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6
회귀자 사용설명서 306화
간단한 게임(2)
앞으로 20수다.
녀석이 움직일 말의 위치와 내가 도망갈 수 있는 공간을 생각해 봤을 때, 적어도 20수 안에는 녀석의 병력이 이쪽에 당도한다.
녀석이 호언장담했던 100수까지는 아직 조금 더 남은 상황.
버틸 만큼 버텨 봤지만 놈은 앞서 던진 미끼를 무시하거나 도망친 병력을 쫓아가는 데 턴을 소비하지 않았다.
왕만 잡으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으리라.
‘왕에 병력을 더 붙였어야 했나.’
병력의 전멸을 막으려고 사방팔방으로 던져놓은 미끼들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한 셈.
하나 하나 잡다가는 백수 안에 이쪽을 잡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있는 것이다.
‘내 손가락….’
물론 다시 붙일 수는 있지만 그래도 고통스러운 건 싫다.
가슴 속 한구석에 저 미친 고인물에게 한 방 먹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도 당연.
곰곰이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버틸 만큼 버텼지만 퇴로는 이미 막혔고 사방팔방으로 이쪽을 조여 오고 있다.
왕을 뒤로 물리는 것도 한계가 있었고 백성들은 이미 대부분이 장기말로서 최후를 맞이했다.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렸고 녀석이 힐끔 이쪽을 바라보는 것이 보였다.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은 것인지 조용한 얼굴로 이쪽을 응시하고 있는 것을 보니 아직도 이쪽이 적당히 자신을 상대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이미 몇십 분 전에 나온 식사는 이쪽을 기다리다 못해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고 게임을 보고 있는 이들은 조용히 내 쪽을 응시한다.
판을 볼 줄 아는 이들은 수 계산을 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으리라.
‘슈바….’
선택지가 없지만 해보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살짝 입꼬리를 올리는 것은 물론 마치 모든 게 이쪽의 생각대로 흘러가고 있다는 듯한 미소를 내비친다.
잠깐이지만 갤러리들의 얼굴에는 약간의 의아함이 들어선다.
어째서 이런 상황에서 이쪽이 이런 표정을 짓는 것인지 궁금해하고 있는 것이다.
당연하지만 모든 게 개짓거리이자 연기.
그냥 허세였고 여유로운 척하는 것에 불과하다.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있던 내가 갑작스레 실실 쪼개고 있으니 진청 역시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이곳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녀석에게 이쪽의 다음 수는 다를 거라는 생각을 심어준 것이다.
‘다르긴 개뿔.’
병법은 내 영역이고 장점도 아니다.
내 입으로 이런 말하기에는 부끄럽지만 이쪽이 그나마 가지고 있는 장점은 선동과 날조, 사기와 협잡.
그리고….
‘심리전.’
서로 얼굴을 맞대고 할 수 있는 이런 종류의 게임에서는 그나마 이런 장난이 먹힐 여지가 있다.
손가락을 튕기자 파직 하고 테이블에서 자그마한 용의 팔이 생겨나기 시작.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이들의 얼굴에 놀라움이 깃든다.
그야 그럴 것이다.
그다지 쓸모 있는 능력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용을 연성하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은 사람은 본 적이 없다.
왕.
그리고 왕과 함께 움직이는 본대를 이쪽이 연성한 연금술의 산물이 붙잡았고 천천히 말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 와중에도 걸려들었다는 얼굴의 미소는 그대로 유지.
상대의 기분을 긁는 야비한 표정을 계속해서 내보낸다.
퍼져나갔던 병력은 오히려 녀석의 심장으로 파고들게 만들고 그나마 평야에서 시간을 끌어준 기사단 역시 발걸음을 돌린다.
어처구니없는 악수요, 아무의미도 없는 한 수였다.
‘먹혀라. 제발… 먹혀라.’
녀석이 이쪽을 과대평가하고 있는 게 정답이라면 이건 먹힐 수 있다.
아직, 이쪽이 완전히 힘을 잃은 것이 아니다.
뿔뿔이 흩어져 있는 병력 그리고 왕과 함께 있는 병사들 역시 최후의 최후까지 저항할 만한 여지가 있다.
보급품 역시 마찬가지.
충분하지는 않지만 녀석의 왕에게 닿을 수 있는 물품들은 조달할 수 있다.
백성들이 없으니 더 이상의 생산은 불가능하지만….
‘병사들에게 있는 보급품을 기사에게 옮기면 돼.’
물론 병사들은 고립되어 죽는다.
하지만 기사의 칼은 상대 진영의 왕에게 닿을 수 있다.
반격할 생각 따위는 없지만 내가 던진 이 의미없는 한 수가 녀석도 이해하지 못하는 신의 한 수가 되기를 바랄 수밖에 없는 상황.
