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6
회귀자 사용설명서 276화
한계가 있는 사람은 밑바닥을 드러내게 마련이다(2)
선택지가 제한적이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마를린 영애가 어떻게든 몸을 회복하기는 했지만 아직은 안정을 취해야 했다.
사실 불행 중 다행이라는 표현 역시 작금의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카트린 공작부인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는지 부들부들 떨고 있었고 엘리제 백작부인 역시 아직까지 충격이 가시지 않았는지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니까.
항상 티타임을 즐기는 멤버들 중 하나가 큰 화를 당했으니 저렇게 반응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나 역시 입맛이 씁쓸하다.
마를린 영애를 그동안 크게 신경 쓰지 않았지만 그래도 자주 얼굴을 맞댄 사이인 만큼 그녀가 아파하는 모습을 보는 건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이 상황에서도 여전히 머릿속을 점거하고 있는 생각은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는가에 대한 것.
‘풀긴 뭘 풀어. 시발….’
답이 없는 문제다.
애초에 이 멤버는 샤를리아 캠프로 들어오는 걸 고민하고 있는 멤버들이었고 적폐축제가 일어나고 있는 현 캠프에서 꼭 필요한 인물들이었다.
공화국과 맞닿은 경계, 동부 귀족의 중심세력이자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는 진짜들이다.
어디서 콩고물이라도 떨어지는 줄 알고 샤를리아에게 납작 엎드려 혓바닥을 내밀고 있는 늙은이들과는 격이 다른 손님들.
그런 손님에게 무례를 저지른 것도 모자라 뜨거운 물을 끼얹어 버렸으니 답을 찾을 수 있을 리가 없다.
표면상으로는 샤를리아 캠프에 몸을 담가 만날 것을 종용한 나에게도 악감정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는 거다.
화해를 시킨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이야기.
나 역시 샤를리아든 카트린 공작부인이든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마를린 영애는 아직까지 내 손을 꽉 쥐고 있는 중이다.
카트린 공작부인의 무거운 입이 열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괜스레 미안해하는 내 표정을 읽었는지 일단은 이쪽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는 것 같은 분위기.
“이기영 명예주교님이 미안해하실 필요 없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요. 명예주교님은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제가 명예주교님이라고 하더라도 이런 상황이 생길 거라는 걸 예상하지 못했을 테니까요.”
“면목이 없습니다.”
“아니요. 정말요. 다만….”
“네.”
“현재 이기영 명예주교님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고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려고 하시는지 이해가 가지만 저희가 그쪽으로 함께 하기에는 힘들 것 같습니다.”
‘제길….’
당연한 결과였다.
상황이 이렇게 됐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이쪽과 함께한다고 한다면 나는 이들을 귀족이 아니라 성자라고 부를 것이다.
“신경을 써주시고 자리를 만들어주시고 여러 가지로 저희를 도와주신 것은 알고 있지만 아무래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카트린 공작부인, 엘리제 백작부인.”
“물론 이기영 명예주교님을 봐서라도 2황녀 전하의 세력에 가담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렇지만….”
겨우 2황녀의 세력에 가담하지 않는다는 걸로 이 사태를 마무리 지을 리가 없다.
아마 속으로는 몇 번을 씹어 먹어도 분이 풀리지 않으리라.
아무리 황실의 사람이라고 해도 정도라는 게 있는 법이다.
당장 귀족사회에 오늘의 일이 퍼져 나간다면 샤를리아는 몰매를 맞아도 단단히 맞을 것이 분명.
심지어는 적폐 늙은이들 역시 떨어져 나갈지도 모른다.
자신들에게 해를 끼치는 황제를 그 누가 섬기고 싶어 하겠는가.
잠깐 한숨을 쉰 이후에 카트린 공작부인이 다시 한번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황녀 전하께 이번 일에 대한 책임은 묻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저희는 정식으로 황제 폐하께 이 일에 대해 보고를 올릴 것이고 제1황녀 전하가 정당한 벌을 받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십분 이해합니다. 저 역시… 1황녀 전하가 정당한 처벌을 받으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움직여 보겠습니다.”
나 역시도 이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는 거다.
지금 당장 저쪽의 편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나도 쌍으로 묶여 적으로 인식될지도 모른다.
일단 중립을 지킨다는 것만 해도 충분히 감사한 일이다.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카트린 공작부인은 다시금 고개를 끄덕이며 이쪽에 말을 건네 오기 시작.
단순히 파벌싸움이 아닌 진심어린 조언이었다.
“이기영 명예주교님이 영특하신 것은 알고 있지만 그래도 조금은 나이를 더 먹은 입장에서 한마디 드리겠습니다. 그분과 함께하시는 건 명예주교님에게도 득이 되지 않을 겁니다. 발을 뺄 수 있을 때 빼시는 게 좋을 거예요. 저도 혹시나 그분이 달라지신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봤지만 사람은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말을 뼈저리게 실감한 것 같습니다. 본래 성정이 포악하고 화를 참지 못하는 분입니다. 이기영 명예주교님이 꼭 현명한 선택을 하실 거라고 믿습니다.”
