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5
회귀자 사용설명서 305화
간단한 게임(1)
“게임 말입니까?”
“네. 단순한 놀이입니다. 체스나 장기 같은 게임이라고 생각하시면 편할 겁니다. 물론 그것보다는 조금 더 복잡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만…. 당신이라면 금방 이해하실 겁니다.”
‘갑자기 게임은 무슨 게임이야. 미친 자식이….’
그딴 건 상관없으니 그냥 빨리 집으로 되돌아가게 해달라고 말하고 싶다.
그렇지만 그렇게 말할 수 있을 리가 만무.
지금 이쪽이 다른 일에 휘말리지 않고 안전히 있을 수 있다는 건 어디까지나 눈앞에 있는 놈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게 맞다.
‘일단은 안전한 건가.’
분쟁 지역에서 문제를 일으키기 싫다고 하는 것을 보니 복잡한 일에 연루되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는 모양.
지금 당장은 이쪽에 묘한 호의를 보내오고 있는 것 같지만 본래 언제 뒤집힐 줄 모르는 게 사람 속내다.
일단은 녀석의 말에 따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었기 때문에 장단에 맞춰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분위기도 그다지 불편하지 않고 이 자식은 확실하게 샤오린과 발렌틴을 컨트롤하고 있다.
녀석에게 이 둘을 뛰어 넘을 수 있는 무력이 있어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도 손을 뻗어오지 않는 러시아산 박덕구를 보면 답이 나온다.
‘괜찮아.’
고개를 돌려 정하얀을 바라보자 여전히 긴장을 풀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지만 살짝 어깨를 두드려 주자 조금은 진정하는 듯하다.
죽을 뻔했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있었기 때문인지 식욕이 뚝 떨어졌지만 녀석이 권하는 대로 움직여줄 수밖에 없었다.
“식사는 제가 대접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 그보다 게임에 대해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혹시나 이런 종류의 게임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으십니까?”
“아뇨. 처음 봅니다만….”
녀석이 똘마니들 중 하나가 가져온 것은 우습게도 커다란 보드게임.
수십 가지의 장기 말로 구성되어 있었고 맵 자체는 마치 실제의 지형을 따왔다고 하는 것이 맞으리라.
숲, 바다, 사막, 평야, 성벽. 장기말 들의 구성 역시 굉장히 다양하다.
왕, 기사, 마법사, 기사, 사제, 백성, 정확히 뭐라고 딱 표현할 수는 없었지만 녀석의 말대로 장기나 체스의 연장선에 있는 것 같은 느낌.
다만 그것보다 더욱더 복잡하다. 전투 말들에게는 보급품을 전달해 주어야 했고 병과마다 분류되어 있는 병력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필요한 자원을 충족해야 했다.
병사들 역시 굉장히 세분화 되어 있었는데 궁병이나 보병, 기마병 같이 기본적으로 대륙에서 운용하고 있는 병과들이 많이 보였다.
‘게임은 개뿔….’
이 판은 전쟁의 축소판이다.
물론 녀석의 말대로 게임을 표방하고 있는 만큼 어느 정도의 룰이 갖추어져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나.
기본적인 룰을 제외한다면 실제 전쟁과 굉장히 유사하게 만들어져 있다.
‘의도가 뭐지.’
기본적인 의도가 궁금해지기는 하다.
어쩌면 정말로 여흥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이쪽을 시험해 보겠다는 의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굉장히 기대하고 있는 눈빛을 보면 나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았지만 지략의 천재 어쩌구 하는 것은 전부다 날조된 정보들이 대부분.
‘뭔가 오해하게 만든 것 같은데….’
하지만 거절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기본적인 룰은 항상 그렇듯 같습니다. 왕이 죽으면 패배. 가지고 있는 모든 말을 잃어도 패배입니다. 혹시나 궁금한 것이 생기거나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씀하셔도 됩니다.”
“네.”
“추가로 어느 정도 핸디캡을 드리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굳이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고요.”
“기분 나빠하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다행이로군요.”
‘기분이 나쁘긴 왜 나빠.’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다면 천만의 말씀.
본래부터 이쪽은 남보다 유리하게 시작하는 쪽을 즐긴다. 적당히 시간 떼우기 용으로 상대해 주는 것뿐이지만….
‘이건 기회지.’
