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0
회귀자 사용설명서 430화
그래도 얘가 제일 무섭다(3)
‘살았구나, 슈바. 살았구나. 기영아. 해냈다. 살았구나.’
천천히 눈을 뜬 뒤 처음 든 생각.
이만큼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해 감사한 날도 없으리라.
승리의 혼잣말을 내뱉으려고 했지만 목이 완전히 말라버렸는지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는다.
왠지 모르게 숨을 쉬기가 힘들어져 허겁지겁 손을 뻗어 포션을 열었지만 부들부들 떨리는 손 때문인지 잘 열리지가 않는다.
몸 전체의 기력이 극도로 쇠약해진 느낌.
지금 이 시기를 놓치면 골든타임을 놓치는 게 될 것 같은 기분에 초조해진다.
서서히 생명의 불씨가 사그라지는 것이 느껴졌을 때 기적적으로 포션병이 열렸다.
벌컥벌컥 하는 소리와 함께 생명수와도 같은 녀석들이 안으로 쏟아지기 시작.
물론 이것만으로도 전부 회복했다고 볼 수는 없지만 응급처치는 한 것이다.
마치 사우나를 한 뒤에 이온음료를 마실 때의 쾌감이 든다.
“죽을 뻔했다.”
농담이 아니다.
정말로 죽을 뻔했다.
사실 어제 일이 어떻게 됐는지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
처음 몇 시간 이후에는 곧바로 리타이어.
중간중간 잠에서 깨기는 했지만 기억나는 것은 오롯이 찰랑거리는 붉은 머릿결과 위에서 나를 바라보는 붉은색 눈동자였다.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는 건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으리라.
물론 행복한 시간이기는 했다.
심지어 이상하게 뒤집힌 상황에 약간의 흥분까지 느낄 수 있었지만… 그것도 처음이 끝.
현재 몸 상태는 대륙으로 온 이후 최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마치 정기가 다 빨려나간 느낌.
몸무게를 재보지는 않았지만… 단언컨대 5㎏ 이상이 빠져나갔으리라.
더욱 최악인 것은, 아니, 이건 아니다. 아무튼 간에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거다.
‘어쩌지.’
이 당혹스러운 상황에서 걱정되는 것은 단연 정하얀의 존재였다.
아마 중간부터는 차희라와 내가 경로를 이탈해 이상한 곳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깨달았을 터.
울고불고 생난리를 치지 않을까 걱정되기는 했지만 이곳으로 찾아오지 않았다는 것도 신기하다.
아니, 아마 찾아오지 않은 게 아니라 찾아오지 못했을 것이다.
않았다는 건 정하얀의 선택지에 존재하지 않는다.
모종의 이유로 이쪽의 좌표를 잃어버렸거나 아니면 현재 나와 차희라가 있는 이곳이 그녀가 입장할 수 없는 장소라는 이야기가 된다.
‘던전인가?’
총 수용 인원이 2인밖에 안 되는 던전?
아니면 탐지마력이 닿지 않는 장소?
어느 쪽이든 상관없지만 돌아갔을 때의 파장을 생각하니 다시 한번 머리가 지끈거렸다.
내가 없는 린델에서 벌어지고 있을 상황이 두려운 것은 당연지사.
옆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일어났어, 자기?”
“아… 으응.”
“미안해. 내가 좀 심했지?”
“아니야. 나도 좋았어.”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는 게 문제지만.
“그렇다니 다행이네.”
가까이에서 본 차희라의 얼굴은 정말로 좋아보였다.
최근에 보였던 푸석푸석한 머리카락과 피부는 마치 새로운 생명을 얻은 듯했고 다크서클도 완벽하게 사라져 있었다.
비포와 에프터를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명확하게 달라진 얼굴은 나 역시 탄성을 자아내게 할 정도.
세상만사 오만 걱정과 모든 스트레스를 날려 버린 것으로 모자라 영양제라도 맞은 모습이다.
현재의 차희라는 그야말로 베스트 컨디션.
생명의 어머니라도 내려와 축복을 내린 모양새였다.
“기다려. 아침만 먹고 가자.”
“아침까지?”
“대단한 건 아니야. 대충 기분만 내본 거지 뭐. 아니면 아침 먹고 가볍게 운동이라도 한 다음에 출발할까, 자기?”
죄 없는 동물을 노리는 베어그릴스의 눈빛.
소중한 단백질 공급원이 되기 전에 어서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걸 깨닫는 것은 순식간이다.
“아니야. 바쁘다고 했잖아. 안 그래도 할 일 많은데…. 그나저나 누나 정말로 좋아 보이네.”
