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3
회귀자 사용설명서 263화
공식발표(5)
“아주 제대로 해주셨네.”
“응? 뭐가?”
“뭐긴. 어제 있었던 일.”
“아아.”
“영감탱이야 그렇다고 쳐도 그 황녀도 입을 떡하니 벌리는 걸 보고는 나도 놀랐다니까.”
확실히 그런 느낌이었다.
황제에게 집중하느라 황녀의 표정을 살피지는 못했지만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을 더듬는 모습이 떠올랐다.
물론 황제의 표정은 더욱더 가관.
늙은 영감탱이의 심장이 깜짝 놀라 멈추는 것은 아닌지 걱정할 정도였으니 다른 수식어는 필요 없으리라.
짧은 시연회가 끝난 뒤 여러 가지 질문이 날아든 것은 당연했다.
마법이나 신성력이 익숙한 이곳에서도 드래곤과 같은 개체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신기한 모양이다.
물론 내가 만들어낸 것은 제대로 된 생명체가 아니지만 저들이 보기에는 별 다를 게 없는 모양.
두 눈을 비비던 이들의 모습이 아직도 훤했다.
놀란 사람은 황제뿐만이 아니었다.
스즈미야 이부키는 카스가노 유노에게 사전에 들었던 것 같지만 다완에서 온 이들은 나를 대하는 태도가 눈에 띄게 달라졌다.
단순히 운이 좋아 이 자리에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입증한 것이다.
마법사인 천관위는 식사시간이 끝난 뒤에도 계속해서 질문을 던져왔고 궁수인 위란 역시 계속해서 묘한 눈빛을 보내오는 바람에 꽤 난처했다.
물론 그들의 시선보다 중요한 것은 황제의 반응.
기존에 밑밥을 뿌린 게 효과가 있었는지는 몰라도 식사가 끝난 이후에 나와 따로 대화를 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심지어 연금술을 지원하고 싶다고 이야기할 정도였으니, 겨우 다섯 시간 만에 일어난 일이라고 하기에는 그 성과가 제법 큰 셈이다.
‘개꿀!’
애초에 돈이 많은 나야 지원이고 뭐고 필요없지만 국고에 저장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희귀한 촉매에 관심이 생겼다.
제국적 지원, 무려 신성제국의 지원이다.
기대가 안 되는 것이 이상하리라.
“지루해 죽는 줄 알았는데 덕분에 나도 좋은 구경했지, 뭐. 아마 몇몇은 자기한테 감사하고 있을걸? 그 늙은이 상대하는 게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거든.”
“그거야. 누나 같은 사람들 생각이지. 황제와 만찬을 가질 수 있는 기회가 쉽게 오는 것도 아니고, 이럴 때 눈도장 안 찍어 놓으면 언제 또 하겠어. 내 입장에서는 오히려 누나가 더 이해가 안 간다니까.”
“싫은 건 싫은 거야. 굳이 그 영감이랑 친분 같은 거 안 만들어도 상관없어. 위란이나 박연주 같은 애들은 그런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기는 한데… 뭐, 걔들도 좋아서 하는 일이겠어? 키야… 어제 자기 하는 거 보니까 딱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뭐?”
“이 새끼는 즐기는구나.”
“칭찬이지?”
“물론. 체질이구나 싶었다니까.”
“부정하지는 않을게.”
손바닥을 비비는 게 체질이라는 소리는 조금 가슴 아프게 들려오지만 즐긴 것은 맞다.
갑작스레 밀려오는 민망함에 슬쩍 고개를 돌리니 시야에 비친 것은 왕성 단상 아래에서 환호를 보내고 있는 군중.
스케일이 제법 클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더 신경을 많이 썼다.
들려오는 함성이 귀가 아플 지경이었고 곳곳에 장식된 제국의 깃발이나 장식물의 규모만 봐도 골드가 제법 들어간 것 같은 느낌이다.
한쪽에 앉아 있는 귀족들 역시 모두가 제국을 대표하는 유력 귀족들이다.
한동안 시선이 머무른 곳에 열심히 손을 흔들고 있는 마를린 영애가 보여 이쪽 역시 대충 손을 흔들었다.
거기서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것은 교황청의 식구들.
교황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바젤 추기경을 포함한 3명의 추기경들이 있었다.
제시카 대주교와 공식석상에 잘 보이지 않는 헬레나 이단심문관장 역시 자리에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나와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이들은 모두 참석한 걸 보니 괜스레 기분이 뿌듯해졌다.
‘그래야지.’
“근데 이거 시작은 언제 하는 거야?”
불만 섞인 차희라의 목소리가 들려오기가 무섭게 커다란 목소리가 귀에 꽂히기 시작했다.
“황제 폐하 입장하십니다.”
단상 위로 모습을 드러낸 황제와 제국의 2황녀 샤를롯트.
