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5
회귀자 사용설명서 355화
쉬운 엘프, 쉬운 엘레나(2)
‘이거 너무 편한 거 아닌가.’
계획대로긴 하지만 너무도 안락하여 죄책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스리슬쩍 밖을 바라보니 여전히 고군분투하는 길드원과 엘프들이 시야에 비쳤다.
갑작스레 나타난 몬스터로 인해 난항을 겪고 있는 것이다.
‘이건 까다로울 만하네.’
확실히 까다로울 만하다.
김현성의 말처럼 뒤틀린 연못의 주력 몬스터는 대부분 악마다.
그래봤자 벨리알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저급 악마들이었지만 이 던전은 희귀 등급이나 일반 등급이 아니다.
엄연히 전설 등급 판정을 받은 던전이었으니 최소 전설 등급의 악마, 혹은 몬스터가 등장한다고 생각하는 게 맞다.
애초에 신화 등급의 존재와는 비교 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수.
지금까지의 경험상 신화 등급이라면 적어도 전설 등급보다 서너 계단은 높다고 생각하는 게 옳다.
그런 의미에서 이쪽이 가지고 있는 준신화 등급 직업, 빛의 연금술사 역시 활용할 방법이 무궁무진했지만 최근 침대에만 누워 있느라 연구다운 연구를 못 한 것이 문제.
조금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시스템의 벽을 두드릴 만한 물약을 만들게 될지도 모른다.
‘그냥 희망사항이지만….’
확실히 몸이 편하니 생각이 한쪽으로 샌다.
입술을 꽉 깨물고 전투에 임하고 있는 원정대원들은 아마 이런 여유조차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최소 영웅 등급 이상의 악마와 드잡이하는 이들의 표정이 꽤 심각해 보였기 때문이다.
박덕구와 유아영의 얼굴에는 초조함이 감돌고 있었고 정하얀이나 다른 이들의 표정을 말할 것도 없다.
안 그래도 어려운 던전을 엘프들과 함께 최대한 빨리 돌파하려하다 보니 저런 모습을 보이는 게 되는 것이다.
‘여유도 사라진 것 같고….’
물론 원인은 나에게 있다.
안 그래도 영혼의 오염으로 생사를 오가는 빛기영이 괴로워하고 있으니 공략을 빠르게 완료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생겨버린 것.
혹시나 사고가 생기면 어떡하나, 걱정했지만 악마의 머리통을 쪼개버리는 김현아의 신위를 확인하자 안심해도 될 것 같다.
인력거에 탄 채 편한 여행을 시작한 지 약 세 시간이 흐르고, 김현아호는 여전히 순항중이다.
계속해서 힐끔힐끔 바깥을 바라보자 이쪽과 같은 공간에 있는 엘레나가 천천히 입을 열어왔다.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명예추기경님. 아무 일 없을 겁니다.”
‘그것 때문에 그런 건 아니지만….’
그렇게 생각해도 나쁠 건 없다.
“어떻게든 도움을 드리고 싶습니다만… 혼자만 누워 있으니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아니요. 아까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바깥에 나가시는 건 최대한 지양해야 합니다. 이 뒤틀린 연못이라는 장소와 악마들이 뿜어내는 오염된 마력이 이기영 님의 영혼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지금 경솔하게 움직이는 것은 오히려 상황을 더욱더 악화시킬 게 분명합니다. 파란은 강합니다. 저희 에베리아의 엘룬나이트들 역시 마찬가지고요.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
“저도 믿지 못해 이러는 것은 아닙니다만….”
“믿으셔야 합니다. 동료 분들께서도 이기영 명예추기경님의 마음을 십분 이해하고 있을 테니까요.”
‘그거야 그렇겠지.’
“별문제 없이 던전 끝에 닿을 수 있을 겁니다. 바깥에 있는 분들 생각보단 명예추기경님 자신을 먼저 생각해 주세요. 그래야 동료 분들 또한 안심하고 싸울 수 있을 겁니다.”
“네. 그렇게 생각해야겠죠.”
침통한 표정을 유지한 것은 당연지사.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엘레나의 표정이 시야에 비쳤다.
[성향-호기심 많은 옹호자]
성형은 호기심 많은 옹호자.
[엘레나 에레리아의 고유 기벽을 확인합니다.]
