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9
회귀자 사용설명서 379화
언제나 팩트는 승리하는 법이다. (5)
‘저는 이곳에 남아 자리를 지키겠습니다.’
‘그런가.’
‘네, 만약 세 시간 내에 돌아오지 않으면….’
‘그럴 일은 없을 걸세.’
‘아뇨, 만약 세 시간 내로 돌아오지 않으신다면 곧바로 병력을 보낼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딱 세 시간입니다. 비숍 사제님.’
‘알겠네, 세 시간 안에는 꼭 돌아오도록 하지.’
‘조건은 이번 만남을 선전에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꼭 말씀해주셔야 합니다. 그리고 돌아오신 직후에는….’
‘예브카리나, 자네에게도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전하도록 하지.’
‘네, 그럼 부탁드립니다. 비숍 상급 사제님.’
‘아니, 오히려 이쪽이 더 고맙군. 무리한 부탁이었을 텐데… 그럼 다녀오도록 하겠네.’
‘입구까지는 함께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정확히 2시간 22분 전에 나눈 대화가 계속해서 기억 속에 맴돌고 있었다. 잘 한 걸까 하는 생각이 내려꽂힌 것은 당연지사.
전시 중 대치하고 있는 병력 간의 소통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이번 일은 확실히 예외라고 부를 만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상급 부대의 허락조차 구하지 않았다. 이기영 명예 추기경과 공화국의 상급 사제의 만남.
이쪽에서 먼저 제안해 온 것을 그렇게 쉽게 수락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함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건가?’
교국에 입장에서는 충분히 함정이라고 판단할 만하다. 공화국은 이기영 명예 추기경을 비방하는 내용의 선전을 주로 담고 있었고 실제로 그를 대륙의 공적으로 지목했었으니까.
하지만 약속장소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그의 모습은 지나치게 평온해 보였다. 정말로 함정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얼굴.
잠깐 마주쳤을 뿐이었지만 조용히 미소를 짓고 있었던 그의 모습은 아직도 뇌리에 박혀 있다.
공화국 진영이 쓸데없는 짓을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어째서 나는 비숍 사제님과 함께 들어가지 않은 걸까.’
이곳을 지켜야 한다고 이야기를 하겠다는 것도 어떻게 생각하면 변명. 사실 답은 이미 나와 있다.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없었으니까.’
그 말 그대로였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이 자신이 믿고 있는 공화국이, 믿고 있는 모든 것들이 무너질까 무서웠을 것이다.
진실을 알고 싶어 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그와 직접 마주할 자신은 없다. 모순적이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겁쟁이니까.
‘싸워야 할 사람이기도 하고….’
괜스레 창밖을 바라보니 아직도 그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작은 텐트가 시야에 들어왔다.
어떤 대화가 오가는지 궁금한 게 당연. 옆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예브카리나 님.”
“아. 쥔윙 와 있었군요.”
“…….”
“아마 괜찮을 겁니다. 저쪽에서도 딱히 모난 짓을 해오지는 않을 거니까요. 아무리 비공식적인 대담이라고는 해도 사제들끼리의 대담입니다. 비숍 상급 사제님은 물론이거니와 그 역시 그런 멍청한 짓을 해오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군요. 비숍 상급 사제님은….”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조금 꽉 막힌 곳이 있으시지만, 그분이야말로 공화국에 정말로 필요한 사람입니다. 절대로 본국에 해가 되는 일을 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분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저희를 못 미더워 보이시겠죠. 저희는 이방인이니까요.”
“그렇기도 하겠군요.”
“네.”
“한데 카리나 님.”
“예.”
“이유가 뭡니까?”
“이유 말입니까?”
“예, 솔직히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물론 비숍 사제님의 체면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정말로요.”
“…….”
“진청군사님을 의심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번 전쟁은 어딘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어요. 누군가의 시나리오대로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말입니다. 아마….”
“네.”
“아마도 전쟁은 공화국에서 먼저 일으켰을 겁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높은 확률로요.”
