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8
회귀자 사용설명서 378화
언제나 팩트는 승리하는 법이다. (4)
“동, 동요하는 병사들은 있습니까.”
“없… 습니다. 카리나 님.”
‘거짓말이야.’
“다른 쪽은 조금 어떻습니까.”
“저, 저희 쪽도 없습니다. 물론 평소 같은 분위기라고 하기는 힘들긴 하지만 쓸데없는 소문의 확산은 최대한 막고 있는 터라… 관련 교육은 물론 입단속도 철저히 하고 있으니 사기의 영향을 끼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없을 리가 없어.’
분명히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찬란한 빛으로 둘러싸인 채로 소리를 내질렀던 명예 추기경. 안 그래도 라이오스 사태를 눈으로 직접 확인했던 직후다.
전쟁의 공포를 떨쳐내지 못하고 있는 병사들이 저런 걸 보고 불안한 마음이 생기지 않을 리가 없다.
‘조작이 아니었던 거야.’
여신의 거울로도 본 적이 있었던 커다란 빛, 심지어 그때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신성한 빛이었다. 대륙에 그리 오랜 시간 자리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정도의 신성력을 목도한 것은 처음. 단순한 눈속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지만….
눈속임 같은 것이 아니었다.
정말로 신의 선택을 받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버렸을 정도.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건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으리라.
이기영 그자가 공화국에서 선전하고 있는 대로 정말로 악마소환에 한 손을 거둔 이들 중 하나가 맞거나 관련되어 있다면 지금의 신성력은 어떻게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다.
물론, 모든 성직자들이 선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경지에 이른 성직자들은 대부분 두터운 신앙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신을 위해 봉사하며 어려운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오직 신을 위해서 살아간다. 명예 추기경이 보유하고 있는 신성력은 각 교단의 성녀나 성자를 상회할 정도. 역사적으로 이름을 남긴 초월적인 존재들과 동급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다시 말해 그가 정말 악마와 관련이 있다면….
‘지금과 같은 신성력을 얻는 것은 불가능해.’
추측이 아닌 확신. 신성력이 정확히 어떤 매커니즘으로 돌아가고 있는지는 자신 역시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악마소환사나 흑마법에 연관이 있는 자가 저런 종류의 신성력을 얻지 못한다는 것 정도는 인지하고 있었다.
‘절대로 그자를 믿어서는 안 됩니다. 예브카리나. 절대로요.’
진청 군사님이 해주신 말씀이 갑작스레 떠오른 것은 당연지사. 하지만….
‘차라리 솔직하게 말씀해 주셨다면….’
만약 진청 군사님에게 어떤 목적이 있었다면 감내하고 받아드렸을 것이다. 공화국의 이득을 위해 공포스러운 존재를 소환한 것이 맞다면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솔직히 말씀해 주셨다면….
‘의문을 품어서 어쩌자는 거야. 군사님이 그럴 리가 없잖아.’
지휘통제실의 불안은 곧 병력 전체의 불안으로 이어진다. 괜스레 입술을 꽉 깨물게 된 것은 당연지사. 밖에서부터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예브카리나 님. 비숍 상 사제님이 뵙고 싶으시다고….”
‘제길.’
어떻게 생각해 보면 예상되어 있는 수순이었다.
“들어오라 전하세요.”
“네. 그대로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난 직후 시야에 비친 것은 백발을 하고 있는 노인이다. 얼핏 보면 볼품없는 늙은이로 보일 수도 있지만 눈앞에 있는 이를 할 일 없는 노인이라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을 거라 생각했다.
공화국에서도 교단은 존재한다. 물론 교국처럼 국가의 기반이 된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사제들이 필수적인 이 사회에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위치는 결코 적지 않다.
군부에 몸을 담고 있는 사제들도 마찬가지. 이들의 목소리를 외면한다는 건 교단 자체를 외면한다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 상황이 달갑지 않다. 저 노인이 무슨 말을 해올지에 대해 대충은 예상할 수 있었으니까.
“무슨 일이십니까? 비숍 사제님.”
“큼…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해서라네. 예브카리나.”