[에메랄드 색 망상하는 꽃]
기벽은 에메랄드 색 망상하는 꽃.
그녀의 성장 배경을 떠올려 보면 납득이 된다.
에베리아 왕국에서만 처박혀 지내던 엘프인데다가 기본적으로 인간이나 타국에 관심이 많은 것을 보면 왠지 모르게 비슷한 기벽을 가지고 있을 것 같았다.
마음에 들지 않냐고 물어본다면 당연히 마음에 든다고 대답하리라.
성향이나 기벽 자체는 괜찮다.
호기심이 많은 것도 마음에 들고 고유 기벽과의 궁합도 좋다. 무엇보다 현실을 모르는 꿈 많은 소녀 같은 성격이라는 게 가장 좋다.
세상살이에 찌든 사람을 상대하는 것보다는 이런 쪽이 더 낫다는 거다.
‘얘를 어떻게든 해야 된다는 건데….’
일단 가장 중요한 과제는 완료한 상황.
좁은 공간이 불편하기야 했지만 그래도 둘만 있을 수 있다는 건 커다란 성과였다.
심지어 마법으로 외부와 차단되어 있으니 대화를 나누기에는 제법 괜찮은 타이밍.
물론 그녀가 나에게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끼고 있다는 문제는 남아 있었지만 사이가 진전되거나 그녀의 사고방식이 바뀔수록 이쪽을 받아들이기 편해질 것이다.
‘어떤 방향에서 흔들어야 할지 감이 안 오는 게 문제지만.’
일단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 조금 더 가까워져야 한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첫 번째도 대화, 두 번째도 대화, 세 번째도 대화다.
최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어야 한다는 거다.
그녀에 대해서 더 알아야 하고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도 파악해야 한다.
서로 교감을 나누는 데 필요한 첫 계단은 서로에 대해 이해하는 거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자 곧바로 대답이 들려왔다.
“힘들지는 않으십니까?”
“괜찮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아닙니다, 명예 추기경님. 아무리 오염된 영혼이라고 한들, 더럽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제 눈에는 그 안에 들어 있는 고결함이 더 들어옵니다.”
‘그래. 그렇게 말해주니까 고맙다, 야.’
“…….”
“정말입니다, 명예 추기경님.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여신의 거울로 명예추기경님과 빛의 영웅 분들을 지켜본 적이 있습니다. 정말 대단한 광경이었습니다. 네. 아직도 그 모습을 보면 소름이 돋을 정도로 생생합니다. 네 명의 영웅이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거대한 악마에게 마주섰던 모습은 몇 백 년이 지난 이후에도 잊지 못할 것입니다.”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엘레나님. 다른 이들이었어도 모두 똑같이 행동했을 겁니다.”
“아니요. 실제로 그곳에 있는 제 모습을 떠올려 봤지만 수백 번 생각해도… 주저앉는 것 이외에는 다른 행동을 할 수 없었습니다. 빛의 영웅 분들께서는 제게 용기를 주신 겁니다.”
“용기 말입니까?”
“네.”
“그리 긴 시간은 아닙니다만 저는 200년 평생을 에베리아 왕국에 틀어박혀 살았습니다. 모든 엘프가 그러하듯 말입니다. 루드비히와 엘리오스 오라버님은 왕국 밖은 항상 위험하다고 말씀하셨고 실제로 저는 다른 인간 분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많이 접하며 자라왔습니다. 바깥은 무섭고 위험한 곳이라고 매번 이야기를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계속 왕국에만 머물러 계셨군요.”
“네. 제게 왕국의 밖은 그저 무섭고 두려운 곳일 뿐이었으니까요.”
“그렇게 보이지는 않았습니다만….”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용기를 주신 건 빛의 영웅 분들이라고요. 아마 여신의 거울을 보지 못했었다면 저는 아직도 에베리아 왕국을 벗어나지 못했을 겁니다. 그리고 제 사명이 뭔지도 모르고 있었을 겁니다. 혹시 하이엘프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으십니까?”
“네. 있습니다. 아주 오래된 시간 동안 태어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또 엘레나 님께서 하이엘프라는 것도 말입니다.”
“사실 하이엘프라고 해서 뭔가 특별한 것은 아닙니다. 세계수의 축복과 엘룬 님께 축복을 받았다는 것 이외에는 다른 이들과 다른 점이 없으니까요. 물론 역사적으로는….”
