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9
회귀자 사용설명서 429화
그래도 얘가 제일 무섭다(2)
정확히 말하면 특수금속으로 만들어진 테이블이었다.
오리하르콘이나 미스릴 같은 전설 등급의 금속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쇠는 쇠다.
최소 영웅 등급 이상의 판정을 받아 무기로 가공해도 나쁘지 않을 퀄리티의 자제.
이딴 자제로 테이블을 만들었다는 것도 황당하지만 그걸 손으로 쥐어 으스러뜨린 근력을 목도하니 당황과 공포의 감정이 교차하고 있었다.
‘아, 맞아. 얘 이런 얘였지.’
단순히 금속을 베어내거나 마법으로 형태를 변형시키는 게 가능한 이들은 넘쳐나겠지만 단순한 완력만으로 이런 게 가능한 건 전 대륙을 뒤져봐도 5명이 채 안 될 거라고 단언할 수 있다.
심지어 마력을 일으키는 낌새도 느껴지지 않았다.
순수히 손가락으로만 이 광경을 이루어냈다는 말이 된다는 거다.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그 광경을 바라본 것도 잠시, 이윽고 들려온 목소리에는 괜스레 더 그녀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뭐해? 빨리 오라니까. 집에 갈 시간이잖아. 응?”
“…….”
“뭐해? 자기.”
“으응. 지금 갈게.”
분명히 표정에는 변화가 없다.
하지만 미묘하게 일그러진 것 같은 얼굴은 차희라가 얼마나 기분이 안 좋은지 알려주는 것 같다.
폭발하지 않은 건 이런 일에 화를 내는 게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인지하고 있기 때문.
그 말 그대로, 정하얀의 어린아이 같은 도발에 대응하기에는 차희라라는 이름이 가지는 위치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틀림없으리라.
생각해 보면 차희라가 화를 내는 걸 본 적이 없다.
기껏해야 정하얀을 비롯한 몇몇이 자신에게 이빨을 드러냈을 때 경고를 하는 정도뿐.
그마저도 결국에는 웃으며 스무스 하게 넘어갔고 한 번 상황이 마무리 된 이후에는 지난 일에 대한 언급도 없다.
말하자면 대인배 중의 대인배요, 위인 중의 위인이다.
‘이건 뒤끝이 있다는 건데….’
불만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말하고 기분이 나쁘다면 그 자리에서 표현했어야 했다.
나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차희라를 그런 사람으로 생각한다.
속 안에 꽁 하고 숨겨놓은 게 있다는 것만으로도 갑작스레 불안감이 증폭하기 시작했다.
이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하얀은 승자의 미소를 흘리며 당당하게 붉은 머리의 옆을 지나가는 중.
흥분한 야수가 갑작스레 손을 들어 정신 나간 마법사의 뚝배기를 부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괜스레 등 뒤가 부르르 떨린다.
파국도 그런 파국이 없으리라.
더욱더 무서운 것은 최악의 베드엔딩이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것.
‘이건 바로 케어해야 돼.’
눈 가리고 아웅이겠지만 이건 케어 하는 게 맞다.
식사를 마치고 나온 이후, 오스칼과 마를린, 카트린 의원들을 비롯한 이기영 인맥 군단과 뜨거운 작별인사를 나눌 때도 괜스레 차희라를 신경 쓰기 시작.
조혜진이 그리폰 위에 올라타 어서 자신의 뒤에 타라 고개 짓을 했을 때 조심스레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저는 차희라 님과 함께 타고 가겠습니다.”
“네, 부길드마스터.”
조금이라도 섭섭해했으면 기분이라도 좋으련만 내 말에 조혜진은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
오히려 울상이 된 것은 정하얀 쪽이다.
이건 아니라는 듯이,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는 듯이 애타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어쩔 수 없다.
뿌린 대로 거두는 법.
힘의 균형은 유지되어야 한다.
어느 한쪽으로 쏠리거나 균형이 무너지는 순간 내 신체의 균형 역시 무너질 수도 있다.
정확히는 좌우 균형이다.
“그럼 주인님, 박물관 건으로 린델에 한 번 찾아뵙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해. 유노.”
“네.”
남들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대화를 나누곤 곧바로 실리아로 향하는 카스가노 유노를 보낸 이후.
곧바로 붉은 머리에게 발걸음을 옮긴 것은 당연지사.
나를 바라보는 표정이 왠지 모르게 싸늘하다.
한 대 쥐어박고 싶어 하는 듯하다.