“어제 일에 관련해서는 이미 입장을 발표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관련해서는 따로 드릴 말씀이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공화국의 입장은 이미….”
“물론 밝혔지만… 아무래도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어. 잠깐 다른 이들을 물릴 수는 없겠는가.”
“그럴 필요 없습니다. 비숍 사제님.”
“부탁일세.”
“…….”
“…….”
‘이래서 싫었던 거라고.’
절로 한숨을 내쉬게 된 것은 당연지사. 저 말에 담긴 의미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각자 위치로 돌아가 다시 한번 부대를 살피도록 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
“…….”
“그래서… 원하시는 게 무엇인지 들어봐도 되겠습니까. 비숍 상급 사제님.”
“이야기를 한 번 나눠봐야겠네만….”
“네? 그게 무슨….”
“교국의 명예 추기경과 내가 한 번 이야기를 나눠보겠다 이 말일세. 따로 자리를 마련해준다면….”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아무리 사제님이라고는 해도 방금의 발언은 흘려들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이 상황에서 그자와 만나보겠다니요. 지금은 전시입니다. 저희의 임무는 이곳을 사수하는 것이고 그것 이외에는 다른 것을 생각하면 안 됩니다. 캐슬락으로 가는 지원군과 보급품을 차단하는 것이 제 일이지만. 사제님과 그자를 만나게 하는 것은 제가 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할 일은 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공화국을 지키는 일이야.”
“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야 말로 공화국을 지키는 일입니다. 사제님.”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가!”
“…….”
“정말로 방금의 것을 보고도 전혀 다른 가능성에 대해서 생각해 보지 않았다고? 그자의 신성력은 거짓이 아니야. 정말로 진청 군사의 말대로 그자가 악마를 소환하고 군사를 함정에 빠뜨렸다고 생각하나? 악마 소환사나 그와 관련된 일을 한 자가 그만한 신성력을 손에 넣을 수 있다고? 베니고어 여신이 웃겠군. 신들은 현세에 관여하지는 않지만 그저 바라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닐세. 그릇되고 잘못된 인성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는 그런 신성력을 내리지 않는다 말일세! 그자는 성인이며 성자며 빛의 선택을 받은 자가 맞아. 하늘이 내린 성인….”
“그자는 사기꾼 입니다! 비숍 상급 사제님!”
“어떻게 한낱 사기꾼이 그런 모습을 보일 수 있단 말인가. 어제 우리가 목격한 것은 여신의 거울로 본 것이 아니야…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었고 현실이었네. 사제들 사이에서는 이미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어. 그들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이기영 명예 추기경과의 만남을 주선해야 하네.”
“하지만!”
“그대는 공화국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살아왔는가. 예브카리나. 나는 어릴 때부터 공화국에서 자랐고 지금도 공화국을 지키기 위해 이 자리에 서 있네. 공화국에게 해가 되는 것은 절대로 할 생각도 마음도 없네. 단지 알고 싶을 뿐이야. 우리가 알고 있는 게 진실이 맞는지에 대해서… 자네가 진청 군사에게 충성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어. 나 역시 진청 군사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고. 하지만 적어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어. 그자가 정말로 신의 선택을 받은 자가 맞는지.”
“진청 군사님은 그럴 사람이 아닙니다.”
“제삼자의 소행일 수도 있지.”
“진청 군사님께서도 제삼자의 소행일 가능성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결국 모든 게 이기영 명예 추기경의 함정이었다고….”
“그것 역시 삼자의 소행일 가능성이 존재해. 눈만 봐도 알 수 있네. 저자는 그럴 만한 짓을 할 위인이 아니야. 빛의 선택을 받은 인간일세. 악마를 소환해 군사를 함정에 빠뜨린다니… 차라리 악마가 봉사 활동을 한다는 걸 믿겠군.”
“…….”
“무엇보다 이기영 명예 추기경 본적도 없는 진청 군사를 위한 함정을 팔 수 있었다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그 악마와 그곳에 있었던 모든 것, 악마가 소환되기 위해 떨어졌던 마법이… 정말로… 고작 진청 군사 한 사람을 위한 일이었다고?”
