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8
회귀자 사용설명서 328화
검은색 세계의 우리(1)
사실 의심이 생긴 것은 이지혜의 한마디 때문이었다.
‘나는 두 사람의 관계는 잘 모르겠지만 잘 생각해 봐요. 정말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인지. 어떻게 생각해도 결정적인 상황에서 타인을 도왔다는 건 마이너스라고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려 그 악마소환사 진청인데. 라이벌 하나 줄이자고 이런 말 하는 게 아니에요. 정말로 걱정되서 하는 말이지. 원래 뒤통수 잘 때리고 다니는 사람들이 이상한 상황에서 뒤통수 맞고 다닌다니까. 그거 흔한 클리셰라고요.’
진청을 놓아준 게 카스가노 유노라는 것을 이야기한 직후의 들려온 목소리였다.
당연하지만 틀린 말이라고 볼 수는 없다.
물론 뒤통수 잘 때리고 다니는 사람이 잘 맞는다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카스가노 유노 같은 경우에는 한 번 정도 생각해 봐야 하는 게 맞다.
어떻게 생각해도 그녀와의 만남이 작위적이었던 것은 사실.
물론 카스가노와 나 사이에는 범접할 수 없는 안전장치가 있다.
하나 그렇다 하더라도 경계를 푸는 것은 지양해야 했다.
조금 다른 말이기는 하지만, 어딘가에서 유행하던 명대사처럼 애초에 믿지 않으면 배신당할 일도 없다.
아마 내 표정에 깃든 의심을 알고 있기 때문에 카스가노 유노 역시 초조해하고 있는 것이리라.
다른 사람보다 더 분위기에 민감한 카스가노 유노가 겉으로 보이는 온도 차를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다.
살짝 분위기를 잡은 채 정면을 바라보자 눈에 띄게 초조한 얼굴을 한 그녀다 다시금 말을 이어왔다.
“당시에는 주인님께서 정신을 잃고 계시고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 설명을 드릴 시간이 없었사옵니다. 이해하시기 힘드시겠지만 적어도 제 행동이… 주인님을 위해서였다는 것만 알아주시옵소서.”
그건 이미 알고 있다.
다만 어떤 미래에 대해 봤는지 지금도 설명 못 하는 것이 문제.
이쪽이 납득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면 그나마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테지만….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사옵니다. 틀림없이 제 눈으로 미래에 대해 보았사온데, 마치 희뿌연 안개가 낀 것처럼 기억이 나지 않사옵니다. 정말입니다. 믿어주시옵소서.”
이런 상황이 문제였다.
물론 그녀의 말이 사실일 가능성에 조금 더 무게를 두고 싶기는 하다.
내가 깨어난 직후 자신의 죄를 고백해 온 것 역시 그녀였고 심지어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겠다고 말하겠다고 했으니까.
일부로 벌을 받기 위해 일을 꾸몄다기에는 너무나도 스케일이 큰 장난.
내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매일 같이 찾아와 잘못했다고 비는 카스가노 유노를 보면, 머릿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확률은 한 없이 제로에 가까울 것 같다.
그러나.
‘아니야. 의심할 필요 없어. 어차피 믿지 않으면 아무것도 해결이 안 돼.’
위험부담이 있기는 하지만 카스가노를 믿지 않고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한 줄기 의심의 끈은 잡아야 하는 게 당연하겠지만 일단은 카스가노의 말이 사실이라는 걸 전제로 생각해 보는 것도 나쁠 것 같지는 않았다.
“미래를 본 것이 확실한 겁니까?”
“그렇습니다. 검은색 세계도 아니옵고 과거 역시 아닙니다. 그것만은 확실하옵니다. 제가 본 것은 틀림없이 미래에 일어날 일이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시간이 많이 지난 이후 인 것 같았습니다만….”
“위험해 처하게 된다는 건 정확하게 어떤 의미인지….”
“뭐라고 설명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목숨이 위험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주인님의 입지나 상황이 위험하다고 표현해야 할지…. 그 마저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 미래를 제 눈으로 직접 목격한 직후 확인해 보기 위해 몇 번이나 노력했으나 거짓말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정말로, 정말로 죄송합니다.”
아예 넙죽 엎드려 부복하는 꼴이 가관이다. 뭔가 이쪽이 더 민망해지는 것 같은 장면이기는 했다.
“미래가 바뀌었기 때문에 기억하지 못하거나 떠올리지 못했을 확률은 존재하는 겁니까?”
“그렇지는 않사옵니다. 최근에 제가 말씀드린 미래가 실현되지 않았듯이 미래가 바뀐 것은 제가 장면을 떠올리지 못하는 것과 아무 상관이 없사옵니다. 그보다 말씀을 낮춰주시옵소서. 부디 말씀을… 제발 낮춰주시옵소서. 흐으으윽.”
크게 불안해하는 얼굴이다.
사실 이럴 때면 정하얀과 닮았다는 생각도 든다.
이쪽이 말을 높이는 게 자신을 노예로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전조로 받아들이는 모양.
단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에는 존대를 하다 보니 그다지 구별하는 것에 의미를 둘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말을 높이고 내리는 게 그녀에게는 무척 중요한 것 같았다.
