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3
회귀자 사용설명서 363화
빛기영 가라사데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노라(1)
다음날 아침은 무척 상쾌했다.
물론 여전히 역겨운 악마 냄새가 진동했지만 기분 좋은 소식과 함께 새로운 아침을 맞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말씀해 주셨던 물건입니다. 이게 맞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확실합니다, 엘레나 님. 뭐라고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준신화 등급-빛의 연금술사 전용 촉매]
[신성력이 첨가된 하이엘프의 눈물]
[준신화 등급-빛의 연금술사 전용 촉매.]
[세계수의 잎]
‘마이 프레셔스….’
반짝반짝거리는 것들을 보자 내 손이 다 덜덜 떨려올 지경.
‘마이 프레셔스!!!’
나만을 위해 준비된 재료라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당연히 이건 값으로 따질 수 없을 정도의 보물이다.
작은 포션 병에 담긴 소량의 액체와 작은 나뭇잎 하나.
저 촉매들이 앞으로 일으킬 파급력을 생각하면 기분 좋게 웃음을 터뜨려도 되는 상황이라는 거다.
지금 당장 일어나 댄스라도 선보이고 싶었지만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을 리 만무.
눈앞에 있는 엘프의 표정이 그다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릴 때부터 예상하기는 했지만 어젯밤 많은 생각을 하게 된 모양.
그래도 해야 할 일은 해야 한다고 생각해 이런 선물을 준비한 건 상당히 대견해진다.
자괴감에 휩싸여 하룻밤을 보내는 와중이었는데도 결국에는 나를 위해 이런 선물을 준비해 준 것이다.
다시 한번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자 눈이 퉁퉁 부은 얼굴이 보였다.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훨씬 힘들어 하는 모습.
귀는 추욱 처져 있었고 아직도 얼굴에 알 수 없는 죄책감이 감돌고 있었다.
천성이 착하다는 건 바로 이 엘프 같은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리라.
거짓말 한 번 해본 적 없는 여자가 갑작스레 차오른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잘못된 선택을 한 시점.
내 기준에서는 아주 조금 힘든 일이겠지만 그녀에게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힘겨운 시간이었으리라.
안 그래도 지금까지 죄책감과 알 수 없는 배덕감이 공존하고 있었던 상태.
마침표를 찍은 기분이 꼭 좋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이런 얘를….’
비정한 엘룬에게 다시 한번 화살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이왕 엎질러진 물이고 일은 벌어졌다. 믿고 있던 신에게 까지 내쳐진 가슴 아픈 엘프. 재기불능이 되기 전에 꺼내 주는 게 맞다. 앞으로도 그녀는 나와 계속 함께 해야 했으니까. 천천히 손을 잡자. 잠깐 동안 움찔하는 모습. 반사적으로 오히려 손을 피하려고 하는 모습은 제법 재미있다.
물론 결국에는 피하지 않고 손길을 받아들인다.
배덕감이 주는 저릿한 쾌감이 다시 한번 그녀의 죄책감을 뒤 덮은 것.
아마 나와 이야기를 하거나 함께 있을 때에는 사태가 심각해지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제 일은….”
“네… 그…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엘레나 님이 사과하실 일이 아닙니다. 저도 같은 마음이었으니까요. 그리고 필요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아….”
“조금 상쾌해진 기분입니다만… 물론 이런 걸 치료라고 불러야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전과는 무언가 다른 느낌입니다. 엘레나 님께서는 제가 어떻게 보이십니까?”
“그러고 보니….”
“네.”
“그랬던 거군요. 그… 그랬던 것이었군요.”
‘그래… 맞다. 네가 다 맞다.’
아무래도 이제는 역겹게 보이지는 않는 모양이다.
아직 완벽하게 달라졌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구역질을 할 정도는 아니라는 거다.
그녀의 성향이 조금씩 변하고 있다는 증거였고 순진한 엘프의 마음에 내가 들어갔다는 증거였다.
어느 정도로 자리 잡았는지는 아직 확실히 판단할 수는 없지만 아마 내가 손을 놓아버리면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있을 정도라고 생각했다.
현재 그녀가 자신을 짓누르는 죄책감을 버틸 수 있는 이유는 어디까지나 내 존재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게 맞다.
만약 커다란 방패막마저 사라져 버린다면 어떤 행동을 할지 불 보듯 뻔하다.
