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2
회귀자 사용설명서 262화
공식발표(4)
권력자를 구슬리는 건 아주 쉽다.
옆에 앉아 있는 황녀야 시간이 조금 걸리겠지만 다 죽어가는 영감에게 잘 보이는 것은 누워서 떡먹기.
눈앞에 있는 황제가 젊었을 때는 어떤 모습으로 제국을 운영했는지, 어떤 일을 해왔는지는 내 알 바 아니지만 현 상태가 어떤지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레임덕.’
말 그대로 슬슬 차기 황제를 선포해야 하는 시기처럼 보이니 그런 현상이 생기지 않을 리 없다.
실제로도 후계자에 대한 이야기들이 여기저기에서 나오는 만큼 기존에 있던 황제를 떠받들고 있는 이들은 이미 다른 배로 탑승하거나 다른 길을 물색하고 있는 중이리라.
이른바 권력 누수 현상.
물론 눈앞에 있는 황제가 권력을 잃어버리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저 늙은이는 제국의 황제다.
고정 지지층이 있고 후계자를 선포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는 최고 결정권자다.
최소 3년이나 5년은 더 해먹을 수 있다는 거다.
문제는 황제 자신이 어떻게 느끼느냐. 아마 실제로는 그렇지 않더라도….
‘본인은 황권이 약해진다고 느끼고 있는 게 분명하지.’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가 여기에 있을 이유가 없다.
성향은 소심한 권력자.
누가 봐도 나랑 잘 어울리는 종류의 인간이다.
저런 종류의 권력자는 간신을 싫어하는 척하지만 그 누구보다 간신을 사랑한다.
인간이라면 직접적으로 아첨을 하는 인간을 싫어할 수가 없다.
‘너무 티 나게 비비면 안 되지만….’
적당 적당히 가려운 곳을 긁어주기만 하는 걸로 호감도 팡팡! 촛불이 꺼지기 전에 활활 타오른다는 걸 생각해 보면 저 양반 역시 꺼지기 전에 빼먹을 수 있는 게 있다.
“하하하. 그거… 재미있는 이야기로군….”
대충 이빨을 털어줬음에도 불구하고 벌써부터 입가에 함박미소를 띄우고 있는 꼴이 가관이다.
벌써부터 나를 괜찮은 녀석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게 눈에 보인다.
“그러고보니… 연금술사라고 하지 않았었나.”
“그렇습니다. 위대하신 황제 폐하.”
“자네의 이야기는 많이 들었네. 가지고 있는 타이틀이 꽤 많았던 걸로… 음… 기억하고 있지. 제국에 연금술을 발전시킨 인물이기도하고… 드래곤에게 선택받았다고 하지 않았나. 내 기억이 맞다면… 확실할 텐데…. 샤를롯트?”
“네. 폐하. 제국 8좌로 내정된 이기영은 자유 도시 린델에서 발족한 파란 길드의 부길드 마스터이며 대륙 최초로 용의 선택을 받은 자이기도 합니다. 또한 최초로 교황청의 명예직을 받은 소환자이며 바젤 추기경과도 매우 친근한 사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렇지. 그랬어…. 교황청의 명예주교였지.”
“운이 좋아. 친분이 닿을 수 있었습니다. 하하. 바젤 추기경은 성정이 불같은 면이 있지만 누구보다도 신성제국의 미래를 걱정하시니 그런 분과 친분이 닿았다는 건 제게 있어 행운이 아니겠습니까.”
“그래… 나도 알고 있지.”
“사실 제가 사람 사귀는 것을 좋아하는 터라. 제국 내에 있는 다른 귀족과도 친분이 두텁습니다.”
“오오, 그런가….”
“캐슬락 백작과 카트린 공작부인, 엘리제 백작부인 같은 분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친 황제파에 위치한 귀족들과도 아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빅터하르트 님과도….”
황제의 근처에서 그를 경호하는 빅터하르트 할배가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냐고 묻는 것 같지만 가볍게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아무래도 차희라 님과 제가 가까운 사이다 보니….”
“아… 그런가. 하하하. 그렇군. 그러고 보니… 빅터하르트 자네가 저 붉은 머리의 이방인을 딸처럼 생각한다고… 했었지. 내 오랜 친우가 말년에 아주 좋은 사위를 얻었구만….”
“송, 송구합니다. 폐하.”
빅터하르트 할배는 나와 그다지 연관되고 싶지 않은 것 같지만 저 사람과 나는 이미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아암… 그래. 그래야지….”
황제파와도 친분이 두텁다는 걸 알고 나니 다시 한번 내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그 와중에 저 샤를롯트라는 여자가 은근슬쩍 이쪽이 교황청과 연이 있다는 걸 황제에게 전한 걸로 봐서는 아무래도 저쪽은 내가 취향이 아닌 것 같았다.
너무 대놓고 간신처럼 행동한 것은 아닌지 다시 한번 생각해 봤다.
황제도 황제지만 황녀 역시 주요 관리 대상이다.
물론 그녀 역시 내가 친 황제파의 귀족들과도 잘 어울린다는 말을 듣고 표정이 좋아진 것 같기는 했지만 그래도 경계의 눈빛을 보내는 건 여전했다.
‘시간은 많아.’
당장은 황제를 구슬리는 작업만 해도 그다지 상관없을 것 같은 느낌.
장담컨대 황녀 역시 내가 필요한 순간이 올 거라고 생각했다.
이미 나는 이 신성제국 커뮤니케이션 집단의 중심에 있다.
