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3
회귀자 사용설명서 273화
당근과 채찍 그리고 검(1)
‘쯧쯧….’
다분히 의도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히 이쪽이 확인하기로는 그녀의 스케줄에 제국 기사단 방문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관할구의 지역 후보가 같은 장소로 유세활동을 벌이러 온 것이나 다름없으니 기가 차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입지가 좁은 1황녀와는 반대로 2황녀의 캠프와 지지 세력은 단단하다.
함께 온 유력귀족들을 보니 이쪽도 조금 덩치를 키워 방문했어야 했나 하는 생각을 해볼 정도였다.
샤를롯트는 기다렸다는 듯이 반갑다는 표정을 짓고는 천천히 이쪽을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녀가 어째서 여기에 있는지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은지, 샤를리아 역시 손을 부들부들 떨며 핏발선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평소대로 행동하시면 됩니다, 황녀 전하.”
혹시라도 돌발행동을 할까 싶어 그녀에게 귓속말을 속삭이자 슬그머니 고개를 끄덕이는 샤를리아의 모습이 보였다.
그렇지만 마치 눈앞에 있는 여자를 찢어 죽여 버리고 싶다는 표정은 여전했다.
‘참을 수 있을까 모르겠네.’
배다른 여동생만 생각하면 질투심에 피눈물을 흘릴 정도니 불안한 것이 당연했다.
제2황녀 샤를롯트에게도 그녀의 언니에 대한 안 좋은 감정이 들어 있겠지만 최소한 이런 자리에서는 드러내지 않는다.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슬그머니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모습이 가관이다.
그 모습을 보고 샤를리아는 자신의 여동생을 향해 입을 열었다.
“여, 여기는 무슨 일인 게냐.”
“제국 기사단을 방문하시고 그들의 노고를 치하하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흔치 않은 자리인 만큼 혹시나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싶어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사전에 연락을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
‘도움은 개뿔.’
“그래…. 고맙구나.”
황당한 말에 샤를리아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지만 누가 봐도 기분이 나쁘다는 모양새였다.
대놓고 티를 내지 않은 것만으로도 칭찬해 주고 싶은 심정이다.
‘그림은 나쁘지 않아.’
‘제1황녀와 제2황녀가 함께 제국 기사단을 방문했다’라는 건 괜찮은 뉴스다.
둘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다른 이들도 고개를 끄덕일 만한 소식.
무난하게만 진행된다면 둘 모두 썩 좋은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으니 윈윈이라고도 볼 수 있다.
황제야 당연히 고개를 끄덕일 테고 아무것도 모르는 제국민들 역시 이 자매의 우애에 대해 소리를 높일 것이 분명하다.
문제는 샤를리아가 언제 지랄발광을 할지 모르겠다는 위험요소 하나뿐이었지만 최소한 지금 보여주는 행동 자체는 굉장히 무난했다.
아무튼 간에 이 자매는 더 이상의 대화를 하지 않은 채 기사단의 연무장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2황녀는 1황녀가 아니라 나를 힐끔 보곤 했는데, 여전히 이쪽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럴 만하겠지.’
안 그래도 간신배 같은 놈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게 분명.
샤를리아가 무슨 행동을 할 때마다 나에게 귓속말을 해오니, 내가 뒤에서 그녀를 조종하고 있다는 걸 눈치 못 채는 게 이상하다.
최근 그녀의 행동과 스케줄을 관리하고 있으니 그녀의 생각이 틀린 것만도 아니지만…….
‘너무 나쁘게는 안 봐줬으면 좋겠는데….’
정적이라고는 하더라도 권력자에게 너무 나쁘게 보이고 싶지 않다는 게 소시민의 솔직한 심정이다.
연무장에 들어서자 제국 기사단의 부단장이며 이번 행사의 책임자가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해왔는데 두 자매가 동시에 찾아올지는 몰랐는지 제법 당황한 듯한 표정이었다.
“이, 이렇게 방문하시게 되어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1황녀, 2황녀 전하.”
“혹시나 저희가 기사들을 귀찮게 한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는군요.”
“아닙니다. 단원들이야 샤를롯트 전하께서 방문해주신 것만으로도 무척 기뻐할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해 주신다니 다행입니다만.”
샤를리아 역시 뭔가 말을 하려고 하지만 선수를 빼앗긴 것 같은 느낌이다.
