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8
회귀자 사용설명서 288화
반쪽짜리 혁명(3)
“생각보다 빠르게 터지지는 않네요.”
“반항하는 방법을 모르는 거야. 무섭기도 하도 분노하고는 있지만 속에 있는 걸 어떻게 터뜨려야 하는지 모르겠지.”
“이해는 되지만 조금 섭섭하겠어요?”
“어쩔 수 없는 거지, 뭐. 그렇게 섭섭하지도 않아. 어느 정도 예상하기도 했고, 다른 세력에 탑승했다고 한들, 지금까지 줄곧 사육당하던 이들이 지들 의지로 울타리에서 튀어 나올 수 있겠어? 아마 신호탄이 터지면 너나 할 것 없이 뛰쳐나올걸? 당장 여기 있는 애들 표정을 봐. 장담하는데 함께 싸웁시다. 이 말 한마디면 모든 게 끝나.”
“머릿속에 사상을 우겨넣는 과정이 조금 급하기는 했죠. 뭐, 저도 알고 있어요. 그냥 아쉬움에 한소리 해본거지. 어떻게? 지금 터뜨릴까요?”
조금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표현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미 모든 제국민의 분노가 폭발 직전에 있는 상황.
사실 샤를리아의 명대사만으로도 충분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장면인 만큼 조금 멋진 연출이 필요했다.
예를 들자면 민주투사들의 숭고한 희생 같은 게 나와야 한다는 거다.
계획하고 있는 것 중 하나이기는 했지만 그저 신호탄으로 사용하기에는 오스칼이라는 브랜드의 가치가 꽤 대단했다.
“잠깐만 기다려. 어차피 아직 연설도 다 안 끝났으니까.”
사실 기다리고 있던 것은 샤를롯트다.
타이밍은 확실히 나쁘지 않다.
민중을 수습하고 함께 거리 행진을 하기에는 굉장히 괜찮은 시점.
그렇지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내부적인 문제라도 생긴 모양이다.
샤를롯트의 의견에 찬동하는 깨어있는 귀족들은 여전히 그녀와 함께하겠지만 내가 터뜨린 영상을 보고도 ‘권력을 유지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생기지 않을 리 없다.
심지어는 그녀의 캠프 내에서도 영상에 등장한 귀족들이 있었으니, 지금쯤 그들을 달래려고 진땀을 빼고 있을 것이다.
제국민들의 분노를 수습할 수 없다고 생각한 이들과 그래도 할 일은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의 마찰 정도는, 굳이 미래를 보는 눈이 없어도 예측할 수 있다.
‘내가 급하게 움직인 만큼.’
그녀 역시 급하게 움직였다.
서로가 피차 부작용을 떠안고 있는 상황.
이지혜를 향해 고개를 살짝 끄덕이던 바로 그때였다.
“모든 제국민들은 반역자의 사탕발림에 현혹되지 말고 자리를 지켜라!”
왕성에서 음성이 증폭된 목소리가 튀어나온 것.
계획을 철회하라는 듯 손을 내젓자 이지혜 역시 알겠다는 사인을 보냈다.
‘좋네.’
이런 썰전도 나쁘지는 않다.
샤를롯트가 먼저 대응해 올 거라고 생각했지만 제국민들을 향해 먼저 입을 연 것은 왕성의 대리인.
같은 값이면 황제폐하가 나오는 게 더 좋다고 생각했지만 겁 많은 늙은이가 이런 자리에 직접 나설 리가 없다.
오늘내일 하는 늙은이는 지금쯤 나나 샤를롯트를 애타게 찾고 있을 것이다.
커다란 목소리와 함께 혹시 모를 무력사태를 위해 기사들이 안에서 튀어나왔고 마법사들은 어떻게든 마력 홀로그램을 멈추기 위한 방도를 찾고 있는 게 보인다.
마력 홀로그램을 향해 화살을 쏘는 궁수들의 모습은 가관이다.
반응이 즉각적인 것을 보면 저쪽에서도 위기감을 가지고 있는 모양.
제국민을 진정시키지 않는다면 커다란 무엇인가가 터져 나온다는 것을 이미 인지하고 있다.
‘그렇게 무능하지는 않아.’
병사들을 풀어 거리에 나와 있는 제국민들을 집으로 들여보내려고 하고 있지만 손을 든다고 해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다.
실제로 강제적인 연행도 진행되고 있는지 수도 곳곳에서는 비명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
어떻게 위기를 느낀 권력자들의 행동패턴은 지구나 이곳이나 다를 게 없는지.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다시 한번 말한다. 모든 제국민은 반역자에게 현혹되지 말고 자리를 지켜라! 모두가 거짓이며 마법으로 조작된 내용이다. 제국민들이여, 그대들이 보고 있는 건 베니고어 여신님이 내리신 축복이 아니라 악마의 속삭임이다. 오스칼은 제국의 반역자다! 그녀와 뜻을 함께 하고 있는 모든 이들과 그녀를 따르는 이들 역시 마찬가지다. 신성제국을 좀먹는 악이다!”
