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3
회귀자 사용설명서 313화
정하얀 사용설명서(7)
‘제기랄….’
순간적으로 머리가 하얗게 변한 것은 당연지사.
‘망했어.’
어째서 한소라가 계속해서 살려달라고 외치는지 불 보듯 뻔했다.
“이건… 그러니까 그… 제발….”
사시나무 떨 듯이 오돌오돌 떨고 있는 한소라의 모습은 불쌍하다 못해 애처롭게 보일 지경.
어떻게 보면 비장해 보이기까지 하다.
‘빌어먹을 타이밍에….’
이유야 어찌됐든 지금 상황이 어떻게 보일지는 뻔할 뻔자.
애초에 상의를 탈의한 한소라와 내가 함께 있다는 것 자체가 정하얀에게 반가운 그림이 아니다.
오해가 있다고 설명을 해야겠지만 그걸 그대로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정하얀의 정신머리가 돌아버리고 있다고 생각한 시기였기 때문에 더욱더 당황스럽다.
‘나타나도 꼭.’
어째서 이런 타이밍에 나타난 건지 궁금할 따름.
이쪽이 한소라를 찾아갈 거라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본인 역시 들킬까 불안한 마음에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을 것이 분명하다.
물론 지금 보이는 그림은 정하얀이 예상한 그림보다 더욱더 충격적인 장면일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나와 한소라가 이런 시기에 밀회를 즐기는 건 말도 안 되지만 정하얀에게 그 정도를 떠올릴 상식이 있었다면 내가 이렇게 고생하지는 않았을 거다.
정하얀의 동공이 흔들리는 것은 순식간이다.
한소라를 향해 적의를 드러내는 것인지 입술을 꽉 깨무는 것이 보인다.
이건 당연히 수습해야 한다.
눈에 닭똥 같은 눈물이 그렁그렁 차오른다.
뭐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순식간에 반대쪽으로 뛰어가는 모습은 가관.
곧바로 ‘정하얀’이라고 외치며 뛰어가려고 했지만 누군가 내 발목을 꽉 붙잡는 게 느껴졌다.
뒤를 돌아본 곳에 자리한 것은 눈물 콧물을 흘리고 있는 한소라.
‘얘는 또 왜이래.’
“이것 좀.”
“혼자 두지 마세요…. 제발 혼자 두지 마세요.”
“이것 좀 놔요.”
“제발 혼자 두지 마세요. 제발 살, 살려주세요. 말씀 좀 잘해주세요. 방금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말씀해주세요. 제발요. 제발 부탁드려요. 콜록. 제발….”
“아니, 일단 이것 좀….”
“안 돼요. 안 돼. 놓고 가지 마세요. 놓고 가지 마요. 혼자 두지 말아주세요. 시키는 건 뭐든 할게요. 놓고 가지 마. 놓고 가지 말라니까! 제발… 어어어엉….”
한소라를 붙이고 따라가는 건 당연히 마이너스다.
막말로 바람피우는 현장을 목격한 부인을 불륜녀와 함께 데리고 가는 꼴.
일단은 놓고 가는 게 베스트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마치 고목나무에 달라붙은 매미처럼 내 다리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으니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내 유약한 근력 수치로는 이 여자를 떨쳐낼 방법이 없다.
“방금 건 사고였다고 말씀해 주셔야 해요. 저, 저한테는 아무 관심도 없다고 말씀해 주세요. 제발… 길가에 돌멩이보다 하찮게 생각한다고 말해주셔야 돼요. 콜록.”
“알겠습니다. 알겠으니까.”
“아아아안안 돼요! 놓고 가지는 마세요. 놓고 가지는 말아주세요! 아까 것도 전부 설명해 드릴게요. 놓고 가지 말아주세요. 혼자 두지 마. 제발… 제발 혼자 두지 마…. 콜록. 살려줘… 살려달라고! 이 나쁜 새끼야!”
사례라도 들렸는지 계속해서 콜록거리고 있는 꼴이 가관이다.
본래 한소라가 정하얀을 무서워 한다는 건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지만 지금 보니 내가 생각한 것보다 상태가 더 심각하다.
아예 정상적인 사고가 마비되어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이고 있는 것 같다.
그래도 최근 좀 나아졌다고 생각했던 내가 우스워질 지경이었으니 다른 말은 필요 없으리라.
여기서 시간이 더 끌리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당연하다.
자꾸만 머릿속으로는 카스가노 유노가 봤던 미래가 떠오른다.
‘라이오스 불바다 설.’
정확한 시기를 알 수가 없다는 게 굉장히 신경 쓰인다.
