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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267화 (266/1,590)

# 267

회귀자 사용설명서 267화

제1황녀 샤를리아(4)

‘갑자기 뭐야?’

누가 들어도 당황스러운 부탁이었다.

우리 사랑스러운 회귀자가 뭔가 고민하고 있다는 건 대충 눈치채고 있었지만 나 홀로 이런 그림을 그리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왜?’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발언에 의문이 가득 찬 표정을 짓자 녀석이 다시 한번 아까의 말을 이었다.

이유를 물어본 것은 아니었지만 내 얼굴을 보고 대충 무엇을 궁금해하는지 눈치챈 모양.

당연하지만 이런저런 자세한 설명을 할 수는 없는 것 같았다.

‘1회 차에 조금 일이 많아서 말입니다’라고 대답할 수는 없을 테니 이상한 일도 아니다.

“죄송하지만… 이유에 대해서는 묻지 않아주셨으면 합니다. 이 은혜는 꼭….”

“아뇨. 뭐 은혜라고 생각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뭔가 생각하시고 있으신 게 있는 거겠죠. 길드나 우리 파티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아뇨. 그런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개인적인 일이라….”

그냥 길드를 위한 일이라고 말하면 될 텐데도 굳이 개인적인 일이라고 선을 긋는 것을 보니 녀석도 참 녀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쯧쯧.’

그야 개인적인 일인 게 당연했다.

샤를롯트가 이쪽을 경계하고는 있었지만 신성제국이라는 커다란 집단을 생각해 보면 그녀가 황제가 되는 것은 이 제국을 위한 길이다.

현 황제는 황제라고 부르기에도 부끄러운 인물이었고 제1황녀 샤를리아는 누가 봐도 또라이에 가깝다.

물론 나로서는 황제나 1황녀가 더 다루기 쉽겠지만 제국의 발전을 더 무게감 있게 생각한다면 무조건 샤를롯트에게 한 표를 행사할 것이다.

‘행사할 필요도 없지.’

샤를롯트는 이미 차기 황제나 다름없다.

제1황녀는 정신 나간 황실의 골칫덩이였고 후계구도가 제한적인 상황, 황제도 샤를롯트를 후계로 생각하는 것 같았으니 무슨 반전이라도 일어나지 않는 한 그녀가 무난하게 황위에 오를 것이다.

‘실제로도 됐을 거고….’

1회 차에서도 샤를롯트가 황제였을 가능성이 크다.

아니, 가능성 정도가 아니다.

김현성이 그녀가 황제가 되는 것을 막고 싶다고 한 것은 1회 차의 황제가 그녀라는 말과 일맥상통하다.

어째서 김현성이 그녀가 황제가 되는 걸 원하지 않는지는 모르겠지만 추측할 수 있는 방향은 두 가지.

‘미치기라도 하나?’

첫 번째는 샤를롯트가 미래에 사상 최악의 폭군이 될 경우.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샤를리아를 매장시키려고 한 것을 생각해 보면 그녀 역시 성격이 착하지만은 않다.

기벽과 성향은 선 쪽에 가깝지만 자신의 적이라고 판단한 이들에게는 검을 휘두르는 걸 주저하지 않는 모양.

나름 냉혹하다 할 수 있는 모습을 보면 그녀가 피에 미친 황제가 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라는 거다.

2회 차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가야하는 김현성의 입장에선 1회 차의 폭군에게 다시 한번 나라를 맡기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 당연.

그렇지만 김현성의 표정을 보고서는 이 추측은 한 쪽으로 미뤄 넣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회귀자의 얼굴에 그녀를 향한 증오는 없다.

‘숨기고 있을 수도 있지만….’

뭔가 그녀를 측은하게 생각하는 것 같은 느낌이 강했다.

그로 인해 추측해 볼 수 있는 두 번째는 샤를롯트의 황제의 삶이 비참했던 경우다.

본인이 자괴감을 느꼈든 황제로서의 최후가 비참했든 간에 왕관의 무게를 그녀가 감당하지 못했을 경우.

샤를롯트가 스스로 황위에 오른 걸 후회하고 그걸 김현성이 옆에서 지켜봐왔을 수도 있다는 거다.

둘만의 이야기를 내가 알 리가 없지만 악의가 들어가 있지 않은 상태로 부탁을 하는 김현성을 보자 두 번째 추측도 나름 입맛에 들어맞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아니라면….

‘제1황녀가 역대급 성군이 되기라도 하는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세 번째 추측은 아니다.

내가 본 1황녀는 아집과 독기로 가득 차 있는 미친년이었고 도저히 구제할 방안이 보이지 않는 망나니였다.

