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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329화 (328/1,590)

# 329

회귀자 사용설명서 329화

검은색 세계의 우리(2)

[제한적인 정보를 열람합니다. 전설 등급의 특성, 마음의 눈의 발동을 확인합니다.]

‘좋아.’

[플레이어 카스가노 유노의 특성, 본질과 과거와 미래를 꿰뚫어 보는 눈이 저항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우연.

두 번째는 외부의 개입으로 검은색 세계를 훔쳐볼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굉장히 부드럽게 넘어온 것 같다.

특성의 등급은 변함이 없었지만 직업이 준신화로 진화한 영향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게 옳은지는 모르겠지만 인간 자체의 격이 올라간 것 같은 느낌.

기분이 좋은 것이 당연하리라.

전조는 저번과 같다.

순식간에 이쪽이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든다.

동시에 보이고 있는 풍경이 완전히 뒤바뀌기 시작.

마치 혼이 빠져나간 것 같은 감각이었지만 이상은 없다.

이미 몇 차례나 봐왔던 만큼 당황스럽지도 않다.

무척이나 반가운 마음이 들기 시작한 것은 당연지사.

앞으로 펼쳐질 미래만큼은 아니었지만 검은색 세계 역시 나에게 충분히 중요했기 때문이다.

‘뭐지. 뭘 보는 거지?’

기왕이면 이번에 있었던 일의 힌트, 그게 아니라면 저번에 봤던 장면을 이어서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리라.

일단은 검은색 세계의 안으로 들어오기는 했지만 뭘 볼 수 있는지에 대해 알 수 없다는 것은 짜증 나는 부분이다.

그러나 쓸데없는 장면을 볼 수 있어도 그게 어딘가.

잠깐이지만 사랑스러운 회귀자와 같은 선상에 설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메리트는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순식간에 눈앞에 보이는 풍경이 지나가기 시작.

예고도 없이 시야에 비친 장면은….

‘어?’

완전히 정신을 놓아버린 사랑스러운 회귀자와 가면을 쓰고 있는 녀석.

생각보다 더 처참해 보이는 김현성과 녀석을 내려다보고 있는 가면 쓴 남자. 아니, 성별도 명확하지 않다. 녀석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하기조차 힘들다.

왠지 모르게 실루엣이 나와 닮은 느낌이지만 이쪽과는 미묘하게 분위기가 다르다.

정황상 저 쓰레기가 김현성을 몰아붙인 느낌이다.

아무리 회귀하지 않았다고 해도 김현성이 가지고 있는 재능을 생각해보면….

‘이 새끼가 1회 차 빌런이구나. 이 더러운 쓰레기.’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린 광경이 내 가설에 힘을 실어주고 있었다.

이곳이 어떤 장소였는지조차 눈치챌 수 없을 정도.

세계의 종말이 오면 이렇게 변할까 싶을 정도로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시체들이 곳곳에 들어서 있고 심지어 그 시체가 실시간으로 부패하고 있다.

여기저기에서는 아직 살아 있는 인간들의 고통스러운 비명이 들려오고 있었고 몸이 녹아내리거나 자해하고 있는 이들도 보인다.

‘생지옥이네, 생지옥이여.’

무언가에 영향을 받고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당연히 어떤 것에 영향을 받고 있는지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만약 내가 저 자리에 함께 있었다면 힌트라도 찾을 수 있겠지만 아쉽게도 나는 제삼자의 입장에서 이미 흘러갔던 장면을 바라볼 뿐이다.

‘도대체 뭐야.’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눈앞의 장면이 정확히 언제쯤 일어난 일인지도 파악하기도 힘들다.

‘우리 현성이 죽은 거 아니야?’

라는 생각을 잠깐 해보기는 했지만 지금 보고 있는 장면이 검은색 세계의 엔딩은 아닌 모양.

비틀거리며 일어서려는 묘령의 여인이 김현성의 앞을 막아섰다.

그녀 역시 정상이 아니다. 서 있는 게 기적이라고 생각해도 될 정도로 몸이 망가져 있다.

당연하지만 김현성의 앞을 막아선 이가 누구인지 이쪽은 아주 잘 알고 있다. 같은 파란 길드 소속이니 알고 있는 게 당연하리라.

조혜진.

김현성의 부관.

그나마 정치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는 파티원이었고 규격 외라고 하기에는 애매하지만 괴물에 준하는 창술을 갖춘 실력자다.

이쪽과는 간혹 술을 함께 마시는 친구이기도 했기 때문에 그녀의 망가진 모습이 기분 좋게 보이지는 않았다.

