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8
회귀자 사용설명서 278화
원하지 않은 설계(2)
제국에서 제1황녀의 존재는 골칫덩이다.
황제도 그 사실을 잘 인지하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제1황녀에게 과중한 업무나 무리한 일을 시키는 것을 자제해 왔다.
혹시라도 그녀가 어디서 사고라도 칠까 염려했던 탓이다.
‘그뿐만이 아니지.’
아버지로서도 그녀가 걱정되는 것이 당연.
만약 내가 황제였어도 제1황녀를 저대로 두고 볼 수는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지금 당장은 황제의 비호가 있어 괜찮지만 만약 이 영감이 베니고어 여신의 품으로 돌아간 이후를 생각해 본다면 이후 어떻게 될지는 무척이나 뻔하다.
아마 무난하게 제2황녀가 황위에 오를 것이고 1황녀는 어떤 식으로든 불이익을 받게 될 것이다.
지금 같은 사고를 친다면 단순 징계로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버지 입장에서는 그게 불안하게 느껴졌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지. 이건 아니야.’
이 늙은이도 양심이라는 걸 가지고 있다면 절대로 그런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따라 유독 진지한 표정이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생각하고 있는 게 나와 같지는 않을 거다.
그렇지만 내 행복회로와는 다르게 평소와 다른 분위기와 다른 말투는 눈앞에 있는 이 늙은이가 무엇인가를 노리고 있다는 걸 말해주는 듯했다.
‘아니겠지.’
지옥에서도 용서받지 못할 제안을 해오지는 않을 것이다.
촉이 자꾸만 경고를 울리고 있었지만 지금 당장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문제.
이 영감탱이의 입에서 그 대사가 튀어나오는 것은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 했다.
“그렇지 않아도 아침에 잠깐 뵈었습니다.”
“그래… 상태는….”
“심리적으로 조금 불안하신 것 같기는 했지만… 자신의 잘못을 통감하고 계신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다행이지만….”
더 이상의 샤를리아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보다 황제 폐하, 어제도 약주를 하셨다고 들었사온데….”
“그랬지. 안 그래도 오늘 이기영 명예주교를 부른 이유도 함께 잔을 부딪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야. 오늘은 긴히 할 이야기도 있고….”
“건강에 좋지 않사옵니다, 폐하.”
“허허허. 명예주교는 정말로 나를 걱정해 주는 것 같아. 다른 충신들과 똑같은 이야기를 해도 그대가 하는 말은 조금 다르게 들려오니… 그것 참 신기하지.”
“폐하께서 건강하길 바라는 마음이야 누군들 다르겠습니까. 아마 폐하께서 그렇게 느끼시는 이유는 황제 폐하께서 저를 더 신뢰해 주시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 내가 이기영 명예주교를 신뢰하고 있지. 아암… 그렇고말고. 그래서 하는 말이지만….”
“하하. 황제 폐하의 신뢰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면 분골쇄신 노력해야겠습니다.”
필사적으로 말을 돌리려고 해도 오늘따라 약을 먹었는지 쉽사리 넘어오지 않는다.
이미 마음을 다잡은 것 같은 모습.
그 동안 뭔가를 고민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 황제가 보여주는 행동이 더욱더 당황스럽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닐 수도 있어.’
어쩌면 단순한 뇌내망상일지도 모른다.
황제에게 다른 골칫거리가 있고 어쩌면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해올지도 모른다.
샤를리아가 아무리 문제아라고 한들, 나는 제국민의 범주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이방인이니까.
어떻게 생각해도 많은 애로사항이 꽃피는 상황이라는 거다.
황제가 조용히 손을 들자 시녀 몇몇이 튀어나와 잔에 와인을 따르기 시작.
이렇게 둘이 함께 와인을 마실 수 있다는 것만 해도 크나큰 영광이건만 어째서 이렇게 불안한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불안감에 말을 돌리고 또 돌려봤지만 핸들이 고장 난 8톤 트럭처럼 이 말만은 해야겠다며 돌진해 오는 황제를 막을 수 있을 리가 만무.
결국에 황제는 자신의 속 안에 있는 말을 끄집어냈고, 나는 예상이 맞았다는 사실에 저주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이기영 명예주교는 샤를리아를 어떻게 생각하나?”
‘이 사이코패스 같은 새끼!’
