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2
회귀자 사용설명서 342화
양치기 소년(1)
‘열연이었다! 슈바!’
지금까지 많은 거짓말을 해왔지만 이번에는 나조차도 놀랄 만큼의 메소드 연기였다.
얼마나 집중했는지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을 정도.
연기에 혼을 실었다는 표현이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장면이었다.
심지어 중반부터는 실제로 고통스러웠으니 다른 표현이 필요 없으리라.
정말로 아픈 사람이 된 것처럼 눈알을 돌리자 촉촉한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엘레나의 얼굴이 비쳤다.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
조금 오버한 것 같기는 했지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적절한 판단이었다.
단순한 해프닝으로 넘기고 조용히 넘어가도 상관없을 것 같기는 했지만, 민감한 시기인 만큼 이런 작은 해프닝도 용납할 수 없다.
버리고 간 담뱃불이 종국에는 커다란 불로 번질 수도 있는 법.
방금의 행동은 작은 불씨를 소화기로 냅다 뿌려버린 응급처치다.
‘아주 좋아. 아주 좋지! 이게 바로 빛기영이지. 아암. 그렇고말고.’
빛기영은 영원히 빛기영으로 남아야 하고 이 방패막은 끊임없이 유지되어야 한다.
순간적인 기지와 물오른 연기력으로 위기를 벗어난 나 스스로에게 찬사를 보내고 싶을 정도.
물론 기쁜 와중에도 왠지 모를 씁쓸함이 감도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벨리알의 ‘역겨운 영혼을 가진 인간’이란 표현한 것이 완전히 들어맞은 셈.
아닐 거라 홀로 씁쓸히 위로하기는 했지만 정황상 녀석의 말을 완전 부정할 수는 없었다.
‘토할 정도는 아니잖아.’
아주 조금 상처받았다.
‘구역질은 너무 심했어.’
그렇지만 곧바로 고개가 저어진다.
영혼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것 좀 깨끗하다고 해서 초월적인 존재가 상을 주는 것도 아니다.
아무튼 다행이라 생각한 부분은 엘레나가 이쪽을 크게 의심하는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았다는 것.
오히려 완전히 이쪽을 믿는 것처럼 느껴진다.
얼굴에 들어선 표정은 누가 봐도 나를 걱정하는 듯하다.
물론 내 옆에 함께 있는 게 괴로워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함박웃음을 보내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을 오래 감상할 수는 없었다.
곧바로 달려 들어온 정하얀의 몸통박치기를 감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흐어어어어엉. 오빠. 오빠아.”
제대로 놀랐는지 얼굴이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다.
박덕구 역시 상황은 다르지 않았고 김현성은 숨을 크게 내쉬며 가슴을 부여잡았다.
다시 한번 개소리를 일발장전 한 것은 당연지사.
별건 아니었다.
방금 전까지는 단순히 모르는 척하는 것뿐이었으니 슬슬 진실을 알아보고 싶다는 모양새를 취하기만 하면 된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혀, 형님 정말로 괜찮은 거요?”
“아… 그래. 괜찮다, 덕구야.”
“정말로 괜찮은 거요? 정말로 아프지 않은 거요?”
“괜찮다. 정말 괜찮아. 걱정시켜서 미안하다. 숨긴 것도… 미안하고.”
“끄으윽….”
“…….”
다시 한번 눈물을 일발장전하려는 박덕구 덕분에 확실히 부담스러워진다.
목이 메는지 말을 잇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다른 이들의 얼굴을 보면 이 짓도 두 번 할 건 못된다.
그새 사람이 많이들 모였는지 오스칼의 얼굴에도 걱정이 가득했다.
“정신이 좀 드십니까? 명예추기경님.”
“네. 고통이 좀 가셨습니다. 못난 꼴을 보여드렸군요. 제가 바보 같았습니다. 하핫.”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보다 오스칼 님, 방금은….”
