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7
회귀자 사용설명서 417화
살기 좋은 세상(2)
“아, 이거 모이지 말라고 했는데 왜 또 모여서 이러고 있는 거야? 나 참.”
조금 퉁명스레 말하기는 했지만 딱히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최고급 가죽으로 만들어진 의자에 앉아 밖을 바라보자 열심히 기도를 드리고 있는 시민들이 시야에 비치기 시작.
끝이 없는 인파는 라이오스 때와 엇비슷하거나 그 이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만약 여건만 마련되었다면 린델 전체를 가득 채우고도 남았으리라.
린델뿐만이 아니다.
캐슬락, 다완, 실리아, 에베리아의 엘프와 드워프 왕국까지 상상이 불가능할 정도의 인파가 모여 있다는 걸 생각하면 더욱더 그렇다.
심지어 아무 연관이 없는 왕국 연합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단다.
라이오스 때처럼 죽음의 위기를 겪었다고 언론 플레이를 한 것도 아닌데도 이 정도.
그만큼 내 이미지가 좋다는 뜻이었으니 보기 불편한 광경일 리가 없다.
‘특히나 이번 건 더 좋았지.’
아직도 여신의 거울에선 이번 전쟁의 클라이막스가 송출되는 중.
온몸이 빛에 휩싸인 한 인형이 팔을 휘두르자 수만의 언데드가 한꺼번에 허물어지는 광경은 기적이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아니, 어떻게 봐도 기적 그 자체.
그 이후 하나가 되어 나아가라는 메시지를 주신 베니고어 여신님의 모습은 감히 한낱 인간이 재단할 수 없을 정도로 신성한 모습이라 할 만했다.
나조차도 눈이 멀지는 않을까 걱정할 정도의 외관.
신에 대한 믿음으로 꽉 차 있는 교국 국민들이 이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대해서는 말이 필요 없는 게 당연지사.
만약 저런 걸 보고 사기라 지껄이는 인간이 있다면 길거리에서 돌을 맞아 죽어도 할 말이 없으리라.
‘그렇고말고.’
어쩌면 돌에 맞아 죽는다는 것 정도로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 기적에 힘입어 얻은 것을 떠올린다면 더욱더 그렇다.
사실 이번 전쟁은 대륙에 커다란 상처를 남겼다. 많은 이가 죽거나 고통 받았고, 심지어는 악마 소환사의 사악한 술수로 인해 죽어서도 편히 눈감지 못한 이들도 생겨났다.
저주받은 언데드가 대륙 전체에 안겨줬던 정신적인 충격은 이루 말할 수도 없을 정도.
많은 인적 피해와 물적 피해가 있었고 어떤 지역의 경우에는 복구가 불가능하다 판단할 정도로 많은 피해를 입었다.
교국과 공화국의 전력은 이전과 비교했을 때 형편없을 정도로 깎여나갔다.
생산시설 자체가 망가진 지역이나 완전히 지형 자체가 바뀌어 버린 지역.
권위 있는 복원 마법사들과 고명한 전문가들은 마법이 있는 이 대륙을 기준으로도 전쟁 이전으로 돌아가기 위해선 몇 십 년이 더 걸릴 수 있다고 판단했고, 가장 중요한 인적 피해 역시 만만치 않았다.
물론 이런 저런 충격과 후유증이 있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대륙은 한 가지 가치를 향해 나아가게 됐다.
힘을 하나로 모으는 것.
이전까지 있었던 모든 경쟁과 대결의 역사를 벗어 던지고 미래에 다가올 위협에 대비하기로 의견을 모은 것이다.
아직까지 여러 가지 협의할 문제가 남아 있기 때문에 공식적인 발표나 선언을 미루고 있었지만, 대륙의 모든 지도자가 한 자리에 모이는 건 시간문제나 다름없어 보였다.
한 전쟁에서 일어난 기적이 대륙 전체를 뒤바꾸어버렸다.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현재의 빛기영은 어떻게 봐도 대륙의 중심이나 다름없다.
여신강림도 여신강림이었지만 온몸을 바쳐 전쟁을 막았고 전후수습 역시 무척 훌륭했다.
공화국의 모든 병사를 용서한 것도 옳은 선택이었고 모두와 함께 나아가자 선언한 것도 옳은 선택이었다.
베니고어 여신의 재림.
베니고어 여신의 아들.
베니고어 여신의 대리자.
여러 가지 수식어가 함께하는 것으로 모자라 심지어 베니고어 여신님이 대륙을 구원하기 위해 내려주신 이라는 소문이 나돌 정도.