어제와 다른 점이 있다면 1황녀로 추정되는 여자 역시 함께했다는 점이다.
자연스럽게 마음의 눈으로 상태창을 바라보자 곧 1황녀의 정보가 쏟아져 내렸다.
‘으음….’
제국의 제1황녀 샤를리아. 성향은 독선적인 이기주의자.
‘키야….’
눈이 옹이구멍인 황제도 제1황녀와 제2황녀 중 어느 쪽이 더 황위에 어울리는지 알고 있는 모양.
‘쟤는 절대로 안 되겠는데….’
표독스러워 보이는 얼굴이 악녀답다.
눈에 가득 들어 있는 독기는 황제의 총애를 받는 샤를롯트를 향해 있었다.
얼굴에는 욕심이 그득해 보이는 것은 물론….
[고유 기벽-질투심 많은 마녀]
고유 기벽 역시 마녀란다.
무려 마녀다.
성격이 저런 식으로 형성된 이유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너무 뻔한 클리셰 같아 ‘굳이 설명해야 하나’라는 생각을 해볼 정도.
아버지의 총애를 받는 둘째와 사랑을 받지 못한 첫째.
자매들끼리의 황권 다툼은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만 같은 이야기였다.
모르긴 몰라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피터지게 싸우고 있음이 분명하리라.
지금까지는 후계자 싸움이 그리 치열하지는 않았지만 본격적으로 황제의 건강이 안 좋아지거나 외부 요소가 개입된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수면 위로 드러날 것이다.
혹시나 내 고유 기벽이 저쪽에 영향을 받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긴 했지만, 악녀의 범주 내에 있다고 해서 모두에게 사랑받는 것은 아니다.
‘얘는 피해 다니는 게 좋겠네.’
아무튼 제1황녀와 제2황녀를 대동한 황제가 천천히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제국민이 모두 보이는 단상 앞에 서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연설이라도 하실 것 같은데….”
“뭐… 그야 그렇겠지. 오랜만에 폼 잡을 수 있는 기회니까. 저거 하려고 8좌니 뭐니 한 거지.”
차희라의 말에는 동감할 수밖에 없었다.
예상대로 음성 증폭 마법을 이용해 황제의 목소리가 쭉쭉 뻗어나가 커다랗게 들려왔지만… 솔직히 훌륭한 연설은 아니었다.
‘지루해.’
엄청나게 지루하다.
목소리에서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 따위는 없었고 내용 역시 교장 선생님의 훈화말씀처럼 길게 길게 늘어져 참기 힘들 지경.
하품이 나와 참을 수 없다는 표현이 잘 어울리리라.
“총애하는 신성제국 백성들이여. 이 자리를 함께 빛내주어….”
저 총애하는 신성제국의 백성들이라는 소리를 벌써 23번 정도 들은 것 같은 느낌.
“오늘도… 위대한 제국의 힘을….”
저 위대한 제국은 약 35번 정도 말한 것 같다.
더 이상 참기 어렵다고 느꼈을 즈음 연설의 끝을 마무리하는 멘트가 들렸다.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제 자랑스러운 우리… 제국민 들에게 제국이 가지고 있는 힘을… 제국을 수호하는 방패이자 제국의 적을 처단하는 검을 소개하고자 한다. 검은 머리의 이방인들은 그 동안 이 땅에서 함께 살아오며 제국의 발전에 수많은 기여한 바, 지금부터 호명하는 이들을 신성제국의 8좌로 임명하는 바이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
커다란 함성이 나오는 것은 당연했다.
드디어 황제의 길고 긴 연설이 끝났다는 환호성인지 아니면 제국 8좌를 위한 환호성인지는 모르겠지만 전자일 확률도 결코 낮지 않으리라.
황제는 군중의 함성에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물론 이번에는 연설이 아니다.
“제국 제1좌, 차희라.”
옆에 앉아 있는 차희라가 벌떡 일어나 단상의 앞으로 향했다.
“나 먼저 나간다, 자기.”
“응.”
제법 멋들어진 갑옷을 입은 채 당당하게 군중들의 앞으로 걸어 들어가는 붉은 머리가 눈에 보인다.
‘멋있네.’
미친 듯이 열광하고 있는 군중들과 잘 어우러지는 그림.
황제를 대신해 차희라를 소개하고 있는 한 병사는 목이 터져라 그녀의 활약상을 외쳤다.
듣고 있는 내가 얼굴이 붉어질 지경이었지만 저런 것도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연출이 너무 과하기는 하지만….’
조금 더 담백하게 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나쁘지는 않다.
어차피 이러기 위한 자리니 이 정도가 적당하다.
황제가 기대하고 있는 홍보 효과도 충분. 대중이 열광하고 있으니 문제는 없다.
차희라 이후에도 한 사람, 한 사람 나갈 때마다 제국민들은 환호했다.
