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2
회귀자 사용설명서 292화
반쪽짜리 혁명(7)
물론 그 콩가루에 이쪽의 지분이 몇 퍼센트 정도 있다는 건 인정한다.
하지만 아니 뗀 굴뚝에 연기 날 리가 없다.
사실 저들이 어떻게 되는지는 이제 나와는 하등 상관없는 이야기.
일이 마무리되고 있는 지금도 별로 관심이 가지 않는다.
황권은 어차피 박살 났다.
만에 하나 이 혁명이 완성되지 못하더라도 땅에 추락한 황권을 다시 하늘 위로 올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럴 가능성은 없지만.’
말 그대로 이번 일이 실패할 가능성은 제로.
질질 끄는 힘 싸움 기간이 제법 길어질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지만 기존 기득권들이 보여준 흥분한 모습은 미묘한 위치에 있었던 이들의 마음을 돌리기에 충분했다.
내가 만약 제국의 병사였다고 하더라도 자연스럽게 태세전환 버튼을 눌렀으리라.
이제 저들에게 남은 것은 진심으로 황제를 모시는 충신과 몇몇 기사 그리고 결국에는 여신의 편에 서는 것을 선택하지 못한 병사가 전부.
제국 기사단의 빅터하르트 영감이 어떻게 움직일 건지에 대해서 조금은 걱정되기도 했지만 별 다른 소식이 들려오지 않는 것을 보니 희라 누나가 잘 막아주고 있는 모양이다.
사실 흘러가는 상황을 보면 굳이 희라 누나를 보낼 필요도 없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볼 정도였다.
‘이번에도 그 영감은 선택하지 않았을 거야.’
그가 지키는 게 제국인지 아니면 저 늙은 황제인지 본인 역시 혼란스러울 것이 분명하다.
반역자라는 이름의 대다수의 제국민에게 그가 검을 휘두르는 장면은 잘 상상이 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그가 황제에게 검을 휘두르는 장면도 상상하기 힘들다.
이번에도 영감은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한 것이다.
그 강한 무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휘두르는 것을 무서워하니 내 입장에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당연.
‘똑똑하다고 해야 하나, 멍청하다고 해야 하나.’
다른 사람들의 기준에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 기준에서 빅터하르트는 멍청이 중의 멍청이다.
황성의 아래에서는 계속해서 고함과 비명이 들려오는 중.
“여신의 반역자들을 찾아라! 여신의 반역자들을 찾아내! 왕성 안을 전부다 뒤져! 어딘가에 숨어 있을 것이다! 분명히!”
“시녀들은 죄가 없습니다! 죄 없는 이들을 해치는 것은 여신님께서도 용서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회개했듯이 그들 역시 우리와 함께할 수 있습니다!”
“이 미친 반역자들이! 무릎을 꿇어라! 다, 당장 무릎을 꿇지 못할까! 더럽고 미천한 평민들이 어딜 감히! 나에게 손을 대는 것이냐!”
“살려주십시오. 제발… 제가 잘 못했습니다. 살려주십시오!”
“단 한 놈도 살려두지 마라! 이단 심문관들을 무얼 하고 있는 게냐! 당장 여신의 반역자들이 악마와 결탁했다는 사실을 알아내지 않고!”
“끌어내라! 모두 끌어내!”
여러 가지 목소리들이 섞여서 들려온다.
그야말로 집단 광기나 최면에 빠져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 같은 기분.
여전히 오스칼은 민중을 이끌고 있었고 왕성 안에 있는 죄 없는 이들을 보호하는 한편, 숨어 있는 귀족들을 색출해 내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이단심문관들도 출동하는 것을 보니 이미 교황청 내부에서 펼쳐진 바젤 추기경의 일 역시 잘 마무리된 것 같았다.
이미 제국민들이 수도의 뒤편 입구까지 봉쇄하며 조여 오고 있으니 황제와 샤를리아는 이미 잡힌 것이나 다름이 없다.
안 그래도 여신의 거울이 죄 많은 이들을 계속해서 비추고 있는 상황이니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을 것이다.
브레스라도 한 번 쏴줘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봤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게 아쉬울 뿐이었다.
“푸흐하하하하핫.”
정리하자면 웃음이 나오는 것도 이상한 상황이 아니라는 거다.
그 와중에 나를 빤히 바라보는 정하얀의 표정이 보인 것은 당연지사.
살짝 고개를 끄덕이니 신난다는 듯이 시야에서 사리지는 모습이 보였다.
뭘 하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제1황녀에게 향했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 당연.
방금 전 사랑을 나누고 어쩌고 입을 털어 댔으니 속으로 쌓인 것을 풀러갔을 것이다.
‘승리네.’
슬그머니 디아루기아에서 내려오자 이쪽으로 오는 반가운 얼굴들이 시야에 비쳤다.
“아이고, 바젤 추기경님!”
“이기영 명예주교!”
“어떻게? 일은 잘 해결되셨습니까? 바젤 추기경님.”
