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6
회귀자 사용설명서 286화
반쪽짜리 혁명(1)
‘시간 한번 빠르네.’
아니, 사실 조목조목 따지고 보면 그리 많은 시간이 흐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체감상으로는 2년 정도가 흐른 것 같은 느낌.
주변의 많은 것이 달라졌으니 이런 기분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아마 이렇게 느끼고 있는 것은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샤를롯트.’
그녀 역시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번 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한 가지를 꼽으라면 당연히 속도였다.
은밀하게 움직이는 것도 중요하기는 하지만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그보다 더 중요했다.
공화국이 개입하기 전에.
황실에서 어떤 대응을 하기 전에.
샤를롯트가 무엇인가를 조금 더 준비하기 전에 터뜨릴 준비를 해야만 했다.
그녀 역시 이쪽의 생각에 동의하는 것은 당연지사.
서로 그 어떠한 이야기도 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녀의 행동에 맞춰줄 것에 동의했고, 그녀 역시 내 뜻에 따라 움직이기는 것에 동의했다.
암묵적인 동맹을 맺기로 한 것이다.
적과의 동침이라고 부르기에는 조금 애매하지만 예전에 그녀가 말했던 대로 나는 현재 그녀의 배 위에 올라타 있었다.
나는 이방인들과 교황청 그리고 일부 귀족, 그녀는 깨어 있는 시민대표들과 자신의 세력에 속해 있는 귀족들을 규합했다.
그리고 전 대륙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제국민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신성한 민주주의에 적혀 있는 사상을 빠르게 전파하는 것은 물론, 본격적으로 그들 안의 열망을 일깨웠다.
아마 혼자였다면 이토록 빠르게 일을 진행하진 못했을 것이다.
제국민들을 계몽하기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었지만 사실상 이방인들이 대륙에 자리 잡은 그 순간부터 이 사상이 퍼지기 시작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쪽이 상상하고 있던 것보다 더 빠르게 물살을 타고 있는 상황.
그녀가 동부에서 움직이면 이쪽은 서부에서, 그녀가 남부에서 움직이면 우리는 그 반대에서.
차이점은 온건이냐, 더욱더 급진적이냐.
그것을 생각해 보면 확실히 그녀가 이쪽에 맞추고 있었던 셈이 된다.
샤를롯트 역시 신성한 민주주의를 차용했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덕분에 제국민을 규합하기가 더욱 수월했다는 것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리라.
어느 정도 사상이 뿌리내린 이후에는 황실 역시 이쪽의 움직임을 눈치채기 시작.
신성한 민주주의를 금서로 지정하는 한편 이쪽의 뒤를 캐기 시작했는데, 문제는 황제가 이 일의 총책임자로 샤를롯트를 임명했다는 점이었다.
총책임자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으니 꼬리가 잡힐 리가 없었다.
한번 웅크리는 시간이 있기는 했지만 혁명의 전초전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나와 샤를롯트가 의도하지 않은 수많은 비밀결사가 만들어졌고 이들은 모든 제국민의 계몽하길 바라며 저마다의 활동을 선보였다.
교황청의 바젤 추기경은 차기 교황이 되기 위해 제국민들의 등에 탑승하기로 결정했고, 나와 친분이 있는 일부 귀족들 역시 내 계획에 찬동했다.
귀족들을 설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수틀리면 그들을 제거할 생각으로 임했을 정도.
하지만 황실 자체에 피로감을 느낀 캐슬락 백작과 카트린 공작부인은 결국 내 말을 받아들였다.
‘혁명이 끝난 이후에도 우리의 권력은 유지될 것입니다.’
신성한 민주주의가 시작된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권력을 잃지 않는다.
귀족과 일부 부르주아 계급 그리고 우리 이방인 역시 마찬가지.
오히려 더 큰 권력을 얻게 될 것이란 비전을 제시했고 그렇게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샤를롯트가 원하는 진짜 민주주의에 대한 위험성에는 고개를 내저었지만, 그 이면에 있는 꿀 덩어리에 대해서는 인지할 수밖에 없었다는 거다.
그 와중에도 차기 지도자로서 낙점한 오스칼은 열심히 자신의 책무를 다하기 시작.
일부 집단에게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불리는 이 여성 역시 시간의 흐름을 체감케 하는 이들 중 하나였다.
굳이 따지고 본다면 샤를롯트보다는 그녀가 더욱 정신없는 생활을 보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한낱 시녀에서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자리 잡기까지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누구보다 그녀가 더 열심히 노력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이쪽의 말을 제대로 따라준 것이 유효했다.
처음 아리스 시녀를 채택할 때만 해도 크게 기대하지 않았건만, 그녀는 내가 지정해 놓은 조건에 놀라울 정도로 부합하고 있었다.
슬쩍 창문 쪽을 바라보자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가 시야에 비친다.
짧은 단발에 허리춤에 차고 있는 검 하나.
그녀가 배운 것은 교양 검술뿐이었지만 짧은 시간 내에 성취를 이루어냈다.
지니고 있던 재능 이상으로 노력한 덕분.