“그건….”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그리고 최대한 억누르고 있는 생각이기도 하고요. 물론 공화국이 잘 못 되어 있더라도 저는 공화국의 편에, 군사님의 곁에 함께 할 겁니다. 그건 변하지 않습니다. 쥔윙. 하지만….”
“네.”
“진실이 뭔지는 알고 싶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끌려다니고 싶지는 않아요. 비숍 사제님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인 것은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무엇 때문에 싸워야 하는지는 알아야 해요. 최소한 저는 그렇습니다.”
“그렇군요.”
“쥔윙은 한 번도 공화국을 의심해본 적이 없습니까?”
“없지는 않습니다만… 카리나 님처럼 깊게 생각해 본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물론 카리나 님이 가지고 계시는 생각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깊게 빠지시는 것도 좋지 않을 겁니다. 생각해보니 군사님께서는 항상 그런 카리나 님을 걱정된다고 말씀하셨죠.”
“정말인가요?”
“네, 생각이 깊은 것은 장점이지만 너무 빠지는 것은 단점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그런 성격 탓에 전장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도 말씀….”
괜스레 씁쓸한 웃음이 지어졌다. 자존심 상하지만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들어가는 쪽이 아닌 지키는 쪽으로 배정받은 것 역시 사실은 그런 이유. 캐슬락 쪽이 아닌 에베리아와 대치하고 있는 것이 그런 연유다.
“잘 알고 계시는군요. 군사님께서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런 장소에서 더 빛을 발하실 거라 하셨습니다.”
“…….”
“…….”
“하하, 그건 기분 좋은 소식이네요. 저를 생각해 주고 계셨다니 정말로… 기분 좋은 소식이네요.”
“이기영 명예 추기경 그자의 말을 절대로 믿지 말라고 한 것은 무언가 이유가 있을 겁니다.”
“네. 그것 역시….”
‘분명히 이유가 있겠지.’
“싸우는 이유라고 말씀하셨죠. 조금 전에 말입니다.”
“네. 맞습니다, 쥔윙.”
“현재 카리나 님을 믿고 있는 이들을 위해 싸운다는 걸로는 이유가 부족합니까?”
“아….”
왠지 모르게 머릿속이 깔끔해지는 듯한 기분이 든 것은 당연지사. 복잡했던 것이 한꺼번에 정리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물론 정리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여전히 의심의 씨앗은 가슴속에서 자라나고 있었고 여러 가지 생각들 때문에 머리가 아프다.
하지만 뭘 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눈앞에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 당장은 그것뿐이다.
어찌 됐건 전투는 벌어질 거고 실수하면 많은 이들이 죽는다. 공화국의 병사들과 교국의 병사들이 부딪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
어느 쪽이 아군인지 어느 쪽이 적군인지는 이미 정해져 있다.
“그렇군요… 네, 그렇네요.”
입가에는 알 수 없는 희미한 미소도 번진다. 어처구니없게도 그런 간단한 것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전술이라는 것은 효율적으로 이기는 방법이다.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시키며 전투에서 승리하는 방법이다.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다.
“슬슬 일어나 볼까요. 세 시간이 지났습니다.”
“네. 카리나 님.”
발걸음을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아 모습을 드러낸 비숍 사제님이 시야에 비쳤다. 조금 의외였던 것은 이기영 명예 추기경.
그자가 함께 걸어오고 있다는 것. 물론 호위들이 함께 이기는 하지만 너무나도 태연한 모습은 조금 신기하게 보일 정도였다.
조금은 찢어졌다고 할 수 있는 눈, 오똑한 콧대와 이상하게 붉어 보이는 입술. 전체적으로 잘생겼다고 하기에는 힘들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야하게 느껴지는 듯한 얼굴이다.
하지만 미소를 보이자 무척이나 선해 보이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예타 카리나 님. 어려우신 결정을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아니요. 명예 추기경님. 약속은 꼭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이번 대화는….”
“물론 선전에 사용하지 않겠습니다. 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그런 방식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저도 즐기는 편이 아니니… 어떻습니까? 이대로 헤어지기에는 조금 아쉬운 것 같은데 함께 대화라도 나눠보심이….”
