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1
회귀자 사용설명서 271화
그 아버지에 그 딸(3)
제1황녀가 달라졌다.
정확히 말하면 ‘정신을 차렸다’라는 소문이 왕성 안에 퍼지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도 이전과는 달리 보였으니 오랫동안 그녀와 함께 했었던 이들은 그녀의 변화를 더 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리라.
그 변화를 가장 처음 실감한 건 역시나 1황녀를 모시는 직속 시녀단.
아마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놀라고 있을 것이다.
예전에는 민감하게 받아들였을 일도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가는 경우가 잦아졌고 작은 실수 정도는 관대하게 눈감아 주기도 했다.
그녀의 밑에서 온갖 지랄발광을 받아주고 있었던 시녀들의 행복회로가 맹렬히 돌아가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재미있게도 이 시녀단은 오매불망 내가 1황녀를 찾기만을 기다렸는데, 그녀를 변화시킨 게 나라고 확신하는지, 묘한 움직임을 선보이고 있었다.
제1황녀의 명과는 관계없이 그녀를 이쪽과 더 가깝게 하기 위해 조직적인 행동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물론 내 입장에서는 이런 행동들이 귀엽게만 느껴졌기 때문에 그다지 신경 쓰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런 움직임을 보여야 했던 1황녀의 시녀단이 측은하게 느껴질 정도.
‘그래. 너희가 제일 고생했겠지….’
굳이 저들이 돌리고 있는 행복회로를 태워버리고 싶지는 않았다는 거다.
나에게는 그저 먼 나라 이야기였지만 그녀들에게는 이 조직적 행동이 생존권 투쟁이나 다름없다.
심지어 그녀들에게는 묘한 싸구려 동정까지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샤를리아와 함께 있을 때면 가끔 그녀의 시녀들의 행실에 대해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리고는 했다.
효과는 상상했던 것 이상.
다음날 시녀들을 마주쳤을 때, 그녀들이 보여주는 얼굴에는 마치 충성이라도 맹세할 것 같은 기세가 담겨져 있었다.
그냥 불쌍하다는 기분이 들어 툭툭 던져본 말치고는 효과가 좋다.
실제로 시간이 조금 더 지난 이후에는 내가 없었을 때, 샤를리아가 어땠는지 그녀의 시녀단이 직접 전해올 지경까지 와버렸다.
물론 일반적인 보고의 형태는 아니었다.
응접실에 들어갈 때와 나갈 때 그녀가 어땠는지 물으면 제법 성실하게 답해주는 것이 전부.
‘어제 명예주교님께서 돌아가시고 난 이후 무척 기뻐 보이셨습니다.’
라든지.
‘독서하는 시간을 가지셨고 쉽사리 잠에 들지 못하셨습니다.’
딱 이 정도가 가 끝이다.
그렇지만 그녀의 시녀단이 이쪽에 호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확실히 기분 좋은 소식이었다.
‘써먹을 곳이 있겠지.’
어떤 재료든 사용할 곳이 나오게 마련이다. 별 힘이 없는 시녀들이라도 분명히 쓸 데가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사실상 이번 일의 가장 큰 수혜자는 제1황녀의 시녀단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함박 미소를 지은 것은 그녀에게 괴롭힘 당하던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를 걱정하던 이들 역시 그녀의 달라진 행실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특히나 제국의 황제는 매일매일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황실의 골칫덩이라고 여겼던 샤를리아의 변화는 자식들만 바라보고 사는 늙은이를 기분 좋게 하기에 충분했다.
사실 뭔가가 크게 달라진 것은 아니다.
내가 무슨 마법을 부려 샤를리아의 정신 상태를 완전히 뜯어 고친 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인간이란 동물은 악해지기는 쉽지만 선해지기는 어렵다.
만약 고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런 단기간에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렇고말고….’
샤를리아를 교화시켜 황제로 만들겠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이야기.
단지 대중에 어떤 식으로 비춰지는 게 좋을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그 비전을 제시했을 뿐이다.
말로 살살 구슬리며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에 대해 전했다. 더불어 해야 할 일을 정리해 명단을 만들어 스케줄을 관리하는 것도 당연하다.
샤를리아는 샤를롯트 못지않은 독기와 아집을 가지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느껴왔던 패배감이 그녀의 자존감을 갉아먹고 있었을 뿐이다.
그녀는 무능하고 열등감으로 똘똘 뭉쳐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 인정받고 싶어 하는 인간으로 자랐다.