어쩌면 가면쓰레기에게 농락당한 1회 차의 정하얀 같은 선택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둘 수는 없지. 아암. 그렇고말고.’
황금 알을 낳는 거위, 아니, 소중한 엘레나를 그렇게 만들 수는 없다.
고개를 끄덕이는 와중에도 엘레나는 혼자 중얼거리는 중.
“그랬군요. 네. 어쩔 수 없었던 일이었군요. 이기영 님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네. 필요했던 일이었습니다. 네….”
혼이 조금 빠진 것 같기도 하다.
손을 꽉 잡아 준 것은 당연지사.
살짝 입을 맞추니 거부하지 못하고 받아들이는 모습이 눈에 보인다. 오히려 본인이 조금씩 매달리고 있다.
입술을 떼니 눈에 보인 것은 무척이나 붉어져 있는 얼굴.
앞으로 며칠간은 이런 종류의 작업을 쳐줘야 할 것 같았다.
호기심이든 쾌감이든 뭐가 되든 상관없다. 안 좋은 생각을 하는 걸 막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거다.
‘어쩔 수 없지 뭐.’
우여곡절이야 있었지만 일단은 기존에 생각했던 작업은 충분히 성공이라고 할 만하다.
불안요소가 있기는 하지만 사실상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정하얀처럼 위험하게 만들지도 않았고 적절한 부분에서 아주 잘 타협했다.
적당히 오염됐고 적당하게 잘 만들어졌다.
과정이야 어찌됐든 엘레나의 가슴 속에 파고들었다는 거다.
그 무엇보다 하이엘프 엘레나와의 진심 어린 교감으로 오염된 영혼이 치료됐다는 것이 중요했다.
다음 챕터는 뻔할 뻔 자.
엘레나의 가슴 속으로 한 번 파고들었으니 이번에는 나를 삼킨 이 더러운 자식의 가슴을 향해 돌진할 시간이다.
‘네가 날 소화시킬 수 있을 줄 알았어?’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
이 더러운 악마가 빛으로 둘러싸인 영혼을 소화시키려고 했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가정이다.
“일단 바로 출발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만드신다고 하신 건….”
“중간 중간 시간이 있을 겁니다. 촉매 자체는 움직이면서도 준비할 수 있으니까요. 대충 머릿속에 전부 들어가 있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혹시 또 무슨 일이 터질 수도 있는 만큼 곧바로 자리를 옮긴 것은 당연.
엘레나는 의아한 표정이었지만 이윽고 시작된 기행에는 입을 커다랗게 벌리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가공이 필요한 촉매를 움직이면서 준비하는 게 신기하게 비친 모양이다.
아니, 그녀가 엘프라는 걸 생각해 보면 어쩌면 연금술 자체에 신기하게 비칠지도 모른다.
엘프라는 종족 자체가 연금술과 친하다고 보기는 힘드니까.
“신기하군요. 물론 저번에도 보기는 했지만….”
다른 일에 관심을 가지는 건 좋다. 잠깐 동안 안 좋은 생각을 막아주기도 하니까.
“그… 이기영 님께서는 만드는 방법이나 순서도 모두 외우고 계신 겁니까?”
“네. 익숙하니까요. 아마 몇 시간 후이면 준비될 것 같습니다. 이후에는 곧바로 연금키트를 사용해 물약을 제조하면 됩니다.”
현재 내가 새로운 물약을 제조하는 건 단언컨대 식은 죽 먹기보다 쉽다.
물론 난이도가 아예 없다고 하기는 힘들지만 컨닝 페이퍼를 읽고 시험을 보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마치 천재라도 된 기분을 느낀 것은 당연지사.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완벽한 계량과 센스.
설명서를 읽으며 작업에 임할 뿐이었지만 엘레나는 마치 대단한 것이라도 목도한 것 같은 얼굴로 나를 바라바고 있다.
중간 중간 존경해 마지않는 베니고어 여신님의 빛을 바라본 것이 틀림없으리라.
‘이펙트 한번 좋네.’
확실히 마력이 신성력을 품게 되니 마력을 내뿜을 때마다 빛이 터져 나온다.
가진 바 신성력은 적지만 준신화 등급의 영향인지 촉매에 마력과 신성력을 입힐 때마다 성스러움이 쏟아진다.