“반드시 새겨듣겠습니다, 카트린 공작부인.”
그 말밖에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제길. 제길.’
마를린 영애가 사고를 당했다는 게 캐슬랙 백작의 귀에 들어가는 것은 금방이다.
딸을 끔찍이 아끼는 캐슬락 백작이 무슨 짓을 해올지 걱정되는 것은 당연지사.
이 틈을 노리고 찔러들어 올 샤를롯트나 다시 한번 샤를리아를 구제불능이라고 생각할 황제의 반응 역시 신경 쓰인다.
‘입만 가져다 대면 되는 거였는데.’
그걸 가져가지 않고 바닥에 던져버렸다.
지금 본인의 위치가 뭔가 대단하게 변했다고 착각이라도 하는 모양.
‘멍청한 년! 인간 쓰레기!’
진짜 쓰레기는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다.
“마를린 영애는 저희가 지키고 있겠습니다, 명예주교님. 일단 돌아가셔서….”
“아닙니다.”
“아뇨.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응접실에 황녀님이 혼자 남으셨으니 어떻게 사태를 책임지고 정리할 사람도 필요하니까요. 저희는 솔직히 황녀님의 얼굴을 다시 볼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부디 부탁드립니다.”
“네.”
입 안에서 쓴 맛이 느껴진다.
마지막으로 마를린 영애의 손을 한 번 꽉 잡아 준 이후에는 인사를 한 뒤 사고가 일어났던 현장으로 되돌아가기 시작.
중간 중간에 보이는 광경들은 확실히 개판 오 분 전이다.
장식되어 있는 것들은 여기저기 떨어져 깨져 있었고 빈 포션 병이 바닥에 나뒹구는 것도 보였다.
가면 갈수록 샤를리아의 시녀단 역시 그 모습을 보였는데….
매번 이쪽에 보고를 올리는 아리스 시녀의 볼은 벌써부터 빨갛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인 채 바깥에서 정리를 하고 있는 것을 보니 일어난 일에 화를 참지 못한 샤를리아가 개짓거리를 시작한 모양이다.
“아리스 시녀님.”
“이기영 명예주교님!”
“얼굴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보다 명예주교님… 황, 황녀님께서 급하게 찾으셨습니다.”
“그전에 치료부터 받는 것이 먼저입니다. 포션을 머금고 계시면 조금 좋아질 겁니다.”
“이, 이 귀한 걸 어찌 제가 감히….”
“괜찮습니다. 아까 빠르게 이쪽을 도와주신 답례입니다. 황녀 전하는 지금….”
“아… 그… 괴, 굉장히 화가 나신 듯합니다. 아무래도 황녀님을 내버려 두고 명예주교님이 뛰쳐나간 게 충격이었던 것 같아서… 어서 빨리 이기영님을 찾아오라 명하셨는데 혹시 다른 시녀들을 마주치지 못한 것인지요.”
“아. 마주치지 못했습니다. 아마 엇갈린 것 같습니다만.”
“어서 빨리 들어가 보셔야 합니다. 많이 슬퍼하고 계십니다.”
지랄병이 났다는 걸 최대한 순화시켜서 이야기한 것이 분명하다.
내가 계속해서 포션을 내밀자 아리스 시녀는 부담스러워하면서도 입 안에 있는 포션을 머금었다.
볼이 부풀어 올라 오물오물거리기가 무섭게 입 안이 터진 상처가 회복되었을 것이다.
“이럴 게 아니라 제가 모시겠습니다.”
“아니, 괜찮습니다. 시녀님. 저 혼자 가도 충분합니다.”
“그렇지만….”
“다른 분들과 함께 여기 바깥을 정리해 주시면 됩니다. 황녀 전하는 제가 잘 달래보겠습니다.”
“아… 네.”
사실 뭘 어떻게 달래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감을 잡을 수 없다는 말이 어울리리라.
대충 어떤 상황인지는 알 것 같다.
이쪽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나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을 것이고 평소처럼 마를린 영애는 신이 나서 이쪽에 대한 이야기를 조잘거렸을 것이다.
영애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내가 알 수 없지만 예전에 있었던 약혼이니 뭐니 이야기를 꺼냈을 가능성도 있다.
둘이서 주고받은 편지나 캐슬락에서 자신과 있었던 에피소드들을 꺼냈을 수도 있다.
표면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마를린 영애는 10대 소녀 팬이 가수를 따라다니는 행동과 굉장히 유사한 행동을 벌이고는 했으니까.
