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6
회귀자 사용설명서 336화
후유증(2)
조금 오랜만에 바깥으로 나와 봤다는 생각이 든다.
하도 누워 있었더니 걷는 게 익숙하게 느껴지지 않을 지경.
그렇지만 기분은 좋다.
라이오스 왕성 안에 있는 산책로를 돌아다닐 뿐이었지만 확실히 외국에 나와 있다는 느낌이다.
형형색색 화려한 색들의 꽃들이 즐비해 있는 교국과는 다르게 라이오스의 정원은 잘 정돈되지 않은 느낌의 녹색.
우거진 나무와 줄기 사이로 빛이 들어오는 것도 마음에 들고 전체적으로 분위기는 나쁘지 않다.
김현성은 슬그머니 이쪽을 부축하는 듯한 모양새를 취하고 있었는데 내가 어깨를 펴라고 해도 도무지 펴지지가 않는 모양.
응급처치를 한 덕분인지 표정이 좀 풀리기는 했지만 마음 한구석을 좀 먹은 죄책감은 사라지지 않은 것 같았다.
‘도대체 뭣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사실 조금은 예상이 된다.
그동안 김현성은 길드의 일보다는 개인의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실제로 길드에 체류하고 있는 시간 보다 체류하지 않는 시간이 더 많았으니 다른 표현이 필요할 리 만무.
녀석으로서는 1회 차의 잘못됐던 일을 바로 잡으려고 했던 것이었겠지만 미래가 많이 뒤바뀐 현재에 와서는 굉장히 아무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는 거다.
굳이 표현하자면 1회 차의 망령에 사로잡혀 정말로 중요한 일을 놓쳐버린 셈.
가면 쓰레기 진청이 공화국에서 새로운 시작을 하고 있었다는 걸 알지 못했던 것은 통한의 실수였다.
그런 상황에서 이쪽이 발발거리고 돌아다니다 커다란 후유증을 안게 됐으니 길드원들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책임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 경우에는 녀석이 붙어 있지 않아 다행이었지만 뭐, 저렇게 생각해 주는 걸 굳이 말리고 싶지는 않다.
당장 지금도 굉장히 지극 정성으로 나를 돌보고 있는 느낌. 절대로 넘어질 일은 없지만 혹시나 다리가 풀려 넘어질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럴 필요까진 없잖아.’
왠지는 모르겠지만 주변을 돌아다니는 이들의 시선이 느껴진다.
자꾸만 시녀들이 힐끔힐끔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괜스레 눈에 띄기 시작.
장소를 옮기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해 봤지만 아마 우리들의 목소리는 저들에게 닿지 않을 것이다.
“하실 말씀이라는 게….”
“조금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고민해 보는 것은 당연.
너무 티 나게 진청의 정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어쩌면 의구심을 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현재 김현성이 나를 의심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조심해도 나쁠 건 없다.
마침 녀석이 먼저 운을 띄우기 시작.
눈치가 없진 않은 모양이다.
이쪽이 무슨 말을 꺼내려 하는지 예상하고 있는 것 같았다.
“혹시 라이오스에서….”
“네. 맞습니다. 아무래도 정확한 경과에 대해서는 아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대충은 알고 있습니다, 기영 씨. 당장 부담을 주고 싶지 않고요. 이번 일은 제가 다 알아서….”
“아뇨. 아뇨. 괜찮습니다. 그렇게까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계속해서 누워만 있는 것도 조금 답답하고 이번 일은 저에게도 중요한 일이니까요. …네. 정말로 중요합니다. 아마 덕구는 모르는 이야기일 겁니다. 그리고… 당분간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기도 하고요.”
“무슨 의미이신지?”
‘지금 해도 되려나.’
김현성의 생각을 알 수가 없으니 여러모로 답답한 면이 많다.
일단 녀석이 진청을 가면남으로 확실히 의심하고 있는지조차 궁금하다.
정황상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확률이 높지만 혹시나 1회 차에서 진청이 가면남과 함께 있는 모습을 김현성이 확인했을 경우에는 스토리가 조금 꼬일 수도 있다.
‘만약….’
만약에 1회 차에서 진청과 김현성이 절친한 사이였다면?
혹은 진청 역시 가면 쓰레기와 적대적인 관계를 구축하고 있었다면?
진청 역시 가면남에게 살해당한 사람들 중 하나였다면?
위 예시처럼 내가 알지 못하는 1회 차의 미래에 진청이 가면남이 아니라는 확실한 정황을 가지고 있다면 김현성은 악마소환사, 가면 쓰레기 진청을 용의자 선상에서 제외하고 있을 수도 있다.
제3세력이 녀석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기 위한 공작이라는 걸 전제로 조사를 시작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거다.
만약 정말로 김현성이 이번 사건을 제3세력의 소행으로 간주하고 조사에 임하고 있다면 경솔한 발언은 오히려 의심을 살 수도 있다.
