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1
회귀자 사용설명서 311화
정하얀 사용설명서 (5)
“하얀아.”
“아… 오, 오, 오빠 오셨어요?”
황급히 고개를 돌려 우다다 달려오고 있는 게 시야에 비쳤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것 같은 표정, 아니, 조금 다르기는 하다.
왠지 모르게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으니까. 정체 모를 죄책감 역시 시야에 비친다. 그렇지만 그 감정은 찰나. 지금의 정하얀은 확실히 평소대로의 모습이다.
“하얀아 너….”
살짝 말을 꺼내니 입술을 앙다물고 대답할 준비를 하고 있는 모습. 본인도 걱정되는지 심호흡을 하는 게 눈에 보였다.
정하얀은 거짓말에 재능이 없다. 특히나 이쪽에 하는 거짓말은 절망적일 정도로 티가 난다.
만약 정하얀이 거짓말을 하려고 한다면 지금처럼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질문을 던지려다 주변을 바라보게 된 것은 당연.
마음의 준비는 했지만 거짓말에 서투른 정하얀이 ‘사, 사실은….’이라면서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을까 걱정됐기 때문이다.
애초에 이런 장소에서 물어보는 건 적절하지 않다.
“네?”
“아니, 아니다. 조금 있다가 이야기하자.”
보는 눈이 너무 많다. 만약에 정하얀이 이 일을 저지른 게 맞다면 아는 사람은 적으면 적을수록 좋다.
붉은 용병과 요조라 길드의 길드원들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혹시 모를 상황이 일어날 수도 있는 만큼 조심해야 했으니까.
지금 당장 정하얀을 끌고 가는 것도 이상하게 보일 것 같은 느낌. 어쩌면 이번 일은 정하얀이 벌인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마력을 소비한 기색이 없어.’
두 눈을 확실히 뜨고 봐도 그렇다. 마력 99가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방금 같은 마법을 한 번 사용하면 탈진현상 정도는 와야 정상이다.
너무나도 정상처럼 보이는 안색 때문에 혹시나 정하얀이 범인이 아닐 가능성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는 했지만….
‘뭔가 다른 방법이 있을 수도 있지.’
아무리 정신을 놓았다고 한들,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일을 터뜨렸을 리 없다.
만약에 범인이 그녀라면, 정하얀 역시 무언가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이번 일을 던진 거라고 생각하는 게 맞다. 아마 증거나 꼬리 같은 것들은 진작에 처리했으리라.
공화국의 숙소뿐만이 아니라 다른 지역도 함께 날려 버린 것 역시 교국이 의심받는 상황을 피하고 싶기 때문에 만들어진 결과물이리라.
마력탈진을 겪지 않은 것 또한 그 일의 연장선. 일단은 고개를 돌려 멍하니 있는 박덕구를 바라보며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덕구야.”
“엉?”
“하얀이 데리고 가서 밖에 좀 나갔다 와.”
“이 시기에 갑자기 무슨… 무슨 의미로 말하는 거요?”
“아마 이번 일에 휘말린 민간인이나 다른 사람들도 있을 거다. 다른 일은 하지 말고 수습작업을 도와주는 일에만 집중해.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겠어?”
“아아아….”
“중립국 애들 도와주라는 이야기다. 마법으로. 가는 김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걸 구호물품으로 내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고…. 아무튼 메인은 마법이야. 할 수 있는 내에서 최대한 잘 도와줘야 한다. 이 일은 너한테 맡기마.”
“아아! 오! 그런 거였구만! 크으… 역시 형님이요.”
“무슨….”
“이런 상황에서도 다른 사람들을 챙기려는 모습이… 역시 다르긴 다르다니까. 이게 의인이지 의인! 항상 무심한 듯하지만 그 누구보다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고 있는 거 아니요! 의인 이기영! 울림이 다르다니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빨리 다녀오기나 해.”
“아암. 한시가 급한 상황이지. 그렇고말고. 맡겨주쇼! 완벽하게 해결할 테니까.”
“요조라 길드의 마법사들 몇몇도 동행하고. 하얀이는 도시 한 바퀴 돌고 온 이후에 이야기 좀 하자.”