사이코패스가 아니라면 이런 질문을 해올 수가 없다.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에 대해 생각을 잠깐 동안 하기는 했지만 다시 한번 슬그머니 주제를 바꾸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세간의 평가와는 다르게 훌륭한 점도 갖추신 분이옵니다. 화를 참지 못하는 불같은 성정을 가지고 계시기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계획하고 있는 일을 밀어붙이시는 걸 주저하지 않으십니다. 결단이 있고 추진력이 있으시고 자신에게 맡겨진 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책임을 지시는….”
“아니. 내 질문의 뜻은 그게 아니라네. 이기영 명예주교.”
“위대하신 황제 폐하. 죄송하지만 황제 폐하께서 정확히 어떤 뜻으로 그, 그… 런 말씀을 하시는 건지 이해하기 힘이 듭니다. 혹여나 1황녀 전하가 또 어떤 결례를 저질렀는지요.”
“아닐세. 그런 뜻으로 이야기 한 게 아니야. 조금 더 명확히 묻는 것이 좋겠군. 나는 지금 이기영 명예주교가… 내 딸 샤를리아를 여자로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물어본 것이네.”
눈앞에 있는 이 황제는 사이코패스가 맞다.
“어, 어떤 뜻으로 그런 이야기를 하시는지….”
“말… 그대로의 의미일세.”
‘제기랄.’
여자로서는 잘 모르겠다.
‘솔직히 기회만 주어진다면 용숨결 물약을 던져 버리고 싶다’라는 말이 입 끝에 맴돌았지만 그런 대사를 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나를 지옥의 구렁텅이에 몰아넣으려고 하는 황제의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
‘네 똥은 네가 치워야지… 그걸 내가 왜 치워.’
일단은 칭찬부터 시작해서 거절의 뜻을 밝히는 것이 옳다.
“어떻게 말씀을 올려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샤, 샤를리아 전하의 그 미모는 마치 보석처럼 아름다우십니다. 낭랑한 목소리는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목소리라 해도 부족함이 없으시고… 그 고귀한 핏줄이 빛이 바라지 않게 항상 그 기품을 유지하고 계시니… 어디에서 온 줄 모르는 이방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분이시지요.”
나쁘게 않게 마무리를 지었다고 생각했건만, 이 사이코패스에게는 내가 뒤에 전한 말은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다.
“허허허. 그렇지. 그 아이가 성격이 모난 구석이 있어도 자기 어미를 꼭 빼닮았는지 보석처럼 아름답다는 명예주교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닐세. 사실 어렸을 때에는 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로 뽑힐 정도였으니 그 미모가 어디 가겠는가.”
“아… 네….”
“한참 때는 이곳저곳에서 혼담이 들어오기는 했었다네. 아암….”
“그렇군요.”
“내 이기심 때문에 샤를리아를 잡아두고 있었지만 이제는 떠나보낼 때가 된 게야.”
“아… 예….”
그 한참동안 여기저기에서 들어오던 혼담이 어째서 뚝 하고 끊겼는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으리라.
기본적으로 황제나 샤를리아의 마음에 차는 이들이 없었을 수도 있겠지만 장담컨대 모두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깨닫고 거리를 벌린 것이리라.
황실의 제1황녀와 연을 맺게 돼서 얻을 수 있는 것보다 그녀와 함께 해서 잃어버릴게 더 많다고 판단한 것이다.
나 역시 같다.
‘얻긴 뭘 얻을 수 있겠어.’
제2황녀와 제1황녀의 사이는 물과 기름이다.
황실의 일원이고 나발이고 하기 전에 제1황녀와 연관된다는 건 제2황녀를 적으로 돌린다는 것과 다름이 없다.
이미 나는 그녀의 적이지만 가장 가까운 곳에서 샤를롯트를 감당하고 싶지는 않다.
“사실 이번 일에 대해서는 실망도 크고 여러 가지 생각도 많았지.”
“네….”
“여러 가지 들려온 이야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샤를리아에게 기대를 걸고 있었지만 이번 일을 겪고 난 이후에 다시 한번 깨달았네. 그 아이에게 누군가를 다스리는 자리는 어울리지 않아.”
“꼭 그렇지만은….”
“죽기 전에 그 아이가 가정을 이루는 것을 꼭 보고 싶네. 이기영 명예주교.”