천천히, 하지만 조심스럽게 진청이 가면 쓰레기라는 의심의 싹을 틔어 내야 한다.
1회 차에 김현성이 확인했던 모든 정황이 거짓말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그 시작의 열쇠가 바로 정하얀.
조금 이른 감은 있지만 일단은 말을 내뱉는 게 정답에 가까우리라.
고민할 필요는 없다.
곧바로 설명을 시작하자 사정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김현성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하얀이와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말하고 싶은 건 아주 단순하다.
‘진청 새끼가 자꾸만 우리 하얀이한테 집적거렸다.’
물론 저렇게 이야기 할 수는 없다.
아무래도 형식이라는 게 있어야 하는 법이니까.
다만 여러 가지 MSG를 첨가하자 그럴듯한 결과물이 나올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정답을 줘서는 안 된다.
진청이 가면 쓰레기라는 사실은 김현성 스스로가 깨달아야 한다.
“하얀 씨 말씀이십니까?”
조금은 의아한 표정.
하지만 나름대로 진지한 내 표정을 읽었는지 김현성 역시 얼굴을 굳히고 있다.
“물론 제 착각이고 기우였다면 좋겠습니다만 아무래도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어서.”
“네.”
“사실 처음 공화국의 이방인들과 마주쳤을 때….”
하나하나 사건을 뒤집어 가며 입을 열려고 했을 때였다.
어디에선가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
“어! 형님! 형씨! 거기서 뭐하고 있는 거요!”
‘아… 제기랄. 박덕구!’
애써 고개를 반대 방향으로 돌리자 더욱더 큰 소리로 입을 열어온다.
“형님!! 나 여기 있다니까!”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는 모습은 가관.
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지면 좀 좋으련만 진지한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통에 난입한 녀석 때문에 분위기가 애매해졌다.
슬그머니 사라지라는 손짓을 하기는 했지만 그걸 이쪽으로 오라는 표현으로 받아들였는지 핸들이 고장 난 8톤 트럭처럼 이쪽을 향해 질주하고 있다.
“형님. 아니, 벌써 움직일 수 있는 거요? 몸에는 별 이상 없고? 아까 뭐 아프다고 하지 않았소? 현성이 형씨가 갑자기 왕성 쪽으로 막 뛰어 가는 거 보고 뭔 일인가 했는데… 정말 걱정했다니까? 이렇게 움직인 걸 보니까 그래도 괜찮은 거 같기도 한데. 거, 이제야 좀 마음이 놓이는구먼.”
크게 숨을 쉬는 모습에는 원망만 할 수도 없다.
정말로 걱정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쪽을 열심히 찾아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 김현성과 함께 있던 녀석에게도 내가 발작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닿았을 터.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고는 있었지만 벌써부터 눈시울이 붉어진 녀석을 보니 괜스레 미안해졌다.
하지만 그것과 이건 별개. 일단은 중요한 이야기가 있는 만큼 녀석을 뒤로 물릴 수밖에 없었다.
“뭔가 오해가 있었던 것 같은데. 몸은 정상이다, 덕구야. 뭐 달라진 점도 없고. 아무튼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일단 넌 하얀이한테….”
“아! 형님도 누님 걱정하고 있었던 거요? 거 걱정할 필요 없소. 일단은 내가 정연 씨 보고 누님 좀 챙기라 이야기해 놨으니까. 안심해도 된다니까? 아마 개미 새끼 한 마리도 하얀이 누님 병실에 침입하지 못할 거요.”
‘이 돼지가 지금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야….’
“형님이랑 형씨가 걱정할까 봐 나만 알고 있었던 건데. 거참…. 역시 형님은 못 당하겠다니까. 역시 형님이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덕구 씨.”
나도 녀석이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아까에 이어 김현성도 무척이나 궁금한 표정.
나뿐만이 아니라 박덕구마저 정하얀을 언급하고 있으니 정말로 정하얀에게 문제가 생겼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의아한 김현성의 표정과 내 일그러진 표정에 자기 자신이 실수했다는 걸 깨달아 주면 좋으련만 녀석은 커다란 목소리로 입을 열기 시작.
잠깐 머리를 감싸 쥐기는 했지만 녀석의 목소리에는 환호성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 진청 악마소환사 쓰레기놈이! 하얀이 누님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 거 아니요!”
‘덕구야! 슈바. 사랑한다!’
“물론 확실하지는 않다니까. 하지만 형님도 나랑 같은 생각을 하는 걸 보니 이제는 당당하게 밝힐 수 있을 것 같다니까!”
‘이 돼지 새끼….’
“확실하다니까!”
‘왜 이렇게 도움이 되는 거야….’
이 자식은 바보가 아닐지도 모른다.
항상 했던 생각이지만 오늘따라 더욱더 그런 생각이 내리 꽂히기 시작했다.
당장 꺼지라고 말하고 싶었던 10초 전과는 다르게 일단은 박덕구의 수다 타임에 합류해도 될 것 같은 기분이 든 것은 당연지사.