창 하나에 의지한 채 서 있는 모습은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 같다.

심지어 입고 있는 옷의 대부분이 찢어져 있는 모습은 가관. 어디에다가 눈을 둬야 할지 힘들 정도다.

‘이건 본의가 아니야….’

사실 그녀의 민망한 차림은 그다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검은색 세계의 이쪽도 그다지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은 느낌.

사실 민망하다기보다는 처절해 보이는 외관이었으니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당연하리라.

아무튼 간에 처참한 겉모습과는 다르게 가면 쓴 남자를 노려보는 눈빛은 그녀가 내가 아는 조혜진이라고 말해주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윽고 땅바닥에 머리를 내리찍으며 천천히 입을 열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살려주십시오.’

‘…….’

‘…….’

‘네?’

‘살려… 주십시오.’

‘푸핫! 신창이라고 불리며 존경을 받았던 여자가 내뱉을 만한 대사는 아닌 것 같은데. 목숨이 아깝기는 한가 봅니다.’

목소리는 변조된 것 같았지만 왠지 모르게 이 더러운 빌런의 말투가 나와 굉장히 흡사하다.

‘부디… 살려주십시오. 제 목이라면 기꺼이 내어드리겠습니다. 그러나 부디. 부디 길드 마스터만은….’

‘…….’

‘부탁드립니다. 자비를, 부탁드립니다.’

내가 아는 그 조혜진이 맞나 싶을 정도로 비굴하다.

언제나 당당하던 표정은 온데간데없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눈에서는 계속해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고 흙먼지와 오물이 된 모습으로 이마를 땅바닥에 가져다 댔다.

단순히 굴욕적이라고 말할 상황이 아니다.

자존심이 고고한 그녀가 저런 모습을 했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나는 잘 알고 있다.

조혜진은 웬만해선 자신의 뜻을 굽히는 일이 없다.

같은 인물인지 이미지가 매치가 되지 않는다고 느껴질 정도다.

그건 가면을 쓴 녀석 역시 마찬가지였던 모양.

과장되게 놀란 제스처를 취한 녀석이 다시 한번 말을 이어왔다.

‘아아. 그쪽이었군요. 그쪽이었나 봅니다. 참, 김현성 이 사람은 인망도 좋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대신 죽는다고 하는 사람이 많은지. 부럽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하고….’

‘부디. 부디.’

‘어떻게 할까…. 사실 오늘은 죽이려고 찾아왔지만 당신 같은 사람만 보면 이상하게 마음이 약해집니다. 저도 비슷한 경험을 몇 번 겪었고 소중한 사람을 잃는다는 게 어떤 건지 뼈저리게 알고 있거든요. 저는 이런 인류애를 좋아해요. 멋있지 않습니까. 아름다운 모습이기도 하고요. 마치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나올 것 같은 장면입니다.’

‘부탁드립니다.’

‘사랑하는, 아니, 존경하는… 무슨 감정인지는 제 알 바 아니지만 그래도 소중한 사람을 위해 목숨을 던지는 모습은 숭고합니다. 네. 숭고해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저는 이런 장면을 볼 때마다 슬프기보다는 기분이 나빠요.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고 구역질이 나옵니다. 떠올리기 싫은 장면이 자꾸만 떠올라서 무척 힘이 든다 이 말입니다. 타인의 신파는 제가 하고 있는 일에 죄책감을 불러일으켜요. 아, 혹시 제가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고 생각하신다면 잘못 생각하신 겁니다, 조혜진 님. 저도 엄연히 사람입니다. 사람.’

‘…….’

보면 볼수록 찝찝한 감정이 새록새록 생겨나기 시작한 것은 당연지사.

그러지 않기를 바라지만 저 가면 쓴 악당 놈이 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조금 전부터 그럴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는 했다.

엄연히 카스가노 유노를 통해 바라보고 있는 검은색 세계다.

적어도 그녀나 그녀와 연결되어 있는 나, 둘 중에 하나는 등장했어야 했다.

욕이라도 내뱉고 싶은 심정.

생각해 보면 그럴 듯하기는 하다.

검은색 세계의 이기영은 구제가 불가능한 쓰레기 중에 쓰레기였고 브레이크를 밟아주던 박덕구를 잃은 뒤에는 완전히 정신을 놔버렸다.

목적은 당연히 녀석의 복수.

박덕구가 죽은 시점에서 몇 년이 지났는지 모르겠지만, 그동안 여러 가지 일을 겪으며 여기까지 닿았다고 생각해 보면 이야기가 왠지 모르게 딱 들어맞는 느낌이다.