괜스레 목소리의 끝이 떨린다.
“내가 욕구불만이라고 이야기했었지? 어제까지만 해도 머릿속에 먹구름이 낀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완벽하게 깨끗한 느낌이야. 완벽해. 정말로.”
대신 내 육체의 피곤과 고통을 등가교환했지.
사실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한 것은 이 장소에 차희라와 함께 있다는 것. 진지하게 말하건대, 만약 이런 장소에 정하얀과 함께 있었다면 지금처럼 여유롭게 있을 수 없었으리라.
혹시나 이곳에 나를 가두지는 않을지, 따위의 온갖 걱정을 했어야 했을 테니까.
적어도 차희라는 그런 미친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근데 너 표정이 왜 그래. 이상한 거 고민하지 마. 나 가두지 마. 씨바. 가두지 말라고….’
고심 끝에 결국에는 몸을 일으킨 차희라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어제 입었던 옷을 그대로 갖춘 채 자꾸만 아쉽다는 듯이 이 장소를 바라보지만 서둘러 나가길 바라는 내 요청에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파란에는 연락해 뒀어.”
“언제?”
“새벽 5시쯤. 잠깐 자기가 정신 잃었을 때 쓸데없는 걱정을 하지는 않겠지만 문제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자기.”
“응?”
“이 반지 청혼반지라 봐도 되는 거지?”
“…….”
“…….”
“비… 슷해.”
물론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방금 그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도 있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느껴져 전력으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차희라는 뿌듯하다는 얼굴로 계속해서 왼손 약지에 장착된 반지를 바라보는 중.
오늘따라 유난히 발걸음이 가벼워 보이는 이유는 어제 있었던 사건뿐만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여긴 어디야?”
“나도 몰라. 던전 비슷한 곳 같던데. 몬스터도 몇 마리 있기는 하더라. 지금은 없지만. 아, 그리고… 바쁘다는 건 균열랜드 이야기?”
“맞아. 안 그래도 지금 그거 손보러 가야 해. 던전 자체는 무리 없이 개장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무래도 서브 콘텐츠들이 부족하거든. 가서 사업 이야기 해야지. 계획서는 대충 머릿속에 있기는 한데 실행하는 건 또 다른 이야기니까.”
“대충 뭐랑 뭐?”
“던전 외에 팔아먹을 게 좀 많아? 그 앞에서 장사하면 백퍼 대박 나, 누나. 박물관 불고기, 박물관 백숙 같은 거라고 대충 이름 지은 다음에 그 가격에 배, 아니, 세 배를 받아먹어도 장사가 될걸? 전투식량이나 포션 같은 던전 보급품은 말할 것도 없고… 던전특구, 관광특구, 경제특구 같은 헛소리도 낭낭하게 집어넣어 가격도 때려 버릴 수도 있고 전형적인 어느 나라 장사방법이기는 하지만 뭐 어쩌겠어. 대체제가 없는데. 무조건 대박 나. 무조건.”
“너무 피 빨아 먹는 건 아니고?”
“정당한 이용료를 지불받을 뿐이야. 던전이 사라진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몬스터 던전이 되는 건데 폭리 좀 취하면 어때. 더군다나 그 던전을 관리할 사람도 나밖에 없는 상황에서. 오히려 양심 장사라니까? 이거 무조건 양심 장사야.”
“규모가 좀 큰 걸 생각하고 있나 본데… 초기 투자 비용은 좀 들겠네.”
“파란에 저장되어 있는 자금으로 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긴 하지만….”
“붉은 용병에 있는 것도 가져다 써.”
“뭐? 진짜?”
“대충 투자라는 개념이라고 보면 될 거야. 네 말 들어서 손해 본 적도 없고 어차피 네 돈이 내 돈이고 내 돈이 네 돈인데, 뭐. 부담 느끼지 말고 가져다 쓸 수 있는 만큼 가져다 써. 다른 건 걱정하지 말고. 인력 쪽도 내가 어떻게 손봐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필요한 거 있으면 말만 해, 자기.”
‘키야. 기브 앤 테이크 확실하네. 그래! 결혼하자, 희라야! 결혼 가즈아!!’
물론 한번 해본 생각에 불과하다.
하지만 방금 차희라의 발언은 진지하게 그런 생각을 해볼 만하게 만들 정도였다.
‘역시 여자는 능력이 있어야 해.’
본래 차희라가 너그럽고 쿨하기는 했지만 거기에 플러스로 따뜻함과 상냥함이 추가된 것만 같았다.