“아닙니다, 곧바로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호의는 감사드리지만, 지금은 적이니까요. 이후, 모든 일이 끝나면 한 번 뵙도록 하겠습니다. 서로 죽지 않는다면… 제가 먼저 찾아뵙겠습니다.”
“그렇군요, 서로 죽지 않는다면… 네. 그렇게 결정하셨군요.”
“…….”
“아쉽지만… 음… 아니… 음… 정말로 아쉽게 됐습니다. 저 역시 싸움을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만… 현재 저희가 처한 상황을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카리나 님.”
“물론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쪽도… 이쪽도요. 그럼 전장에서 뵙겠습니다.”
“네, 만나는 곳이 전장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그럼 안녕히.”
천천히 등을 돌린 그의 모습이 눈에 보인 것은 당연지사. 심지어 대화를 나누는 목소리까지 들려온다.
“형님 말대로 여기까지 나오긴 나왔지만 다음부터는 이런 일 없었으면 좋겠다니까. 거, 나는 심장이 철렁철렁 한데 형님은 아무렇지도 않은 거요?”
“왜 아무렇지도 않겠어. 나는 믿은 것뿐이다. 덕구야 저들도 그리고 너도.”
“거, 고마운 말이기는 한데 조금 쑥스럽구만. 일단은 빨리 돌아가는 게 좋겠소. 혹시 추격조가 따라올지도 모르니까.”
“그럴 일은 없을 거다.”
“형님은 너무 사람을 잘 믿어서 탈이요.”
대화를 나누고 있는 대상은 아마 여신의 거울로 봤었던 그 전사가 틀림없으리라.
왠지 모르게 익숙했던 얼굴이라 생각하던 차. 관심이 가기는 했지만, 곧바로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앞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어떻게 할까요. 카리나 님. 지금이라도 레인저들을….”
“아닙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어차피 만나게 될 테니까요.”
“네,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보다 비숍 사제님 이야기는 잘 나누셨습니까?”
“…….”
“비숍 사제님?”
“아… 불렀나?”
“네, 이야기는 잘 나누셨는지….”
“뭐, 그렇다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좋은 사람인 것 같아서 조금 시간을 더 보내버렸지. 이거 미안하게 됐군.”
“아뇨, 괜찮습니다.”
“흐음… 여전히 싸울 생각이구만….”
“네, 그럴 수밖에 없으니까요. 아마 상황을 바꿀 수 없는 건 명예 추기경 역시 마찬가지 일 겁니다. 서로 양보할 수 없는 상황이니….”
“아쉽게 됐군.”
“그보다 의문은 좀 풀리셨습니까, 사제님?”
“사실 풀렸다고 하기에는 애매하지만 그래도 속은 좀 시원해졌네.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대충은 알 것 같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도 알 것 같아. 이 늙은이의 눈이 확실하다면 그는 신의 선택을 받은 사자가 맞다고 할 수 있을 걸세. 아니 확신할 수 있어. 그는 베니고어 여신에게 선택을 받은 성자가 맞아.”
“그게 사실입니까?”
“암….”
“그렇다면 라이오스 사건은….”
“그가 저질렀을 리가 없지. 그는 그럴 사람이 아니야. 거짓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이더군. 또 흘릴 피에 대해서 걱정하는 사람이기도 했고… 성자라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사람이었지. 아암 그렇고말고….”
“그래도… 저희는 싸울 생각입니다.”
“그렇군….”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
“그보다 손에 들려 있는 건….”
“아, 포도주일세.”
“네?”
“교국의 고위 사제들만 마실 수 있다는 신성한 포도주에 대해 들어보지 못했나? 오늘 마시고 조금 남은 걸세. 선물로 가져가라더군. 독이 들어있거나 위험하거나 하지 않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네. 어떤가 같이 들어가 한잔할 텐가?”
“아니요, 저는….”
“함께 취하자는 이야기가 아닐세. 카리나, 잠깐 내 이야기를 들어주게나.”
“그건….”
“아마 상당히 중요한 이야기가 될 게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