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0
회귀자 사용설명서 300화
중립국 라이오스(1)
불안한 감이 있었지만 정하얀을 다그치는 것은 적절한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마음 같아서는 무슨 미친 짓을 하는 거냐고 화를 내고 싶었지만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조금씩, 조금씩 성질을 건드리려고 했던 정하얀이나 과민반응을 한 차희라.
잘못은 둘 모두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차희라 쪽을 두둔하다가는 다른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일단은 태도를 지적한 뒤에 조금 더 존중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 같다는 걸로 시동을 걸었고, 실제로 불편하지 않았다는 의견도 피력했다.
물론 그 와중에 나를 생각해 줘서 고맙다든가, 네 마음은 잘 알고 있다든가 하는 립 서비스를 날린 것은 당연한 일이다.
처음 불 같이 다그칠 때에는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지만 그 이후에 날아 들어온 당근에는 사르르 표정이 녹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본인의 생각대로 모든 게 진행되지는 않았지만 일단 마무리가 당근으로 끝났다는 것에 만족한 것이다.
‘제길.’
여전히 본인이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는 것 같은 느낌.
물론 엄중한 경고에는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지만 이 약발이 어느 정도까지 갈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채찍에 좌절하는 만큼 당근에 회복하는 속도도 무척이나 빠르다.
전에 일어난 일은 어떻게 생각해도 앞으로 일어날 재앙의 예고편이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 당연했다.
힘을 얻은 이후로 곧바로 차희라에게 이빨을 들이민 것을 보면 다른 이들에게는 더 달려들 것이 뻔하다.
부릉부릉 시동을 걸려고 하는 폭주기관차를 바로 옆에서 보는 것 같은 느낌.
이걸 가만히 내버려 둔다면 당장은 조용하더라도 언젠가는 사건이 터질 것이다.
애초에 마법이라는 것은 나 역시 제대로 이해하기 힘든 영역이다.
보통의 마법사만 해도 그러할 진대 정하얀 정도 되는 마법사가 탄력을 받았을 때에 어떤 걸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상상하기 힘들다.
장담컨대 이쪽은 예상하지 못한 마법이 튀어나올 수도 있으리라.
‘힘들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정하얀은 이쪽에 무척 소중하다.
어떻게 보면 이건 등가교환이나 다름이 없다. 정하얀 정도의 마법사를 다루는 대가가 겨우 멘탈을 케어해 주는 정도라면 오히려 싸게 먹히는 장사라는 거다.
문제는 이상하게 위험해지는 것이었지만 미래를 생각해 보면 충분히 감내할 만하다.
물론 케어해 줘야 하는 사람이 그녀뿐만은 아니다.
하지만 차희라는 정하얀보다 훨씬 더 케어하기 쉽다.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서는 그나마 말이 통하는 이들 중 하나.
최소한 미치기는 전까지는 말이다.
내 입장에서는 두 사람이 아무런 마찰 없이 그대로 있어주는 것이 가장 베스트.
하지만 사람 일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풀리는 것이 아니다. 같은 마차 안에 들어선 와중에도 묘한 공기가 흐르기 시작한 것.
물론 정하얀이 차희라에게 어떤 시비를 거는 것은 아니었지만 두 사람 사이에 이상한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다는 건 그 누구라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연애 박사 박덕구나 정하얀 위험 감지에 특화된 한소라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니까 최근에 하얀이 누님이 조금 날이 선 것 같은 느낌이었다니까!”
“아… 그래.”
“아암. 내가 몇 번이나 말해왔던 거 아니요. 그동안 거 바빠서 제대로 뭘 할 시간도 없었는데 여리고 여린 누님이라도 스트레스를 받는 게 당연하지!”
“…….”
“내가 볼 때는 분명히 리프레시가 필요한 시기가 온 것 같은 느낌이요. 사실 그 용병 누님도 조금 날이 선 반응을 보이기는 했지만 말마따나 하얀이 누님 눈빛이 조금 살벌했던 거 아니요. 거 딱 뭐라고 정의하기는 힘든데… 솔직히 나도 조금 무서웠다니까. 조금 미안한 소리기는 한데 그냥 자리를 피해버리고 싶더라니까.”
슬그머니 한소라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괜스레 몸을 바들바들 떨어오는 게 시야에 비친다.