“에베리아 왕국의 엘레나 공주님께서 도움을 주셨습니다.”
“엘레나 님이… 도움이요?”
의아하다는 표정을 보내는 것은 당연하다.
악마에게 영혼을 고문당하고 있는 빛기영은 어째서 이 고통이 가신 것인지에 대해 눈치채지 못했으니까.
오스칼은 천천히 일어나 엘레나에게 고개를 숙였고 나는 더욱더 당황스럽다는 표정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상황이 너무 긴박해 인사도 제대로 드리지 못했군요. 오스칼이라고 합니다, 엘레나 님. 교국은 오늘 주신 도움을 절대로 잊지 못할 겁니다.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엘레나 에베리아입니다. 고개 숙일 필요 없습니다, 오스칼 님.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보상을 바라고 한 일이 아닙니다. 영웅을 돕는 일이고 저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명예추기경님, 위험한 상태에 있는 추기경님을 안정시켜 주신 분이 바로 엘레나 님이십니다.”
“정말입니까?”
반문을 하자 이쪽을 바라보는 엘레나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네.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저도 모르지만 이기영 님의 상태를 안정시킨 것은 제가 맞습니다.”
“어떻게 이걸…. 혹시 설명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물론입니다. 명예추기경님, 아마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터무니없이 느껴지실 수도 있으시겠지만 오해하지 마시고 제대로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곧바로 말을 이어오는 엘레나가 눈에 보였다.
이쪽의 예상과는 완전히 같지 않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들어맞는 부분이 있었다.
대충 정리해 보자면 이렇다.
그 날 이후 나에게는 후유증이 남았고 그 후유증이 남은 곳은 사실 신체가 아니라는 것.
영혼이니 뭐니 지루한 소리를 하기는 했지만 교국의 사제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좋네.’
어떻게 생각해도 신체의 이상을 찾을 수가 없었으니 다른 쪽으로 화살을 돌리는 게 당연하다.
영혼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이들 입장에서는 어처구니없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이곳에 있는 이들은 실제로 내가 회복되는 것을 확인했다.
엘레나의 발언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거다.
하이엘프들의 전승을 알고 있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으니까.
아마 지금쯤 다들 머릿속으로 전승에 대해 떠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계속해서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점점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이 많아지기 시작.
나 역시 그 무리에 포함되어 있었다는 건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으리라.
“믿기 힘든 이야기입니다만… 이제야 조금 설명이 되는군요.”
“네. 현재 명예추기경님의 영혼은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저 역시 이렇게 순수하게 역한 영혼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럼 치료가 끝난 지금은 어떻습니까?”
“저는 치료를 해드린 것이 아닙니다, 명예추기경님.”
“네?”
“단순히 명예추기경님의 고통을 덜어드린 것뿐입니다. 실망시켜 드려 죄송합니다만 실질적인 치료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침식은 진행되는 중일 테고… 제 미약한 힘으로는 명예추기경님을 둘러싸고 있는 역한 기운을 단기간에 몰아낼 수 없었습니다. 응급처치. 네. 단순히 응급처치를 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이전과 비교해 어느 것 하나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김현성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관심이 없을 리가 없다.
녀석에게 가장 중요한 일일 테니까.
“그럼 앞으로도 계속해서 발작 증세를 보일 수도 있다는 겁니까?”
“실망시켜 드리기는 싫지만 그럴 가능성이 클 겁니다. 물론 적절한 치료와 관리를 받는다면 상태가 조금은 호전될 수 있겠지만, 그마저도 명확하지 않고…. 뭔가 다른 방도를 찾는 것이 좋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기는 싫습니다만 어쩌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 그럼 형님은 어떻게 되는 거요? 계속 이렇게 살아야 한다, 이 말이요? 아니, 형님이 죽을 수도 있단 말이요?”
“…….”
“…….”
“그건 아닐 거다, 덕구야. 조금씩 상태가 나아지고 있는 것 같으니까….”