녀석이 조용히 이쪽을 바라본 것은 바로 그때였다.
‘먹혔나.’
어째서 이런 수를 둔 것인지 고민하는 듯한 얼굴.
곰곰이 머리를 굴리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 우습다.
이 다음 수가 뭐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생각할 여지는 만들었다.
너무 과한 허세는 오히려 의심을 살 수 있으니 적당히 거만 떠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리라.
이해해 보라는 듯이, 받아 보라는 듯이 살짝 다리를 꼬며 녀석을 응시했고 녀석은 내가 둔 수가 정말 이게 맞는지 판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말은 없다. 아니, 불필요하다.
녀석과 함께 온 공화국의 갤러리들이 멋대로 해석해 주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예상대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
녀석이 판단력을 잃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갤러리들의 소리에 조금은 흔들려줬으면 싶었다.
눈에 깃든 것은 의심과 확고한 일념.
한쪽은 내 수를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할 테고, 남은 한쪽은 상관없으니 밀어붙여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녀석의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싸움에서 일단은 한 번 두고 보자는 쪽이 승리하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녀석이 말을 손에 움켜쥐기 시작.
두근두근 떨리는 마음으로 판을 바라봤고 녀석은….
‘됐어!’
한 수를 더 두고 보는 것을 선택했다.
‘푸핫.’
물론 한 턴을 더 벌었다고 해도 이쪽이 끝장 난다는 것은 예정되어 있는 일이지만 적어도 한 방 먹인 듯한 느낌은 있었다.
속아준 건지, 정말로 속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간에 이쪽의 의도대로 움직여주고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테이블 위에 아직도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용의 팔로 다시 한번 말을 집어 든다.
녀석의 얼굴에 기대감이 깃든다.
이쪽이 다음에 무엇을 할지 기대하는 듯한 표정.
당연하지만 보여줄 것은 개뿔 아무것도 없다.
단지 시간을 벌기 위한 쇼였지만 정말로 녀석은 내게 숨겨진 뭔가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병신.’
아마 경기가 끝나고 녀석이 이 대전을 천천히 돌아본다면 방금의 한 수에는 그 어떤 의미도 없었다는 걸 눈치챌 것이다.
다시 한번 내가 말을 들어 올렸던 바로 그때였다.
콰앙!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문이 튕겨져 나간 것.
문뿐만이 아니라 입구가 완전히 박살 나 있는 상황.
순간적으로 고개를 돌리니 굉장히 반가운 사람이 시야에 비쳤다.
“희라 누나?”
내 손가락을 지켜주기 위한 천사가 강림한 것이다.
‘슈우발! 차희라 최고다!’
살아남은 손가락은 반드시 그녀를 위해 사용하리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샘솟기 시작했다.
당연하지만 차희라만 온 것이 아니다.
박덕구와 한소라 역시 자리하고 있었고 붉은용병 단원.
그리고….
‘카아아아스가노 유노호우!’
두 눈을 감은 채 이쪽을 다급히 찾는 얼굴이 보였다.
저 얼굴이 저렇게 반가워 보이기는 또 처음.
“뭐….”
진청은 잠깐이지만 꿀 먹은 벙어리가 됐고 용병여왕 이야기만 나오면 정신머리를 놓아버리는 러시아산 박덕구는 그녀를 향해 돌진한다.
앞을 막아선 것은 전투력 측정기 코리안 박덕구.
쾅 하는 굉음이 들려오며 코리안 박덕구가 튕겨져 나갔지만 녀석은 다시 한번 몸을 일으켜 러시아산에게 돌진한다.
“이 버러지가… 죽여주마.”
“거, 인사가 너무 거친 거… 쿨럭. 아니요?”
갑작스럽게 일어난 상황에 샤오린은 채찍을 빼들었고 다른 공화국의 떨거지들 역시 전투 준비를 하고 있다.
물론 나를 찾으러 온 우리의 구원자들 역시 눈에 독기를 품고 있는 상황이다.
진청은 몸을 일으켰고 다시 한번 러시아산 박덕구를 향해 입을 열었다.
“발렌틴 알렉산드로. 제가 문제를 일으키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
“차희라 님, 오랜만입니다. 그리고… 카스가노 유노 님도 오랜만이군요.”
“네 인사나 받자고 여기에 찾아온 거 아니야, 쥐새끼. 사람 하나 돌려받으러 온 거지.”
“아, 뭔가 오해가 있으신 모양입니다. 교국 8좌의 이기영 님을 저희가 핍박한 것이 아닙니다만… 오히려 이기영 님께서 저희쪽에….”
“입 다물어라. 정신 놓는 꼴 보기 싫으면… 지금 내가 움직이지 않는 건 어디까지나 우리 자기랑 저 미친 채찍녀한테 진 빚 때문이니까.”