“네…. 오빠.”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에 점점 불안감이 깃든다. 정말로 오줌이라도 마려운 것 같은 표정. 계속해서 눈을 바라보자 은근슬쩍 시선을 피하는 게 눈에 보인다. 말을 더듬지 않은 것을 보니 평소와는 다르게 의식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네가 그런 거 맞잖아. 슈바….’
아직 확신할 수는 없지만 정하얀의 얼굴을 보고 반쯤 확정 지을 수 있었다. 어떻게 일을 벌 린 건지는 모르겠지만….
‘쟤가 한 거 맞아.’
이번 일의 주역은 정하얀일 확률이 높다. 만약 아니더라도 그렇게 생각하고 움직여야 했다. 조금 더 빨리 여기서 내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당연지사. 마법의 발현자로 의심받을 수 있는 만큼 체내에 마력의 여유가 있다는 걸 다른 이들에게 보여줘야 한다.
봉사활동은 어디까지나 덤이다. 운이 좋으면 라이오스에게도 잘 보일 수 있으니 지금 당장은 정하얀을 내보내는 것이 맞다.
아무튼 박덕구와 정하얀 그리고 요조라 길드의 몇몇 마법사들은 이쪽의 재촉에 빠르게 이 자리를 벗어나기 시작. 일이 터진 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으니 딱 적절하기도 한 타이밍이기도 한 것 같았다.
“다녀올 테니 조심 좀 하쇼, 형님. 혹시나 아까 그게 또 떨어지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으니까.”
“그럴 가능성은 적으니까 일단 다녀오기나 해. 이쪽은 방어마법 전부 구축하고 있을 테니까.”
“거 알겠소.”
박덕구와 정하얀이 더 이상 눈에 비치지 않게 되어 있을 때, 이쪽 역시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만약에 정하얀이 증거를 꼭꼭 숨겨 놨다면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다. 혹시 그녀가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런 종류의 마법이 어디서 터져 나왔는지 알아내야 했다.
이미 교국에서 온 다른 마법사들과 카스가노 유노가 대놓고 샘플을 채취한 이후 반응을 보고 있는 상황이다. 내가 가까이 다가서자 환영한다는 듯한 얼굴들이 시야에 비쳤다.
이쪽 역시 마법에 커다란 지식이 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적어도 연금술은 이런 부분에선 도움이 될 때가 많다. 심지어 이쪽은 마음의 눈도 가지고 있으니 기존 마법사들보다 백배는 더 도움이 되리라.
[??? 흩어진 마력결정-전설 등급]
[준신화 등급 마법 ??? 의 영향을 받은 결정입니다. 고급 촉매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곧바로 돗자리를 깔고 눈에 마력을 모으기 시작하자 이것저것 보이는 것이 많다.
[??? 잔존마력-전설 등급]
[준신화 등급 마법 ??? 의 영향으로 대기에 떠돌아다니고 있는 잔존마력입니다. 7시간 후에 흩어질 예정입니다.]
‘준신화 등급….’
발현된 마법의 등급이 준신화 등급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마력 99 이상의 효율을 가지고 있는 종류의 주문이라는 것.
확실히 이 눈으로 보기에도 보이지 않는 것들이 많다. 준신화 등급이라는 등급 판정을 받았으니 제대로 보이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실제로 마법이 떨어질 당시에도 눈에 비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
생각이 많아지기는 했지만 곧바로 플라스크를 열어 연구 가치가 있어 보이는 것들을 수집하는 것 또한 일, 마력결정이나 파편, 잔존마력 같은 것들은 다른 이들이 볼 수가 없으니 내가 직접 일을 하는 것이 더 빠르다.
다른 마법사들이 마력만 묻은 쓸데없는 돌멩이를 샘플이랍시고 줍는 꼴을 보면 조금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이건 내 눈으로 봐도 구별하기가 쉽지가 않다.
‘잘했네.’
아마 흔적들 역시 통째로 집어삼켰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리라. 실제로 가까이 다가가 삼켜진 단면을 보면 완벽하게 깔끔하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흔적이 있는 곳은 대부분이 이런 단면들에서 떨어져 나간 조각들, 그 외에는 흔적조차 보이지가 않는다. 이런 식으로라면 마법의 발현지를 찾기도 쉽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든 것은 당연지사.