“아암. 덕분일세! 명예주교. 잘 해결되고말고! 조금 가슴 아프기는 하지만 여신님의 새로운 뜻이니 어찌하겠는가. 이것도 전부 여신님을 위한 일이니 기뻐해 주실 걸세.”
“아암. 그렇고말고요. 여신님께서도 웃으시며 고개를 끄덕여 주실 겁니다, 추기경님. 하하하하. 그나저나… 일이 성공적으로 마무리 됐다면 지금부터는 바젤 추기경님이 아니라 바젤 교황님이라고 불러야 되겠군요. 이거 부럽습니다, 교황님. 조금 더 여신님께 가까이 다가가신 것이 아닙니까. 하하핫.”
“아직 즉위식도 하지 않았는데 교황은 무슨! 허허허. 뭐 곧 그렇게 될 것 같네만… 그런 이기영 명예주교야말로 명예주교가 아니라 명예 추기경이라고 불리게 되는 것 아닌가?”
“네? 그게… 무슨….”
“하하하. 그렇게 놀라지 않아도 괜찮네, 명예추기경.”
“아니 바젤 추기경님… 너, 너무 갑작스러워서 잘….”
“사실은 이 이야기가 나올 때부터 생각하고 있었네, 명예추기경. 교단에 아직까지 전례가 없기는 하지만 차기 교황인 내가 그렇게 하겠다는 데 감히 누가 내 말에 토를 달겠는가. 하하. 사실은 명예추기경이 아니라. 베니고어 교단에 추기경으로 이기영 신도를 올리고 싶었지만 딱딱한 내부 규정도 있고 또 이기영 명예추기경이 너무 억압되는 걸 싫어하는 것 같아 이 정도밖에 해줄 수가 없었네.”
“아… 바젤 추기경님…. 저한테는 너무 과분한 자리입니다.”
“과분하긴 무슨! 이기영 명예추기경이야말로 이 자리에 합당한 사람이 아닌가! 내가 가장 믿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고 말이야!”
“저야 항상 여신님을 섬기는 것밖에는 하는 일이 없습니다, 바젤 추기경님.”
“바로 그 점이 내가 명예추기경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야. 하하하. 사람이 욕심이 없어! 욕심이! 어떻게 이렇게 욕심이 없는 사람이 다 있나. 하하하하. 어디 이기영 명예추기경 같은 이방인이… 아니, 사람이 흔한가! 이기영 명예추기경이야말로 여신님께서 내리신 복일세!”
“과, 과찬입니다, 교황 성하.”
“하하하하. 그런 인사는 되었네, 명예추기경. 그 호칭은 즉위식이 끝나면 하도록 하세나. 하하하. 아! 그리고 명예추기경이라고는 해도 추기경으로서 누리는 혜택은 모두 받을 수 있도록 조치해 놓을 테니. 너무 섭섭해하지 말게.”
‘나이스! 나이스!’
속으로는 소리를 지르고 싶은 심정이다. 겉모습으로는 이러실 필요 없다고 손사래를 치고는 있지만 누가 이런 자리를 마다하겠는가.
‘명예추기경이야.’
수많은 특권은 물론, 3인의 템플러가 이기영이라는 개인의 안전에 반응한다.
신성제국의 숨기고 있었던 비밀병기 중에 하나가 이쪽의 그림자 무사가 되는 것이다.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라는 게 올바른 표현이리라.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바젤 추기경님. 그러고 보니 제시카 대주교와 헬레나 이단심문단장은….”
“아! 제시카 대주교는 왕성으로 들어가 여신의 뜻을 실현시키는 이들을 돕고 있고 헬레나 이단심문단장은 아직도 교황청에서 기존의 죄지은 자들을 처단하고 있네만…. 실은 나 역시 자리를 지켜야 하지만 이기영 명예추기경이 드래곤과 함께 온 것을 보고 바삐 이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네. 하하하.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지만 저런 초월적인 생명체의 선택을 받았다는 건….”
“모든 게 여신님의 듯이지요. 하하. 뭐 별 다른 이유가 있겠습니까.”
확실히 너무 빨리 끝냈다고 생각했는데 교황청에서는 아직도 일이 진행되고 있는 모양이다.
헬레나가 마무리하고 있다고 하니 안심하고 나올 수 있는 것이리라고 생각했다.
왕성 안에는 아직도 한창 드잡이 질이 진행되고 있는 도중.
아마 이쪽과의 온도차가 꽤 심각할 것이다.
사실 차라도 한 잔 마시고 싶었지만 아무리 나라고 해도 이런 자리에서 차까지 마시는 건 눈치가 보인다.
슬그머니 병력에 휩싸여 다가오고 있는 이들이 다시금 시야에 비친다.
눈에 마력을 집어넣으니 눈에 보이는 건 시민혁명 지지선언을 해주신 우리 쪽의 귀족들.
일부는 한숨 돌렸다는 표정으로 일부는 입꼬리를 올리며 다가오고 있다.
저들 역시 우리가 승리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카트린 공작부인! 엘리제 백작부인!”
“이기영 명예주교님! 아! 바젤 추기경님도 계셨군요.”
“오오. 이거 참 오랜만입니다. 카트린 공작부인.”
