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1
회귀자 사용설명서 331화
검은색 세계의 우리(4)
동요할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박덕구 때와 마찬가지다.
동요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충격이 꽤나 크다.
그래도 정이 들었던 사람의 마지막 모습이다. 괴롭지 않을 리가 없다.
아니, 내가 이 정도로 크게 동요할 거라고는 사실 스스로도 몰랐다.
물론 정이 든 것은 사실이지만 가끔 정하얀이 짜증 나게 느껴질 때도 있었으니 이런 이질감을 느끼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리라.
아무튼 간에 머리가 지끈거린다.
어차피 이건 2회 차, 내가 있는 시간대에서는 벌어지지 않을 일일 뿐이다.
지나치게 몰입하는 게 적절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꾸만 몰입하게 되는 상태에 있다는 게 짜증 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정하얀은 아주 행복에 빠져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으니 1회 차와는 다르다.
호흡을 조금 고르자 그제야 조금 심신이 안정되는 듯한 느낌.
그 와중에 무척 당황스러웠던 것은….
정말로 지은 죗값을 치르는 거였잖아. 슈바.
농담 아닌 농담이 현실이 되어버렸다는 것.
단순히 잘못했다 정도가 아니라 뭐라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의 죄를 저질렀다고 생각하는 게 맞다.
정황상 정하얀을 절벽 끝까지 몰아서 절벽으로 뛰어 내리라고 종용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그 벌을 내가 받고 있다고 생각하니 점점 더 당황스러워지기 시작.
사실을 말하자면 정하얀이 지금과 같은 상태가 된 것은 8할이 내 탓이었지만 그래도 남 탓을 할 거리가 있으면 탓하게 되는 게 소시민적인 사고방식이다.
몰려오는 씁쓸함에 다시금 입맛을 다셨을 때, 다시 한번 나를 둘러싸고 있는 풍경이 뒤바뀐다.
가장 최근에 카스가노와 링크했을 때 역시 꽤나 많은 것을 보게 된 느낌이었지만 이번에도 역시 마찬가지.
이쪽이 힘을 실어준 것이 약빨을 받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여러 가지 에피소드를 보게 된다는 건 운이 좋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다.
아마 지금 보게 될 장면이 시간상으로는 가장 빨리 일어날 일이 될 것 같았다.
박덕구가 죽고 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벌어진 일.
무척 야위어 있고 독기로 가득 찬 검은색 세계의 나를 확인한 순간, 그런 생각이 머리를 뒤흔들기 시작했다.
도대체 어디로 향하는지, 지금 검은색 세계에 있는 내가 어디인지 알아볼 수가 없다.
지하수로 같이 보이기도 했고 어떻게 보면 버려진 던전 같기도 하다.
그러나 검은색 세계를 볼 때 너무 불친절하다는 건 어쩔 수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지금 이쪽이 향하는 장소가 좋은 곳은 아니라는 거다.
저런 장소를 지난 이후에 꿀과 젖이 흐르는 땅에 도착한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잘 맞지 않는다.
예상대로 어두운 곳 한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
‘오랜만이네요. 그러니까… 이기영이라고 했었나요? 헷갈린 건 미안해요. 사람 이름을 잘 기억하지는 못해서….’
‘아뇨. 괜찮습니다.’
‘더 이상 이쪽은 찾지 않을 줄 알았는데…. 아니, 솔직히 말하면 살아 있을 거라곤 생각 못 했죠. 이렇게 보니 반갑네요.’
‘사연이 있었습니다. 뭐… 별로 궁금하진 않으실 것 같지만.’
‘당신 말이 맞아요. 중요한 건 어떻게 살아 있는지가 아니죠. 당신이 어째서 이곳을 찾아왔는지. 몇 년 전, 제 제안을 확실히 거절하셨는데… 아, 그러고 보니 덩치 큰 남자는 죽었나요?’
‘…….’
‘오래 살지는 못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내 예상이….’
‘…….’
‘솔직히 그 덩치는 그때까지 살아 있던 게 기적….’
‘그 입 다물어.’
‘네?’
‘그 입 다물라고 했다. 한 번만 더 지껄이면 네 입을 그대로 찢어버릴 테니까.’
‘제가 뭘 잘못 들은 것 같은데. 지금 그 말 저한테 한 게 확실해요?’
