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7
회귀자 사용설명서 347화
엘프들의 도시 (2)
엘프에 대한 정보는 극히 제한되어 있다. 폐쇄적인 정책을 유지하고 있는 이종족들 중에서도 가장 베일에 쌓여 있는 이들이었고 심지어 인간들과의 관계도 좋다고 말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캐슬락을 한 번 뒤집어 놓은 이후에는 교국에서 엘프 노예를 찾기가 힘들어졌지만, 사실 지금도 대륙 어딘가 에서는 암암리에 엘프들이 거래되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엘프들은 더욱더 자신들에 대해서 숨기는 것을 선택했고 그 결과 엘프의 숲은 정체를 그들 말고는 알 수 없는 미지의 땅이 되어버렸다. 라이오스를 처음 봤을 때도 상당히 놀란 것이 사실. 그렇지만 에베리아 왕국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압도적인 광경을 보여주고 있었다.
‘진짜…….’
그야말로 경외심이 들 정도의 자연 광경이다. 울창하게 우거진 녹색 숲과 형형색색으로 아름다움을 밝히고 있는 꽃, 사이즈부터 다른 커다란 나무는 그 끝을 올려다보기가 힘들 정도였고 폐 속으로 들어오는 공기 역시 다르다.
내가 이런 표현을 쓰는 것도 어처구니없지만 마치 온몸이 정화되는 기분. 물론 실제로 정화가 되거나 하지는 않았다.
가장 압권이었던 것은 도시 중앙에 자리잡혀있는 커다란 나무다. 도무지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나무는 주변광경과 묘하게 잘 어우러져 완벽한 그림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세계수?’
소문으로만 들어왔던 그 세계수가 맞다. 희미한 빛을 뿜고 있는 나무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도 없었으니 틀림없을 것이다. 그 와중에 엘레나는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기분이 좋은 모양.
계속해서 쓰레기통에 뒹굴다 공기 좋은 곳으로 왔으니 기분이 좋을 만도 했다. 정신없이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와 중에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왠지 모르게 익숙해 보이는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닮았네.’
엘레나와 같은 에메랄드색 머리카락에 눈동자를 가지고 있는 남자. 누가 봐도 그녀와의 연관성을 유추해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일행의 리더인 김현성과 인사를 나눈 뒤에 이쪽으로 향한 모양. 나이는 300살. 아버지라고 하기에는 나이차이가 얼마 나지 않았으니 아마 남매라고 생각해도 될 것 같았다. 특이사항으로는 가지고 있는 무력이 상당했다는 것. 교국 8좌나 오호대장군 정도의 수준에 이른 실력자. 녀석 말고도 강자가 몇몇 더 있겠지만 일단 간판으로 쓸 수 있는 실력자를 직접 볼 수 있다는 건 상당히 기뻤다.
“에베리아 왕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기영 님.”
“당신은……?”
“엘리오스 에베리아라고 합니다. 편하게 엘리오스라 불러주시면 됩니다.”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엘리오스 님.”
“아닙니다. 굳이 예를 표현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야말로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그보다 몸이 많이 안 좋으시다 들었습니다만…….”
“부끄럽지만… 그렇습니다.”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할지… 유감입니다.”
“걱정하실 정도는 아닙니다.”
“저 역시 여신의 거울을 통해 이기영 님께서 싸우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저희 엘프들을 대표해 대신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서로 인사를 나누는 게 조금 딱딱하다. 그럴 수밖에 없었지만 이쪽을 환영하는 이들도 있는 반면 경계를 하고 있다는 느낌도 들기 시작했다.
“일단 자리를 옮기시죠. 머무실 곳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네.”
무장한 이들이 슬쩍 이곳을 감싸고 있는 것이 보인다. 표면상으로는 이쪽을 보호하기 위해서겠지만 이쪽으로부터 다른 엘프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생각도 든다.
재미있었던 것은 다른 엘프들이 이쪽을 마치 동물원 원숭이 보듯 구경하고 있었다는 것. 옹기종기 모여 있는 꼬마 엘프들도 그랬지만 신기한 모양의 건물에서 이쪽을 바라보는 이들도 눈에 띈다. 수군거리고 있는 이들도 있었고 환호성을 내지르고 있는 이들도 있다. 대충 반응을 보자면…….