내가 조심스럽게 말하는 것보다는 녀석이 말하는 게 더욱더 효과가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훨씬 더 직접적일 테니까.
“그 더러운 악마소환사 쓰레기가 누님한테 막 응? 쪽지까지 건네면서 엄청 집적거렸다니까! 당시에는 누님이 워낙 매력 있고 착하다 보니까 벌레가 꼬이는 거겠지 하고 생각하기는 했는데…. 이거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수상한 거요. 그러다 오늘 제대로 된 결론을 내렸지. 아암 그렇고말고!”
‘그래 그거야, 자식아.’
“나는 마력 같은 건 잘 모르지만 왠지 모르게 수상한 마력이 담겨져 있는 것 같았다는 거 아니요! 사실 그때 하얀이 누님 상태가 조금 이상한 것 같기는 했는데, 형님도 굳이 말하고 싶어 하지 않은 것 같아서 언급 안 했지. 나는 무슨 봉사활동 하고 있다가 형님이 따라오라고 해서 따라 갔을 뿐이니까. 그 악마소환사가 그 자리에 떡하니 있는 줄 누가 알았겠소?”
“그렇군요.”
“이건 그냥 내 추측이요. 형씨, 어쩌면 그 악마소환사가 일부러 하얀이 누님을 끌어들였을 가능성도 생각해 봐야 된다니까! 그 날 형님이 있는데도 쪽지까지 주면서 껄덕거린 것도 이상하고! 무엇보다 악마의 봉인이 완전히 풀리지 않았다는 게 가장 수상했지. 아암 그렇고말고! 어쩌면… 그 썩을 놈들이 누님을 제물로 바치려고 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 거 아니요!”
‘그건 또 새로운 해석인데….’
이쯤 되면 작가를 해도 될 정도의 스토리텔링 능력이다.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이 나오기는 했지만 이 증거를 뒷받침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면 그건 이미 진실이 된다.
“마력에 대해서 제대로 모르는 나도 누님이 마력의 축복을 받았다는 건 알고 있는데, 그놈들이 그런 것 하나 몰랐을까? 아마 자기들의 힘으로는 악마를 완전히 소환하지 못했을 거요. 필연적으로 마력이 큰 누님을 찾을 수밖에 없었던 거고… 처음부터 모든 게 짜여진 함정이었던 거요.”
“가능성은 있을 수도 있겠군요.”
“자세히는 모르지만 어쩌면 지금도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을 수도 있지!”
자신의 추리가 어떠냐는 듯 이쪽을 바라보는 박덕구.
내가 쓴 시나리오와는 달랐지만 이건 또 이것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다.
가능성이 있을 수도 있다고 말한 김현성은 표정을 굳히고는 있지만 아직까지 녀석의 말을 믿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겨우 이걸로는 의심의 싹이 뿌리를 내리기는 힘든 모양.
저 허무맹랑한 추측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 바로 내 역할이다.
“기영 씨가 말하려고 했던 게….”
“네. 다르기는 하지만 비슷합니다. 물론 착각이라면 좋겠지만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늦었지만 저 역시 뭔가 이상한 징후들을 느끼고 있었으니까요. 박물관 원정 당시 막스가 하얀이에게 마력의 축복을 받은 인간이라고 말했던 적 있었는데, 기억하십니까?”
“네.”
“제가 봐도 정하얀의 몸은 순도 깊은 마력의 결정체입니다. 흑마법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만약 제물로 사용한다면 그녀보다 더 질 좋은 소재는 찾기 힘들 겁니다. 어쩌면 다른 목적이 있을 수도 있고요. 무엇보다 자꾸만 이상한 것들이 눈에 밟힙니다. 정확히 말하면 밟혔었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여기에서 한 번 뜸을 들여주는 것도 나쁘진 않으리라.
중요한 이야기를 꺼낼 차례였으니까.
“공화국이 라이오스를 빠져나가기 전에, 하얀이의 주위를 맴도는 몇몇 이들을 본적이 있습니다. 물론 착각일 수도 있습니다만….”
“…….”
여기에서 1회 차에 봐왔던 얼굴들이 힘 있게 등장해 줘야 한다.
내가 여단에 들어가는 것에 반대표를 던졌던 쓰레기들.
1회 차의 사소한 복수라고 하기에는 애매하지만 아무튼 짐을 떠넘길 수 있어서 다행이다.
나는 이들이 누군지 모른다. 하지만 김현성은 틀림없이 알고 있을 것이다.
“궁수로 보였던 남녀 쌍둥이, 한쪽 다리가 없는 청년, 큰 키의 빼빼 마른 남자.”
확실히 표정을 굳히는 모습.
이제야 윤곽이 잡히는 모양이다.
녀석은 중얼거렸고 녀석의 목소리에 박덕구의 얼굴도 구겨지기 시작했다.
“…여단.”
완벽한 정답.
소리를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