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4
회귀자 사용설명서 274화
당근과 채찍 그리고 검(2)
항상 같은 얼굴에 같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있는 모습.
다시 봐도 샤를리아와 닮은 점이 많다.
백금발의 머리카락도 그렇고 새하얀 피부색도 마찬가지다. 아마 멀리서 본다면 제대로 구별하기 힘들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면 표독스러운 얼굴을 가지고 있는 1황녀와 차이가 존재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같은 황가의 피를 이어 받았다는 걸 실감할 수 있을 정도였다.
‘머리색이라도 달랐으면 조금 더 편했을 텐데….’
더러운 핏줄을 가지고 있다는 물타기가 한결 수월하게 진행됐을 것이다.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샤를롯트는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다시금 귀 뒤로 넘긴 이후에 말을 이었다.
“사람이라는 건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네. 저도 제2황녀 전하의 말에는 동의하는 편입니다. 실제로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만… 어째서 저에게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모르는 척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기영 명예주교님.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저도 대충 알고 있고 당신도 제가 어떤 사람인지 대해 대충 알고 있지 않습니까.”
“정말로 저는 샤를롯트 전하께서 무슨 말을 하시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그것도 이런 자리에서 말입니다.”
“저는 지금 당신이 언니와 같은 길을 걷고 있다는 것에 대해 묻고 있는 겁니다.”
꽤나 직접적이라고 생각했다.
말을 아껴야 될 타이밍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자, 다시 한번 말을 이어간다.
“수다스러운 타입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생각보다 말을 아끼시는군요.”
“사람을 잘못 보신 모양입니다.”
“네. 그 말씀이 맞습니다. 제가 사람을 잘못 본 게 맞지요. 조금 더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상식 밖의 행동을 보여주시고 계시니 말입니다.”
‘네 말이 맞아.’
누가 봐도 지금의 샤를리아 쪽에 붙는다는 것은 이성적인 행동이 아니다.
보통이었다면 샤를롯트가 던지는 채찍을 겸허히 받아들인 이후에 당근을 주워 먹는 쪽을 선택했을 것이다.
김현성의 부탁 그리고 그녀의 채찍이 얼마나 아플지에 대해 걱정한 내 겁이 죄인이었다.
“당신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
“특히나 빅터하르트 님께 말입니다. 양보하는 걸 그다지 좋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극단적인 행동을 보이시더군요. 제가 당신에 대해 어느 정도 잘못 판단하고 있었다는 건 인정합니다. 그리고 이전에 보였던 무례에 대해서도 사과드리겠습니다.”
“무례라니요. 누가 들을지 걱정됩니다, 황녀 전하.”
“당신의 손과 발을 쳐내려고 한 행동에 대해서 말씀드린 겁니다, 명예주교님. 이해하시겠지만 저는 이기영 명예주교님의 존재가 그리 달갑게 느껴지지는 않았습니다. 명예주교님이 제 입장에 계셨다면 당신 역시 자신을 어떻게 억제할지 고민하셨을 겁니다. 한 사람이 너무 큰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건 저 같은 사람에게는 위협적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저는 제가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샤를롯트 황녀 전하. 어떻게 황실의 일원 앞에서 제가 가진 권력에 대해 논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종류의 대화를 나누는 것을 불편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런 말을 해도 응해주실 것 같지는 않지만요. 그럼 주제를 바꾸어 보죠.”
샤를롯트가 잠깐 대화를 끊고 전방을 바라보는 것이 보였다.
때마침 제1황녀가 제국 기사단 순방을 마친 이후에 단상 위에 올라갔기 때문이다.
적당한 자리에 착석한 이후에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는 것을 보니 계속해서 옆 자리에 앉아 남은 대화를 하자는 모양.
애초에 다른 이들과는 말이 되어 있었던 모양인지, 달리 내가 앉을 만한 곳은 없었다.
혹시나 오해할지도 모르는 제1황녀에게는 눈짓으로 양해를 구한 이후에 자리에 앉자, 제1황녀가 주머니에 꼬깃꼬깃 접어놓은 연설문을 꺼내 단상위에 올려놓았다.
내가 적어준 연설문이니 적어도 반 이상은 갈 것이다.