‘반 정도는 환영받고 있다는 건가.’
다른 말로 하면 나머지 반에게는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 된다. 배척한다기보다는 경계한다는 느낌이 더 강했지만 그거나 이거나 뜻은 같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는 와중에 다시 한 번 엘리오스가 입을 여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인간들이 이곳으로 들어온 것은 556년 전 이후로 처음입니다.”
“…….”
“길다고 할 수 있는 시간은 아니지만 아이들에게는 충분히 신기하게 비춰질 겁니다. 너무 기분나빠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간혹 적대감을 표출하는 이들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해해 주신다니 다행입니다. 사실 여러분들이 이곳을 찾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조금 걱정했습니다만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도 드는군요. 모두가 어느 정도 인간들에 대한 혐오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빛의 영웅들에 대한 혐오는 아닙니다만 우리 종족들은 아직까지도 여러 아픔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왕궁 근처를 벗어나면 아직도 이종족 사냥꾼들을 볼 수 있고 어딘가 에서는 이종족 노예가 거래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더욱더 그렇지요.”
“…….”
“물론 교국이 노예거래 금지법을 채택하고 있는 나라들 중 하나라는 건 알고 있지만 대다수의 엘프들은 그런 구분을 두지 않을 겁니다. 저에게도 가슴 아픈 일입니다만 몇몇의 엘프에게 인간들이란… 그저 탐욕적이고 위험한 자들일 뿐입니다.”
“이분들은 다른 분들과는 다릅니다. 오라버님. 여신의 거울에서 보였던 모습은…….”
“그건 나도 알고 있다. 엘레나. 나는 지금 우리의 손님들을 탓하려고 하는 게 아니야. 그저 사실 그대로를 설명드리는 것뿐이다.”
‘굳이 그렇지만은 않은데…….’
물론 이 엘리오스라는 엘프가 우리들에게 적대감을 표시하는 건 아니었지만 방금의 대화는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을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조용히 있어달라고 이야기해 준 셈. 확실히 삼국 동맹이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저쪽과 이쪽이 느끼는 온도차는 다른 모양인 것 같았다.
‘재미있게 됐네.’
말 그대로였다.
‘뭔가 구린 게 있기는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단순한 망상이지만 해볼 법한 추측이기는 하다. 문서에 도장을 찍기는 했지만 고작 인간 몇 명이 들어와 있는 걸로 크게 동요하고 있는 이들을 보면 이곳의 분위기가 어떤지 대충은 눈에 보인다. 단순히 커다란 위협에 함께하겠다고 손을 내민 걸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이들 역시 외부적이나 내부적으로 문제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이들 역시 필요에 의해 우리 쪽에 손을 내밀었을 수도 있다는 거다.
‘뭘까.’
물론 지금 당장 어떤 정황이 보이지는 않는다. 당장 보기에는 다툼이 없는 평화로운 장소처럼 보였으니까. 당연하지만 무력을 갖추고 있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아니다. 병사들의 수준은 전체적으로 높은 것처럼 보였고 그중에서도 쓸 만한 궁수들이 많이 보인다. 인간 쪽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정령사들의 비율이 마법사보다 높다.
까놓고 말해 강국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 게다가 도시 근처에 펼쳐져 있는 결계 역시 수준급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이들이 어째서 삼국동맹에 들어오기를 청했는지 의문스러울 정도였다.
‘이유가 있기는 있겠네.’
여러 가지를 추측하기에는 주변 배경지식이 부족한 상황, 한 번 더 생각으로 빠져보려고 했을 때 다시 한 번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숙소에 도착한 것이다.
“저희 왕국에 머무르실 때까지는 이곳에서 지내시면 됩니다. 오늘은 밀린 피로를 푸시고 국왕폐하와의 만남은 천천히 일정을 잡아보겠습니다. 아. 남는 시간에 도시를 둘러보는 것은 말리지 않겠습니다만 제한구역에는 접근하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네.”
“제가 이분들께 직접 도시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오라버님.”
“아니, 너는 잠깐 아버님을 뵈어야겠다. 엘레나. 손님들에 대한 안내는 루드비히에게 맡기는 게 좋을 것 같구나.”
“하지만…….”
“아버님이 기다리고 계신다. 그럼 여러분 편안한 시간을…….”