아무도 그녀에게 신경 쓰지 않았을 때, 모두의 시선이 그녀의 여동생에게 쏠려있을 때, 그녀가 어느 정도의 스트레스를 받았을지는 감히 상상할 수 없으리라.
단언컨대 샤를리아가 그토록 기다리고 있는 인간은 나 같은 종류의 인간이었을 것이다.
본인을 인정해 주고 지지해 줄 수 있는 사람.
재활용도 안 되는 폐기물도 대단하다고 말해줄 수 있는 사람.
결정적으로 그녀의 별것 아닌 행동을 제대로 포장해 시장에 내놓아 줄 수 있는 사람.
과자 봉지에 질소를 반 이상이나 채워 넣어 팔아먹을 수 있는 사람 말이다.
“시녀들에게 휴가를 내리셨다지 뭐예요.”
“신전에도 꾸준히 다니시는 걸 보니 아무래도 제1황녀 전하께서 마음을 다잡으신 모양입니다.”
“아침 국무회의에도 참석했다고 들었습니다. 가장 끝에서 조용히 듣고 계시기만 하셨다는데….”
“제국민이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듣기로는 직접 시찰을 나가고 싶어 하시는 것 같았는데 이미 일정도 잡아놓으셨다고 하시더군요.”
“그러고 보니 최근에는 술도 입에 대지 않으신다고 들었습니다.”
“저도 저번 만찬 모임 때 와인을 거절하신 걸 제대로 눈여겨봤었지요.”
제1황녀의 별 것 없는 행보에 들어갈 질소는 아주 간단하다.
조용히 입을 여니 이쪽을 바라보는 이들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역시 그 핏줄이 어디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하하하.”
늙은 귀족들을 단 한순간에 끌어 모을 수 있는 회심의 문장이었다.
보통 선거운동에 들어가는 슬로건들은 그 후보자를 대변한다.
‘기호 1번 샤를리아. 그 핏줄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제국에서는 이런 프레임을 내세우지는 않지만, 샤를리아의 별것 아닌 행보를 포장하기 위해서는 이런 작업이 반드시 필요했다.
괜히 지구에서 정치하던 양반들이 서민을 위하니 경제를 살리니 지껄이는 것이 아니다.
서민을 위하는 후보의 행동은 기본적으로 서민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경제를 살리겠다는 이들의 초점은 경제에 맞추어져 있다.
그들의 정책 방향도, 홍보도, 유세활동도 모두 같아 보이지만 당연히 차이점이 있다.
나 같은 경우에는 더 터무니없다.
내가 샤를리아에게 넣은 프레임은 제국민을 위하는 것도 아니고 제국의 경제를 살리겠다는 것도 아니다.
심지어 후보자를 대표하는 슬로건이라고 볼 수도 없다.
무근본에 무논리도 없지만 일부 꼴통들에게는 마법 같은 단어.
‘정통성.’
“그렇고말고요! 샤를리아 황녀전하께서 황가의 핏줄을 제대로 이어받은 거야 두말하면 입 아프지요.”
“그렇지요. 허허허. 잠깐의 방황이야 누구나 겪지 아닙니까. 어디 그 피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생각해 보면 이야기로만 들었던 7대 황제 폐하의 젊은 시절도 그리 순탄치는 않았다고 하지 않습니까. 나이 마흔이 넘어서야 공부에 몰두하시고 쉰이 넘으신 뒤에야 황위를 물려받으셨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뤄놓으신 업적을 보면… 샤를리아 황녀 전하께서도 지금부터 시작이 아닌지 하는 생각도 듭니다.”
“하하하하. 그렇지요. 그렇습니다!”
아주 지들끼리 북치고 장구 치는 꼴이 가관이다.
한 마디를 던져놓는 것으로 내 임무는 끝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대충 손에 와인을 들고 구석진 곳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된 정하얀이 내 뒤를 쫄레쫄레 따라온 것은 당연지사.
다른 쪽에서 같은 작업을 치고 있었던 이지혜 역시 이쪽으로 천천히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피곤하지는 않아?”
“아… 네. 오빠. 같이 있으니까요. 헤헤.”
정하얀과는 조금 오랜만에 대화하는 느낌이다.
물론 매일 보는 얼굴인 만큼 이야기야 항상 나누지만 결정적일 때는 챙겨주지 못한 것 같아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차올랐다.