살짝 정하얀 쪽으로 눈치를 보내니 이쪽이 뭘 원하는지 알 것 같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공화국의 군사라고 했으니 이런 종류의 전략 시뮬레이션에는 밝은 것이 당연.
아쉽게도 이쪽은 체스나 장기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지만 평범한 말놀이가 아니니 조금은 적응할 수 있을 것이다.
정확히 몇 십분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이… 이… 개자식. 미친 고인물이!’
시작부터 병력과 보급이 우위에 있었던 상황.
그렇지만 게임이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당황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이쪽이 처음이었다고는 하지만 내가 미숙함 이전에 녀석이 너무도 잘했다.
조금씩, 조금씩 이쪽의 말들을 갉아 먹으며 숨통을 조이는 꼴은 가관.
어떻게 보다 많은 병력을 유지하고 있던 내가 궁지에 몰릴 수 있었는지 궁금해진다.
말을 옮기면 옮길수록 점점 더 상황이 꼬이고 있는 것 같은 느낌.
실제로도 이쪽의 진영은 시작부터 쑥대밭이 나고 있었다. 더 짜증 나는 것은 녀석이 이쪽을 봐주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었는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흥미진진하다는 처음의 표정과는 다르게 조금씩 짜증 난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제국, 아니, 교국의 천재….”
중얼거리는 꼴은 가관.
아쉽지만 천재라는 건 홍보의 일환일 뿐이다.
제국 8좌를 발표했을 당시에 황실에서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를 많이도 뿌려댔으니 저런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녀석이 잘못된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기분이 나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따금 싸늘하게 이쪽을 노려보는 표정에는 확실히 멸시의 감정이 들어가 있다.
‘아니, 멸시랑은 다른가….’
지금 보여주는 표정은 지루한 얼굴도, 무시하고 있다는 얼굴도 아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척 기분이 나쁘다는 표정을 하고 있다.
‘저 새끼 왜 저래.’
조금은 의외의 목소리가 터져 나온 것은 바로 그때.
게임이 막 중반을 향해 흘러가고 있을 때였다.
“혹시 적당히 하고 계신 건 아니십니까? 이곳에 있는 다른 이들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말 그대로 게임일 뿐이고 승패에는 관계없이 저희는 마찰을 일으킬 마음이 없습니다.”
‘그게 뭔 개소리야.’
“조금은 진심으로 대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무슨 개소리냐고.’
이미 이쪽은 피똥이 나올 정도로 힘을 주며 진심으로 임하고 있다.
진짜로 내가 접대 게임을 하고 있었다면 아슬아슬한 시점에서 가까스로 져주는 방법을 선택했을 거다.
그게 로비고 상대방의 마음에 들어 갈 수 있는 방법이니까.
‘안 되는 걸 어떻게 해. 이 새끼야.’
적어도 이 게임에 익숙했었다면 이렇게 어처구니없게 밀리지는 않았으리라.
본래 룰 안에서 움직이는 게임이라는 건 항상 사기 칠 방법이 존재하니까.
만약 병법에 밝았더라면 발버둥이라도 쳐볼 수 있었겠지만 그쪽은 지휘관을 선택한 이지혜의 영역이지 내 영역이 아니다.
기본적인 공부를 해두기도 했고 스스로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을 한 적도 있었지만….
‘레벨이 달라.’
애초의 이쪽은 녀석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그 이후로 약 10수 정도가 더 흐른 상황, 앞 쪽에 있는 미친 녀석의 분위기가 조금 달라졌다는 생각이 든 것은 바로 그때였다.
“간만에 좋은 여흥이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제 입장에서는 충분히 명예추기경님을 배려해 드렸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아무래도 명예 추기경님께서는 저와 진심으로 겨룰 마음이 없으신 것 같군요.”
‘겨루긴 뭘 겨뤄, 이 미친놈아.’
“가벼운 내기를 해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야 명예추기경님께서도 조금 흥미가 동하실 것 같으니….”
“무슨?”
“앞으로 100수 안에 제가 이긴다면 제 승리, 그게 아니라면 명예추기경님의 승리라고 합시다. 내용은 무엇으로 하면 좋을까. 아, 손가락을 거는 것으로 합시다. 열 손가락 전부. 잘은 모르겠지만 단순한 내기라면 교황청의 템플러들도 용인해 줄지도 모르겠습니다.”
순간적으로 욕이 튀어 나올 뻔한 것은 당연지사.