“그, 그렇게 할 수 있으실 겁니다.”
“아암. 그렇게 되어야지. 그래야 내가…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아. 그 철부지를 그냥 두고 떠나가기에는….”
“그, 그런 말씀은 삼가 주시옵소서. 폐하께서는 건강히 오랫동안 제국의 통치자로 남을 것입니다.”
“허허허. 고맙군. 이기영 명예주교, 자네는 알고 있었지?”
“…….”
“누가 봐도 알고 있겠지만 첫째 아이와 둘째 아이의 사이가 그다지 좋지만은 않아. 혹여나 내가 떠난 뒤에 둘째가 제 언니에게 몹쓸 짓을 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는 게 사실이라네. 나도 그렇고 내 아버지인 선대 폐하께서도 그런 과정을 겪었어. 샤를롯트는 영특하지만 필요한 일에 손을 쓰는 것을 주저하지 않지. 아마 제 언니에게도 똑같을 게야.”
‘슈바….’
“샤를리아. 그 망나니도 내 딸일세. 나는 우리 첫째가 안전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아가기를 원해. 자신이 좋아하고 잘 따르는 사람이라면 그 아이도 욕심을 버리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겠지.”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잘 모, 모르겠습니다. 폐하.”
“허허허. 자네는 눈치가 빠르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런 부분에서는 둔하군.”
“송구스럽습니다.”
“어째서 그 아이가 마를린 영애에게 몹쓸 짓을 했는지 들었네. 나도 그 아이에게 구금을 내리는 과정에서 언성을 높였지. 눈치챘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아이가 자네를 많이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야. 그나마 그 동안 얌전했던 것도 모두 자네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였던 것 같고.”
“…….”
“그 아이 이야기를 들어보니 자네도 샤를리아에게 마음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건 또 무슨 개소리야, 씨발.’
당연하지만 그런 티를 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아무래도 이 미친 여자가 되는 대로 개소리를 지껄인 모양.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가 나올 정도였다.
“나도 여러 가지 방향을 생각해 보기는 했지만 많은 고민 끝에 이게 제일 좋은 선택지라 확신할 수 있었지. 아암. 그렇고말고.”
“폐하….”
“샤를리아를 데려가 주게.”
‘이 나쁜 새끼!’
뭔가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황제가 결론을 말해버렸다.
절로 주먹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
저런 결론에 다다른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지만 솔직히 도망쳐야겠다는 생각 외에 다른 생각은 아무것도 들지 않았다.
가능하다면 전력질주로 황성을 벗어나리라.
“북쪽에 남아 있는 영지가 있다네. 좋은 곳이라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한적하고 외부의 시선이 닿지 않은 곳이지.”
나도 알고 있다.
어마어마하게 춥고 뭐 먹을 수 있는 게 없는 곳이다.
제국 내에 있는 북부 영지는 대부분이 그런 식이다.
“이방인에게 영지를 내린다는 데에 귀족들의 반발은 있겠지만 자네라면 아마 그들도 대충 수긍할 게 분명하겠지. 샤를리아와 함께 그곳으로 가 유유자적 인생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게야. 샤를롯트도 변방에 있는 언니에게까지 손을 쓰지는 않을 거고 애초에 이기영 명예주교가 그 아이를 들여 준다면 아마 다른 이방인들의 눈치가 보여서라도 무리한 짓은 하지 않겠지.”
“그… 게… 그러니까.”
“이방인이라는 걸 신경 쓰지 말게. 자네들도 이미 제국민이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은가. 교황청의 명예주교이자 제국 8좌의 신분을 가지고 있는 자네라면 충분히 자격이 있어. 그 무엇보다 내가 이렇게 명예주교에게 신뢰를 보내고 있지 않나. 당장 눈앞에 있는 신분의 격차는 무시해도 돼. 아암. 그렇고말고.”
‘신분의 격차는 개뿔….’
“허허허. 물론 좋은 사위를 얻고 싶은 내 욕심도 조금은 들어가 있다는 걸 염두에 두었으면 좋겠네. 이기영 명예주교.”
심지어는 내가 이 제안을 기쁘게 받아들인다고 생각하는 모양.
아무 죄책감 없이 사람을 지옥의 불구덩이로 집어넣으려고 하는 황제의 얼굴을 보자 저도 모르게 안면 근육에 힘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