“아니, 그걸 어떻게 형님이 판단할 수 있다는 거요? 어느 날 갑자기 또 이런 일이 생길 줄 누가 알겠소. 그… 시, 실례지만 엘레나 님이 계속 형님을 아플 때마다 지켜봐 줄 수는 없는 거요? 내, 내가 무엇이든지 하겠소. 부, 부디….”
“그건 불가합니다.”
박덕구의 쌩뚱 맞은 말을 가로막은 것은 에베리아의 엘프 공주가 아닌 함께 등판한 수행원.
당연한 반응이다.
아무리 이쪽의 생명이 달려 있다고 한들, 엘레나는 몇 천 년 만에 태어난 고귀한 하이엘프였고 심지어 일국의 공주이기까지 하다.
웬 개똥 같은 놈의 영혼의 치유사 노릇을 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수.
어느 정도는 타협의 여지가 있겠지만 아마 그마저도 제대로 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나도 이게 편하지.’
물론 나 역시 이쪽이 편하다.
계속해서 저 여자가 달라붙어 있는 다면 여러 가지 애로사항이 꽃 필 가능성이 크니까.
정하얀이란 문제도 있고 더 이상 꼬리를 밟히기도 싫다.
어떤 이유든 엘프 왕국에서 엘레나를 두고볼 리가 없다.
예상했던 대로 녀석이 다시금 진지한 목소리를 지껄이기 시작했다.
“엘레나 공주님께서는 왕국을 지키셔야 하는 몸입니다.”
“그, 그렇지만.”
“맞다, 덕구야. 무리한 부탁은 드리는 게 아니야. 서로의 입장 차이라는 게 있는 거니까. 방금 덕구가 드린 말은 잊어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불편하게 해서 죄송합니다.”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명예추기경님.”
“네?”
뭔가 살짝 일이 꼬였다는 생각이 든 것은 엘레나의 얼굴에 들어선 책임감을 인지했을 때였다.
“왕국으로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네?”
“박덕구 님이 말씀하신 대로 계속해서 명예추기경님의 곁에 남아 상처를 돌보겠습니다. 이대로 빛의 영웅을 죽게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엘레나 님, 무슨 말씀을!”
“이미 결정을 내렸습니다, 루드비히. 어머니와 아버지께도 그대로 말씀드릴 겁니다. 저는 계속해서 이 분의 곁에 있을 겁니다.”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불가합니다.”
“어머님이나 다른 분이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만약 제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 제 지위라면 기꺼이 그 족쇄를 벗겠습니다. 제가 무슨 말씀을 드리는지 이해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엘레나 님, 경솔한 발언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어떤 말씀을 하고 있는 알고 계시는 겁니까?”
“루드비히, 제게 중요한 것은 직위가 아닙니다.”
“어째서….”
“계시를 받았습니다. 절대로 착각이 아닙니다. 정말로 엘룬 님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대륙의 위기에 저에게도 주어진 역할이 있었습니다. 제가 이곳에 온 것은 우연이 아니에요.”
“…….”
“…….”
서로를 한참을 바라보던 두 엘프의 모습에 장내가 점점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쟨 갑자기 뭔 계시타령이야.’
“제가 오늘 이 영웅 분들을 만나게 된 것은 필연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개소리냐고.’
“저에게도 역할이 있었던 겁니다.”
저 여자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지 도무지 알아먹을 수가 없다.
뭔가 오해를 해도 단단히 한 모양.
그게 이쪽에 득이 될지 실이 될지 모르는 상태기 때문에 더욱 당황스러웠다.
“저는 당신을 살리기 위해 이곳에 온 것입니다, 명예추기경님.”
‘미친….’
고개를 꾸벅 숙여오는 모습은 가관.
도대체 그 계시라는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저 여자가 나를 곤란하게 만들 거라는 것 하나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머리 아파지는데….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