‘이거 왜 했는지 알겠는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이런 생각을 해볼 정도.
대중은 힘에 목말라 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제국 제3좌, 카스가노 유노.”
안개 소환사 천관위의 다음이 카스가노 유노.
이런 자리는 익숙하지 않은지 살짝 표정을 굳힌 채 앞으로 나가는 옆모습이 보였다.
“제국 제4좌, 박연주.”
군중의 함성.
“제국 제5좌, 위란.”
다시 한번 터지는 함성.
“제국 제6좌, 스즈미야 이부키.”
그리고.
“제국 제7좌, 김현성.”
몇몇 떨거지들이 나간 이후에야 자리를 박차고 나간 사랑스러운 회귀자.
가벼운 무장임에도 발걸음은 거침이 없다.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제국의 깃발은 펄럭이고 시선을 잡아끄는 묘한 느낌이 분위기를 더욱더 고조시킨다.
‘그림이네, 그림이야. 현성아!’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때마침 하늘에 있는 구름이 걷히며 햇빛이 쏟아지기 시작.
‘연출 죽이네!’
아까만 해도 과하다고 생각했던 연출이 괜스레 괜찮게 느껴진다.
제국민들의 환호는 더욱더 커져가고 있었고 당연하지만 내 차례 때도 예외는 아니었다.
“제국 제8좌, 이기영.”
그 다음에 호명된 이름이 바로 내 이름 석 자.
최대한 위풍당당하게 걸으려고 했지만 그들과 같은 이미지를 심어주는 것은 역시 무리다.
심지어 발을 헛디뎌 넘어질 뻔했다.
그렇지만 함성은 제법 크다.
“자유 도시 린델을 대표하는 파란의 부길드 마스터이며, 용의 선택을 받은 자. 신성제국의 명예주교이며 대륙을 구원한 30인의 대륙 수호자의 1인. 제국을 대표하는 연금술사이자…….”
얻어놓은 타이틀이 꽤나 많다는 생각도 든다.
비공식적인 타이틀까지 합치면 조금 더 된다.
물론 불세출의 천재라는 둥, 전략과 지략의 귀재라는 둥, 말도 안 되는 타이틀도 함께 나오기는 했지만 저런 것도 다 홍보의 일환이니….
‘눈 감아줄 만하지.’
아무래도 이번 행사를 기획한 이들은 내 컨셉을 제국의 두뇌 같은 이미지로 잡은 모양.
보여준 모습이라고는 캐슬락 몬스터 웨이브를 막아낸 것과 부대 편성이 전부였지만 공화국의 오호대장군에도 비슷한 게 있는 만큼 밸런스를 맞추고 싶었던 것 같았다.
‘나쁘지는 않지.’
거짓말이 조금 섞이기는 했지만 나를 천재로 만들어준다는 데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다.
애초에 내가 원하는 포지션이기도 했고 실제로 내가 대단하지 않더라도 대단하게 보이는 효과는 어마어마했으니까.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제국의 수도가 떠나가라는 듯 소리 지르는 군중과 손을 흔드는 인사들.
황제 입장에서도 기획자 입장에서도, 이 이벤트의 참가자인 우리 입장에서도 완벽한 성공이라고 할 수 있는 축제였다.
문제가 있었다면 이 이후에도 마련된 이벤트가 많이 있다는 것.
단상으로 내려와 행진 한 번 해주고 몇몇 제국민 대표들과의 악수회, 귀족들과의 파티 등등 쌓여 있는 스케줄이 많다.
‘이렇게까지 해야 되냐고….’
처음에는 제법 즐거웠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체력적 한계에 부딪칠 것 같았다.
늙은 황제가 몸소 이곳까지 행차해 내 손을 번쩍 들어 올려준 것은 바로 그때였다.
자연스럽게 환호성이 터졌고 늙은 황제는 괜스레 내 등을 두드렸다.
‘이 늙은이, 간신 한 번 엄청 좋아하네.’
이렇게 대놓고 간신을 좋아하는 황제도 흔치 않을 것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모습을 보고 화들짝 놀란 바젤 추기경도 슬그머니 내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
‘이런 것까지 바란 건 아닌데….’
이런 그림까지 그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여러 곳의 총애를 받는다는 건 좋지만 이런 식이라면 적을 만들 수 있는 가능성도 커지기 때문.
물론 결과는 예상했던 대로였다.
나를 못마땅하다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샤를롯트의 시선이 느껴진 것이다.
그렇지만 좌 황제, 우 바젤 추기경은 생각보다 듬직했다.
‘내가 인마! 으이! 얘들이랑! 인마! 술도 먹고! 으이! 밥 먹고! 사우나도 가고! 마! 다했어, 인마!’
어디에선가 들어봤던 대사가 계속해서 머릿속에 울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