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2
회귀자 사용설명서 332화
검은색 세계의 우리 (5)
깜짝 놀란 것도 잠시였다.
순식간에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든 직후에는 초조하게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안 되는데… 따위의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기 시작, 그야 이런 생각이 드는 게 당연하리라. 이후의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보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으니까.
여단의 멤버들 역시 눈에 전부 담지 못했고 앞으로 이들의 행보에 대해서도 보지 못했다.
그중 가장 궁금했던 것은 이지혜가 도대체 뭣 때문에 저곳에 있는지에 대한 것. 1회 차에서도 그냥 뒈졌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설마 여단에서 활동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물론, 2회 차에 이지혜는 여단에 가입하지 않고 어차피 여단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굳이 알 필요가 없는 이야기이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금한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마치 드라마를 보다가 끊긴 것 같은 찝찝한 기분. 여단이 남몰래 활동하고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 보면 괜스레 더 찝찝해진다.
허무맹랑한 추측은 아니다. 정진호가 없으니 그 세력이 약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부분. 하지만 이쪽이 실제로 확인한 여단 멤버들은 대가리가 없다고 해서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무능력한 이들이라고 하기엔 가지고 있는 전투력과 개성이 뛰어난 이들이었다.
만약 기존의 추측대로 여단이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해도 그들 개개인은 남몰래 활동하고 있을 수도 있다.
정신을 차리기는 싫지만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천천히 감은 눈이 떠지기 시작. 혹시나 다른 것을 볼 수 있을지에 대해 기대해 보긴 했지만 아무래도 이번 건 여기서 끝인 모양이다. 검은색 세계와는 다른 익숙한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슈바….’
누워 있는 곳은 침대. 혹시나 이번에도 카스가노와 즐거운 시간을 카스가노 유노는 의자에 앉은 채 내 옆을 지키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원하는 건 얻으셨사옵니까?”
“반 정도는… 일단은 고맙다. 어째서 네가 그런 말을 했는지 알 것 같다. 네가 봤던 미래가 뭔지도 대충 알 수 있을 것 같고….”
“도움이 됐다니 정말, 정말로 다행입니다.”
“시간은 얼마나 지났지?”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는 않았습니다. 어떻게… 생각을 정리하실 시간이 필요하신지요.”
복잡한 이쪽의 표정을 눈치챈 모양이다.
“잠시 자리를….”
“아니, 굳이 자리를 피할 필요까지는 없어. 그보다 혹시 한 번 더 볼 수는….”
“죄송합니다. 주인님. 그건 불가능합니다. 죽, 죽여주시옵소서. 벌이라면 달게 받….”
“아니. 괜찮다.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몸에 괜찮은지 여부에는 상관없이 이렇게 계속해서 미래나 검은색 세계를 보는 건 불가능한 것 같았다.
카스가노 유노의 힘은 이치를 벗어난 능력이다. 단순히 생각해 보면 연속으로 그런 걸 볼 수 있을 리가 없다. 아쉽기는 하지만 계속해서 매달려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에 일단은….
‘시간 순서대로 배열을 해볼까.’
두서없이 진행된 이야기를 되짚어 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박덕구가 죽은 이후의 검은색 세계의 이기영이 무엇을 했는지 정리하는 것이 우선이다.
시간상으로 정리해 보자면 이렇다.
1. 검은색 세계의 이기영은 박덕구가 죽은 이후에 여단에 들어갔다.
카스가노 유노와 함께 들어간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이며 가장 처음 몸을 담은 곳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았다. 그야 목표가 생긴 시점에서 세력이 필요하다는 느낀다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 여단이 검은색 이기영이 하려고 하는 일에 완전히 맞아떨어지는 집단인 만큼 이기영이 가입하려고 위험을 무릅쓴 것도 이해가 된다.
이지혜가 어째서 그곳에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그 이후의 이야기는 굳이 보지 않아도 뻔하다고 생각했다.
차마 눈뜨고는 보지 못할 쓰레기 짓들을 저질렀을 거고 계속해서 덩치와 세력을 불렸을 것이다.
계속해서 여단과 함께 움직였는지 대에서는 생각해 봐야겠지만 최소한 입지를 다질 때까지는 함께 활동했을 확률이 높다.