“잠깐. 엘리오스 님.”
갑작스레 김현성이 훅하고 치고 들어간 것은 바로 그때였다.
‘뭐야. 현성아 또 왜 그래…….’
“가능하다면 지금 따로 국왕폐하를 만났으면 합니다.”
“네?”
“실례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만 한시가 급한 일이라. 잠깐 시간을…….”
“지금은 시간이 늦었…….”
“부탁드립니다.”
‘…너 왜 그래, 인마.’
허락할 때까지 계속해서 부탁하겠다는 태도는 확실히 갑작스럽다. 도대체 뭐가 뭔지는 알 수 없지만 제법 진지한 모습에 엘리오스 역시 당황한 듯한 얼굴, 엘레나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 모르긴 몰라도 이쪽과 관계되어 있는 일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무례한 행동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수도 있지만 분위기가 조금 달라졌다는 것에는 녀석도 이견이 없을 것이다. 슬쩍 다시 한 번 말을 있는 엘리오스의 얼굴이 눈에 보였다. 아까와는 명백하게 다르다. 뭔가 경계하고 있는 듯한 얼굴.
“이유를 먼저 들어봐도 되겠습니까?”
“국왕폐하께서 직접 들어야 납득하실 수 있을 겁니다. 엘리오스 님.”
“…….”
“결코 에베리아에 해가 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
“…….”
긴 침묵이 흐른다. 김현성은 조용히 엘리오스를 바라보고 있었고 엘리오스 역시 마찬가지다. 장신의 엘프가 커다랗게 한숨을 내쉰 것은 바로 그때였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일단 청을 올려드리겠습니다. 김현성 님은 저를 따라 오시지요. 엘레나. 너는 잠깐 방으로 돌아가서…….”
“아니요. 저는 이분들과 함께 있겠습니다.”
“엘레나.”
“상황은 대충 전해 들으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오라버님. 제 뜻은 변함이 없습니다.”
“후우…….”
저 새끼 머리 아프겠는데…….
자연스럽게 동정이 간다. 저 심정이 어떤 심정인지 아주 잘 알고 있으니까. 결국에는 녀석 역시 동생의 고집을 당해낼 수는 없었던 모양.
엘리오스가 이쪽에게 인사를 한 뒤에 밖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그런 녀석을 뒤따라 가는 김현성의 뒷모습이 눈에 보였다. 살짝 엿본 녀석의 표정은 가관. 무척 중요한 면접은 앞둔 취준생 같은 얼굴에는 왠지 모를 비장함까지 감돌고 있었다.
‘도대체 뭐야?’
아무런 정보도 없으니 불안한 것이 사실. 뭔가가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었지만 나도 녀석이 이렇게 빨리 움직일 거라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다. 심지어 국왕과의 독대가 필요하단다. 혹시나 덜컥 왕국의 보물이라도 넘기라고 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아무리 상황이 급하다고는 해도 그 정도로까지 무리수를 던지지는 않을 것이다.
‘불안한데… 혼자 보내기 불안한데…….’
함께 따라 나서고 싶지만 이미 이쪽의 몸은 다른 이들에게 꽉 붙잡혀 있다. 기왕이면 내 몸을 치유할 수 있는 수단이 발견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 일이 너무 커지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일이 마무리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았다.
그 와중에 엘레나는 이쪽의 상태를 살피며 다른 길드원들을 안내하고 있었고 다른 길드원들 역시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지만 이쪽의 귀에 잘 들어오지는 않았다. 안 그래도 불편한 상황이 더 불편해질까 걱정됐기 때문이다.
물론 언제나 그렇듯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김현성이 밖으로 나간 뒤 한 시간이나 지났을까. 어디에선가 분주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것. 무장한 이들이 이쪽으로 향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자연스럽게 옆에 자리해 있는 엘레나를 바라보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문 밖을 바라보는 것이 보였다.
“무슨 일입니까?”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엘레나 님.”
“지금 이게 무슨 짓입니까!”
“무례를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당장 그 무기를 손에서 내려놓으세요!”
밖에서 들려오는 소란스러운 소리. 무슨 상황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알 수 있었다.
‘김현성 이 새끼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한 거야.’
우리 사랑스러운 회귀자가 무리수를 던졌다는 사실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