샤를리아는 당당하고 낭랑한 목소리로 이쪽의 연설문을 읽어나가기 시작.
의자에 앉아 단상을 바라보고 있던 이들은 박수를 보냈고 한층 더 자신감에 찬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개인적으로 기대가 되는 것이 당연하다.
그녀가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고 싶었지만 다시 말을 걸어오는 샤를롯트 때문인지 1황녀에게 집중할 수가 없었다.
“조금 더 직접적으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명예주교님.”
“네?”
“저는 당신이 저와 같은 배에 타셨으면 합니다.”
“무슨 말씀을….”
“말씀드리는 그대로입니다. 언니에게서 벗어나 직접 제 배 위에 올라타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저는 의심이 많습니다. 또 걱정도 많고요. 아마 당신과 비슷한 종류의 사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명예주교님이 저와 함께해 주신다고 말씀해 주셔도 아마 사전에 계획하고 있던 작업을 멈추지는 않을 겁니다. 당신의 권한을 축소시킬 거고 당신의 양보를 받아내려고 노력할 겁니다.”
“아아….”
“그렇지만 그 결과가 당신에게 좋게 돌아오리라는 것 하나는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당장은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지만… 장담컨대 모든 결과는 제국과 당신 모두에게 좋은 일이 될 겁니다. 물론 이기영 명예주교님이 계획하고 계신 결과보다 좋을 거라는 확답은 드리지 못하겠지만 최소한 지금 하고 계신 투자보다 위험하지는 않을 겁니다.”
이런 이야기가 나올 거라고 대충은 생각했었다.
아무래도 그냥 떠나보내기에는 내가 조금 군침 돌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아마 제1황녀를 다시금 일으켜 세우려는 내 모습이 인상적이었던 것 같았다.
‘탐이 나는 인재라는 건가.’
물론 한 입에 씹어 삼키기에는 덩치가 크다는 것도 인지하고 있다.
내 권한을 축소시켜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는 것이다.
사실 태세전환을 아예 하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다.
김현성의 부탁만 아니었다면 진지하게 배를 갈아타는 것도 생각해 봄직하다.
‘하지만.’
이토 소우타 사건 때 빅터하르트 영감에게 말했다시피 나는 절대 이런 부분에서는 양보하지 않는다.
양보하는 건 타인이 되어야 하지 절대로 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실례가 될 수도 있지만 명예주교님에 대해서는 약간의 사전 조사를 마쳤습니다. 용에게 선택받은 자, 신성제국의 명예주교 같은 모두가 알고 있는 타이틀보다는 조금 다른 쪽에 관심이 가더군요. 언론이라는 매체를 린델에 뿌리내리고 여러 가지 변혁을 가져온 것이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영광입니다.”
“자유 도시는 기본적으로 제국과 분리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분리되어 있는 만큼 간접적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린델에 언론이 뿌리내리고 시작한 이후,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제국 내에서도 비슷한 기관이 생긴 것만 봐도 그러합니다. 당신은 기본적으로 이기적인 인간이지만 최소한의 양심 정도는 가지고 있다는 사실 역시 잘 알고 있습니다. 이유야 어찌됐든 간에 당신이 벌인 일들이 다수에게는 좋은 결과를 가지고 왔으니까요.”
“그렇군요.”
“아마 제가 생각하기에… 당신이 그런 결과물을 만들 수 있는 이유는 타인의 눈치를 보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뇨. 확신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틀림없이 대중의 눈치를 보고 있는 사람입니다. 강자에게는 자신이 가진 것을 양보하지 않아도 대중들에게는 자신이 가진 것을 양보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감사하군요. 이걸 칭찬으로 받아들여야 할지는 조금 고민해 봐야겠지만.”
“칭찬이 맞으니 고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명예주교님, 제국에는 당신과 같은 인재가 필요합니다. 대중의 눈치를 보는 인재가, 다수의 눈치를 보는 정치를 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잠깐 숨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거 진짜 물건인데….’
정말 제대로 된 물건이다.
영특한 건 알고 있었지만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도 머리가 좋다.
사고방식 자체가 여기에 있는 다수의 귀족들과 다르게 느껴질 정도, 단상 앞에서 내가 써준 쪽지를 앵무새처럼 읽고 있는 샤를리아와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
어째서 그녀의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이는지도 알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야 이 정도 되는 인물이라면 정통성이고 나발이고 따르고 싶어질 것이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냐는 말도 있지만 황제가 되기 위해서 태어난 것 같은 이가 눈앞에 있다.