이 더러운 고인물은 뉴비에 대한 배려 따위는 없다.
설마 하는 심정으로 살짝 고개를 들어 녀석의 얼굴은 봤지만 이미 눈은 나를 보고 있지 않다. 어떻게든 이쪽의 본심을 끌어내겠다는 심정으로 게임에 100% 집중한 모습이 눈에 띈다.
‘진심이야.’
고인물의 눈에 고여 있는 것은 티끌 하나 없는 진심.
성향으로 봤을 때 녀석은 도박을 즐기는 사람은 아니다.
이미 자신에게 승기를 기울었다고 생각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어쩌면 단순히 이쪽의 본심을 끌어내려는 욕심의 발로 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아쉽게도 이쪽은 본심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한 게 없다.
뭔가가 있으면 그걸 꺼내서라도 보여주고 싶은 심정.
‘이 미친 자식!’
“이, 이겨 버려요! 오빠! 봐주지 말아요!”
‘봐준 거 아니라고.’
정하얀 역시 내가 이길 수 있다는 듯이 두 주먹을 꽉 쥐고 응원을 보내고 있으니 눈앞 미친놈의 얼굴에는 조금의 긴장감이 감돈다.
‘씨발, 누가 이지혜 좀 데리고 와.’
아무리 생각해도 이 자리가 내 자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 것은 당연하다.
100수 안에 끝내겠다고 호언장담한 미친놈은 본격적으로 밀어붙이기 시작.
애초에 대항하는 것 따위가 불가능하다.
이쪽의 아둔한 뇌로는 저 고인물의 생각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거다.
‘버텨야 해.’
지지 않는 것 정도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패배의 조건은 왕이 죽으면 안 된다는 것과 말의 전멸을 막는 것.
곧바로 말을 놀리자 내 의도를 파악한 녀석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끝까지 싸워주지 않으시겠다는 겁니까.”
“당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당신에게 충분한 호의를 보였다고 생각했는데 명예추기경님은 끝까지 저를 무시하시는 것 같습니다.”
“뭔가 착각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정말로요.”
“…….”
정상인인 줄 알았던 녀석의 표정이 사정없이 구겨진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내가 녀석의 역린을 건드린 모양.
만약 어처구니없게 패배한다면 손가락뿐만이 아니라 목이 날아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니 다른 표현은 필요 없으리라.
하지만 이쪽의 행동은 변함없다.
중반부터 말린 경기를 뒤집는 것은 불가능.
애초에 이 건 턴제 게임이다.
공간이 한정되어 있기는 하지만 녀석이 한 칸을 앞으로 옮기면 이쪽은 한 칸을 뒤로 물리면 된다.
뒤는 생각하지 않고 버티는 것에만 집중한다면 100수는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왕을 살리는 걸 우선으로.’
다른 생각은 하지 않는다.
기사 하나는 비교적 움직이기 편한 평야로 내보내고 궁수나 암살자는 숲으로 도망친다.
마법사는 적의 시선을 끄는 용도로만 사용하고 백성들은….
‘버린다.’
백성들이 턴마다 공급해 주는 보급품을 최대한 확보한 이후, 시간을 끄는 용도나 길을 막는 용도로 밀어 넣는다.
본대를 향해 달려드는 백성들을 죽이는 것만 해도 녀석은 턴 하나를 소모하게 된다.
이게 만약 게임이 아니라 실전이었다면 나는 천하의 둘도 없는 개새끼가 됐을 테지만….
‘어차피 게임이니까 상관없지 뭐.’
솔직히 실제 상황이 오더라도 이렇게 행동할 수 있을 가능성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녀석이 만족할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저 고인물이 이기영이라는 인간에 대해 파악하고자 했다는 게 목적이라면 그 목적의 일부분은 이룬 셈이다.
‘쓰레기 같은 인간이라 미안하다.’
녀석의 주요 병력을 우리의 훌륭한 백성들이 막아주는 사이 이쪽의 왕은 뒤로 내빼기 시작.
일반 병사 역시 최후의 최후까지 사용하다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다고 판단되면 과감하게 밀어 넣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곡 차곡 이쪽을 잡아먹고 전진하는 놈의 군대는 숨이 막힐 지경.
‘니가 무슨 제갈공명이라도 돼?’
앞으로 20수, 20수 안에 이쪽의 왕이 녀석의 병사에게 잡히는 그림이 머릿속에 그려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