조혜진이나 김현성의 외관으로 몇 년 정도가 지난 시점인지 때려 맞추고 싶었지만 마력에 영향을 받아 늙지 않은 둘의 외관으로는 유추하기가 어렵다.

아무튼 간에 불안감은 점점 더 차오르기 시작.

아직 아무것도 결정된 게 없는 만큼 성급한 판단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 와중에 들려오는 가면 쓴 쓰레기의 말은 가관이었다.

‘보세요, 조혜진 님. 계속해서 머리가 지끈거리지 않습니까. 저 역시 당신 하나로 만족하고 싶지만 자꾸만 머리가 아파오는 바람에 조준이 잘 안 될까 걱정입니다. 혹시나 당신 뒤에 있는 사람이 맞을까 봐요. 그런 일이 벌어지면 안 되죠. 기껏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내놓으려고 했는데 제 손이 미끄러져서 실수가 벌어지면 너무 슬프지 않습니까. 하하.’

‘그렇다면….’

‘아아. 그만 두세요, 혜진 씨. 그건 아닙니다. 그건 아니에요. 자결해라! 랜서! 라는 말이 아닙니다. 아무리 그래도 이쪽도 복수의 일환이니까 마무리 정도는 제 손으로 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두통만 가시면 됩니다. 두통만요. 그럼 전부 해결됩니다.’

‘제가… 뭘 하면 되는 겁니까.’

‘굳이 뭔가를 해야 하는 건 아닙니다. 사실 뭘 시켜야 할지도 모르겠고 말이죠. 저와 함께 가자고 해도 당신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들게 뻔하니까요. 저도 폭탄을 떠안고 싶은 마음은 없어서… 뭐, 됐습니다. 이 두통은 제가 알아서 해결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약속은 지킵니다.’

어디에선가 화살이 날아 들어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순식간에 조혜진의 몸에 화살 다발이 박히기 시작.

‘쿨럭….’

조혜진은 고통보다는 다행이라는 표정이었다.

조혜진의 얼굴에 가면 쓴 남자는 다시 한번 말을 내뱉는다.

‘조혜진 님. 당신 길드의 마스터는 살아 돌아갈 겁니다.’

‘고… 맙습….’

‘이런 상황에서 감사까지 받으면 더 슬퍼집니다. 저에게 감사하기보다는… 하고 싶은 말이나 하세요. 당신 같은 사람을 싫어하지는 않습니다. 제가 유언을 전해드릴지는 장담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마지막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없는 것보다는 더 나을 겁니다.’

‘하아… 하아. 길… 드 마스터.’

‘네네.’

‘길드 마스터.’

‘네네네.’

‘좋… 좋아… 했….’

‘네네…. 확실히 받았습니다, 조혜진 님.’

‘…….’

‘아… 벌써 죽으셨군요.’

‘…….’

‘사실 당신은 싫지 않았었는데….’

‘…….’

‘어쩌겠습니까. 서로가 처한 상황이 다른데. 뻔한 대사기는 하지만 만약에 우리가 다른 곳에서 다른 방식으로 만났다면 친구가 될 수도 있었을 겁니다. 저는 당신의 적이었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당신을 존경했어요. 마지막 역시 마찬가지였고요. 사실 이런 식으로 마무리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신창의 최후는 숭고하기보다는 굴욕적인 게 더… 뭐,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당신은 이미 죽었는데.’

저 쓰레기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대충 알 것 같다.

검은색 세계의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조혜진은 신창이라고 불릴 정도로 명성 높은 이방인이다.

숭고한 죽음보다는 굴욕적인 죽음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 틀림없으리라.

하지만 조혜진의 주변을 쉽사리 떠나가지 못하는 걸 보니 본인의 말대로 일말의 양심은 남아 있는 모양.

뭘 고민하는지 뻔하다.

조혜진의 시체를 이대로 내버려 둘 것인지 고민하는 것이다.

절대로 저 가면쓰레기와 내가 동일인물은 아니지만 나였더라도 박덕구와 비슷한 모습을 보여준 조혜진이 저런 최후를 맞이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으리라.

결심이 섰는지 천천히 손을 뻗는다.

굴욕적인 최후를 언급한 것과는 다르게 그녀의 시체에서 검은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다.

어떤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창을 들고 재가 된 자리에 꽂아 놓는다.

천천히 뒤로 돌아 얼굴을 가린 가면을 벗고, 남자는 중얼거린다.

‘기분 더럽네.’

동일인물이 아닐 거라는 일말의 기대가 있었던 것도 사실.

하지만.

내 눈에 비친 녀석의 얼굴은.

완벽하게 이쪽과 같은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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