조용히 이름을 부르자 황급히 뒤 돌아보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사실 표정이나 얼굴 자체는 예전과 별로 다를 게 없다.
그렇지만 묘하게 바뀐 분위기와 눈에서 비치는 감정이 이쪽의 계획이 들어맞았다는 증명한다.
“오스칼 님.”
“아… 명예주교님. 둘만 있을 때는 아리스로 불러주시기로 하셨잖아요.”
“하하. 네. 그러기로 했었죠. 큰일을 앞두고 있다 보니 조금 정신이 없었나 봅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명예주교님. 모든 게 잘 풀릴 거예요. 생각하시고 계신 일이 잘 되도록 최선을 다할게요.”
“하하.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그리고… 큰 짐을 나누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그런 말씀 하지 않으셔도 돼요. 실은 처음 명예주교님이 저를 불러주셨을 때는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지금은 너무 기쁘답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사명감도 느끼고 있고요. 네. 정말로 그래요.”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인 걸요.”
“아리스 시녀님, 아니… 아리스 님도.”
“아뇨. 아뇨! 시녀님이라고 불러주시는 게 더 괜찮아요. 그편이 더 좋아요.”
“그렇지만….”
“아니, 꼭이요. 둘이 있을 때는 꼭 그렇게 불러주세요. 명예주교님마저 저를 오스칼이라고 부르면 뭔가… 조금… 혼란스러울 것 같아서요.”
“이해합니다. 굳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그러고 보니 식사는 하셨나요? 하지 않으셨다면 준비를 서둘러야….”
“아뇨. 아뇨. 괜찮습니다. 사실 아리스 시녀님이 잘 계시는지 확인하러 온 게 전부라.”
“그럼 차라도 대접해 드릴게요!”
제국 민주주의의 상징에게 차를 얻어먹는 기분은 나쁘지 않다.
이래서 아리스 시녀를 미워할 수 없다.
한때 샤를리아의 밑에서 여러 가지 스킬을 갈고 닦은 만큼 향 좋은 차가 등장하는 것은 순식간.
한 모금 들이키는 것만으로도 온갖 피로가 날아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괜찮으신가요?”
“물론입니다, 아리스 시녀님. 그러고 보니 계속 바깥을 바라보고 계시던데 혹시나.”
“네. 어머님과 동생들이 잘 지내고 있을지 걱정되어서요.”
“이미 파란의 길드원들이 보호하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만약 제가 잘못되더라도 아리스 님의 가족은 꼭 보호해 드리겠습니다.”
“그런 말씀은 삼가해 주세요. 혹시라도 명예주교님이 다치는 건 원하지 않으니까요. 그럼 이제… 나갈 시간인가요?”
“네. 나가시죠, 오스칼 님.”
“네, 명예주교님.”
‘귀엽네.’
입술을 꽉 깨무는 모습이 나름대로 귀엽다.
그렇지만 표정은 점점 진지해지기 시작.
아마 마지막을 앞두고 있는 만큼 그녀도 만감이 교차하고 있으리라.
‘힘들었겠지.’
하지만 그만큼 보람차기도 했을 것이다.
마치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은 느낌.
표정을 굳힌 오스칼을 보니 왠지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문을 열자 가장 먼저 눈에 보인 것은 잔뜩 긴장하고 있는 막스와 정하얀.
이번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매일 설명한 만큼 저들 나름 긴장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하얀 같은 경우에는 이쪽을 힐끗 바라보고서는 볼을 부풀렸는데 아무래도 아리스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는 않은 모양.
물론 정하얀의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겠냐만은 최근 아리스 시녀와 붙어 다니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저기압 상태가 조금 길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챙겨줘야지.’
열심히 노력하고 참아준 만큼 이번 일이 끝나고 그녀를 달래주는 것은 이미 확정된 이야기다.
살짝 손을 흔들어주자 활짝 웃는다.
바로 옆에 있는 박물관 관리인 막스는 자신에게 손을 흔든 줄 아는지 양팔을 들고 폴짝 폴짝 뛰는 중.
준비가 되었냐는 수신호를 보내자 팔로 원을 만든다.
오랜만에 보는 선희영과 꼬맹이 김예리, 황정연 역시 자리해 있는 모습.
김현성에게 불려간 조혜진과 아리스 시녀의 가족들을 보호하러 간 병아리들을 제외하면 파란의 멤버들이 전원 모인 셈이다.
물론 민주투사 바쿠더쿠와 아르기모는 여전히 제국민 사이에 섞여 때를 기다리는 중.
아리스 시녀, 아니, 오스칼이 단상으로 발걸음을 옮긴 것은 바로 그때였다.
‘시작이야.’
이쪽이 미리 작성해 준 연설문을 보지도 않고 말로 내뱉는 것을 보니 이미 내용을 전부 외운 모양.
저 정도 노력도 하지 않았던 샤를리아가 괜스레 떠오른다.
‘백번 낫지. 훨씬 유능하지. 암.’
연설 마지막 부분에 집중하고는 싶지만 이쪽 역시 따로 할 일이 있는 만큼 정하얀과 막스가 있는 곳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발걸음을 옮기는 와중에 말을 걸어온 이지혜.