‘슬슬 대응해야지.’
오스칼 쪽에게 신호를 보내기도 전이었다.
아리스 시녀로서는 보여주지 않는 잔뜩 성이 난 목소리가 커다랗게 울려 퍼졌다.
-나라를 좀먹는 것은 그대들이 아닌가! 더러운 황족들, 지금까지 이 제국을 수면 아래로 끌어 내리고 있었던 것은 바로 그대들이었다. 하늘 위를 보라. 그대들이 한 짓은 악행에 죽어간 제국민들이 알고 있으며 여신님이 알고 계시다.
“어디서 그 더러운 입으로 여신님을 입에 담느냐. 반역자야.”
-반역자는 그대들이다. 여신 아래에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신의 뜻을 거역하는 바로 그대들이다! 계급을 나누며 차별을 일삼고 미천한 핏줄과 고귀한 핏줄을 구분하는 그대들이야말로 반역자다. 그대들은 도대체 언제부터 황족이었는지 떠올려보라. 그 고귀한 피들이 행한 짓을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보라.
혹시라도 말이 막히지는 않을까 걱정한 내 우려와는 달리 오스칼은 따박따박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내뱉었다.
이지혜가 입을 연 것은 당연지사.
“저건 대본 아니죠? 오빠?”
“응. 아니야. 아마 본인 생각일걸.”
“쓸 만하네요. 샤를리아보다 더 나아요.”
마침 나도 딱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당황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오스칼은 본인이 먼저 앞장서 황권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었다.
훌륭한 그림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 당연하다.
-그대들이 있기 때문에 제국이 있는 것이 아니다. 제국민이 있어야 제국이 있는 것이다.
“황제 폐하가 있어야 제국이 있는 것이다. 이 반역자야. 지금 네 모습을 보라. 진실된 얼굴은 보이지 않은 채 선동하는 네 모습을 보라. 제국민들이여, 오스칼은 그대들을 위험 속으로 빠뜨리려는 악마다. 듣기 좋은 말로 포장하고 있지만 절벽 위에서 그대들의 등을 떠미는 사악한 마녀다. 그 누구라도 좋다. 저 마녀를 잡아오는 자는 이유와 신분을 막론하고 작위와 상금을 내리겠다. 마녀는 처형되어야 한다. 처형되어야 해!”
-나는 숨은 것이 아니다. 여신의 반역자들이여!
영상을 보내주고 있는 정하얀을 똑바로 쳐다보던 아리스 시녀가 등을 돌린 것은 순식간.
성큼성큼 문 밖으로 걸어 나가려고 하는 것이 보인다.
‘어?’
조금 당황하기는 했지만 나쁘지는 않다.
대본에는 없었던 행동이지만 제국민들 앞에 직접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좋다.
이쪽은 정하얀에게 빠르게 손짓하기 시작.
오스칼이 세상에 등장할 때가 되었으니 모든 제국민이 그녀가 있는 위치를 확인하도록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명예주교님.”
“뜻대로 하셔도 됩니다, 오스칼 님.”
“네.”
분위기를 잡아주기 위해 아무렇게나 걸려 있는 깃발을 집어 든다.
이제는 심볼이 되어버린 신성한 민주주의의 로고가 그려진 깃발을 들고 오스칼은 그렇게 제국민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선보였다.
제국의 수도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꼭대기의 시계탑.
그곳에 깃발을 들고 서 있는 아리스 시녀의 모습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기에 충분하다.
멍하니 영상을 바라보고만 있던 제국민들은 어딘가 익숙한 풍경에 너도 나도 그녀가 서 있는 시계탑으로 고개를 돌린다.
점점 고양되는 분위기는 소리를 지르고 싶을 정도.
‘완벽해.’
완벽하다.
이 정도 연출이라면 굳이 신호탄으로 희생양을 사용할 필요도 없다.
“나는 숨지 않는다.”
-나는 숨지 않는다.
그녀가 시계탑의 꼭대기에서 내뱉고 있는 말을 여신의 거울이 그대로 비춰주고 있다.
눈앞에 보이고 있는 걸 환상 마법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던 이들의 얼굴에 확신이 깃든다.
병사들은 순식간에 시계탑으로 뛰어 들어오고 미리 대기하고 있던 병력들은 그들을 막는다.
여기저기에서는 커다란 소리가 튀어나오고 준비했던 불길이 하나둘 치솟는다.
마법과 화살들이 쏟아지지만 미리 준비한 방어 마법에 의해 차단당한 것은 당연지사.
무서울 만도 하건만 그 사이에서 계속해서 말을 내뱉고 있는 민주투사의 모습은 내가 그리고 있던 그림 이상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숨지 않는다. 여신의 반역자들이여. 나는 이 자리에서 제국민들의 등을 떠미는 것이 아니다. 내가 먼저 그들의 앞에 설 것이다. 황제는 어디에 있는가! 숨어 있다고 나를 비난한 그대가 말해보라. 지금 이 상황에서 황제는 도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각성했네!’