“공화국을 압박하기 위한 전술로….”
“이기영 명예 추기경은 라이오스에 진청 군사가 와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네.”
“그걸 어떻게 단언할 수 있습니까. 비숍 사제님.”
“자네도 여신의 거울로 직접 보지 않았는가. 그때 라이오스에서 일어난 일을 모든 중립국의 국민들이 보고 있었어. 진청 군사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 공포스러운 존재를 이기영 명예 추기경이 종 부리듯 부리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그만 한 힘을 가지고 있는 존재가 이기영 명예 추기경과 말을 맞춰 진청 군사를 속였다고 생각하는 건가? 상식적으로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대륙을 위협할 수 있는 악마가 한 인간의 말을 듣고 오직 진청 군사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연극을 했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심지어 불과 한 달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그 모든 걸 계획하고 실행했다 이 말인가? 우연의 우연이 겹쳐도 쉽지 않은 일이야. 나는 지금 지극히 상식의 선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세. 예브카리나. 정말로… 정말로 이기영 명예 추기경이 대륙을 혼란에 빠트리고 싶어 했다면 그 악마를 다시 한번 소환했을 게야. 이런 귀찮은 짓을 하지 않았겠지. 그자가 그럴 리가 없어.”
‘제기랄….’
부정하고 싶다. 하지만 부정하기 힘들다. 비숍 사제님의 말에 틀린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라이오스에서 일어났던 그 엄청난 사건의 실상이… 한낱 인간의 말을 듣고 진청 군사를 속이기 위한 연극을 한 거라니… 지나가던 개도 믿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제삼자가 있고 교국과 공화국의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한다고 생각하는 게 더 현실적이다. 이래서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지만 점점 더 표정이 어두워지는 것은 당연지사. 개미만 한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곧바로 대답이 들려왔다.
“어떻게… 단언할 수 있습니까 비숍 사제님.”
“그래서 대화를 해보겠다는 게야.”
“…….”
“그래서 대화를 하고 싶다는 걸세. 내 눈으로 직접 그가 어떤 사람인지… 정말로 신의 선택을 받은 사자가 맞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
“대륙을 실제로 위협하고 있는 존재가 실존하고 있는지.”
“…….”
“듣고 싶은 것이 많아. 그 자의 말 대로 우리들이 뭔가 잘 못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네. 우리가 검을 들어야 할 대상은 서로가 아니야.”
“대화는….”
“부탁일세.”
“허가해 드릴 수 없습니다.”
“예브카리나!”
“공식적으로는 말입니다.”
“아….”
“공식적으로 허가를 해드릴 수는 없습니다. 만약 비숍 상급 사제님께서 이기영 명예 추기경을 만난다는 게 밝혀진다면… 사기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겁니다. 적들의 선전 전술로 활용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고요. 하지만… 어디까지나 비공식적으로는 만날 수 있도록 조치를 해보겠습니다. 물론 그건 저들의 동의가 필요한 부분이겠지만요. 일단은 저희 뜻을 전달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빠르면….”
“최대한 빠르게.”
“알고 있습니다. 비숍 상급 사제님. 전쟁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요.”
자신이 현재 잘하고 있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여러 가지를 한꺼번에 생각하기에는 머릿속이 무척이나 복잡해졌으니까. 하지만 비숍 상급 사제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인 이유 정도는 알고 있다.
‘진실을 알고 싶으니까.’
서신을 보낸 지 약 한 시간이 지난 직후.
에베리아 왕국으로부터 똑같이 편지 한 통이 도착했다. 커다란 기대를 하지 않았던 것도 사실. 하지만 이기영 명예 추기경의 편지는 완벽한 긍정을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저 역시 이번 일을 대화로 풀어나가고 싶습니다. 빛의 사랑을 받으시는 비숍 상급 사제님의 결단과 아름답고 고귀한 예브카리나 님의 양보에 경의를 표합니다. - 이기영 명예 추기경 올림.]
“어떤가… 예브카리나 자네도 함께 갈 텐가.”
그 질문에 쉽사리 고개를 끄덕일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