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9
회귀자 사용설명서 289화
반쪽짜리 혁명(4)
말 그대로, 혁명의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숨어 있던 이방인과 병력들이 지하에서 지상으로 쏟아져 나왔고 화염 마법이 사방에서 터져 나온다.
시민혁명단은 제국민들의 손에 무기를 쥐어주고 그들과 함께 불나방처럼 불길 속으로 몸을 내던진다.
다수가 모이면 공포심은 사라지고 터져 나오는 광기는 전염된다.
제국의 수도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는 이 혁명은 스폰서들이 다스리는 영지를 제외한 각 도시의 마력 홀로그램을 통해 실시간으로 보여지는 중.
타 도시의 시민들 역시 검을 들고 소리를 내지르며 거리로 뛰쳐나오고 있는 게 그다지 이상한 상황은 아닐 것이다.
“하얀아, 상황 어때?”
“다, 다른 도시도 전부 비슷한 것 같아요. 오빠 생각대로 됐어요!”
확실히 막스가 관리하고 있는 홀로그램을 바라보자 기분 좋은 미소가 지어진다.
오히려 수도보다 더욱더 흥분한 군중들이 커다란 함성을 내지르고 있는 상황.
실황중계를 해주는 화면을 보자 뭔가 찌릿찌릿한 게 올라오기 시작했다.
코멘트를 달 수 없다는 게 천추의 한이다.
‘개돼지 발언으로 커다란 활약을 보여준 부쉬 백작이 관리하고 있는 중소도시 조지나.’
투입되어 있는 이방인들은 린델의 가로쉬 앤 캐쉬 클랜.
커다란 도끼를 들고 있는 갈오식이라는 놈이 괜찮은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지금 보여주는 모습을 보니 상상하는 것 이상이다.
선동 실력도 수준급이라고 할 만한 수준.
나중에 자리를 따로 만들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우리는 개돼지가 아니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아!
-제국의 주인이 될 것이다!
-일어나라! 동포들아! 투쟁하고 혁명하라!
-우리는 개돼지가 아니다!! 제국의… 주인이 될 것이다!!
단언컨대 이곳보다 열정적으로 혁명에 임하는 곳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억압되어 있는 만큼 터져 나오는 게 커다란 것이다.
슬그머니 바티칸 영지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이번에도 보기 좋은 장면이 그려진다.
대형 길드의 가깝다고 할 수 있는 일리다리 길드의 악마사냥꾼 임리단은 본인이 가장 앞장서 민중을 이끌고 있다.
전직의 영향으로 눈에서 초록색 기운을 뿜어내고 있기는 하지만 같은 편이라면 든든할 것 같은 외관이다.
-친애하는 동지들이여. 우리들의 손으로 운명을 잡아끌어야 합니다. 언제까지 피하고 있을 수많은 없습니다!
-우와아아아아아!
-캐슬락 영지에서 지원군이 도착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흘린 피는 무의미한 피가 아닙니다. 제국을 위해 살아갈 터전을 위해서입니다! 수도에서도 이미 동포들의 총궐기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승리가 눈앞에 있습니다! 여러분 싸웁시다! 모든 준비가 되었습니다. 준비가 안 된 것은 바로 저들입니다.
‘저 여자도 괜찮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영지에서 여러 방법으로 혁명이 시작되고 있었다.
괜찮은 지역 같은 경우에는 벌써부터 힘의 방향이 기울고 있는 것 같은 느낌.
특히나 공화국과 살을 맞대고 있는 쪽은 빠르게 정리를 해야 된다고 생각해 이방인들과 명예귀족들을 밀어 넣었는데 그게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다.
애초에 동부는 캐슬락 백작, 카트린 공작부인, 엘리제 백작부인의 텃밭.
가장 커다란 세력들이 함께해 준 만큼 빠르게 정리가 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였다.
조금 힘들어 하는 지역도 보이는 것 같지만 안전한 곳에 있는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다.
‘바젤 추기경은 물갈이를 시작하고 있을 테고….’
이단 심문관 헬레나와 제시카 대주교를 포함한 교황청의 인사들을 끌어 들였으니 아마 성공적인 정권교체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바젤을 제외한 또 다른 추기경 한 명도 바젤을 밀어준다고 하는 상황.
세 명의 템플러 중 두 명이 우리와 함께하는 셈이니 기분이 더욱더 좋아진다.
바젤 추기경이 교황의 자리에 올라간다면 나 역시 명예추기경에 자리에 오를 수도 있는 만큼 가슴이 선덕선덕해진다.
‘현성이도 잘해주고 있을 거야.’
아직까지 공화국이 움직이기에는 이른 타이밍.