혹시나 그게 바로 오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나 역시 점점 더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만약에 카스가노가 말했던 것처럼 정말로 정하얀이 도시를 폐허로 만들어버린다면….
‘수습할 수도 없을 거야.’
그건 내가 수습할 수 있는 영역을 완전히 벗어난 이야기다.
계속해서 이곳에서 시간을 끌리는 것도 지양해야 할 일.
일단은 얘를 데리고 가는 게 최우선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한숨을 푹 쉬고 입을 열자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는 얼굴이 시야에 비친다.
“일단 일어납시다. 빨리. 지금부터 찾으러 갈 거니까.”
“네?”
하지만 곧바로 들려온 말에는 사정없이 고개를 끄덕여왔다.
“그게 싫으면 여기….”
“갈게요! 갈게요! 당연히 가야죠. 당연히. 당연히 갈 거예요. 같이 가요. 빠, 빨리 준비해야 되니까. 빨리…. 네. 빨리 가야죠. 그래야 이 오해를 풀 수 있죠.”
서둘러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고 하지만 다리가 풀린 건지 제대로 서지도 못하고 있다.
마치 갓 태어난 얼룩말이 몸을 일으키려고 하는 모습과 오버랩 된다.
이쪽은 곧바로 상체를 가릴 수 있는 상의를 집어 던졌고 한소라는 부들부들 떨리는 몸으로 나갈 준비를 마쳤다.
“소라 씨한테 오는 피해는 없을 테니 진정하셔도 됩니다. 방금 건 오해였다고 잘 말할 테니까 너무 불안해하지 않으셔도 된다는 겁니다.”
“네… 네. 알겠습니다. 네.”
“그리고 아까 전에 물었던 일에 대해서도 상세히 대답해 줄 것. 그게 싫으면 여기 혼자 계시면 됩니다.”
“당… 연히 말씀… 드려야죠. 네. 당연히….”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따라오시면 될 겁니다.”
“알겠어요. 네. 전부 다 할게요. 시키는 건 전부 다 하고 말씀도 드릴게요. 대, 대신 꼭….”
“방금 그건 잘 말해보겠습니다.”
자신 있게 말을 하기는 했지만 일단은 나부터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다.
‘너만 엿 되는 게 아니야, 소라야…. 나도 마찬가지야.’
정하얀이 어디로 갔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서둘러 움직이는 것이 당연하다.
계속해서 카스가노 유노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째서, 어떤 방식으로 라이오스가 폐허가 되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왠지 모르게 그 일이 목전까지 닥쳐왔다는 느낌이 든다.
정하얀의 폭주로 폐허가 된다는 것도 전부 추측에 불과하지만 적어도 지금 생각나는 건 그것밖에 없다는 거다.
재빠르게 달려가 찾고 싶었지만 다리를 절뚝거리면서 달리는 한소라 때문에 그것도 여의치 않다.
혹시나 자신을 두고 가는 것이 아닐까 걱정하는 한소라의 얼굴이 보였지만 기왕 이렇게 된 거 함께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말로 야생의 정하얀이 한소라를 습격하지 않을 보장이 없는 건 아니다.
나와 떨어진 걸 노린 이후, 훈련소에서 끝내지 못했던 이벤트를 마무리 짓기 위해 출몰할 수도 있다.
어차피 멀리가지는 않았을 테니 상황을 정리해 보며 찾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리라.
“아까 전에 있었던 일이나 이야기해 봅시다, 소라 씨.”
달리면서 말까지 하려니 힘든 모양이다. 혹시나 낙오될까 곧바로 입을 열어오는 모습.
그만큼 떨어지고 싶지 않다는 필사적인 의지가 느껴졌다.
“정확히 어, 어떤 것부터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일단 어째서 소라 씨가 마력 탈진 현상을 겪었는지부터.”
“마법을 발현시킨 대상이 저니까요.”
“소라 씨가 아까 같은 종류의 주문을 발현할 수 없다는 건….”
“아니요. 저는 단순히 마지막 시동어만 외우고 말 그대로 발현만 시켰을 뿐이에요. 어떻게 하신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정하얀 님이 저에게 주문을 양도해 주셨어요. 양도라는 표현이 어울릴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게 가능한 겁니까?”
“단발성이니까요. 물론 그마저도 이론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거기에 제 마력을 전부 다 합쳐서 뽑아낸 마법이 보신 마법이에요.”
‘정하얀이니까 가능한 건가.’
말하자면 어마어마한 마력이 잠깐 동안 한소라의 몸을 빌려 발현된 셈이다.