2. 그 이후에 일어난 것이 정하얀의 죽음.
1번 이후로 시간이 많이 지난 시점. 여단이나 이지혜와 함께 활동했는지도 미지수, 카스가노 유노와 함께했는지도 명확하지가 않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쪽이 정하얀을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는 것 하나.
이유야 쉽게 유추할 수 있다. 당시 정하얀은 린델에 소속되어 있었던 것이 분명, 파란 길드에서 활동한 것은 아닌 것 같았지만 검은색 세계의 쓰레기는 정하얀을 적으로 인식했다.
어째서 정하얀을 끌고 가지 않았는지는 생각해 봐야 될 문제지만 결과적으로 검은색 쓰레기는 정하얀을 버렸고 그 결과 그녀는 목을 매달았다.
‘정말로… 이제 다시는 싫다는 소리 안 할게요. 오빠가 시키는 건 전부 다 할게요. 이제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되도 상관없어요.’
라고 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기 전에 그녀는 분명 비슷한 종류의 말들을 중얼거렸다.
아마 어느 시점에서 이기영이 그녀에게 이쪽에 협력해 함께 쓰레기 짓을 하자는 것을 종용했을 것이고 지금과 달리 마음이 약했던 1회 차의 정하얀은 이쪽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 같았다.
아군 측에 정보를 팔아넘기거나 시시한 심부름은 했을 가능성도 있겠지만 결정적인 곳에서는 등을 돌리지 못한 셈.
그 결과 버려졌고 벼랑 끝으로 내몰렸다. 현재의 정하얀이라면 시키지 않아도 할 일을 선택하지 못한 것이다.
‘환경이라는 게 참 중요하긴 해….’
1회 차의 정하얀과 2회 차의 정하얀의 결정적인 차이점이 이쪽을 만난 시기밖에 없다고 추측해 보면 현재 그녀가 이상해진 결정적 이유가 나라는 게 된다.
부정할 이유는 없지만….
‘씁쓸하긴 하네….’
정하얀과 내가 상성이 좋은지 좋지 않은지 판단을 내리기가 힘들다. 아무튼, 우리 사랑스러운 회귀자가 어째서 정하얀과 내가 함께 지내는 모습에 손뼉을 치며 기뻐했는지도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1회 차, 김현성 진영의 사람들에게는 정하얀의 자살 사건이 이렇게 비추어졌을 것이다.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었던 대마법사가 웬 쓰레기에게 작업당해 완전히 망가진 사건.
나와 그 쓰레기를 동일인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김현성은 눈앞에서 펼쳐지는 사이좋은 커플의 애정행각에 훌륭한 방패막이 생겼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틀림없이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정하얀을 데려가면 안 되는 상황에서도 김현성은 이쪽과 정하얀을 1+1으로 묶어서 원정으로 내보냈다. 심지어는 훈련소나 왕성에 가는 길에도 묶어서 보낼 정도였으니 녀석이 얼마나 1회 차 같은 일을 피하고 싶어 했는지도 이해가 간다. 정하얀을 죽이고 싶어 하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에는 혹시나 이 자식도 박덕구처럼 이상한 설계를 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했지만 진실을 알고 나니 고개가 끄덕여 질만 하다는 거다. 아무튼, 그다음 벌어진 일은….
3. 대규모 전쟁, 혹은 테러.
그 결과 조혜진을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었다. 이건 명확하지 않은 것이 많다. 일단 1회 차 김현성 진영을 공격했던 정확한 집단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던 것이 문제.
물론 이쪽의 모습이 보이기는 했지만 어떻게 생각해도 그때 봤던 광경은 개인이나 여단이 했다고는 보기 힘들다. 도시 하나가 완전히 폐허가 되어 있었고 김현성 역시 넝마가 되 일어나지 못했다.
조혜진은 나를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조혜진에게 화살을 쏜 이들의 모습도 확인하지 못했다.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내분, 혹은 타국과의 전쟁 같은 대규모 전쟁 시나리오를 이쪽이 기획했다는 것. 하지만 이것 역시 딱 들어맞는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김현성은 특정 나라에 대한 분노를 보낸 적이 없었던 것은 물론, 오히려 갈등을 최소화하며 힘을 최대한 비축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으니까.