“네?”
“역사적으로 항상 선대 수호자 분들은 커다란 역할을 맡아오셨습니다. 아주 먼 옛날, 인간의 나라가 갈라지지 않았을 때부터, 인간과 이 종족들이 하나가 되어 싸워왔던 시절부터 선대의 수호자분들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 직접적인 위험과 마주하셨습니다. 동화책이나 역사책에 나오는 엘프 동료라는 건 전부 선대의 수호자님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렇군요.”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저에게도 무언가 주어진 역할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이기영 님께서 직접 찾아주셨습니다.”
“저번에 말씀하셨던 사명이라는 게….”
“네. 저는 계시를 받았습니다. 이기영 님의 오염된 영혼을 치유하고 빛의 영웅 분들과 함께 하라는 엘룬 님의 계시를 말입니다.”
당최 뭔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내게는 반가운 소식이다.
시작부터 이쪽에 호의적인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건 어떻게 봐도 사실인 것 같았으니까.
‘저렇게 착각해 주면 더 좋고.’
정말로 계시를 받았다고 생각한다면 어쩌면 써먹을 수 있는 구석이 있을지도 모른다.
‘아암. 써먹을 수 있고말고.’
본인이 알아서 북치고 장구 쳐주는 데 이걸 요리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잠깐 고민하기는 했지만 결정을 내리는 것은 순식간.
시간을 끌 이유가 없다.
곧바로 똥꼬쇼를 펼쳐야 할 타이밍.
표정을 찡그리자 황급하게 이쪽으로 다가와 상태를 살피는 모습이 보였다.
얼굴 가득 다급해 보인다.
시동을 걸자 황급하게 신성력을 이쪽으로 보내오는 게 느껴졌지만 당연히 효과는 없다.
이번에는 조금 다른 방식의 치료가 필요할 것 같았기 때문.
최대한 호흡을 멈추며 눈물을 쏟는 것은 순식간.
빛기영 연기 인생 26년, 악어의 눈물을 흘리는 것 정도는 식은 죽 먹기보다 쉽다.
“괜찮으십니까? 명예추기경님, 괜찮으십니까?”
“커… 헉….”
“명예추기경님!”
팔을 부들부들 떠는 것도 잊지 않는다. 아니, 사실 이게 가장 중요한 작업.
이제 신성력으로 나를 치료할 수 있는 시기는 지났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지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이쪽에 신성력을 쏟아내지만 제대로 치료가 될 리 만무.
계속해서 발광하듯 온몸을 떨자 엘레나의 얼굴에 금방 당혹스러움이 감돈다.
“아, 안 돼.”
눈알을 요리조리 굴리며 그녀를 바라보자 바깥에 도움이라도 청할 모양인지 좁은 가마 안의 창문을 바라보는 것이 눈에 띈다.
하지만 한참 전투가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 그녀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리가 만무.
그 와중에 내가 준비한 이벤트는 절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온몸을 비틀거리며 팔을 공중으로 내뻗는다. 뭔가를 쥐어 잡는 것처럼 나를 구원해 달라는 듯 애절한 눈빛을 선보인다.
“엘룬이시여. 엘룬이시여… 제발….”
“커… 헉… 하….”
“엘룬이시여.”
이쪽의 고통이 느껴진 모양인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가관.
뭐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허공으로 치솟은 내 팔을 그녀가 꽉 잡은 오는 것이 느껴졌다.
이쪽의 상태가 안정된 것은 바로 그때.
“어?”
눈물로 가득 찬 얼굴에 드리운 것은 안도의 한숨과 의문.
방금 전까지 온몸이 부서져 죽어버릴 것 같았던 내가 갑작스레 안정되는 기적을 체험했으니 저런 표정을 짓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아….”
‘그래….’
“설마….”
‘그 설마가 맞아.’
영혼의 침식은 2페이지에 돌입했다.
더 이상 필요한 것은 신성력이 아니다.
오직 엘룬에게 선택받은 하이 엘프 만이 빛기영을 죽음의 위기에서 건져 올릴 수 있다.
[영웅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발동 합니다.]
[그만해라! 이 저주받을 악마야!(0/1)]
[알 수 없는 이유로 영웅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취소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