뭔가 해주고 싶지만 눈앞에 있는 정하얀은 그저 같이 있기만 하면 좋은 모양이다.
슬슬 머리를 쓰다듬자 기분이 좋다는 듯 점점 가까이 붙어온다.
“짠 할까?”
“네!”
“그러고 보니 연구는 어땠어?”
“아. 잘되고 있는 것 같아요. 일정을 조금 앞당겨야 해서 조금 바빠지기는 했는데 생, 생각보다 순… 조로웠어요. 며칠 안으로 프로토 타입을 만들어 본데요.”
“언제쯤 될 것 같다는 말은 없었고?”
“네. 그런 말은….”
“음….”
“조금 더 닦달하는 게 좋을까요?”
“아니. 그럴 필요는 없어. 제2황녀는….”
“계, 계속 주시하고 있어요.”
“그래. 혹시라도 특이사항 있으면 바로 보고해 줘야 돼.”
“네!”
살짝 손을 잡으니 고개를 푹 숙이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마침 사교회장의 한가운데였고 슬그머니 발걸음을 이끌자 기쁜 모습으로 끌려오는 게 보였다.
사교댄스를 제대로 배워본 적은 없지만 대충 스텝 정도는 밟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정하얀 역시 기분 좋게 헤실거리며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입이 광대까지 치솟은 걸 보니 기분이 꽤나 좋은 모양.
마치 동화 속 공주님이라도 된 듯한 기분일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나 역시 나쁜 기분은 아니다.
어느 쪽이냐고 묻는다면 기분이 제법 괜찮은 편.
종종 무서운 모습을 보이기는 하지만 정하얀은 기본적으로 이쪽을 우선시한다.
오래 보다 보니 그런 모습이 적응이 되기도 했고 이상하게 귀엽게 느껴질 정도.
‘최근에 너무 조용한 게 조금 불안하긴 하지만….’
마력 능력치가 오를 대로 올라 뭔가 액션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건만, 아네모네의 눈을 가끔 활용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짓을 해오지 않고 있었다.
떨어져 있는 시간이 많이 길어졌다는 걸 생각해 보면 무척 얌전해진 셈이다.
‘부족하다고 생각한 건가.’
이쪽이 내린 퀘스트를 진행하는 시간 이외에는 모든 시간을 전설 등급의 지팡이에서 얻은 지식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데 활용하고 있으니, 본인이 느끼기에는 얻은 것들에 대한 소화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으리라.
‘더 강해지고 싶은 거겠지.’
물론 원하는 걸 얻은 이후에는 어떤 식으로 행동할지 불안하긴 하다.
이지혜에게 들은 이야기만 생각해 봐도 언제 어디서 돌발행동을 할지 모르지만 최소한 내 눈이 닿는 곳에서는 이상한 짓을 하진 않을 것이다.
아무튼 간에 계획이라고 할 수 있는 일들은 차곡차곡 진행되는 중이었다.
정하얀에게 맡겨놓은 샤를롯트에 대한 감시와 막스에게 부탁해 놓은 영상 홀로그램 기술 연구는 순풍을 맞은 듯 순항하고 있다.
시간 내에 맞출 수 있을지가 관건이기는 하지만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아니다.
아직 이 두 자매의 황권다툼이 수면 위로 올라오지도 않았고 지금 당장 영상 매체가 등장한다고 해서 활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말하자면 지금은 한쪽으로 심하게 기울어져 있는 균형을 맞춰나가야 하는 타이밍.
제1황녀의 입지를 조금 더 끌어 올리고 제2황녀에 관한 네거티브한 일을 진행할 시기다.
‘원래 권력자는 안 좋은 소문 하나쯤은 끌어당기고 사는 법이지 뭐.’
그럴듯하게 날조된 근거 없는 헛소문을 뿌릴까 생각도 해봤지만 회귀자가 그녀를 신경 쓰고 있는 만큼 적당한 수위를 지키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물론 샤를롯트의 입장에서는 피가 거꾸로 솟을 만한 프레임일 수도 있겠지만 생각하고 있는 것 중에는 그나마 이게 가장 양호했다.
그녀를 네거티브하게 만들기 위한 슬로건은 아주 간단.
“역시 피는 못 속인다니까.”
같은 말이었지만 그 뜻은 분명 차이가 있다.
평민을 어머니로 두고 있다는 건 이런 사회에서는 커다란 약점이었으니까.
‘그 반쪽짜리 핏줄이 어디 가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