“연애박사 박덕구의 눈으로 본 게 확실하니 믿어도 문제없소. 솔직히 형님이랑 하얀이 누님이랑 거 잘 지내고 있는 거 같기는 하지만 진도도 너무 느리기도 하고 또 형님이 워낙 인기가 좋다 보니 여기저기에서 다른 여자 분들이 막 이렇게! 요렇게! 달라붙는 거 아니요. 큼큼. 아무리 여기 대륙의 연애관이 자유롭다고는 하지만 누님 같이 여리고 개미 한 마리 못 죽이는 사람들은 이런 일에 지나치게 스트레스 받는 법이지. 아암 그렇고말고! 그렇지 않나?”
“네… 물론이죠….”
개미 한 마리도 못 죽이는 건 도대체 어디서 나온 정보인 건지 궁금했지만 박덕구의 말에 태클을 걸 기력이 남아 있지는 않았다.
정하얀의 최대 피해자인 한소라 역시 무슨 개소리를 하냐는 듯 박덕구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사회생활을 위해서인지 일단은 고개를 끄덕인다.
다만 입술을 꽉 다물고 혹시라도 닥쳐올 실제 상황에 대비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언제 한번 둘이 여행이라도 다녀오는 게 좋은 거 아니요. 거, 그 나보트 남작인가 뭐시긴가 하는 사람 영지, 아니, 이제는 나보트 의원이지! 거기에 거울 호수 같은 게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쪽으로 언제 놀러나 가서 뱃놀이도 즐기고 천천히 저녁도 먹고 어쩔 수 없이 마차가 끊기는 게 최고일 거 같은데….”
“거울 호수 보러가려면 여기서 한참을 돌아서 가야 돼. 그리고 마차가 끊길 일이 뭐가 있어. 그리폰이 있는데.”
“당연히 그런 건 다 핑계 아니요? 원래 다 그런 거요. 큼큼. 내가 뭐라고 딱히… 말은 못 하는데 다 그런 거 아니요.”
“언젠가는 놀러 갈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 말이요?”
“휴식은 라이오스에서 취하면 될 거야. 그쪽에서도 제법 신경 써주고 있을 테고. 물론 그 이후에는 정신없이 움직여야겠지만 그래도 쉴 수 있다는 게 어디야. 아무튼 네 말대로 하얀이랑 같이 외출이라도 해야겠네.”
심지어는 카스가노 유노의 라이오스행 역시 예정되어 있다.
검은 백조에 있는 이지혜를 제외하면 그나마 이쪽과 많이 연관되어 있는 이들이 모두 모이는 셈이다.
유노와는 한 번 사건이 있었던 만큼 찔리는 부분이 있는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슈바….’
당시에 아무 일도 없었다고 어물쩡 넘어간 것은 물론.
오히려 역지사지로 화를 내며 위기를 모면하기는 했지만 꿍쳐두고 있는 게 많은 정하얀이 그 사건을 마음속에 담아두지 않았을 리가 없다.
차희라에게도 이빨을 드러낸 만큼 카스가노 유노에게 그러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걔는 차희라랑은 또 다른데….’
제국 8좌에 오를 만큼 강하기는 하지만 카스가노 유노는 어디까지나 지원형.
굳이 전투력을 매겨 보자면 카스가노 유노는 정하얀을 감당할 수 없다.
‘신단 때처럼 미친 짓을 하지는 않을 거야.’
정하얀 회귀 사건 이후로 그런 미친 생각을 아직까지 하고 있을 리는 없다.
그렇지만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길 수도 있는 만큼 박덕구의 말처럼 둘 만의 시간을 많이 가지는 것도 고려해 볼 만한 일이리라.
곰곰이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에 박덕구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아직까지 주제가 바뀌지 않은 것을 보니 녀석도 이 사건을 꽤 민감하게 받아들인 것 같았다.
물론 나와 같은 걱정을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그건 그렇고… 그래서 그 용병 누님이랑 하얀이 누님은 어쩔 거요? 나는 솔직히 무조건 하얀이 누님 편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영 분위기가 불편한 거 아니요. 원래 대놓고 싸우는 것보다 저런 분위기가 더 무서운 거요. 차라리 자리를 한번 만들어 보는 게 나을 것 같은데….”
‘그건 자살 희망자들이나 하는 생각일 거야.’
“안 그래도 요즘에 대륙에서 요런 문제가 많다고 들었다니까? 다들 일처다부, 일부다처 하다 보니까 당연히 이런 기싸움 같은 게 펼쳐지는 거 아니요. 거, 예전에 같이 술자리 함께했던 친구가 한 명 있는데 그 친구도 마누라를 두 명이나 두고 있다고 들었소.”