대기에 떠돌아다니고 있는 잔존마력이 앞으로 7시간 후에 사라진다는 걸 생각해 보면 흔적을 찾기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조금 재미있었던 것은 이 마법의 영향을 받은 파편들이 촉매로도 사용할 수 있었다는 것이었는데 아직 정확한 쓰임새를 알 수는 없었지만 전설 등급의 촉매인 만큼 여러 가지 쓰임새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이 마법 자체 역시 굉장히 흥미롭다.
‘마치 공간이 통째로 삼켜진 것 같은데….’
확실히 그런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발렌틴의 팔이 잘리지 않고 기형적인 방향으로 뒤틀린 것을 보면 공간에 삼켜지기 전에 팔을 빼냈다고 생각하는 게 맞다.
녀석은 힘으로 자신을 끌어당기는 인력에 저항했고 팔이 부서지기는 했지만 완전히 잃는 것을 면할 수 있었다.
만약에 조금 더 구체의 안쪽으로 빨려 들어가거나 저항하지 못했다면 녀석의 어깨, 혹은 몸 전체가 깔끔하게 떨어져 나갔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피하는 게 늦거나 저항할 수 없는 이가 대상이라고 한다면 시체조차 남기지 못한다. 심지어는 혈액조차 남기지 못하고 죽는다.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지는 것이다.
‘아니야…. 사라지는 게 아니야….’
이건 공간에 삼켜지는 게 아니라고 판단한 것은 아주 작은 물질 하나를 발견했을 때. 먼지 한 톨 같은 크기로 만들어진 작은 조각이다.
평범한 사람의 눈에는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일반 핀셋보다 더욱더 작게 만들어진 핀셋으로도 제대로 잡히지 않을 정도. 심지어는 그 어떤 정보도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평범한 돌멩이나 다름이 없었지만….
‘뭔가 이상해.’
순간적이지만 저게 무엇인지 깨닫는 것은 당연.
‘미친….’
사라지는 게 아니다.
‘압축됐어.’
이 마법의 영향을 받은, 이 장소를 깔끔하게 삼켜버린 단면이 이 작은 조각으로 압축되어 버렸다.
‘미친… 미친…. 슈바….’
어차피 뭐에 맞나 뒈지는 건 매한가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공화국의 피해자들이 이 작은 조각으로 압축됐다고 생각해 보면 절로 모르게 식은땀이 나오는 게 당연.
이건 구의 형태가 폭발하는 그 순간부터 주변에 있는 걸 먼지 한 톨로 압축시켜 버리는 종류의 마법이다. 사람이 어떻게 인지하기도 전에 빨아들이고 압축시켜 버린다. 순식간에 뼈와 혈액이 으스러지고 무와 비슷한 형태로 되돌아간다.
당황스럽지만 이 먼지 한 톨이 돌멩이라도 들고 있는 것처럼 무겁게 느껴진다.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이 물건에 이 일대를 파먹은 지면이 들어 있는 셈.
만약 마력을 가지고 있거나 그에 준하는 걸 이런 형태로 압축시킬 수 있다면, 어떤 의미로는 쓸 만한 에너지 자원이 되는 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너무 무서운데….’
이건 너무 무섭다.
처음에는 제발 정하얀이 아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마법에 대해 알아 가면 알아 갈수록 차라리 정하얀이었으면… 하고 바라게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딴 마법을 정체를 알 수 없는 적이 쓴다고?’
하늘에서 운석이 떨어지는 것과 비슷한 레벨의 자연재해로 느껴지는 수준, 이게 정하얀이 벌인 일이라면 수습할 수는 있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적이 이 마법을 발현시킨 게 맞다면 수습을 개뿔 빠르게 도망치는 방향을 선택해야 할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태세전환 버튼을 누르는 게 가장 현명한 방법.
‘제발 하얀이 작품이어야 돼…. 제발….’
그 와중에 불안했던 점은…. 이 작은 물질에서 자꾸만 익숙하지 않은 검은색 연기가 눈에 비쳤다는 것.
아주 미세해서 눈치채지 못할 정도인 것은 물론 다른 종류의 잔존마력이 더 많이 남아 있기는 했지만, 수많은 잔존마력 중 흑 마법으로 추정되는 마력이 존재했다는 게 자꾸만 신경 쓰였다. 기억 속에 밀어 넣고 있었던 사람 하나가 생각난 것은 당연지사.
‘한소라 어딨어.’
퍼즐이 맞춰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얘 어디 있어…. 슈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