뭐가 어떻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샤를리아는 그녀의 말을 듣고 치미는 화를 못 참고 주전자를 쓰로잉 해버렸다는 것.
그게 사건의 전말일 것이다.
마를린 영애가 혹시 그녀를 도발한 것은 아닌지에 대해 생각해 봤지만 가능성은 적다.
영애는 조금 특이하기는 해도 미친 짓은 하지 않는다.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문을 활짝 열어젖히자 기다렸다는 듯이 샤를리아 황녀가 이쪽을 바라봤다.
어처구니없게도 무척이나 억울하다는 표정이 시야에 비쳤다.
이어서 입을 열어오는 꼴은 가관.
마음 같아서는 용숨결 물약을 던져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기영 님! 이제야 오셨군요.”
“…….”
“카트린 공작부인이나 엘리제 백작부인에게 사정은 전해 들으셨습니까? 무, 무슨 말씀을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마를린 그 멍청한 것이 자꾸만 이상한 소리를 해대서….”
“…….”
“자꾸만 자신이 명예주교님과 약혼할지도 모른다느니 하는 되먹지 못한 헛소리를 했습니다. 어처구니가 없지요. 주고받은 편지도 많다고 이상한 소리를 하는데 듣고 있는 제 입장에서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이기영 님의 명예를 지켜드려야겠다고 생각하다 보니 저도 모르게 손이 나가서….”
“…….”
“일이 이렇게 커질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지만 그 계집애는 당해도 쌉니다. 고작 백작의 딸이… 어떻게 감히 분수를 모르고….”
“고작 백작의 딸이 아닙니다. 샤를리아 님.”
“괜찮습니다. 이기영 님이 어떤 걸 걱정하시는지 이해합니다. 그렇지만 변두리에 있는 자그마한 귀족의 힘을 얻지 못한다고 해서 저와 이기영님이 함께 탄 배가 침몰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세력도 많이 모였고….”
이미 침몰하다 못해 맨틀까지 가라앉았다.
정하얀과 함께 보트를 타는 것 보다 이 여자와 타는 보트가 더 위험하다.
조금 늦게 깨달은 감이 있지만 그걸 이제야 확신할 수 있었다.
“자그마한 귀족이 아닙니다. 캐슬락 백작은 지난 십여 년 동안 공화국의 위협에서 제국을 지켜온 충신 중 하나고 마를린 영애는 그 캐슬락 백작이 가장 아끼는 금지옥엽입니다. 그 규모는 작지만 캐슬락 가문의 상징성이나 제국민들이 그들에게 보내는 신뢰와 믿음은 감히 상상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황녀님.”
“괜, 괜찮습니다. 아무리 그렇다고는 하나 그런 정신 나간 계집….”
완전히 틀려먹었다.
애초에 어떻게 이번 일에 대한 수습이 아니라 그녀가 괜찮은지에 대한 이야기가 먼저 나왔어야 했다.
우발적으로 손이 나간 것도 아니고 계획적이었던 걸로 모자라 본인이 무슨 짓을 했는지에 대한 자각도 없다.
일단 화를 풀고 변명하기에 급급한 모습을 보니 이딴 걸 황제로 만들어 보겠다고 발버둥친 내가 한심하게 느껴진다.
샤를롯트 황녀가 나를 얼마나 우습게 봤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부끄럽다.
“캐슬락 공작부인도 마찬가지고 엘리제 백작부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캠프에 모인 어중이떠중이들 보다 그녀들은 더 가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아… 그렇지만… 그렇다면 꼬투리를 잡아서….”
“그녀들도 바보는 아닙니다. 황제 폐하께 이번 일을 정식으로 항의할 거고 샤를리아 님은 또 폐하에게 징계를 받을 겁니다. 아무리 황가의 자손이라고 한들, 제국에 헌신하는 귀족을 이런 식으로 대우할 수는 없습니다. 단순히 이쪽으로 합류하느냐 아니냐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아예 황녀님에게 등을 돌릴 수 있다는 걸 이야기하는 겁니다.”
“지, 지금까지 잘해왔으니 어떻게든….”
“지금까지 한 게 있어야 수습할 수 있지요. 쉽게 쌓아올린 것은 쉽게 무너지게 마련입니다. 황녀님은 뭔가 대단한 걸 이룬 것이 아닙니다. 고작 출발선에서 막 발을 떼려고 시작하는 타이밍이었고 앞으로 계속 쌓아올릴 수 있는 탑을 스스로 무너뜨린 겁니다. 이번 일은….”
“제, 제가 괜찮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네?”
“분, 분명히 괜찮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제가 황제가 되면 전, 전부다 해결할 수 있습니다!”
빼액 소리를 지르는 꼴이 가관이다.
본인도 깜짝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더 이상의 잔소리는 듣기 싫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라 황당하다 못해 실소가 튀어나올 지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