어릴 적 동화책으로만 봐왔던 위인의 성장기를 직접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라 나도 모르게 태세전환 버튼을 눌러버릴 뻔했다.
“아.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최근에 묘한 소문이 돌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
“비천한 핏줄이라든지 방탕한 놀이라든지, 밤마다 들려오는 교성 소리라든지. 굳이 반응할 가치도 느끼지 못하는 터무니없는 소문들이지요.”
예상은 했지만 이런 것까지 캐치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직 꼬리를 잡지 못했고… 잡는다고 해도 소문의 근원지를 찾는 데 시간이 걸릴 것 같기는 하지만 어디에서 흘러나오는지 심증은 있습니다.”
“어떤 소문에 대해서 말씀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황녀 전하.”
“명예주교님이 알아주기를 원해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듣고 계시기만 하면 됩니다. 아까 전 사과와 제의가 당근이었다면 지금부터 드리는 말씀은 채찍이니까요.”
“…….”
“저는 적에게 칼을 들이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성격입니다, 명예주교님. 당신이 제국에 있어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정말로 제게서 등을 돌린다면 저도 칼을 빼들 수밖에 없습니다. 현명한 선택을 하셔야 할 겁니다.”
‘제길….’
“어째서… 아버님, 아니, 황제 폐하의 곁에서 간언하는 이들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지 생각해 보시면 답이 나올 겁니다.”
‘슈바….’
“이번에는 양보해 보시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겁니다.”
‘할 수만 있다면 전력으로 양보하고 싶다.’
제대로 부딪치면 짜증 나는 일이 많이 생길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당연.
그렇지만 이쪽에게도 이쪽의 사정이라는 게 있다.
제2황녀를 황제로 만들지 말라는 특명을 받은 만큼 그녀와 같은 배를 탈 수는 없다.
때마침 샤를리아가 낭독회를 끝낸 타이밍.
“양보하실 마음이 생기셨다면 무릎을 꿇고 제 손에 입을 맞추세요. 저는 두 번 말하는 성격이 아닙니다. 당신을 위한 당근도, 채찍도 여기서 마지막입니다. 다음에 뽑는 것은 검이 될 겁니다.”
딱 봐도 그렇게 보이지만 답은 정해져 있다.
“죄송합니다.”
이미 이쪽은 노선을 정했고 다른 선택지는 없다.
너무 멀리 온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 와서 돌아가기에도 우습다.
태세전환의 욕구는 여전히 가슴속에서 펄떡펄떡 살아 숨 쉬고 있지만…….
‘한 번 양보하면.’
계속 양보해야 한다.
불안한 표정으로 이쪽으로 뛰어오는 샤를리아만큼 샤를롯트가 어떤 인간인지 눈에 보였기 때문에 방금과 같은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원하는 건 제국민의 안녕이고 그걸 위해서라면 나에게 계속해서 양보를 요구할 것이다.
굳이 뚜껑을 열어보지 않아도 결과가 뻔하다는 거다.
슬그머니 옆을 바라보자 희미하게 미소 짓고 있는 샤를롯트의 얼굴이 보였다.
저 미소가 어떤 의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추측컨대 자신의 예상이 들어맞았다는 표정이었다.
“제가 처음 한 말을 잘 기억하세요, 명예주교님.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거.”
인사도 하지 않고 곧바로 등을 돌려 사라지는 꼴은 가관.
샤를롯트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는 이해가 가지만 샤를리아가 그 정도는 아니라 생각했다.
“고생하셨습니다, 황녀님.”
“잘한 게 맞나요?”
“네. 아주 훌륭한 연설이었습니다.”
시키는 것도 잘해주고 있고, 이제야 막 자신이 날개를 펼치고 있다는 사실도 인지하고 있다.
지금 이 타이밍에 사고를 치는 것은 애비도 못 알아보는 패륜아도 하지 않을 짓이다.
‘그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을 거야.’
그렇지만.
어처구니없게도.
내 확고한 믿음이 무너지기까지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샤를리아는 그 정도로 멍청한 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