조금 오버하는 게 아니냐는 생각도 들지만 손짓으로 악마들을 쓸어버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나 역시 같은 생각이 든다.
실제로 이쪽이 베니고어 여신의 가호를 받고 있는 것도 맞고 그녀와 소통하고 있는 것도 맞다.
재림이고 아들이고 현신이고 대리자고 반 정도는 맞는 이야기라는 거다.
덕분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당연히 내 가치는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떡상.
그야말로 수직상승이라는 말이 부족할 정도다.
기영코인의 가치는 원래 높았지만 이번 일로 인해 단가가 더 높아졌다.
이 코인에 투자하지 못한 이들은 땅바닥을 치고 후회하고 있는 것은 당연지사.
그동안 조금이라도 나와 적대했던 모든 이가 선물 공세를 시작했다는 것이 그 증거라 할 수 있으리라.
괜스레 입꼬리를 올리며 실실 웃고 있었을 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리니 시야에 비치는 것은 제법 익숙한 얼굴.
한 손으로 안경을 올린 채 인사를 하고 있는 인형의 정체는 이쪽의 개인 비서.
물론 정확한 직책은 비서라고 하기에 힘들지만 최근 하고 있는 역할이 그러니 그렇게 생각해도 상관없으리라.
“김미영 팀장님.”
“아! 식사하시는 도중이셨군요. 죄송합니다.”
“아뇨. 아뇨. 괜찮습니다. 거의 다 끝나기도 했고, 준비를 하지 못한 제 잘못입니다. 보다시피 여기에 앉아 있으면 누워서 바깥을 구경하는 것밖에 할 일이 없어서 말이죠. 아무튼 마침 잘 오셨습니다. 안 그래도 조금 심심하던 차였거든요. 뭐 새로 들어온 소식이라도 있습니까? 아니, 이후 일정은….”
“네.”
“바로 말씀해 주셔도 됩니다.”
“네, 부길드 마스터. 일단 가벼운 소식부터… 큼.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공화국 의원들을 비롯한 대륙 각국의 귀족들이 보내 온 선물 목록입니다. 현재 길드 하우스 창고에 보관 중이며 특이사항으로는 공화국에서 보관하고 있었던 고대 연금 서적을 비롯한 촉매가 있습니다. 그 외 동부의원 연합 그리고 공화국의 총통께서도 개인적으로 쾌유를 빈다는 메시지와 함께 선물을 보내주셨습니다.”
“아아. 그렇군요.”
이래서 권력이 좋다.
“추가로 개인적으로 만나 뵙고 싶다 청하기도 하셨지만….”
“아, 그건… 그다지 내키지 않습니다. 현재로서는 움직이기 힘들 뿐더러 다른 이들의 시선 때문에 행동하기가 조금 부담스럽습니다. 개인적인 만남은 제가 따로 연락을 드린다고 전해주세요.”
“네. 그대로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기왕이면 잘 포장해서 부탁드립니다.”
“네.”
“추가로 오스칼 님께서도 직접 병문안을 오시고 싶다고….”
“음. 오스칼 님께도 굳이 찾아오지 않으셔도 된다고 전해주세요. 아마 한창 바쁘실 테니까요. 그러지 않아도 수도는 바로 들릴 예정이니 그렇게 말씀 부탁드립니다. 그러고 보면 바젤 교황님도 뵈어야 하네요. 여러 가지로 궁금해하는 것도 많으실 테니…. 아! 그보다 길드원들은 조금 어떻습니까? 그러니까 덕구나 현성 씨나.”
“박덕구 님은 병상에 계십니다. 치료에는 차도가 있는 것 같아 며칠 안에 회복하신다고는 하지만 현재까지는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계십니다.”
“으음. 그 발렌틴 알렉산드로 개자식은 아직 감옥에 있는 거죠?”
“네.”
“이단 심문관 헬레나한테 특별히 잘 부탁한다고 전해주시고, 아니, 이건 제가 따로 연락을 드리는 게 좋겠네요. 뭐, 며칠 안으로 전부 회복된다고 하니 다행입니다. 그리고….”
“길드 마스터 같은 경우에는….”
“네.”
“최근 조금 생각하실 게 많은 것 같습니다. 창밖을 바라본다든가, 뭔가 고민하시고 계시는 게 눈에 보일 정도라…. 딱히 다른 말은 없으시지만 평소와 다른 건 분명합니다. 물론 걱정할 정도는 아니지만 언제 한 번 부길드 마스터께서 이야기를 꺼내보시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흐음.”