조잘조잘 말을 걸어오는 것이 오스칼과 제국민들의 함성을 뚫고 귀에 들어온다.
“이제 시작이네요.”
“응. 그렇지 뭐.”
“그동안 궁금해서 죽는 줄 알았는데 드디어 볼 수 있겠네. 혹시나 샤를롯트가 제국민들을 진정시킬 수 있는 건 아닌지 정말로 궁금했거든요. 그게 가장 중요하니까.”
“그녀가 내가 준비한 한 방을 수습할 수 있다면 난 샤를롯트를 신이라고 부를 거야.”
“그만큼 자신 있는 거겠죠? 솔직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닌데…. 실현 가능성이 크지는 않죠. 역사적으로 보면 명예혁명이나 무혈혁명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게 아예 없었던 건 아니지만….”
“영국에서도 한 번 있지 않았나?”
“아아. 제임스 2세를 국외로 망명시킨 그거요? 그게 민주화를 이뤄낸 건 아니잖아요. 권리주의가 장전됐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지만…. 그리고 그것도 피를 흘리기는 했을걸요? 샤를롯트가 이걸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모델로 삼고 있다고 한다면 그렇다고 할 수 있겠네요. 부패하고 무능한 건 물론 독선적인 황실, 종교적인 문제고 섞여 있고… 국민들 역시 불만을 품고 있는 상황.”
“세계사는 잘 모르는데….”
“몰라도 돼요. 어차피 뻔하니까요. 아주 많이 변질되기는 했지만 들고 일어선 제국민들을 수습하고 그동안 꿍쳐놨던 병력을 풀어 국민들과 함께 들어가 황제를 압박하겠다는 계획이죠, 뭐. 영국의 무혈혁명 같은 경우에는 외부에서 병력이 들어왔다는 차이점이 있지만 사실 별로 다를 건 없다고 봐요. 피를 흘리기는 흘리겠지만 그래도 최소화할 수 있을 거고요. 좋은 계획이죠. 좋은 이상이고…. 개인적으로는 샤를롯트가 바보 같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사실 존경심마저 든다니까요.”
“누나가 그렇게까지 말할 줄은 몰랐는데 의외네.”
“원래 역사적인 철학자나 혁신가, 이상가들은 그녀 같은 법이예요. 조금 예가 다르기야 하겠지만 공산주의를 세상에 내놓은 이들이나 국가의 체제로 선택한 이들이 멍청해서 그런 선택을 했을까요? 그 사람들뿐만이 아니죠. 모든 정치 이상가들은 천재라고 부를 수 있는 이들이 대부분이에요.”
“누나 말이 맞아.”
“문제는 이런 사람들이 실패하는 이유죠, 뭐.”
“그건 나도 알 것 같은데.”
“뭘까요?”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이야.”
“개인적인 생각이라면 오히려 환영이네요.”
“다른 인간들도 자신의 이상을 쫒아올 거라고 믿었다는 거.”
샤를롯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더 이상 관심 없지만 그녀가 제국민들과 자신의 캠프에 있는 이들을 철썩 같이 믿었다는 건 조금 가슴 아픈 이야기다.
장담컨대 그녀의 세력 안에서 그녀의 사상에 공감하지 않은 이들이 몇쯤은 있으리라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은 그녀의 내부 사정이 아닌 내가 탄 배가 어떤 길로 목적지로 향하느냐.
지금까지 배를 운행하고 있던 것은 그녀였지만, 이 순간부터는 내가 하게 될 것이다.
마침 우리의 오스칼이 연설을 한창 흥미롭게 진행하고 있는 상황.
딱 괜찮은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다.
“하얀아, 막스. 영상 내보내.”
이 좋은 걸 우리만 볼 수는 없다.
창문 밖에서도 보일 정도로 커다란 마력 홀로그램.
공중에서 생겨난 화면은 수도에 있는 제국민들이 전부 볼 수 있을 정도로 컸다.
깜짝 놀란 대중들이 눈으로 보고 있는 광경은 아마 오스칼의 얼굴일 것이다.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이지혜는 눈앞의 영상을 바라보다 막스가 준비하고 있는 홀로그램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제법 경악한 표정으로 말이다.
“저… 저, 저게 뭐예요?”
“뭐긴 뭐야. 다음에 내보낼 영상이잖아.”
“그건 알고 있어요. 제가 드리는 질문은… 안에 있는 내용이 뭐냐는 뜻이잖아요.”
“내가 운영하는 블랙마켓에 들락날락거리는 귀족 나으리들의 명단과 그들의 활약상 모음이지.”
“미… 미친. 오빠… 정말로 이거….”
“푸흐하하하핫.”
“이, 이건 정도가 심한 것 같은데. 이건… 너무….”
“왜? 누나. 아무리 그래도 너무한 것 같아?”
“아뇨…. …좋네요. 솔직히… 조금 축축해졌어요.”
어디가 축축해졌다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지혜의 목소리는 미묘하게 떨렸다.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이 당연.
마력 홀로그램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이들의 분노가 폭발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거라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영상을 본 기득권이라면 누구라도 그런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