‘이럴 줄은 알았는데….’
이번 자리가 익숙한지 능숙하게 분위기를 이끌어가는 그녀와는 반대로 샤를리아의 포지션은 뭔가 애매하다.
대놓고 병풍이 되고 있다는 것 정도는 본인이 잘 느끼고 있으리라.
“아….”
우물쭈물거리는 꼴이 가관이다.\
어떻게든 주도권을 자신에게 되돌리고 싶어 하는 것 같지만 이미 부단장과 샤를롯트는 그녀가 끼어들 수 없는 이야기를 주제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무래도 우리 2황녀는 이런 쪽에도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다.
“어떻게, 고민하시고 계시던 병력 개편 문제는 잘 해결되셨습니까.”
“네. 물론입니다. 제국 기사단이 기마대 위주의 병력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아무래도 일반 보병과 방패수 비율을 높이는 게 더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확실히 요즘은 기마대만으로 병력을 운용하기에는….”
“네. 황녀님 말씀이 맞습니다. 무리가 있는 게 사실이지요. 아무래도 한계가 있으니까요. 그리고 추진해 주신 기사단의 개인 물약 보급 역시 기대가 높습니다.”
“그 이야기는 여기 계신 이기영 명예주교님과 나누시는 게 더 좋을 것 같군요.”
“그러고 보니….”
“네. 이번에 기사단에 보급되는 물약은 파란의 연금공방에서 직접 들여올 예정입니다. 대륙 최고의 연금술사가 제국에 있는데 활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으니까요.”
“하하. 그렇군요. 사실 저도 파란에서 유통하고 있는 고급 물약을 써본 적이 있습니다. 평범한 기사들의 봉급으로는 구입하기 부담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포션이라는 게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효과가 좋더군요.”
‘요것 봐라….’
갑작스럽게 날아 들어온 당근에는 눈이 휘둥그레질 지경.
샤를롯트의 채찍질이 기분 나빴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당근은 달콤하기 짝이 없다.
‘사과의 선물이라고 봐야 하나.’
그 동안 제국에서 일반적으로 유통되었던 보급 물약을 생각해 보면 그 질이 좋지 않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기사들의 생존율이나 안전을 생각해 보면 당연히 파란의 연금공방에서 양산으로 만들어지고 있는 물약을 사용하는 것이 옳다.
안 그래도 슬슬 제국과 직접 계약을 할 타이밍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저쪽에서 미리 추진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렇지는 않을 것 같은데… 이유가 있겠지.’
어차피 안정성 측면에서 생각해 보면 어떻게 생각해도 이쪽의 물약을 보급하는 것이 맞다.
군인에게 질 좋은 물건을 가져다주는 것은 지구에서도, 대륙에서도 상식의 범주에 포함되어 있는 이야기.
물론 어딘가에서는 이 상식이 통하지 않는 나라도 있기야 하겠지만 최소한 제국은 본인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기사단과 군인들을 홀대할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다.
서로 관계가 좋다 안 좋다는 따지기 이전에 내 포션을 채택하는 건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이라는 거다.
말하자면 샤를롯트의 입장에서는 그냥 툭하고 콩고물을 던져본 것에 불과.
내가 받아먹으면 좋고 받아먹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얻을 수 있는 게 있다.
‘이간질?’
그렇게 추측하는 게 맞다.
대놓고 불편해 보이는 샤를리아의 표정을 보고서는 나 역시 조금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고는 싶지만 공사인 만큼 뭐라고 코멘트를 달아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둘만의 대화에 잠깐 동안 등판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리라.
물론 완벽하게 소외되어 있는 샤를리아 역시 이쪽으로 함께 데리고 와야 했다.
“가격이 비싼 것은 사실입니다만 품질은 의심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제국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해 주시는 기사단에 납품할 품목은 특별히 제가 신경을 쓰게 될 테니까요. 사실 파란도 이런저런 일 때문에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않은 상황이지만….”
사실 굉장히 여유롭다.
“시중에 판매되고 있는 가격보다는 훨씬 싸게 계약을 진행하게 될 겁니다.”
기회인만큼 최대한 남겨먹어야 하는 것이 당연지사. 파격 디시는 없다.