“아. 누구?”
“아마 형님도 알고 있을 텐데… 갈오식이라고”
“당연히 알고 있지. 그 친구 제법 쓸 만하던데…. 어떻게 연이 닿았어?”
안 그래도 끈을 만들어 놓으려고 했던 놈이었다.
덕구 녀석과 친분이 있는 걸 보니 굳이 이쪽까지 나설 필요는 없는 모양이다.
“당연히 연애상담이지! 좌우지간 뭐 본인이 클랜도 운영하고 있고 능력도 있으니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모양인 것 같은데 문제는 이 두 명 사이가 너무 안 좋다는 거 아니요. 서로 눈만 마주치면 노려보는 건 예사에 매번 막 뒷담화하고 언성 높이고, 싸우고 그러다 보니까 그 친구가 가운데 끼어서 엄청 고생하고 있더라니까?”
‘그게 무슨 고생이야…. 그 정도면 양호한 거지.’
겨우 그 정도였다면 나 역시 그냥 웃어넘길 수 있었을 것이다.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박덕구는 녀석을 예로 들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장황하고 긴 이야기라 솔직히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큼… 거 뭐, 대충 이렇게 됐다는 거요. 형님도 이럴 때일수록 정신 똑바로 차려야 된다니까? 가운데 끼어 있는 사람이 어찌어찌 팍팍 잘 조율해서 균형을 맞추는 게 좋은 거요. 힘의 균형은 유지되어야 한다는 유명한 격언도 있지 않소.”
“들어본 적 없는데.”
“뭐 어쨌든 간에 이런 부분에서 형님의 역할이 그 누구보다 중요하다는 건 두말하면 잔소리요. 뭐가 됐든 한번 자리를 만들고 둘을 친하게 만드는 게 모두가 고생하지 않는 방법이라니까? 물론 그전에 하얀이 누님을 먼저 챙기는 게 중요하지만. 기왕 형님이 여러 사람이랑 연을 맺을 거라면 지금부터라도 조금씩 관계를 개선하는 게 맞지. 장담컨대 만약 그렇게 되지 않으면 정말로 위험해질 거요.”
생각하지 않고 말한 것일 테지만 위험해질 거라는 말은 좀 더 진중하게 다가온다.
박덕구의 말이 백번 맞다.
‘어떻게든 해야 돼.’
계속해서 이런 상황을 만들면 정말로 좋은 보트 위에 올라서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될 수도 있다.
김예리와 안기모라도 불러서 다시 한번 연기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이 마차와 라이오스에 그들은 없다.
‘거의 다 왔나.’
그러고 보니 이렇게 마차에 탄 지도 꽤나 오래된 느낌.
박덕구, 한소라와의 대화 도중에 슬쩍 마차 밖을 바라보니 제법 빠른 속도로 배경이 지나가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때려 맞췄을 뿐이었지만 교국과는 다르게 이국적인 풍경이 많이 눈에 띈다.
‘중립국.’
대륙 내에서 유일하게 중립국을 표방하고 있는 국가.
교국이나 공화국처럼 강한 국력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수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국가 중에 하나다.
남부에 자리한 만큼 따뜻하고 음식들 역시 다양한 것은 물론, 바다에 인접하고 있으니 교국과 공화국의 이방인들이 자주 찾는 휴양지 겸 여행지다.
이곳에 온 목적 자체가 애초에 휴식이나 정하얀 케어와는 거리가 멀긴 했지만 박덕구의 말대로 뭔가 조치를 취하는 게 맞다.
“풍경 한번 죽이네…. 그렇지 않소, 형님? 소라도 이런 풍경은 처음 아닌가?”
“네. 당연히 처음이긴 한데….”
“아무튼 형님, 이건 기회요. 원래 이런 장소가 사람들을 더 개방적으로 만드는 장소 아니요! 분명히 누님도 뭔가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을 거요.”
무슨 마음의 준비인지는 조금 더 알아봐야겠지만 기왕이면 마음의 준비 같은 건 하지 않았으면 싶었다.
물론 모든 건 내 희망사항.
계속해서 달리던 마차가 어느덧 자리에 우뚝 멈췄고 마차의 문이 열리며 조금 앳된 느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이오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기영 명예추기경님, 린델의 용병여왕님.”
중립국에 도착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