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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381화 (380/1,590)

# 381

회귀자 사용설명서 381화

성전(1)

‘계획대로는 아니네.’

-죽어!

-…….

-죽어! 이 변절자!

-…….

-죽어어어!!!

‘살벌하다. 살벌해.’

그 말 그대로, 여신의 거울에 비치는 예브 카리나는 사실상 악마의 하수인과 다름없어 보인다.

바리안 님의 조각상을 들고 공화국에서 존경받았던 사제의 머리통을 후려치는 모습은 누가 봐도 사이코패스 살인마.

1회 차 여단의 일원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 아니, 여단 정도가 아니다.

누가 봐도 부정할 수 없는 악마 하수인이다.

벨리알도 기쁘다고 박장대소를 터뜨릴 정도의 외관이었다.

‘저거 물건이네 물건이야.’

얼굴이 피로 뒤범벅이 된 것은 물론 머리카락은 산발이 되어 있다.

입고 있는 의복 역시 마찬가지로 피투성이.

저 정도면 현장에서 잡힌 현행범이나 다름없다.

사실 의도한 바와는 조금 차이가 있지만 이런 흐름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 것은 당연지사.

본래대로였다면 정의를 위해 움직이고 계시는 비숍 사제님이 죽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자 역시 충분히 써먹을 수 있는 곳이 있을 테니까.

‘비숍 상급 사제님이 너무 급하게 움직이셨네.’

신성한 포도주가 비숍 상급 사제의 입맛에는 그다지 맞지 않는 모양.

급한 상황이라고 설명했지만 저 정도로 서둘러 움직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이런 종류의 부작용 때문에 최대한 사용을 자제하기는 했지만.

‘오랜만에 만난 적격자였으니까.’

빈손으로 보내기에는 뭔가 아쉬움이 있었다는 거다.

걱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걱정한 것과는 별개로 만들어진 결과 자체는 나쁘지 않다.

어찌 됐건 적 지휘관은 거의 초죽음 상태가 됐고 마침 타이밍 좋게 공화국의 병사가 들이닥치기까지 했으니까.

혼란이 일어나지 않을 리 없다는 말이다.

비숍 사제의 처절한 순교는 곧 부대 내에 퍼지게 될 것이고.

백번 양보해 저들이 악마 하수인의 정체를 숨기고 감추려고 한들 여신의 거울을 통해 모두가 진실을 보게 될 것이다.

사실 따로 작업을 칠 필요조차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안쪽에서 여러 소리가 겹쳐 들려오는 중.

기왕 순교하는 김에 제대로 순교하겠다고 마음이라도 먹은 모양이다.

휘하 사제들에게도 어느 정도 내용에 대한 전파를 했던 것이 틀림없으리라.

‘공화국의 사제들도 제법이야.’

무시했던 내가 멍청하게 느껴질 정도.

공화국의 사제들은 교국과 조금 다르지 않을까 의심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신을 위한 마음은 모두가 같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비숍 상급 사제의 희생적인 행동에 힘입어 공성전이 조금 더 손쉬워 진다는 건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안 그래도 이제 막 출전을 앞두고 있는 시점.

괜스레 밖을 바라보자 출전 준비를 마치고 있는 병사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함께 싸우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아무래도 나에게는 안전한 후방 지원이 제격이다.

‘연설 같은 것도 해야 하고.’

때마침 방문을 천천히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

조심스레 밖으로 나가자 엘레나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제법 오랜만에 보는 느낌이 든 것은 당연지사.

하지만 굳이 반가운 마음을 표현하지는 않았다.

괜스레 옆에 있는 정하얀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출전을 앞두고 있는 지금은 약간 진지해질 타이밍이니까.

아니나 다를까 천천히 입을 열어오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아마….”

“네?”

“아마 병사들에게도 큰 용기가 될 겁니다, 이기영 님. 너무 무거운 역할을 맡긴 것 같아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엘레나 님. 무거운 역할이라고 말씀하시니 민망할 뿐입니다. 마땅히 지켜야 할 장소입니다. 이곳 역시 이제는 제게 있어서 고향이나 다름없으니까요. 오히려 이런 자리를 마련해 주셔서 감사하기 그지없습니다.”

“명… 예추기경님.”

“…….”

“…….”