‘그럼 너한테 했지, 더러운 년아. 네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어? 버림받은 자들의 성녀니 뭐니 개짓거리나 하다가 뒤통수 맞고 싸구려 매음굴이나 굴러다니던 년이.’
‘뭐?’
‘내가 틀린 말 했나? 선희영?’
‘이 미친 자식이….’
넌 또 왜 거기서 튀어 나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현 파란 길드원인 선희영.
그 끝이 좋지 못했을 거라는 건 대충 예상했지만 설마 이런 곳에서 만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심지어 일면식이 있었던 모양.
그다지 사이가 좋아보이지는 않지만 반가운 사람이다.
지금과는 생김새도 무척 다르다.
갖은 고생을 한 게 드러난 얼굴.
그래도 선한 포지션을 유지하고 있는 지금과는 다르게 얼굴에 조금의 광기가 서려 있었다.
빈민들에게 뒤통수를 맞고 싸구려 매음굴을 돌아다녔다고 들었으니 그럴 만도 하지만 너무나도 달라진 모습에 입이 벌어진 것은 당연지사.
조금 의문점이 있었던 것은 어째서 김현성이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냐는 것이다.
아마 음지에서만 활동했거나 대외적인 일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추측하는 게 맞으리라.
어쩌면 비교적 빨리 죽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이 상황에 그건 크게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다.
‘내가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잖아.’
‘당신 죽고 싶어?’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정신 나간 년.’
‘너!!’
어째서 이 장소에 그녀가 있냐는 것보다는 여기가 어떤 장소인지가 더 신경 쓰인다.
예전에 찾아왔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소리고, 했던 제의를 거절했다는 건 또 무슨 말인지 모르지만 예상이 가는 게 없는 것은 아니다.
기왕이면 이쪽의 예상이 틀리기를 바라는 게 맞지만 더 깊숙한 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내 생각이 맞았다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그만. 거기까지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희영 씨. 그리고… 기영 씨는… 이거 정말로 오랜만이군요.’
사이코패스 살인마 정진호.
1회 차의 또 다른 빌런이자 김현성의 적.
그리고.
살인여단의 주인.
당연하지만 2회 차에 봤던 모습과는 무척 다르다.
마음의 눈으로 스탯을 보고 싶었지만 보이지 않는다.
사실 굳이 볼 필요도 없다.
녀석이 강자라는 건 확인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으니까.
생김새도 여전하다.
허리춤에는 여러 자루의 검을 달고 있고 입고 있는 장비는 경갑옷.
가벼운 움직임을 선호하는 건 여전한 것 같다.
아무리 생각해도 엄청난 쓰레기로 성장한 것 같은 모양새. 이런 쓰레기 자식을 2회 차에 훌륭하게 처리한 내 자신이 자랑스러워진다.
자리한 것은 녀석뿐만이 아니다.
이기철?
튜토리얼 던전에서 불타는 좀비의 먹이가 되어버린 녀석이다.
왠지 모르게 친숙한 이름을 한 범죄자도 눈에 보였고 그밖에도 다양한 놈들이 눈에 띈다.
물론 전부 지금의 나는 모르는 얼굴이다.
멤버는 대충 봐도 10명이 넘어보였고 모두가 상당한 수준에 오른 강자처럼 보였다.
그야 사랑스러운 회귀자가 그렇게 기겁할 정도로 악행을 떨쳐온 녀석들이니 힘을 갖춘 건 당연한 일이리라.
차희라나 박연주 같은 교국 8좌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적어도 그 바로 밑 단계에서는 이름을 날릴 만한 녀석들의 모임.
여단은 내가 기존에 상상하고 있었던 모습보다 더 강했다.
아무튼 간에 정진호의 반가운 인사에 검은색 세계의 나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에 답하기 시작.
분위기가 꽤나 험악했지만 검은색의 이기영은 무서워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네. 오랜만입니다.’
‘끄응. 이거 곤란하군요.’
‘…….’
‘다시는 저희를 찾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보내드린 것으로 기억하는데…. 애초에 당신은 저희 제의를 거절한 순간 죽었어야 했습니다. 살려드린 건 제 변덕이었고 배려였는데, 이런 식으로 다시 찾아오실 줄이야. 아, 물론 반가운 이야기를 하러 오셨다면 거친 방법은 사용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상황에 따라서는 당신은 이 자리에서 죽어야 할 수도 있습니다.’
‘…….’
‘찾아온 이유를 들어도 되겠습니까?’