‘이 새끼.’
사랑스러운 회귀자에 대한 보고에는 괜스레 팔걸이를 툭툭 두드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걱정 아닌 걱정이 샘솟았기 때문이다.
‘다 끝났는데 도대체 뭐가 문제야.’
병문안 차 이곳에 왔을 때도 뭔가 분위기가 묘하기는 했지만 길드하우스에서도 비슷한 상태인 모양.
기분이 조금 찜찜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아직까지도 멍 때리고 있었을 줄은 생각지 못했다.
김현성이 이번 전쟁에 대해 안 좋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
다른 건 몰라도 결과에 있어서는 굉장히 만족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1회 차가 얼마나 개판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마 녀석의 반응으로 추측하건대 이 시점까지 각 대륙의 세력들이 개싸움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설마 그렇게 멍청한 짓을 했을 거라고는 생각하기 싫지만… 심지어는 알 수 없는 위협이 터진 이후에도 개싸움을 하고 있었을 가능성도 크다.
작은 밥그릇 하나 더 차지하겠다고 피터지게 싸우는 것으로 모자라 서로가 서로를 구렁텅이로 빠뜨리고 있었다는 거다.
‘그렇게 생각하면 1회 차는 정말 지옥이었겠네.’
가면 쓰레기의 활약으로 막장으로 치달았던 1회 차와 비교한다면 현재는 환골탈태했다 생각해도 무방할 정도.
조금 피해가 있기는 했지만 현 상황을 1회 차와 비교한다면 세발의 피다.
전 대륙을 기준으로 생각해 보면 피해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말하자면 대륙은 위협에 다가올 체력을 완전히 보존한 거나 다름없다.
어째서 녀석의 상태가 이상한지는 모르겠지만.
‘진청이 가면 쓰레기가 아니라는 오해하는 건가?’
내 기준에서는 상당히 어렵기는 했지만 김현성이 느끼기에 진청이 제법 싱겁다고 느껴졌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과거에 녀석을 그렇게 괴롭혔던 가면 쓰레기가 자신은 악마 소환사가 아니라고 소리치며 추한 모습으로 잡혀 나오는 광경을 봤을 때.
김현성이 어떤 감정을 느꼈을지 판단하기 무척 어렵다.
심지어 가면 쓰레기 진청은 아군 병력에게 붙들리면서 나왔다.
녀석에 대해 약간의 존경심을 가졌던 나 역시 그 모습을 보고 온갖 정이 다 떨어졌을 정도.
카리스마 넘치던 가면 쓰레기의 모습 대신 그 자리에 자리한 것은 단순히 악에 받친 찌질이 한 명이었다.
김현성이 그 순간 느낀 감정은 허무함일까 아니면 통쾌함일까.
녀석의 생각을 알 수가 없는 나로서는 판단하기 어렵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녀석은 축 쳐진 상태.
언젠가 한 번 멘탈을 다듬어 줘야겠다고 생각은 하지만 일이 산더미처럼 쌓인 지금은 그럴 시간도 부족하다.
‘그나마 일을 해주긴 해서 다행이지.’
만약 그게 아니었다면 파란 길드원 전체가 힘들어졌으리라.
갑작스레 다른 생각을 하느라 팔걸이를 툭툭 건드리는 내 모습을 본 모양인지 김미영 팀장은 조용히 자리에서 나를 기다리는 중.
깜짝 놀라 입을 열자 조용히 미소 짓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
“…….”
“아. 죄송합니다, 김미영 팀장님.”
“아닙니다. 혹시 계속 말씀드려도….”
“네. 그렇게 해주셔도 됩니다.”
“방금 바젤 교황께서도 한 번 뵙는다고 하셨던 일의 연장선입니다만.”
“네. 일정은 최대한 빨리 잡아도 상관없을 것 같습니다. 아마… 다음 주 내로 시간이 날 겁니다.”
“실은 바젤 교황께서 급하기 찾으시는 일이 있습니다.”
“네? 진청에게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겁니까? 아니면 재판 일정을….”
“아뇨. 그런 것 때문이 아니라… 그… 뭐라 말씀드려야 좋을지 모르겠지만.”
“네.”
“베니고어 님의 여신상이 피눈물을 흘리고 있다고….”
“네?”
훈훈한 가운데 들려온 거지 같은 소식.
‘이건 또 뭐야.’
이유는 모르겠지만 위에서 무언가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아 얘는 또 왜 이래?’
갑작스레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