“사실 제1황녀, 샤를리아 전하께서도 2황녀님과 비슷한 생각을 언급하신 적이 있었는데… 하하하. 이거 참 우연이로군요.”
물론 그딴 소리는 들은 적도 없다.
불과 1분도 채 되지 않은 시간 동안 적지 않은 거짓말이 튀어나왔지만, 이런 건 선의의 거짓말인 만큼 부담이 없다.
슬그머니 샤를리아를 앞으로 내밀자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나서는 그녀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대충 합만 맞춰줘라.’
“그렇군요. 샤를리아 전하께서도….”
미소를 지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제국 기사단의 부단장은 여전히 뿌듯하다는 표정이다.
이 타이밍에 비집고 들어오지 못할 정도로 멍청이는 아닌지 샤를리아 역시 이 흐름에 탑승하려 입을 여는 것이 보인다.
“부끄럽습니다.”
“하하하. 그렇군요. 하하하. 두 분께서 기사단을 이렇게까지 생각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나라가 안전해야 발전할 수 있는 법입니다. 제국 내 최고의 무력집단이라고 할 수 있는 제국 기사단을 위하는 것은 이 나라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하고 있는 생각일 겁니다.”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샤를리아 전하. 하하하하.”
‘좋아. 잘하고 있어.’
아까 전 내가 쪽지를 사전에 읽은 것이 효과가 있었던 것 이다.
물론 샤를롯트의 표정은 담담하다.
대충 예상했다는 느낌인 걸 보면 말 그대로 한번 던져본 것에 불과한 모양.
샤를리아가 비집고 들어간 자리에서 한 발자국 물러나 이쪽과의 거리를 좁힌 것을 보니 내가 생각한 게 맞는 것 같았다.
포섭이 안 되면 이간질이라도 해보겠다는 심보가 틀림없으리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샤를롯트와 샤를리아는 보여주기 식 훈련을 선보이고 있는 제국 기사단에게 격려의 말을 전하는 중이었다.
대부분의 기사들이 샤를롯트에게 더 호의를 보이고 있는 느낌이었는데 확실히 현재 누구에게 더 힘이 쏠려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인 것 같았다.
나 역시 제국 기사단의 연무장에 들어온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샤를리아에게 계속해서 신경을 쓰면서도 마음의 눈으로 제국 기사단의 스펙을 확인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기사단 수준이 꽤 높네.’
빅터하르트 할아범이 최선을 다해서 키우고 있는 이들인 만큼 제국 최고 세력이라고 하기에 부끄럽지 않다.
대부분이 내구와 체력이 높은 것을 보면 말에 올라탔을 때의 파괴력은 그야말로 상상을 불허할 것 같다.
장담컨대 웬만한 중소 길드는 저들의 용트름 한 번에 곧바로 쓸려 나가게 되리라.
물론 제1황녀에게 그런 생각은 하고 있지 않은 모양이다.
이쪽이 전해준 행동과 동선을 최대한 따르기에 여념이 없다.
‘그래도 잘하고 있어.’
격려의 말을 전하고, 그들의 무훈을 칭찬한다.
어차피 이런 종류의 순방이라는 건 대부분 실속이 없고 보여주기 식이다. 검술에도 능통한 제2황녀야 거기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간 모습을 보이고 있었지만 샤를리아는 저 정도까지 보여주지 않아도 상관없다.
‘할 수 있는 것만 하면 되니까.’
굳이 요란한 모습을 보일 필요는 없다는 거다.
“고생이 많으십니다.”
“최선을 다해 제국을 지키는 검이 되겠습니다.”
‘아주 좋아.’
“제국이 안전한 것은 모두 그대들의 덕입니다.”
“감사합니다! 영광입니다. 제1황녀 전하.”
‘그래 넌 그것만 하면 돼. 할 수 있는 일만 하면 되는 거야.’
사실 근력이 높은 기사들과 악수를 하는 건 그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힘든 일이다.
그들이 힘 조절을 한다고 한들, 내구가 약한 우리 같은 사람 입장에선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이미 수십 차례의 악수를 하고 퉁퉁 손바닥이 부어 있는 상황에서도 미소를 유지하는 것을 보니 확실히 독하기는 독한 모양.
딱 저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도중에 샤를롯트가 이쪽으로 다가와 입을 열었다.
“달라질 거라고 생각하시는군요.”
담담한 어조에 담담한 울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