진청이 살짝 얼굴에 미소를 띄우며 샤오린을 바라보는 것이 보였다.
샤오린은 슬그머니 팔을 누그러뜨리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
“캐슬락에서 저 고릴라가 미쳐 날뛴 걸 잠깐 말려준 적이 있었거든요. 아마 그거 때문일 거예요.”
“맞아. 아무튼 간에 이유가 어찌 됐든 이벤트는 여기서 끝이야. 아, 발렌틴도 여전하네. 어때 그동안 잘 지냈어?”
“이 잡년이….”
서로 으르렁거리는 꼴이 꼭 개와 고양이 같다고 생각했다.
공화국과 교국은 대륙인들 뿐만이 아니라 이방인들끼리도 사이가 안 좋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던 순간이었지만 반갑지는 않다.
만약에 사고가 일어난다면 녀석들의 품에 있는 나와 정하얀이 제일 먼저 휩쓸릴 가능성이 크다.
대륙법상으로도 중립지역에서 사고를 치는 것은 금기 아닌 금기였고 나와 마찬가지로 진청 역시 커다란 마찰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하는 눈치다.
어느쪽의 전력이 우위라고 말할 수 없지만 차희라와 카스가노 유노, 정하얀의 스쿼드는 결코 약하지 않다.
아직 저 고인물의 능력이 미지수이기는 하지만 부딪친다면 사망자는 분명히 나온다.
뭐가 어찌됐든 간에 일단은 공기를 꽉 채우고 있는 적의를 잠재우는 것이 먼저였다.
“실례지만 이만 일어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진청님.”
“아….”
아쉽다는 눈빛.
그 다음을 보지 못한다는 게 어지간히 아쉬운 모양이다.
이쪽은 제법 당당하게 몸을 일으켰고 당연하지만 아무도 이쪽을 제지하지는 않았다.
진청이 내가 내민 손을 붙잡았기 때문이다.
녀석 역시 이곳에서 마찰을 일으키는 것을 원치 않으니 이 자리는 여기서 마무리되는 것이 맞다.
대충 악수를 하며 인사를 주고받는 훈훈한 분위기가 생겨나자 희라 누나 역시 긴장을 약간은 푸는 것 같은 느낌.
아무래도 녀석을 조금 더 놀려주는 게 좋을 것 같아 녀석을 향해 살짝 입을 열었다.
“그대로 갔으면 내기는 제가 이겼을 겁니다.”
당연히 개소리지만….
“재미있어 졌겠군요.”
녀석은 고개를 숙여 판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샤오린 님, 따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장담컨대 이번에도 안 주면 미쳐 날뛸지도 몰라요. 붉은 고릴라 눈치가 보여서 배웅은 못 나갈 것 같으니까 잘 들어가세요.”
당연히 샤오린과는 약속을 잡을 생각이다.
내부를 신경 쓰기에 바빴던 전과는 다르게 공화국에게 흥미가 생겼다.
저 진청이라는 놈이 어떤 놈인지, 남은 공화국의 오호 대장군은 누가 있는지, 기본적인 정보들도 캘 것이 많다.
이쪽이 샤오린과 인사를 하고 있는 사이 정하얀은 역시 진청과 무언가 말을 주고받고 있었는데, 무언가 쪽지를 받아드는 것이 보인다.
녀석이 처음 정하얀에게 내비쳤던 관심이 진심이었다는 걸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정이 안 가네, 저놈은.’
누군가가 이쪽이 가지고 있는 것에 손을 데려고 하면 기분이 나쁜 것이 당연하다.
슬그머니 정하얀을 바라보자 화들짝 놀라며 이쪽으로 뛰어오는 것이 눈에 띄었다.
막 정하얀에게 인사를 건네려고 했던 녀석은 잠깐 표정이 굳은 것 같은 느낌.
정하얀은 이쪽의 팔을 꼬옥 붙잡았고 나는 그녀를 향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시킨 건 제대로 했는지 확인해야 했으니까.
“방금 거 녹화했어?”
“전쟁 게, 게임 말씀하시는 거 맞으시죠?”
“맞아. 집에 돌아가면 바로 분석할 거야. 이지혜한테도 영상 보내고 하얀이는 피곤하겠지만 오늘 나랑 같이 밤새는 게 좋겠다. 괜찮지?”
“네… 네! 무, 물론이죠. 물론이고 말고요.”
“아. 그리고 나는 네가 저런 사람이랑 이야기 섞는 거 별로 안 좋아해. 내가 무슨 말하는지 알겠어?”
나는 되고 너는 안 돼.
전형적인 내로남불 쓰레기의 정석.
내 표정에 깃든 책망을 엿본 것인지 정하얀의 얼굴이 창백해지는 게 시야에 비쳤다.
순진한 정하얀은 본인이 바람이라도 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