“바젤 추기경님도 얼굴이 좋아 보이시네요.”
“하하하. 계몽한 민중들로 하여금 여신님의 새로운 뜻을 설파할 수 있게 된 날입니다. 얼굴이 좋은 게 당연하지요. 그러고 보니 이기영 명예주교와 이야기를 나누러 왔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야기들 나누시지요.”
“아뇨. 괜찮습니다, 바젤 추기경님. 말씀대로 좋은 날인데 함께 있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지 않겠어요? 이기영 명예주교님께는 사실 감사 인사를 드리러 온 것뿐이라 어디로 떠나시면 제가 더 부담스러워요. 함께 계시죠.”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바젤 추기경의 모습이 보였다.
이제는 황권과 갈라져서 싸우던 교황청은 옛말.
새 시대가 찾아온 만큼 굳이 서로 이빨을 보이며 으르렁거릴 필요가 없다.
카트린 공작부인을 위시한 귀족들과 바젤 추기경의 교황청은 그 누구보다 그것을 잘 이해하고 있다.
나 역시도 고개를 끄덕이며 곧바로 말을 이었다.
훈훈한 분위기는 더욱더 훈훈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좋다.
아직 시민혁명단이 열심히 싸워주고 있는 와중에 승리의 축배를 드는 모습이 조금 적폐세력 같기는 하지만 사실 별로 부정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이 제국의 다음 기득권이라는 건 은연중에 확정된 사실이다.
“하하. 카트린 공작부인도 참…. 감사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오히려 제가 감사의 인사를 드리는 게 맞습니다.”
“아니에요, 명예주교님. 저희 동부 귀족들, 아니, 이제는 귀족이 아니죠. 참… 아무튼 명예주교님께서 저희를 신경 쓰지 않으셨다면 저희 역시 여신님의 성전에 서지 못했을 거예요. 명예주교님께서 저희에게 해주신 일은 평생토록 잊지 못할 겁니다. 당시에 여러 가지로 신경 쓰이게 한 점에 대해서도 사과드리고 싶네요. 워낙 민감하고 막중한 사안이라.”
“당연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카트린 공작부인. 오히려 저야말로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를 믿어주셔서 감사하고요. 동부 귀족 여러분들께서 함께해 주시지 않으셨다면 일이 이렇게 잘 풀리지 않았을 겁니다.”
“아뇨. 오히려 저희야말로 제국민들과 뜻을 함께할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다만….”
“하하하.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카트린 공작부인. 시민혁명 지지선언에 함께해 주신 귀족 여러분들은 따로 의회에 자리를 마련해 두겠습니다. 아니지. 제가 마련하는 것이 아니지요. 우리 제국민 여러분들이 마련해 주실 겁니다. 하하.”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다시 한번 인사드릴게요, 명예주교님.”
“엘리제 백작부인도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다 민망해 집니다. 하하하.”
대조적이다.
“꺄아아아아악!”
“아아악!”
“아파… 아파! 살려줘! 살려줘!”
“한 놈도 놓치지 마라! 여신을 배반한 반역자들을 단 한 명도 놓쳐서는 안 된다!”
“민주투사 아르기모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마라!”
“신성한 민주주의를 위하여! 여신님을 위하여!”
바로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과 이곳에서 편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이들은 확실히 대조적이다.
내가 이 그룹에 속해 있다는 거에 쾌재를 부르고 싶은 부분.
조금 양심이 찔리기야 했지만 사회란 건 어차피 이런 법이다.
“그럼 슬슬 자리를 옮기는 게 어떻겠습니까?”
“어디로….”
“하하하. 이번 일을 제대로 마무리 하셔야죠. 공작부인! 바젤 추기경님도 함께 가시죠. 영광스러운 제국민의 승리입니다. 이런 날 추기경님이 빠지면 되겠습니까.”
“이거 참….”
“네. 함께 가요, 추기경님. 제국민들에게 인사를 해두셔야죠. 이제는 교황 성하가 되실 분인데.”
“큼. 그럼 그렇게 합시다. 위대한 여신의 군대가 승리했으니 당연히 축하를 해주어야지요!”
말 그래도 이제 막 자리를 옮기려 했을 때였다.
제법 가까운 곳에서 또 다른 집단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 것.
일그러진 저 얼굴을 보니 괜스레 웃음이 나온다.
슬쩍 손뼉을 친 것은 당연지사.
짝짝짝 박수 소리가 들리자 반사적으로 손뼉을 맞부딪치는 동부의 귀족들의 모습도 시야에 비쳤다.
“하하하하. 이번 혁명에 숨겨진 일등 공신이 아니십니까. 샤를롯트 전하! 하하하하하. 그리고 우리 혁명단을 지지해 주신 귀족 여러분들! 참으로 감사합니다. 샤를롯트 전, 아니 아니. 이제는 황족이 아니지요. 샤를롯트 님!”
“당… 당신….”
“자자자. 함께 움직이시지요! 제국민의 위대한 승리입니다.”
뻔뻔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공에 대해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리자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주먹이 시야에 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