“그럼 갑시다, 엘레나 님.”

“네.”

살짝 얼굴이 붉어지는 엘레나를 봤는지 정하얀이 짐짓 표정을 찡그렸지만 그리 신경 쓰지는 않았다.

아직 내 몸이 완벽하게 회복되지는 않았으니까.

단상의 위로 올라가는 순간은 언제나 기분이 좋다.

주변을 둘러보자 익숙한 얼굴들이 천천히 시야에 비치기 시작.

어쩔 수 없이 전장에 서야 하는 파란의 길드원도 조금 긴장한 듯하다.

그나마 다른 이들은 의연해 보였지만 이런 대규모 전쟁이 처음인 유아영은 제법 긴장하는 듯한 모습.

태연한 김창렬이 조금은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박덕구는 얼굴에 알 수 없는 초조함이 깃들었다.

김현성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

‘심란해 보이네.’

물론 김현성은 조금 더 준비를 한 이후에 들어가는 게 낫다고 생각하겠지만 지금이 적기다.

당장 급한 것은 캐슬락을 지원하는 것.

이것저것 따질 상황이 아니라는 거다.

김현성이 기다려 마지않는 함정을 만들어야 하는 생각도 들기는 했지만 당장 그런 도박을 할 자신은 없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군대를 최대한 유지하며 캐슬락 전선으로 향해야 했으니까.

아무튼 간에 계단을 오를수록 점점 시야가 확장되기 시작.

후방에 위치한 지휘관으로서 내려다보니 어떻게 봐도 안전해 보인다.

물론 안심하는 듯한 표정을 보여줄 수 있을 리가 없다.

이건 중요한 전쟁의 시작이었고 대부분의 병력은 내가 상상하기조차 힘든 감정을 느끼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

천천히 고개를 양옆으로 돌리자 저마다의 방법으로 불안감을 해소시키고 있는 이들이 눈에 보인다.

어떤 이는 자신의 검이나 투구를 매만졌고, 또 어떤 이는 기도를 하고 있다.

또 어떤 이는 동료의 손을 잡거나 어깨를 두드리고 있었고 또 어떤 이는 조용히 눈앞의 적을 바라보고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단상 위에 서 있는 내 목소리를 기다린다는 것 하나.

‘압박감이 느껴지긴 하네.’

아무런 생각 없이 이 광경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라 장담할 수 있다.

괜스레 구겨진 의복을 정리하며 입을 떼자 곧바로 귀를 기울이는 병사들의 모습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싸우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명분입니다.”

-싸우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명분입니다.

시작은 가볍게.

하지만 목소리는 가볍지 않다.

무척이나 조용해진 장내.

다시 한번 입을 떼자 곧바로 들려오는 목소리를 확인할 수 있었다.

-네. 바로 명분입니다. 어째서 싸워야 하는지, 어째서 검을 들어야 하는지, 어째서 목숨을 바쳐야 하는지, 어째서 소중한 생명을 빼앗아야 하는지에 대해 목도하고 제대로 마주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검을 들어 올렸습니다. 우리는 싸우기로 마음을 먹었고 지금 적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어째서 검을 들어 올렸습니까. 우리가 검을 든 대의와 명분은 무엇입니까.

대답이 들려올 리 없다.

어차피 답을 찾으라고 던진 질문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모두가 느끼고 있을 것이다.

-어째서, 어째서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 있습니까. 어째서 검을 들고 두려운 적과 마주하고 있습니까.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어째서 이 자리에 깃발을 들고 서 있습니까. 모두가 알고 계실 거라 믿고 있습니다. 아마 모두가 인지하고 계실 겁니다. 이 싸움은! 이 싸움은 미래를 위한 싸움입니다! 우리의 대의와 명분은 누가 먼저 침략했는지, 누가 대륙의 질서를 어지럽혔는지가 아닙니다. 우리의 명분은 앞으로 우리가 살아갈, 마땅히 누려야 할 미래에 있습니다.

이 말이 맞다.