‘김현성이 회귀한 이유가 분명히 있을 거야.’
물론 그 이유에 나도 포함되어 있는 것 같았지만 어쩌면 인류의 적 같은 게 툭 하고 튀어나올지도 모른다.
‘시스템을 생각해 보면 더욱더 그렇지.’
김현성을 회귀시킨 초월적인 존재의 행동을 생각해 보면 답이 조금 더 명확해진다.
정하얀을 살리고 싶어 했고 이쪽을 김현성에게 붙여주고 싶어 했다.
이미 1회 차의 흑막으로 추정되는 내가 회귀자에게 딱 달라붙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완전히 해결됐다고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회귀한 이유는 존재해. 분명히.’
김현성과 시스템은 보이지 않는 위협에 대비하고 있다. 악마일 수도 있고 천사일 수도 있다. 어쩌면 제3의 세력이 갑자기 툭 튀어나올지도 모른다.
지금 생각해도 답이 나오는 문제는 아니기에 깊게 생각하는 것은 지양해야 되는 것이 맞다.
지금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어째서 이런 장면들이 눈에 보였느냐는 것.
또 이걸 어떻게 활용할 수 있냐는 가다. 당연히 알 수 있을 것 같다. 유노가 본 미래는….
‘김현성이 나를 위협하는 장면이 맞겠네.’
초월적인 존재의 입장에서는 절대로 내게 알리기 싫은 장면이다. 내가 만약 유노에게 그 사실을 전해 들었다면 뭐가 됐든 액션을 취했으리라. 김현성을 등지는 극단적인 짓은 저지르지 않았겠지만….
‘또 모르지.’
뭐가 됐든 이쪽이 1회 차의 빌런이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그 사실을 알았다는 게 이번 검은색 세계를 보고 온 최고의 성과다.
어째서 유노가 나를 지키려고 진청은 내보냈는지 바로 이해가 간다.
생각하면 아주 간단한 문제다. 본인은 어째서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에 대해 이해하고 있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카스가노 유노의 선택은 그야말로 최선의 선택이었다.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카스가노를 바라보자 괜스레 그녀의 얼굴이 사랑스러워진다.
‘키야… 고맙다.’
순간적이지만 마음속에 싹튼 의심 역시 눈 녹듯 사라지기 시작. 두 손으로 얼굴을 잡자 깜짝 놀랐다는 듯 흠칫 하기는 했지만 이마에 뽀뽀 세례를 퍼붓자 살짝 얼굴을 붉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감, 감사합니다.”
“아니… 내가 더 고맙지. 네 선택은 옳았던 것 같다.”
“송구합니다. 어찌 제가 감히.”
“아냐. 네 선택이 맞았어. 진청이 현재 우리 손에 있거나 죽었었다면 더 힘들어졌을 것 같거든….”
“정확히 무슨 말씀이신지….”
카스가노 유노는 김현성이 회귀자라는 사실은 알지 못한다. 녀석이 찾고 있는 게 가면남이라는 사실도 모르고 있을 것이 분명, 심지어 외부의 개입으로 본 것을 잃어버렸으니 오늘 본 것과 진청을 내 보내는 것의 상관관계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슬그머니 입을 여는 것은 당연, 내 말을 듣고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카스가노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참… 그 악마소환사를 놓친 게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조금 더 확실한 증거를 잡는 게 맞다.
‘그 새끼가 범인이야. 아암. 그렇고 말고 무조건 그 자식이 범인이지.’
녀석에게 걸린 타이틀은 악마소환사뿐 만이 아니다.
‘1회 차, 가면쓰레기 진청….’
1회 차에서 여단에 가입한 이후, 정하얀을 자살하게 만든 것은 물론, 조혜진을 죽게 만들고 사랑스러운 회귀자의 뒤통수를 수도 없이 때린 장본인, 김현성이 수도 없이 찾아다닌 흑막이자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든 가면쓰레기. 단순히 악마소환사인 줄 알았던 녀석의 참된 정체였다.
‘이 분리수거도 못 할 것 같은 가면 쓰레기 자식!!’
마음속에 있는 빛의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