‘좋지 않은 이야기는 아닐 겁니다.’
‘네네.’
‘조금 민망하기는 하지만 전에 받았던 제의에 대한 답을 번복하고 싶어서 찾아온 거니까요.’
역시나.
‘글쎄요. 반가운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당신을 영입하려고 했던 시기와는 입장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그 당시에는 기영 씨를 필요로 하긴 했지만 지금은 그다지 필요할 것 같지 않아서 말이죠.’
‘도움이 될 겁니다.’
‘도움이 될 거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기영 씨가 뛰어나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고요. 하지만 한 집단에 머리가 둘 이상 있으면 조금 난잡해질 것 같은 터라. 아, 무슨 말씀인지는 알아들으실 거라 생각합니다만 여단은 벌써 머리를 구했습니다. 어떤 부분에서는 당신보다 뛰어날지도 모르는 사람인데, 개인적으로는 당신을 들이고는 싶지만 다른 멤버들의 의견도 중요하죠. 물론 기존 머리의 입장이 가장 중요하겠죠? 어디까지나 여단의 멤버들의 의견이 최우선 사항입니다. 저는 당신에게 호의적이지만 일단 가장 중요한건 우리 가족이니까요.’
과장되게 주변을 둘러보는 녀석의 모습은 가관.
그 목소리에 화답하듯 몇몇 이들이 입을 여는 것이 보였다.
‘죽여요.’
‘죽이자.’
‘나도 죽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찬성.’
입을 연 것은 남녀 쌍둥이.
빼빼 마르고 키 큰 남자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한쪽 다리가 없는 녀석 역시 조용히 말을 내뱉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이 자식들 얼굴은 지금 기억해 놓는 게 좋으리라.
만나면 곧바로 죽여야 할 녀석들이 여기 다 모여 있다.
특히 방금 반대표를 던진 놈들의 얼굴은 틀림없이 기억했다.
약간 의아했던 것은 선희영이 찬성표를 던지지 않았다는 것.
아마도 고유 기벽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녀의 성격은 조금 신중하다.
잠깐의 말싸움이 있기는 했지만 두고 보자는 입장을 취하는 게 더 자연스럽다.
‘아무래도 의견은 반반으로 갈릴 것 같기는 한데, 그전에 동기에 대해서는 들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여단에 들어올 마음이 생긴 이유가 뭡니까? 예상이 가지 않는 건 아닙니다만 그래도 당신 입으로 직접 듣고 싶군요.’
‘복수.’
‘대상은?’
‘대륙 내 썩어빠진 모든 인간.’
‘하… 하핫. 푸하하하하핫!’
‘웃긴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아닙니다. 웃겨서 웃은 것이 아닙니다. 하하하. 훌륭합니다. 훌륭해요. 하핫. 그런 열정이 중요합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복수를 하고 싶다는데. 기영 씨, 그거 아십니까? 여기 들어온 이들이 모두 같은 이유 때문에 움직이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는 충동 때문에, 누구는 쾌락 때문에, 단순히 돈이나 살인이 좋아서 들어온 이들도 있고 인간에게 실망해 들어온 이도 존재합니다. 모두가 제각각이기는 하지만 당신이 가지고 있는 이유를 별 볼일 없다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아마 여단에 대부분은 당신의 뜻에 공감해 줄 거란 말입니다. 우리는 그런 부정적인 에너지를 먹고 자라요. 특히나 명확한 방향성이 존재한다는 게 마음에 듭니다.’
‘그렇다면….’
‘그래도 일단은 불가합니다. 기존의 머리가 찬성한다면 저 역시 찬성표를 던지는 것으로 하죠. 음… 그래서 일이 이렇게 될 것 같은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이코패스 살인마 정진호가 뒤를 돌아보자 앉아 있던 여성 한 명이 시야에 비쳤다.
아마 그녀가 정진호가 말한 머리인 모양.
가면을 쓰고 있는 모습, 재미있게도 그녀가 쓰고 있는 가면이 이후에 내가 쓰고 다니던 가면과 같은 디자인이었다.
천천히 가면을 벗은 여자가 똑바로 이쪽을 바라보고 입을 여는 것이 보인다.
‘여단에 오신 걸 환영해요.’
어처구니없게도 가면을 쓴 여자 역시 이쪽에게도 익숙한 얼굴.
이지혜.
시스템이 영혼의 단짝으로 공인한 그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