…….”
“지금부터는 누님이라고 불러도 되는 거요?”
“누님은 개뿔. 부르던 대로 불러라. 안기모 씨도 그냥 편하게 계셔도 됩니다. 오랜만의 술자리니까요.”
“감사합니다, 부길드마스터. 그나저나 이거 정말로 깜짝 놀랐습니다. 부길드마스터가 이렇게 아름다워지실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정말로 가방으로 힌트를 주지 않으셨더라면 꿈에도 몰랐을 겁니다.”
“칭찬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길드는 조금 어떻습니까?”
“똑같습니다. 아무래도 이래저래 손이 많이 가는 일이라 유지․보수에 정신없습니다. 손봐야 될 때가 생각보다 많으니까요. 길드마스터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전히 정신없이 보내고 계시죠. 아! 어떻게 길드마스터에게 아직 연락은 넣지 않았는데, 지금이라도 불러 봐도 되겠습니까? 아니면 하얀 씨라도….”
“아니요. 그렇게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바쁜데 이쪽까지 신경 쓰이게 하기는 싫습니다. 그리고 웬만하면 이 일은 두 분만 알고 계시면 좋겠습니다. 기왕이면 예리까지만요.”
‘절대로 정하얀이 알게 하지 마….’
“그럴 줄 알고 예리 씨에게는 미리 말을 해놨습니다.”
고맙다, 기모야.
“아암. 내가 또 입 하나는 무겁지. 나만 믿으라니까.”
넌 안 믿긴다. 이놈아.
호언장담하며 가슴을 텅텅 치고 있지만 당장에라도 달려 들어가 정하얀에게 이번 일을 보고하지는 않을까 겁이 날 정도였다.
물론 평소 박덕구가 입이 무거운 녀석이었다는 건 인정하지만 정하얀에게는 한없이 가볍다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이 주제가 조금 더 이야기되기 전에 급하게 말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왜 콘셉을 그따구로 잡았어? 물리마법사… 그리고 피에 미친 광전사는 뭡니까? 기모 씨?”
“큼. 면목 없습니다. 예전부터 꼭 해보고 싶었던 역할이라…. 그래도 매혹의 춤보다는 조금 나은 것 같다고 스스로 위로하는 중입니다.”
“확실히 그건… 조금 심했지. 예리 그 꼬맹이 발랑 까져가지고. 언제 한번 파란 길드에서 성교육수업이라도 진행해야겠습니다.”
농담으로 받아들였는지 푸훕 하고 술을 뿜어버린 안기모가 눈에 보였다.
좁은 방안에 이렇게 셋이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자 분위기가 제법 좋다.
확실히 이런 시간을 굉장히 오랜만에 보내는 것 같은 느낌.
특히나 박덕구와 술자리를 언제 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끊임없이 이야기를 쏟아내는 녀석이 질릴 만도 하건만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니 지루할 틈도 없다.
“상처는 괜찮냐.”
“뭐, 몸 튼튼한 거 빼면 시체 아니요. 아니, 오히려 형님이 괜찮은 거요? 템플러들까지 왔다고 들었었는데….”
“몸에는 아무 문제없다. 조금 피로가 쌓였는데 그것 때문인 것 같더라고….”
서로의 안부를 묻거나.
“부길드마스터. 그런데 이건 언제 끝내실 겁니까.”
“던전만 잠깐 들어갔다가 나올 겁니다. 얼마 걸리지도 않을 거고요.”
“흐음…. 그렇군요. 왠지 모르게 이 자리를 이렇게 끝내기가 아쉬워서 말입니다. 어떻습니까. 이번 일 전부 끝내시면 또 이렇게 한잔하시는 게.”
“나는 찬성이요.”
“물론입니다.”
쓸데없는 이야기를 나눈다.
나 역시 오랜만에 즐거운 자리를 끝내기가 아쉽다.
슬쩍 밖을 바라보니 어느덧 새벽.
지금 자도 몇 시간 못 잔다는 걸 깨닫고는 잠깐 동안 멍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직 네 시간에서 다섯 시간 정도는 숙면이 가능하다.
‘피로회복 포션 먹으면 되니까.’
꾸벅꾸벅 졸기가 무섭게 눈치 빠른 안기모가 입을 열기 시작.
이만 나가주는 게 좋다는 걸 이제야 깨달은 모양이다.
“이만 일어납시다, 덕구 씨. 내일 던전에 들어가시는데, 저희가 부길드마스터를 너무 붙잡은 모양입니다.”
“크흠. 아, 이거 이대로 끝내기는 너무 아쉬운데…. 형님, 한 시간만 딱 놀다 갑시다.”
“나온 다음에 놀아줄게. 나도 웬만하면 같이 있고 싶은데 진짜 피곤해서 못 참겠다.”
“그럼 할 수 없지만….”
“빨리 나가, 이 새끼야. 잠 좀 자자.”
녀석을 툭툭 밀어내자 마지못해 일어서는 녀석이 시야에 비쳤다.
“그럼 부길드마스터, 조만간 뵙겠습니다.”
“뭐, 필요한 일 있으면 연락하쇼. 달려갈 테니까.”
“응.”
그렇게 문을 열고 녀석들을 배웅하려고 하던 바로 그때였다.
“아.”
짧은 목소리가 들려온 것.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리니 시야에 비친 것은 우정 클랜 소속의 여자.
왜 이런 시간에 나와 있는지 모르겠지만 경악한 표정으로 나와 아르기르모를 바라보는 게 눈에 보였다.
뒤이어 방에서 튀어나오는 바크 세르게이의 모습까지 확인하자 진한 혐오감이 얼굴에 깃들기 시작.
마치 벌레를 바라보는 표정이 이러할까.
치울 수 없는 인간쓰레기를 보는 표정이 이러할까.
뭘 오해하고 있는지에 대해 깨달은 순간 나도 모르게 목구멍으로 침이 넘어간다.
“…….”
“…….”
“뭔가 오해하시는 것 같은데….”
원정 하루 전 남자 둘을 방으로 끌어들이는 미친년.
빛기연이 비치기연으로 이미지가 굳어지는 순간.
못 볼 거라도 본 것처럼 다급히 문을 닫는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조신한 이미지는 끝장났네, 시바.’
평소에 쌓아왔던 조신한 행실이 실수 한 번에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