내부적으로 이 사건을 어떻게 판단하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군대를 끌고 오는 것만으로도 삼 일이 더 걸린다.
‘그전에 혁명은 마무리되겠지, 뭐.’
귀족들이 가지고 있는 병력을 모두 죽일 필요도 없다.
필요한 건 일부 귀족들의 목.
일반 제국민에게 칼을 빼드는 것을 거부하는 병사들과 마력 홀로그램이 보여준 장면에 영향을 받은 이들은 자신들에게 봉급을 주고 있는 귀족들을 배신할 준비가 되어 있다.
제국민들을 희생시키고 싶지 않은 샤를롯트의 병력 역시 어쩔 수 없이 이쪽을 따라오고 있으니 이미 혁명은 반쯤 성공한 거나 다름없다.
지금도 충분하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그대로 불에 타는 장작에 기름을 끼얹어 주고 싶은 것이 나 같은 놈들의 심정.
한 가지 영상을 더 내보내도 나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하얀아, 안기모 준비해.”
“네? 안기모 씨요?”
“지금 여기에서 영상 찍고 곧바로 내보낼 거야. 숭고한 희생 장면이 필요할 것 같은데… 아무래도 그 역할에 민주투사 아르기모가 필요할 것 같거든.”
“아아. 네! 안기모 씨! 안기모 씨! 오, 오빠가 불러요.”
이런 종류의 혁명에는 숭고한 희생 장면이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하는 법이다. 지구에서부터 배우를 꿈꿔 왔던 린델의 안기모는 이미 사정을 전해 들었는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중, 전 대륙에 뻗어나갈 스크린 데뷔다. 본래는 녀석을 희생시킬 생각은 아니었지만 오히려 이게 더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너무 리얼한 장면을 내보냈다간 일부 제국민들이 겁을 집어먹을 지도 몰랐으니까.
이들의 희생은 처참하고 처절한 죽음이 아니라 숭고하고 감동적인, 영화 같은 죽음이어야 한다.
내장이 쏟아지고 피가 흘러내리는 장면을 보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준비되면 말씀해 주세요. 안기모 씨.”
“네. 부길드 마스터. 이거 어떻게… 동선을 짜야 하는지….”
“제국 갑옷을 입고 있는 병사들에게 화살을 맞는 장면입니다. 물론 화살은 가짜니 안심하셔도 되고요. 기왕이면 민주투사 아르기모가 혁명에 가담한 소녀를 지키기 위해 희생하는 장면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아. 예리야! 너도 이리 와봐.”
“나. 이런 거 이제 안 한다고 했잖아. 나도 덕구 아저씨처럼 바깥으로 나갈래. 오스칼 지켜야 한다며.”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해보자. 저번에도 잘했으니까. 이번에도 잘할 수 있을 거야. 두 분 모두 대충 마법으로 위장해 주시고 정확히 10분 후에 큐 사인 들어가겠습니다. 어차피 내보낼 장면은 한 장면뿐이니까 부담 없이 해주시면 됩니다.”
“아, 네. 알겠습니다. 부길드 마스터.”
“정말… 하기 싫은데….”
“이번이 마지막이야. 진짜로. 약속할게.”
“정말로 이번이 마지막이야.”
“응. 그럼 준비해. 애드립 너무 많이 치지 말고. 대본은 여기 지혜 누나가 설명해 줄 테니까.”
“응.”
프로 하나에 아마추어 하나였지만 준비가 되는 것은 순식간.
떨떠름한 표정으로 파란의 길드직원 몇 명이 제국 병사의 갑옷을 입고 등장했고 안기모와 김예리는 시작해도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하기 싫다고 말한 것과는 다르게 꼬맹이 김예리는 뭔가 기대하는 표정이다.
말로는 싫다고 했지만 꽤 즐거운 듯하다.
‘솔직하지 못하네. 꼬맹이가.’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자마자 제법 박진감 넘치는 연기가 시작된다.
김예리는 자신의 몸보다 커다란 시민 혁명단의 깃발을 들고 힘겹게 발걸음을 옮긴다. 그렇지만 눈에 있는 혁명을 향한 갈망은 숨길 수가 없다.
표정 연기가 가히 압권, 내가 다 살이 떨려온다. 어색했던 박덕구 때와는 다르게 두 번째는 완벽한 몰입감을 보여주고 있었다.
‘연습이라도 한 건가.’
거울을 보며 연기를 연습하는 김예리는 잘 상상이 되지 않지만 만약에 그게 아니라면 정말로 체질이라는 셈이 된다.
침을 한 번 꿀떡 삼켰을 때 김예리의 입에서 터져 나온 목소리.