‘저번에도 높이지 않았었나.’
사실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때와는 다르게 이런 분위기에 타인 대하듯 존댓말을 쫙쫙 뻗고 있으니 저쪽이 불안해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리라.
물론 말투 같은 것은 아무 상관도 없다.
당장은 카스가노 유노가 탐탁치 않으니 존댓말이 나가기는 했지만, 그녀의 답답한 모습에 짜증이 치솟자 반말도 함께 튀어나온다.
“미래가 변할 수도 있다는 건 카스가노 유노 님이 가장 잘 알고 있는 것 아닙니까? 이번에도 도시가 폐허가 되지는 않았고요.”
“네. 물론입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그렇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그를 보내야 한다는 느낌이…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무어라 설명할 수는 없지만 틀림없이.”
“다시 말하면 단순한 감 때문에 그를 놓아줬다는 게 되는 겁니까? 내가 난처해질 거라는 걸 알면서도.”
“조,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네. 아마…. 죽여주시옵소서. 흐으으윽.”
“사실 너를 믿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납득이 안 돼.”
“저 역시 당혹스럽사옵니다. 흑… 그동안 많은 것을 봐왔지만 안개가 낀 것처럼 보이지 않고 기억나지 않은 적은 처음입니다. 마치 외부에서 누군가 개입한 것처럼… 네. 누군가 방해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옵니다.”
“외부에서 개입….”
“네. 그렇사옵니다. 정말로 이런 적은 없었는데…. 죽여주시옵소서.”
사실 그동안 카스가노 유노는 계속해서 같은 변명을 해왔지만 저 외부의 개입이라는 말이 오늘따라 새롭게 들려온다.
‘이거….’
왠지 모르게 의심이 가는 게 있기는 하다.
‘시스템인가.’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다.
초월적인 존재는 현세의 일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지는 않는다고 결론을 내렸지만 이런 부분에서는 개입할 만한 여지가 있다.
만약 카스가노 유노가 본 미래가 녀석이 원하지 않는 미래, 혹은 알리기 싫은 미래라면 그녀의 머리에 안개가 낀 것 같은 현상은 설명이 된다.
‘그럴 듯해.’
유노가 이쪽의 통수를 칠 생각이 없다는 걸 전제로 생각해 보면 설득력이 없지는 않다는 거다.
한 가지 의문점은 어째서 초월적인 존재가 그녀가 본 미래를 기억하지 못하게 막았냐는 것.
시스템은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녀석에게 충분히 호의적이었다.
실제로 녀석도 나에게 많은 투자를 하기도 했고, 욕 아닌 욕을 해대지만 결과적으로는 항상 이쪽에게 떡을 던져주고 있었다.
물론 우리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이유야 뻔했다.
내가 사랑스러운 회귀자에게 납작 엎드려 있었으니까.
현재도 찰싹 달라붙어 있는 걸 생각해 보면 지금 와서 태세 전환 버튼을 누르기에는 타이밍이 조금 이상하다는 거다.
마침 준신화 등급의 직업을 얻었고 심지어는 신성력까지 사용 가능한 체질이 되어버렸다.
이번 업적은 완벽했고 악마 역시 몰아낼 수 있었다.
어떻게 봐도 이쪽은 초월적인 존재의 아군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미루어 봤을 때, 세울 수 있는 가설은 두 가지.
첫 번째는 이쪽을 바라보는 초월적인 존재가 하나가 아닌 경우.
나름대로 설득력을 가지고 있기는 한 추론이다.
어쩔 수 없이 나를 끌고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도 있는 한편,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놈이 있을 수도 있다.
내가 위험에 처하게 된 미래를 카스가노가 떠올리지 못하게 조치한 것은 혹여나 이쪽이 위험을 피할 상황을 고려해서 일수도 있다.
말하자면 내가 위험에 처하거나 심할 경우 죽기를 바라고 있을 수도 있다.
이 경우 외에 떠올려 볼 수 있는 남은 한 가지….
그러니까 초월적인 존재들이 나를 적대하지 않을 경우에 생각할 수 있는 나머지는.
‘현성이 때문인가?’
내가 위험에 처하게 되는 상황이 어떤 식으로든 김현성과 관련되어 있을 경우다.
뜬금없기는 하지만 충분히 할 수 있는 생각이라고 느껴졌다.
시스템과 초월적인 존재는 세계관의 주인공인 김현성을 애지중지 키우기도 했고 실제로도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다.
내가 수많은 혜택을 받은 것 역시 그 이유.
만약 내가 김현성의 적으로 시작했더라면 이 정도로 선물을 결코 쏟아내진 않았으리라.
극단적으로 예를 들어 카스가노 유노가 본 장면이 김현성이 나를 적대하고 있는 장면이고 만일 내가 그 사실을 알게 됐을 경우에는.
‘현성이 통수도 후려 버리려나….’
초월적인 존재는 내가 사랑스러운 회귀자의 뒤통수를 때리는 미래를 경계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래도 정이 많이 들었는데. 나 그렇게까지 쓰레기는 아닌데….’