만약 이 경우가 맞았다면 김현성은 제2황녀가 황제가 되는 걸 막고 싶다고 말하기 이전에 제1황녀를 황제로 만들고 싶다고 말했어야 했다.

어떻게 생각해도 세 번째는 논외.

가능성이 있는 쪽은 첫 번째 아니면 두 번째다.

슬그머니 운을 띄워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혹시 제가 모르는 일이라도 있었던 겁니까?”

“아… 조금….”

“그렇군요. 사실 저도 처음 말씀드리는 거지만 제2황녀 샤를롯트는 저에게도 적대적이었습니다. 확실히 그런 사람이 황제가 된다면 곤란하겠죠.”

“네. 맞습니다. 그런 이유입니다.”

“다시 재기하지 못할 정도로 완벽하게….”

“아, 꼭 그러실 필요는 어, 없습니다. 할 수 있는 선에서 적당하게… 그녀가 황제가 되지 않는 것만으로도 만족합니다.”

‘두 번째네.’

두 번째가 맞다.

김현성은 샤를롯트에게 호의적이다.

그녀의 1회 차가 피에 미친 황제의 포지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호의적일 가능성은 있지만 이런 추측은 이제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2황녀를 황제로 만드는 것을 김현성이 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혹시나 또 질문을 던져올까 불안해하는 녀석의 얼굴을 보자 더 이상 쪼아대는 질문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뭘 원하시는지는 알겠습니다. 질문에 대답하는 게 곤란하신 것도 알겠고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받아온 게 많으니 갚는다는 의미도 있고… 그 이전에 동료니까요.”

“그 말씀은….”

무척 감동했다는 표정.

‘그래야지.’

이런 부탁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마침 나도 노선을 정했어야 했던 타이밍. 안 그래도 그녀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었던 시기였다.

김현성이 길을 열어준 느낌이라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제2황녀와 아옹다옹할 것을 생각해 보니 머리가 아픈 것도 사실이다.

만만하다 만만하지 않다를 판단하기 이전에 개싸움이 될 가능성이 다분하다.

좋게 끝내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 당연.

어떤 식으로든 마찰이 있을 거고 만약 내가 이 개싸움에서 승리했다고 가정해도 샤를롯트는 상처 입을 가능성이 크다.

‘나는 아무 상관없지만….’

김현성이 그걸 용인해 줄까가 문제였다. 작업에 착수하기 전에 확인하는 것이 당연한 일, 슬그머니 입을 열자 잠깐 동안 침묵이 감돌았다.

“예상하고 계시겠지만 좋게 끝나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지만 이미 마음을 굳힌 모양.

“네. 부디 부탁드립니다.”

그 모습은 조금 씁쓸해 보이기는 했지만 나 역시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샤를롯트는 적이다.’

절대로 개인적인 앙금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김현성의 말이 아니었다면 무난하게 샤를롯트 루트를 탔을 가능성이 크다.

그게 합리적인 결정이고 이득도 가장 크게 볼 수 있으니까.

저렇게 생각하게 된 계기는 어디까지나 김현성 때문이다.

그렇지만 입꼬리가 히죽 히죽 올라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 * *

덕분에 안 그래도 바쁘게 돌아가고 있던 일상이 조금 더 바빠졌다.

이유야 뻔할 뻔 자.

어제의 일을 정리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미 이지혜에게는 내가 움직일 노선을 전달했고 그녀는 예상했다는 듯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어요. 그래야 이기영이죠’라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절대로 개인적인 앙금 때문은 아니었다.

조금 오해를 산 것 같기는 했지만 이지혜가 의욕적으로 움직인다면 편한 것이 사실.

물론 이지혜만 급하게 움직인 것은 아니었다.

어째서인지 차희라도 ‘예상했던 대로네, 자기. 뭐 필요한 거 있으면 이야기해’라며 도움을 줄 수 있는 쪽에서 주겠다고 이야기했고 카스가노 유노야 당연히 이쪽에 협력하기로 했다.

파란도 가만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김현성은 평소보다 조금 더 의욕적이었고 정하얀에게도 몇 가지 일을 맡길 수 있었다.

그 와중에 나 역시 빨빨 돌아다니며 유력귀족과의 만남을 추진하고 있는 중.

평소대로의 스케줄이었지만 그 내막은 다른 것이 당연하다.

그 동안의 만남이 친분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면 이번 만남은 그 친분을 활용하기 위함이었다.

열심히 모루와 망치를 두드렸으니 완성된 칼을 빼내 휘둘러볼 때가 다가왔다는 거다.