그리폰에 올라탈 때부터 린델로 향할 때까지, 차희라의 상냥함은 계속되고 있었다.
하지만 행복회로가 맹렬히 돌아가고 있던 것도 잠시 점점 린델에 가까워질수록 버리고 괜스레 쓸데없는 걱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버리고 온 폭탄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최근 정하얀이 조금 얌전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정하얀은 정하얀.
꺼진 정하얀도 다시 봐야 한다.
언제 다시 그 불씨가 위로 올라 올지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하지만.
‘별문제 없겠지.’
대놓고 발광하진 않았으리라.
그래도 계속되는 반복학습 끝에 내가 그런 모습을 싫어한다는 것 정도는 인지하고 있을 테니까.
비행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점점 더 초조해지는 것은 당연지사.
아니나 다를까.
저 멀리서 앉아 있는 한 인형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말을 걸어오는 따뜻한 차희라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상황.
착륙장의 한쪽에서 양 무릎을 모은 채 이쪽을 기다리고 있는 이의 모습은 틀림없이 정하얀이다.
멀리서부터 그리폰을 발견했는지 우다다 달려오고 있는 모습이 왠지 모르게 측은하게 느껴졌다.
‘그래…. 니가 뭔 잘못이 있겠냐. 전부 내가 쓰레기지. 그래도 이번에는 제발 조용히 넘어가자.’
마침내 그리폰이 린델로 떨어졌을 때 우다다 달려온 정하얀이 나에게 푹 안겨오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
아무 말 없이 계속해서 품에 안기려는 모습이 왠지 모르게 귀엽다.
하지만 내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차희라를 바라보는 시선은 귀엽지 않다.
미치광이로 돌변하기 일보 직전의 눈빛이 가관이다.
경고가 생각났는지 살기는 띄우지 않았지만 그래도 오한이 들기는 매한가지였다.
“이야기는 들었지? 잠깐 깜빡하고 있었던 볼일이 있어서 자기랑 던전에 좀 다녀왔어. 세컨드도 한 번 다녀오는 게 좋겠네.”
적어도 정하얀과 내가 그 장소에 들어갈 일은 없다.
높은 확률로 명예추기경 실종이라는 기사가 헤드라인에 뜰 확률이 높다.
아무튼 간에 차희라는 나를 한 번 안아준 것은 물론 심지어는 정하얀의 어깨까지 툭툭 두드렸다.
반지를 낀 손으로.
조금이지만 구겨진 프라이드를 회복한 것이다.
“그럼 나는 먼저 간다. 자기.”
물론 남은 한쪽은 자존심이 구겨졌다.
억울하고 분한지 꾸역꾸역 튀어나오는 눈물을 어떻게든 입술을 깨물며 막고 있었지만, 계속해서 눈물은 멈추지 않는다.
‘이거 진짜 어떻게 해야 되냐?’
더욱더 가슴 아팠던 것은 지금 일어난 이 신경전이 싸움 측에도 끼지 않는 유순한 신경전이었다는 것.
나를 둘러싸고 있는 광년들이 전력으로 부딪쳤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상상하기 힘들었다.
정하얀, 차희라 두 괴물을 제외하고서도 그렇다.
카스가노 유노는 그나마 이쪽을 맹목적으로 따르고 있지만 최후의 승자 선언을 한 이지혜도 다른 종류의 괴물이다.
‘아니. 차라리 이지혜가 제일 나아.’
그나마 가장 현실 감각이 있으니까.
조용히 지내기는 했지만 우리 엘프 공주님도 뭔가 마음의 병을 안고 있는 느낌.
“아무 일도 없었어. 정말로 볼일이 있어서 그런 거야, 하얀아. 미리 말 못 해서 미안해. 오늘은 일 끝나고 연극이라도 보러갈까? 균열랜드 일만 마무리 한 다음에 바로 올게. 아마 몇 시간 안 걸릴 거야.”
“…….”
“그만 울어. 이해할 수 있지?”
끄덕 끄덕.
“어제부터 계속 여기 나와 있었던 건 아니지? 빨리 들어가서 한숨자자, 하얀아. 피곤할 텐데. 방까지 데려다 줄 테니까.”
끄덕 끄덕.
“착하지.”
“오.”
“…….”
“오, 오빠….”
“응?”
“우, 우, 우리. 우리 결혼 언제 해요? 결혼…. 결혼한다고 했잖아요. 네?”
그래도 얘가 제일 무섭다.
“끄으윽. 결혼한다고 했잖아요…. 끄으으으윽.”
약발이 조금씩 떨어지고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