“신성한 민주주의를 위하여! 투쟁하라! 혁명하라! 모두 함께 싸워 쟁취하자!”
깃발을 들고 뛰어다니는 장면은 그야말로 민주투사의 모습이다.
투입한 엑스트라들이 함께 검을 휘두르고 이 좁은 공간에서 나름대로 멋진 연출이 시작되고 있었다.
활을 든 병사는 그 잔혹하고 비열한 화살을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소녀를 향해 조준했고 민주투사 아르기모의 눈에서는 불길이 타오른다.
‘키야!!!’
순간적으로 고민하는 아르기모의 표정은 확실히 몰입감이 있다.
바크더쿠와 함께 혁명의 상징으로 자리 잡은 아르기모는 대의와 소녀를 지켜야 한다는 쌍방의 감정이 교차한다.
“죽어라! 이 더러운 반역자야!!!”
파란의 길드 직원 한 명이 저도 모르게 애드립을 장전했지만 나쁘지는 않다.
비열한 기득권의 더러운 화살이 순진한 소녀를 향해 날아가는 순간 그 앞을 막아서는 것은 우리들의 영웅 아르기모.
“커헉!”
푹푹푹!
여러 발의 화살이 안기모에게 박혔다.
안기모의 모습은 제법 멋지게 흔들린다.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르거나 살려달라고 울부짖지도 않는다.
화살이 박힌 곳에서는 영화 같은 피가 흘러내린다.
점점 더 눈빛에서 힘을 잃어가는 아르기모와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는 작은 소녀.
“아!”
화면은 다시 아르기모를 비추고 어째서인지 다음 화살은 날아오지 않는다.
뭔가 이상하기는 하지만 지금 이 장면에 누가 그런 개연성을 따질 수가 있을까.
어디에선가 튀어나온 이방인이 그들을 제압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아아아!”
“괜찮습니다…. 괜찮… 습니다.”
다급한 김예리의 외침과 죽어가면서도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놓지 않는 아르기모.
화살에 맞은 채 억지로 몸을 일으키고 있는 모습은 대놓고 신파적이다.
그렇지만 이런 세상에는 이런 신파가 먹힌다.
“일어나야지요. 네. 제 동지들이 함께… 싸우고 있습니다.”
“아…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아이까지… 싸울 필요는 없습니다.”
이쯤 되니 손발이 오그라드는 느낌이 있었지만 대중들이 이걸 실제상황이라고 받아들일 걸 생각해 보면 용인해 줄 만하다.
여전히 아르기모는 비틀거리며 중심을 잡지 못한다.
그 몸을 이끌고 굳건히 서 무기를 들다 그렇게 허물어진다.
“내가 흘린 피는… 제국민들을 위한… 자랑스러운….”
중얼거리는 모습.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신성한 민주주의여… 만세.”
그렇게 녀석은 멋들어지게 눈을 감는다.
김예리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가득 차오르고 있는 상황.
그렇지만 눈물을 닦아내고 민주투사가 가지고 있던 무기를 집어 든다.
심하게 오그라드는 설정이기는 하지만 편집을 거치면 제법 봐줄 만 하게 변신할 것이다.
한손에는 깃발을, 다른 손에는 검을 쥐고 왕성을 바라보며 고함을 내지른다.
“컷!”
“…….”
“…….”
“이제. 정말로 안 할 거야.”
“우리 김 배우! 연기를 왜 이렇게 잘해? 정말 완벽했어. 안기모 씨 역시 굉장히 멋졌습니다. 막스, 지금 당장 이거 송출해.”
“넵!”
“그 뭐야. 어색하다고 생각하는 장면은 적당히 노이즈 넣고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지?”
“넵!”
묘하게 기뻐 보이는 표정의 김예리와 성공적인 데뷔를 치룬 안기모는 위장을 풀고 다시금 이방인들을 지원할 준비를 마친다.
그사이에 그들이 찍은 영상은 약간의 편집 과정을 거쳐 전파를 타고 안 그래도 활활 타오르고 있는 장작에는 다시 한번 기름이 쏟아진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
“신성한 민주주의여! 만세! 만세!”
“베니고어 여신님이 함께하신다! 일어나 투쟁하라!”
“아르기모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마라!! 깃발을 들고 일어나자 민중들아!”
왕성으로 향하려고 하는 이들과 그걸 막으려고 하는 이들의 싸움.
바크더쿠의 보호 속에서 민중과 함께 투쟁하고 있는 오스칼을 보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기 시작.
제법 정체되고 있는 타이밍.
이럴 때 든든한 지원군이 등장하는 것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나갈 준비합시다.”
황제와 샤를리아의 통수를 강하게 후려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