‘이게 빛의 기운이지. 아암. 그렇고말고.’
오랜만에 제대로 된 연금술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다.
잠깐 쉬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컨닝 페이퍼를 읽으며 진지한 자세로 시험에 임한다.
빛이 뿜어져 나오며 어떻게 설명하기도 힘든 소리가 튀어나온다.
나조차도 이게 뭔지 제대로 알 수가 없다. 나는 시키는 대로만 할 뿐이었으니까.
그렇지만 뭔가 대단한 기적을 선보이고 있다는 기분 하나는 확실하다.
이제 막 완성을 목전에 둔 타이밍.
갑작스레 녀석이 움직인 것 같은 기분이 든 것은 바로 그때였다.
‘어?’
분명 착각이 아니다.
엘레나 역시 나와 비슷한 표정.
녀석이 움직이고 있다는 걸 느낀 것이 분명하리라.
물론 이런 일이 있었던 것은 처음이 아닌 만큼 크게 당황하지는 않았다. 실제로 우리가 여기에 머무른 동안에 몇 차례 움직임이 있었다.
기껏해야 몸을 뒤척이는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
하지만 다시 한번 일어난 충격에는 뭔가 잘못 되었다는 걸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이, 이기영 님.”
“저도 느끼고 있습니다. 속도를 조금 올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일단 최대한 떨어지지 않게 붙잡으면서요.”
“네.”
다시 한번 왔던 곳으로 되돌아 갈 수는 없다. 여기서 떨어진다면 모든 것이 물거품.
다시 한번 뜻밖의 여정을 계속하게 될지도 모른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쓸데없는 생각을 하자마자 흔들리는 안.
곧바로 수인을 외우고 손바닥을 튕기며 몸을 고정시킬 지지대를 만든다. 단순히 몸을 뒤척인다거나 달리고 있는 종류가 아니다.
‘이거….’
마치 싸움이라도 벌이고 있는 듯한 모양새.
한쪽 팔로 엘레나를 꽉 껴안자 그녀 역시 눈을 꽉 감고 내 몸을 붙잡기 시작했다.
‘현성인가!?’
다시 한번 거대한 굉음이 들려오며 녀석의 몸이 크게 흔들린 순간.
자연스럽게 같은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온 거야.’
파란 길드원들과 에베리아 왕국의 엘룬 나이트들이 당도한 것이다.
“이게… 무슨 일인가요? 이기영 님.”
“아무래도 원정대가 도착한 것 같습니다. 정확한 건 알 수 없지만 아마도… 확실할 겁니다.”
원래 원정대가 이곳에 당도할 시간보다 약 삼 일이 더 빠르다.
원정대가 무척 급하게 움직였다면 얼추 시간이 맞는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 일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아마 원정대도 힘겨워 할 가능성이 큽니다. 엘레나 님과 제가 도움을 준다면 조금 더 쉽게 네임드 몬스터를 공략할 수 있을 겁니다.”
“네.”
“일단 안기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몸을 부딪칠 수도 있으니 조심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 와중에도 얼굴을 붉히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지만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얘는 이 와중에….’
지금 당장 눈앞에 있는 문제부터 해결해야 했으니까.
외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방금 말했던 대로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가능성이 높다.
준신화 등급의 네임드 몬스터.
아무리 김현아와 정하얀을 중심으로 한 파란 길드라고 한들 어느 정도의 희생은 감안하고 전투에 임할 것이다.
아마 체력적인 페널티 역시 떠안고 있음이 분명할 터.
3일이나 일정을 단축시켰을 테니 체력이 약한 후위의 경우는 한계를 맞았으리라.
조금 머리가 복잡하기는 했지만 손은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기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신성력을 옮겨내고 담아낸다.
‘제기랄.’
디아루기아의 촉매를 생성해 몸을 고정시키는 와중에 실험까지 하게 되니 돌아버릴 노릇.
하지만 점차 결과가 가까워진다.
엘레나 역시 만약을 대비해 충격을 막아줄 수 있는 장막을 만들고 초조한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본다.
기도라도 드리는 것 같은 얼굴.
비정한 쓰레기 엘룬을 향한 기도였겠지만 효과가 있다는 건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준비한 촉매를 연성한 이후 신성력을 쏟아내자 눈을 뜰 수도 없을 정도의 빛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나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