아마 이건 흔적을 찾기 어렵게 하기 위해 마력을 한 번 꼬아놓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한소라가 주문을 발현한 사이 정하얀은 또 다른 주문을 외웠을 테고 틀림없이 그 작업은 이후에 벌어질 조사에 혼동을 주기 위한 주문일 가능성이 크다.
주문을 완성한 사람은 정하얀이지만 발현자가 흑마법사.
이것 역시 계획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주문에서 정하얀이 사용할 수 없는 흑마법의 향기가 느껴진 것도 이 때문이리라.
어느 정도 궁금증이 해결된 것 같은 느낌.
퍼즐이 딱딱 맞춰지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미리 말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겁니까?”
“죄송합니다. 죄, 죄송합니다.”
탓하는 건 아니다.
한소라가 저런 행동을 했다는 건 충분히 이해가 간다.
어째서 둘이 합이 맞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다가 이야기가 나왔고 한소라는 정하얀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누가 흑마법사 아니랄까 봐.’
정하얀이랑 계약이라도 한 것 같은 모습은 어처구니가 없다 못해 당황스럽다.
물론 한소라의 입장에서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들이닥쳤을 테니 거절이라는 선택지는 없었던 것.
오히려 정하얀의 계획에 무한 긍정하며 그녀를 보조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러 가지로 흔적을 찾지 못하게 손을 써 놨어요. 굳이 제 몸으로 마법을 발현한 것도 그 이유였고 말려보려고 했지만….”
말려보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에게 그 정도의 용기가 있을 리가 없다.
“너무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셔서….”
“…….”
“생각하시면 생각하실수록 자기 생각에 갇히시는 것 같았어요. 모든 일이 잘못된 게 그… 공화국 사람들 탓이라고…. 혼자서 결론을 내버리시는 것 같았어요.”
“도대체 뭐가.”
“부길드 마스터가 자기를 이상한 여자로 생각하는 게 싫다고 하시면서… 저는 오히려 질투하신 것 같다 말씀드렸고, 처음에는 무척 좋아하셨지만 그 이후로도 부길드 마스터가 굉장히 바쁘신 바람에….”
“더 불안해졌다는 말입니까?”
“네. 이후에는 이해할 수 없는 말만 계속해서 중얼거리시더니 결국에는…. 이제는 자신을 미워하게 된 것 같다고 말씀하시거나 부길드 마스터를 똑바로 쳐다볼 자신이 없다고… 일을 해결해야겠다고. 저는 그게 이런 걸 뜻하는 건 줄 몰랐어요. 순수를 증명해야 한다면서… 계획에 함께해 달라고 해서…. 당연히 저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도통 몰랐지만 그, 그냥 살고 싶어서… 아프기 싫어서… 흐그윽….”
‘슈바….’
서러움이 폭발했는지 횡설수설 말을 내뱉는 모습은 가관.
눈물이 떨어지는 모습은 솔직히 조금 가슴 아프게 느껴졌다.
‘잘못은 나한테 있는 것 같은데….’
반갑지 않은 손님의 등장에 정하얀을 순간적으로 밀어버렸다.
물론 이후에 당겼다고 생각했지만 정하얀의 입장에서는 이게 당기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 문제.
저주받은 신단 사건 이후로 무척이나 조용했기 때문에 이 정도로 케어가 되고 있었다고 생각한 것이 패착이었다.
얌전한 정하얀 때문에 나 역시 긴장을 놓고 있었다.
결국에는 터질 만한 게 터진 것이다.
‘눈을 똑바로 쳐다볼 자신이 없다는 건 또 뭔데.’
진청 같은 놈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에 경고를 한 번 던졌을 뿐이다.
어째서 그게 자신이 이상한 여자가 되는 거고 순수를 증명해야 되는 일이 되는 건지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고인물의 입장에서는 쪽지 한 번 잘못 건넨 것으로 평생의 원한을 받게 된 셈.
‘망했어.’
점점 더 종말 엔딩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은 느낌.
카스가노 유노가 봤던 미래가 내 눈 앞에서 계속해서 아른거린다.
‘다 같이 죽자는 엔딩은 아닐 거야. 그렇지? 그게 맞지?’
어쩌면 지금도 자신의 순수를 증명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뛰어다니고 있을지도 모른다.
전부 다 끝내지 못한 일을 스스로 마무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일 수도 있다.
뭐가 됐든 이쪽이 최악의 상황에 처하게 된다는 건 확실하다.
서둘러 눈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자 주먹을 꽉 쥐고 밖으로 우다다 뛰어가고 있는 정하얀의 뒷모습이 시야에 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