물론 그런 사고는 벌어져서는 안 된다. 차희라가 한 대 쥐어박는 순간 내 뚝배기는 두부처럼 터져 버릴 것이다.
“왜? 세컨드랑 타고 가지. 응?”
“아니 그냥. 겸사겸사 할 말도 있고….”
“무슨 말?”
“뭐, 딱히 정확히 말이 있다기보다는 누나랑 둘만 시간 보낸 게 언젠지 잘 기억이 안 날 정도라서… 유유자적하게 그리폰 위에서 대화를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래서….”
“…….”
“…….”
“올라타.”
“…….”
슬그머니 눈치를 본 것은 당연지사.
그만큼 쫄리는 상황이었다.
이후 정하얀의 향후행보가 걱정되기는 했지만 지금 당장은 불길이 치솟은 곳을 달래주는 것이 중요하다.
정하얀과 우리 엘프 공주님, 조혜진을 태운 그리폰이 하늘로 솟아오른 직후에는 천천히 누나가 타고 있던 그리폰도 떠오르기 시작.
밑에서 열렬하게 손을 흔들고 있는 팬클럽 여러분에게는 웃어주었지만 내 입가에 웃음이 사라지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그래. 얘도 한 번 케어해 줄 때가 됐어.’
린델 최고의 무력집단을 거느리고 있는 이 여편네의 중요성은 이미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지금의 내게는 크게 중요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차희라는 차희라고 붉은 용병은 붉은 용병이다.
여전히 린델 내에서 중요한 포지션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은 물론 권력의 한가운데 있다.
내가 조금 컸다고 한들 마음대로 대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거다.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여러모로 이쪽을 도와준 의리를 생각하면 매몰차게 떨쳐낼 수 있을 리 만무.
아니, 애초에 그녀를 떨어뜨리려고 했다간 내 머리가 먼저 떨어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린델로 돌아가는 내내 입을 꾹 닫고 있는 모양새는 가관.
솔직히 차희라가 이런 모습을 보여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의외로 귀여운 면도 있네.’
그녀의 평소 모습을 생각하면 이렇게 살짝 삐진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 자체가 생소하다.
물론 그런 감성적인 감정은 잠시 넣어둬야 하는 것이 당연.
지금은 어떻게 이 용병여왕의 기분을 풀어줄까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어떻게 하지.’
생각해라, 빛기영.
자존심 같은 건 신경 쓰지 마.
내가 이런 태도를 보였을 때 정하얀이 어떤 행동을 했는지 떠올려.
정답은 정해져 있다.
이런 게 통할지, 아니, 이런 걸 내가 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얼굴에 철판을 깔아보는 거야.
“내가 누나 많이 좋아하는 거 알지?”
“…….”
“고맙기도 하고… 솔직히 여기까지 온 게 누나 덕분이잖아. 처음에 만났을 때도 날 많이 믿어줬고.”
애교.
어쩌다 보니 삐진 남친을 풀어주는 여친의 포지션이 된 것 같았지만 차희라에게는 이 방법이 효과적이다.
그녀가 원하는 건 자신을 이끌어줄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애초에 그런 걸 바라고 있었다면 나에게 접촉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목소리에 잔뜩 애교를 묻히고 살살 그녀를 간질인다.
머리를 등에 비벼 보기도 하고 허리를 꽉 잡은 손을 배 쪽으로 옮겨 깍지를 낀 채 은근슬쩍 자극한다.
어울리지는 않지만 최대한 교태를 부려 그녀의 청각을 자극.
조혜진이었다면 나를 그리폰에서 밀어내 버렸겠지만 내 고유기벽에 효과를 받는지 몸을 자꾸만 움찔거린다.
‘키야. 이거 호스트바에서 일해도 되겠네. 네가 최고다.’
아무래도 조금은 재능이 있었던 모양.
왠지 모르게 분위기를 타기 시작한다.
여포와 동탁을 손에 들고 가지고 논 초선의 기분이 이러할까.
세상을 가지고 논 양귀비와 클레오파트라의 심정이 이러할까.
괜스레 치명적인 놈이 된 것처럼 코스프레를 해대는 건 내가 생각해도 역겨웠지만, 반응이 좋으니 신이 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섹스심볼 이기영!!’
나 자신에게 구역질이 나오기는 하지만 동서고금 남녀불문하고 이런 앙탈은 실패하는 법이 없다.
“화 풀어, 누나아.”
“…….”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어. 그리고 단순한 선물이었고 하얀이가 많이 안 좋았던 일이 있어서 기분 풀어주려고 준 거야. 누나도 알고 있잖아. 내가 누나 많이 좋아하는 거. 그렇지?”