물론 완성된 무기들은 내가 적으로 판단하고 있는 이가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에 있지만… 만약 눈치챈다면 파장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누가 봐도 제2황녀의 자리는 확고했고 그녀에게서 등을 돌린다는 건 곧 권력과 멀어진 다는 것과 같았으니까.

‘카트린 공작부인이나… 캐슬락 백작도.’

내키지 않아 할 수도 있다.

아무리 이쪽과 저쪽이 친근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한들 샤를롯트를 적대한다는 주사위를 던지는 건 한 가문을 책임지는 입장에서는 부담스러운 이야기다.

물론 교황청이야 이쪽을 지지해 주겠지만 황실과 교황청이 서로 크게 관여하지 않다는 걸 생각해 보면 명예주교라는 위치는 활용하지 못할 가능성도 크다.

‘어려운데….’

아직까지 샤를롯트는 내가 자신을 적대시한다는 것도 알지 못하는 상태에 있을 터.

조만간 알게 될 만큼….

‘노선을 잘 정해야 돼.’

솔직히 생각해 둔 방법은 있다.

아니, 어차피 선택지가 제한되어 있다.

샤를롯트 캠프로 들어가 트롤짓을 해서 캠프를 완전히 분열시키든….

‘샤를리아를 황제로 만들든….’

솔직히 두 가지다 내키지 않는 것은 사실이나 그 외의 선택지는 없다.

‘다른 방식은 반역이야.’

단두대의 목이 잘리고 싶지는 않았으니 어쩔 수 없다는 거다.

그 와중에 샤를롯트는 이쪽을 경계하고 있으니 논외.

결국에는 후자를 선택할 수밖에 없지만 이건 어떤 의미로 제국에게는 재앙이다.

아마 김현성은 이것까지 고려해 나에게 부탁을 한 것이 틀림없을 터.

사실 제2황녀가 황제가 되는 걸 막으라는 건 제1황녀를 황제로 만들라는 말과 다름없다.

‘제국이 망해도 상관없다는 건가.’

아니면 이쪽이 제1황녀를 컨트롤 할 수 있다고 믿고 있음이 틀림없으리라.

물론 샤를리아 캠프를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그 이후가 문제다.

제1황녀는 여전히 제국의 민폐녀고 이미 많은 귀족도 그녀를 등졌다.

아무런 지지기반도 없고 본인 역시 능력이 없다.

‘생각보다 험난하겠는데.’

단순히 험난하다는 정도가 아니다. 그렇지만 나로서는 제일 확실한 선택지를 고를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지난 파티에서의 감사를 하고 싶다는 샤를리아를 만나고 있는 도중, 제1황녀가 머무는 곳의 시녀들의 얼굴을 보고서는 더욱더 아까와 같은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미… 친….’

대부분의 시녀들의 얼굴 쪽에 희미하게 신성력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답이 나온다.

미친 1황녀가 시녀들의 뺨을 샌드백 마냥 후려친 증거.

내가 방문한다는 소식에 급하게 사제를 부른 것이 맞으리라.

마주치는 모든 시녀들이 겁에 질려있었고 혹시라도 뭔가 일이 터지지는 않을까 극도로 긴장해 있었다.

평소에 자신의 아랫사람을 어떻게 다루고 있을지는 뻔할 뻔 자.

장담컨대 이쪽에 거주하는 시녀들을 몸이 성할 날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쓰레기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은 저번에도 대충 느끼기는 했지만….

‘제대로 쓰레기.’

은근히 긴장되는 것도 사실.

본래는 최대한 샤를리아와 연관되는 것은 피하고 싶었지만 이왕 일이 이렇게 된 걸 어떻게 하겠는가.

‘한 번은 부딪쳐 봐야지.’

“저, 저… 황녀 전하. 이, 이… 이기영 님께서 오셨사옵니다.”

긴장했는지 부들부들 떨리는 시녀의 목소리 이후에 안쪽에서 생각보다 밝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래? 들어오시라 일러라.”

“알겠사옵니다, 황녀 전하.”

어제와는 사뭇 다른 목소리.

조금 앙칼진 것 같은 느낌이 있기는 했지만 생각보다 조신하게 들리는 것은 내 착각이 아니리라.

문이 열리고 난 이후에 보이는 것은 응접실에서 풀 셋팅을 하고 나를 기다리고 있는 샤를리아의 모습이었다.

기벽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바라보는 눈에는 호의가 가득했다.

조금은 새침한 얼굴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여는 꼴은 가관.

어제 내가 봤던 그 여자와 동일인물이 맞는지 내 눈을 의심해 볼 정도였다.

“샤를리아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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