물론 실제 상황이 닥치면 어떻게 움직일지에 대해서는 장담할 수 없다.
‘뭐 어차피 그냥 추론이니까. 깊게 생각할 필요는 없겠지.’
흥미롭기는 하지만 아쉽게도 이 두 가지 가설은 성립하는 것이 불가능.
두 이야기 모두 악마소환사 진청과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
둘 중에 하나가 진실이여도 카스가노 유노가 악마소환사를 살려야 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
외부의 개입이라는 소리에 괜스레 머리를 강타한 가설이기는 했지만 영양가 없는 추론이었다.
퍼즐 조각은 모인 것 같았지만 좀처럼 연결되지 않는 느낌.
‘1회 차와 연관이 있을 수도 있나.’
이건 너무 갔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물론 알아봐서 나쁠 건 없다.
하지만.
‘볼 수 있다고 볼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게 문제지.’
그동안 시도는 수차례 해왔지만 카스가노는 박덕구의 날 이후로 나와의 연결에 성공한 적이 없다.
매번 고개 숙인 채 죄송하다는 말을 하는 카스가노의 모습은 마치 발기부전을 겪는 중년의 모습이다.
시도할 때마다 실패하다 보니 본인도 자신감을 잃었는지 먼저 함께하자는 말을 건네는 경우도 적어졌다.
실망하고 짜증 난 내 얼굴을 보기가 무서웠던 것이리라.
“검은색 세계는….”
갑작스레 튀어나온 혼잣말 카스가노가 깜짝 놀란다. 순식간에 얼굴에 절박함이 감돈다.
“노, 노력해 보겠습니다. 힌트가 될지도 모르는 만큼 이번에는 꼭….”
“할 수 있겠어?”
“오늘은 컨디션도 좋습니다. 네.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기대하는 표정을 짓는다.
정면을 바라보자 카스가노는 천천히 감은 눈을 뜨고 연신 낑낑댔다.
어떻게든 미래, 혹은 검은색 세계를 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는 있었지만 잘 되지 않는 모양인지 식은땀을 뻘뻘 흘리기 시작.
‘이번에도 잘 되지 않으면 어떡하지?’라고 걱정하는 표정이다.
애초에 볼 수 있다고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연결하고 싶다고 연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실망이 물밀듯이 올라온다.
‘이번에도 못 하겠네.’
하도 이런 상황을 많이 겪다 보니 이제는 좀 느낌이 온다.
낑낑대며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이번에도 고개 숙인 똘똘이 같은 표정.
결국에는 슬그머니 뜬 눈을 감은 채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기 시작.
그 절박한 얼굴에는 이번에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성공해야 한다는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터무니없는 부탁이옵니다만….”
“…….”
“그… 저, 저번에 주인님과 제가 연결되었을 때 저희의 신체 역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계신지요.”
“기억은 하지만.”
“가능성은 낮지만 한번 시도해 보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어쩌면 입맞춤이나 그, 그에 상응하는 행위로 연결될 가능성이 생길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얘는 또 뭔 소리를 하는 거야.’
하지만 일단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은 나쁘지 않으리라.
불안한 마음이 없지 않아 있기는 했지만 그녀의 손을 잡고 살짝 입을 맞추는 것은 순식간.
무척이나 붉어진 얼굴만큼이나 마력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하지만 여전히 눈동자에 깃든 불안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여전히 고개 숙인 똘똘이 같은 표정이다.
‘아 답답하네….’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뻔하다.
‘이번에도 잘 안 되면 어떡하지.’
혹은.
‘버려질 거야. 실패하면 버려질 거야.’
방법의 문제라기보다는 자신감의 문제.
전형적인 고개 숙인 친구들의 모습이었다.
그동안은 내버려 두고 있었지만 사안이 사안인 만큼 자신감을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잘할 수 있을 거야.”
“아….”
“이번에는 잘할 수 있을 거다. 천천히. 마음 편하게 먹어도 돼. 옳지. 그렇게. 천천히. 지금은 그냥 마음을 편하게 먹고 몸을 맡긴다고 생각해.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지만 살살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적극적으로 스킨십을 시도하자 뭔가 반응이 오는 느낌이 든다.
몸을 부들부들 떠는 것은 물론 금붕어처럼 허공에 입을 뻐끔댄다.
“아아아… 아아.”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사실 널 의심한 적도 없어, 카스가노. 단지 투정부렸을 뿐이지. 내가 널 아낀다는 건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번에도 그럴 거야. 조급하게 시도하려고 하지 말고 천천히 하자. 굳이 오늘이 아니어도 돼. 마음 편하게 먹고 천천히. 옳지. 그래. 옳지….”
그냥 한번 해보자는 심정으로 시도했을 뿐이지만 달콤한 말을 속삭이며 숨을 불어넣자 고개 숙인 똘똘이의 표정을 하고 있던 카스가노가 점점 고개를 든다.
마치 용트림이라도 하는 것 같은 굳건한 모습.
‘설마 이런 걸로 되겠어?’라는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직후 순식간에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감각에는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다.
‘나이스!’
카스가노 개인이 가지고 있는 내면의 발기부전을 해결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