“…….”
“누나 붉은 입술도, 붉은 머릿결도 전부 다 너무 좋아. 항상 당당한 모습도 그렇고. 정말로 화난 건 아니지? 내가 오버하고 있는 거지?”
‘근데 얘는 왜 이렇게 말이 없어. 진짜 극대노하기라도 한 건가.’
“어쩔 수 없다는 거 알고 있잖아. 나도 물론 누나가 첫 번째라고 생각하고 있기도 하지만….”
‘진짜 삐졌나?’
뒷모습만 보이니 그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꽤나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이런 포지션을 취하고 있는 것을 보니 이 필살기가 먹히지 않는 모양.
결국에는 현성이가 사준 샤넬리아 에르메스의 가방에 손을 집어넣을 수밖에 없었다.
‘쓸 만한 반지가 있나.’
준비가 되지는 않았지만 준비한 것처럼 시도하는 게 중요.
혹시나 정하얀이 폭주할 일이 있을까 봐 여러 가지 뇌물을 가방에 집어넣었건만 마땅히 쓸 만한 게 손에 잡히지 않는다.
정하얀이 폭주할 때를 대비해 하나씩 끼워줄 반지들.
초조함에 고개까지 빼꼼 내밀며 물건을 찾자 마침 그녀와의 상징도 같은 붉은색 반지가 눈에 띄기 시작.
반지를 꺼낸 이후에는 슬그머니 그녀의 한쪽 팔을 어루만졌다.
아직도 이쪽을 돌아보지 않았지만 순순히 한쪽 팔을 이쪽에 떠넘기는 걸보니 이런 스킨십이 싫지는 않은 모양이다.
물론 진짜는 지금부터.
설마 반지를 끼워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음이 분명.
자신의 왼손으로 들어가는 차가운 금속을 느꼈는지 몸이 조금 움찔 하는 것이 보인다. 녀석을 완벽하게 밀어 넣자 천천히 팔을 빼내어 자신의 손을 보는 모습은 왠지 모를 설렘이 느껴졌다.
‘여기서 결정타.’
소녀처럼 폭 안긴 이후.
“차희라, 사랑해. 정말로 사랑해.”
반 정도는 진심인 말을 중얼거린다.
뭔가 예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은 바로 그 직후.
“어?”
갑작스레 잘 날아가고 있던 그리폰이 경로를 이탈한 것.
먼저 가고 있던 선발대는 현재의 상황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경로를 이탈한 그리폰들은 전속력으로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뭐야. 이게 뭐야.’
혹시나 벌집을 건드린 것은 아닌지 긴장한 게 사실.
하지만 적의는 느껴지지 않는다.
“누, 누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다만 들려오는 것은 계속해서 거칠어지고 있는 숨소리.
‘개….’
만약 그리폰 레이스가 있다면 트로피를 들어 올릴 것만 같은 경기력이다.
단숨에 지상으로 내려온 그리폰은 내가 알 수도 없는 장소에 들어가는 곳으로 모자라 이상한 동굴을 거쳐 계속해서 저공비행을 하기 시작한다.
‘여기가 어디야….’
아마도 버려진 던전 안.
차희라는 지금 이곳이 어딘지 알고 가고 있는 건지 확신할 수 없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녀를 꽉 껴안은 채 온 몸으로 바람의 저항을 견디는 것뿐.
마침내 그리폰이 알 수 없는 장소에 도착했을 때, 꽉 감았던 두 눈을 떠 주변을 둘러 볼 수 있었다.
“여기 어디야?”
꽉 막혀 있는 것은 물론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두컴컴한 장소.
“라이ㅌ….”
조심스레 불을 키자 정말로 작은 던전 같은 공간이 눈에 띈다.
하지만 그보다 눈에 띄는 것은 눈동자가 붉어진 채 나를 바라보고 있는 한 마리 짐승.
충혈된 것도 모자라 핏발이 선 눈으로 이쪽을 응시하고 있다.
“난 이럴 생각 없었어. 근데… 네가 먼저 유혹한 거야.”
“어?”
“자기가 먼저 유혹한 거라고.”
“어어?”
균열박물관에서 고대신을 마주친 것만 같은 압박감.
몸이 굳어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았고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오는 차희라의 얼굴이 보였다.
갑작스레 진청의 마지막 대사가 생각나는 건 기분 탓이 아닐 것이다.
‘언젠가 네가 저지른 짓들이 너를 좀먹는 날이 올 거다.’
이 새끼가 이걸 말한 건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