말문이 트였다는 표현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리라.
단언컨대 그녀의 인생에서 지금이 가장 빛나고 있는 시기일 것이다.
-제국민이 흘린 피와 땀으로 자신을 치장한 황녀는 어디에 있나. 그대들이 선전했던 신성한 핏줄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나. 나는 그대의 목소리를 듣고 싶은 게 아니다. 황실의 개들아. 이 잘못된 체제를 만들고 그 뒤편에서 달콤한 독주를 마시고 있는 이들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싶은 것이다.
“제, 제국의 2황녀 샤를롯트입니다! 그대들의 열망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마침 들려오는 또 다른 목소리.
급하게 튀어 나왔는지 미처 음성증폭도 하지 못한 채 소리를 지르고 있는 모습은 가관.
어울려 주고 싶지만 이미 기차는 떠나갔다.
지금 이 자리에서 행해지고 있는 역사적 그림을 망치고 싶지 않다.
“하얀아, 우리 쪽 볼륨 키우고 혹시라도 샤를롯트 쪽으로 가는 음성 증폭 마법이 있으면 전부 차단해. 천관위 님도 함께 부탁드립니다.”
“네! 네! 오빠.”
여러 가지 소리에 묻혀버린 샤를롯트의 목소리는 그 누구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다.
심지어 사방에서 불길이 피어오르고 있으니 여럿 기사들이 뛰쳐나와 그녀를 다시 안쪽으로 들이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누구보다 제국민들을 사랑하시는 2황녀께서는 이러지 말라는 듯 그들을 뿌리치고 있지만, 이런 위험한 상황에 충성스러운 신하들이 어떻게 그녀를 가만히 내버려 둘 수 있단 말인가.
이미 일이 틀어졌다는 건 저들이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녀의 목소리 대신 수도에 울리는 것은 탄력을 받은 우리 오스칼 님의 낭랑한 목소리.
-제국민들이여! 다치는 것이 두려워 왕성의 뒤에 숨어 있는 이들입니다. 지금까지 저희를 비천한 핏줄이라 멸시하며 힘과 권력이 제국민들을 지켜줄 것이라고 믿었던 저 권력의 개들의 진짜 모습입니다. 신의 거울에서 비쳤던 것처럼 그들의 관심사는 제국을 통치하고 우리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것이 아닙니다. 수탈하고 착취하며 자신들의 배를 채우는 것만이 그들이 원하는 전부입니다. 캐슬락 백작, 카트린 공작 부인, 엘리제 백작 부인 같은 일부 깨어 있는, 시민혁명지지선언문에 함께해 주신 분들을 제외한 이 나라의 모든 귀족은 사회의 암 덩어리나 다름이 없습니다.
시킨 것은 확실히 하는 게 마음에 든다.
스폰서들의 이름을 밝히는 것 정도는 당연히 해야 할 일.
조금 불안해하는 내 인맥들은 아마 지금쯤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것이다.
힐끔 곁눈질로 나를 바라보는 오스칼의 얼굴.
지금 시작해도 되겠냐고 질문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나는 조용히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말 잘 듣는 건 마음에 드네.’
샤를리아가 처음부터 그녀 같았더라면 굳이 이런 귀찮은 일을 하지 않았어도 되었으리라.
나는 결국 입을 열었고 오스칼은 내가 말한 것을 그대로 대중들에게 전달했다.
“일어나셔야 합니다.”
깃발을 치켜 올리며 자신의 검을 뽑아 들며 그렇게 안에 있는 목소리를 내뱉었다.
-일어 나셔야 합니다!
“제국민들을 위한 제국을 만들어야 합니다.”
-제국민들을 위한 제국을 만들어야 합니다!
“동지 여러분.”
-친애하는 동지 여러분!
“먼저 앞장서겠습니다.”
-그 누구보다 제가 먼저 앞장서겠습니다.
“제가 먼저 피 흘리겠습니다.”
-여러분들보다 제가 먼저 피를 흘릴 것입니다. 대의를 위한 피를, 여러분들을 위한 피를 흘리겠습니다.
“깨어나라.”
-깨어나십시오!
“많은 분들이 우리와 함께할 것이다.”
-많은 분들이 함께할 것입니다. 진실된 신의 뜻을 알아주고 진정으로 제국을 위해 기도해 주시는 교황청과 저희를 지지해 주시는 일부 귀족, 이제는 한 가족처럼 함께 녹아든 이방인들까지 모두가 제국민 여러분들과 함께해 주실 것입니다!
“투쟁.”
-일어나! 무기를 드십시오! 스스로의 권리를 스스로가 되찾으십시오! 친애하는 제국민 여러분. 투쟁의 때가 다가왔습니다! 이제는 싸워야 할 때입니다.
“마무리.”
-신성한 민주주의를 위하여! 일어나! 싸우고! 투쟁하라! 내 동지들아!
수도 전체에서, 아니, 제국 전체에서.
커다란 함성이, 귀를 울리는 폭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