-종족 간의 번영을 위한 미래! 이종족과 인간의 완벽한 화합이 함께하는 미래입니다. 서로 적대하며 싸우기 위해서가 아닌 화합과 조화로 이루어진 미래입니다. 저는 이곳에 있습니다. 헤아릴 수 없는 긴 시간동안 이종족의 반대편에 서 있던, 인간이었던 제가 이제는 여러분과 함께 전장에 서 있습니다. 공통된 적에 맞서기 위해 현재 저는 이곳에 자리해 있습니다. 당장은 작은 발걸음이지만 곧 커다란 도약으로 이어질 것이며 우리가 함께 일구어내어야 할 이상향입니다.

슬그머니 옆에 있는 엘레나를 바라본 것은 당연지사.

엘룬쓰레기의 딸이자 빛 폭탄 물약의 소중한 재료는 내 말에 조용히 미소를 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녀에게 방금 말보다 더 달콤하게 들릴 문장은 존재하지 않으리라.

물론 다른 대다수의 엘프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했다.

‘화합과 조화라는 건 좋지.’

-그 미래는 이 대륙과 빛을 위한 미래입니다. 어둠이 드리운 대륙이 아닌 빛과 함께하는 미래를 위해서입니다. 베니고어, 엘룬, 바리안, 대륙 위에 존재하는 모든 빛이 조화롭게 살아가는 미래입니다.

이건 중요하다.

그동안 너무 많이 언급해 짧게 끝내기는 했지만 빛을 위한 미래는 두 번 말해도 부족함이 없다.

목소리에는 확신을 담고 다시 한번 병사들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본다.

내 몸을 감싸는 신성력은 덤.

지난 선전 활동에서 보였던 찬란한 빛을 기억하는지 몇몇 신앙심 깊은 엘프의 눈빛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 미래는 우리가 지켜야 하는 것들을 위한 미래입니다! 우리의 사상과 자유, 올바른 생각과 행동을 위한 미래입니다.

이것 역시 중요하다.

물론 규제가 아닌 획일화 되겠지만 가치로 안고 싸우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소재다.

-그 미래는! 우리의 후대를 위한 미래입니다. 앞으로의 대륙에서 살아갈 우리의 후대를 위한 미래입니다. 우리의 아들들이 살아갈 곳은 어둠으로 가득 찬 대륙이 아닐 겁니다. 우리의 딸들이 살아갈 곳은 인간과 이종족이 서로를 향해 검을 드미는 장소가 아닐 겁니다. 우리의 자식들이 살아갈 곳은 올바른 사상과 철학이 자리한 곳일 겁니다. 여러분은 이 모든 것을 위해 자리해 있습니다. 우리가 지켜야 할 미래를 위해, 저마다가 꿈꾸고 있는 미래를 위해 이 자리에 있습니다. 누구는 가정을 위해, 또 누군가는 함께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기 위해, 또 누군가는 사랑하는 이를 위해, 또 누군가는 신과 함께하는 미래를 위해 이곳에 있습니다!

‘여기서 숨을 멈추고.’

-우리는 강합니다!

한번 내질러 준다.

-대의가 있고 명분이 있는 이는 강합니다. 대의가 있고 명분이 있는 군대는 강합니다. 우리는! 승리할 것입니다! 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신의 이름 아래 우리는 승리할 것입니다. 각자의 이상향을 그리기 위해 그렇게 승리할 것입니다.

‘좋구요.’

-미래를 향해 발을 걸어갑시다.

모든 병사가 한 발 앞으로 내디뎠다. 얼굴에는 확신이 깃들었고 모두가 무기를 고쳐 잡는다.

-그 발걸음이 바로 미래를 위한 걸음입니다. 함께 싸웁시다. 우리가 그리는 이상향을 위해. 우리의 후대들을 위해! 이 땅 위에 살아가는 모든 이를 위해! 나아갑시다!

함성이 터져 나온 것은 순식간.

예의상으로 내지른 소리인지, 아니면 단순히 공포를 잊기 위해 내지른 소리인지는 구별할 수 없다.

하지만 함성이 점점 커진다.

드워프는 평소와 같이, 엘프들은 평소와는 다르게.

수많은 병력이 각 부대의 지휘관들의 신호에 맞춰 투구를 고쳐 쓰고 한 번 더 발걸음을 내디뎠다.

-전군! 전진!

커다란 전장 안에 빼곡히 들어선 병사.

그 모습이 장관이었다는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으리라.

-함께 갑시다! 빛과 함께 싸우는 자들이여!

‘아무나 빛 좀 뿌려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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