괜히 이쪽을 경계하는 건 누가 봐도 황녀의 손해다.
만약 저 여자가 후계 구도에 관심이 있다면 더욱더 나를 필요로 할 것이다.
“그나저나 황녀님의 미모가 눈이 부실 지경입니다. 총기가 가득하신 모습을 뵈오니 누가 봐도 황제 폐하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 우리 샤를롯트는 아름답지.”
“그 또한 폐하의 덕입니다.”
“아암… 그렇고말고.”
칭찬해 준다고 넙죽 받아먹는 모양새는 우습다.
황제가 아니라 샤를롯트를 향해 던진 아첨이었지만 아무래도 저 여자는 이런 종류의 칭찬이 그다지 와닿지는 않은 모양이다.
대충 어떤 스타일인지 슬슬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친해지려면 시간 좀 써야겠는데….’
오늘 이후로 또 볼 수 있을지가 문제지만 아마 어느 정도는 시간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계속해서 식사가 진행되는 와중에도 여러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당연하지만 질문은 나에게만 집중되지 않았다.
황제의 입장에서는 이곳에 있는 8명 모두가 관리 대상이었으니까.
다른 이들도 모두 황제의 질문에 성실히 답하며 좋은 분위기를 이끌어가고는 했었지만 아무래도 관심은 이쪽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대륙 8좌는 기본적으로 각자 한 집단의 수장이며 남들의 위에 서는 게 자연스러운 이들이다.
아무리 기분을 맞춰준다고 한들 태어날 때부터 간신의 피가 흐르고 있는 이쪽과는 아첨의 급이 다르다.
이딴 걸 자랑스러워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해 봐야겠지만 부끄럽지는 않다.
이런 게 전부 사회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처세술이라는 거니까.
아무튼 간에 황제는 다른 이들과 적당한 대화를 나누면서도 슬그머니 나와 대화를 하고 싶다는 기색을 내비치는 중.
제국 8좌 역시 황제를 이쪽에 떠넘기고 싶어 하는 느낌이었다.
특히나 차희라나 실리아의 스즈미야 이부키, 다완의 천관위 같은 경우에는 황제와의 친분에는 별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오히려 나에게 고맙다는 눈빛을 보내는 걸 보니 확실히 이런 자리가 맞지 않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다.
김현성은 특이하게도 황녀에게 집중하는 느낌이었는데 녀석의 표정을 읽기가 힘들어 1회 차에서의 황녀가 어떨지 판단하기 힘들었다.
‘차기 여황이라도 되는 건가.’
가능성은 높다.
애초에 황제가 이런 자리에 저 여자를 대동했다는 것부터 자체가 증거다.
아무튼 식사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딱딱한 분위기가 많이 풀어졌고 황제가 편하게 대화를 나누라 어명을 내리며 모두가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물론 늙고 병든 황제 역시 본격적으로 이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이야기에 열중하기 시작.
애초에 내가 먼저 주제를 가져올 필요도 없었다.
오히려 저쪽에서 넙죽 넙죽 질문을 던져오니 대답하기에도 편하다.
보통 꼰대들이 그렇듯 젊었을 때의 이야기에는 탄성을 내질러주고 황제폐하의 위대함을 칭송한다.
기분 좋은 황제는 다시 한번 허허허 웃어주고 자신의 위대함을 확인받을 수 있는 주제를 찾아 꺼낸다.
물론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본래 화술이라는 게 그렇다.
상대방의 이야기에 계속해서 동조하면서도 나에게 흥미를 가질 수 있는 요소를 찾게 하는 것.
그런 게 바로 호감을 사는 방법이라는 거다.
물론 그런 요소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런 인간들이 뭘 원하는지는 1살 먹은 우리 똘똘이도 알고 있을 것이다.
“엘릭서. 으음… 엘릭서라고 했나.”
“예, 황제 폐하. 아직 제가 성취가 낮아 자세히 알지는 못 하지만 연금술을 공부하는 이들에게 있어서는 현자의 돌과 함께 이야기로만 전해져 오는 물약입니다. 모든 질병과 상처를 치료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젊음을 되찾아 줄 수 있다고 전해지는 신의 선물이지요.”
“허허. 그렇군. 어떻게… 연구에 차도는 있는 겐가.”
“아쉽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말 그대로 이야기로만 알려진 물건이라…. 솔직히 말씀드린다면 단기간 내에 성과를 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으음. 솔직하게 말해주어 고맙군.”
“제가 괜한 말씀을 드린 것 같습니다.”
“아니. 그건 아닐세. 오히려 이렇게 솔직하게 말해주는 게 더 좋아. 자네는 으음… 다른 귀족들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야.”
“송구합니다.”
“아니. 질책하는 게 아니니 그렇게 말할 필요 없네. 으음… 그래서 그 엘릭서라는 게….”
뭐, 대충 이렇다는 거다.
굳이 엘릭서에 대한 희망을 심어줄 필요는 없다.
나중에 자기를 속이려고 했느니 어쩌느니 말이 나오는 것보다는 깔끔히 불가능하다고 말해주는 게 나에게는 더 유리하다.
어차피 저런 인간은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관심을 보일 수밖에 없다.
“추측하기로는 엘릭서라는 것은 현자의 돌을 촉매로 만들 수 있는 물약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아직까지는 현자의 돌의 정체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 당연하지만 제 숙원 중에 하나이지요.”
“오오…. 그렇군.”
“엘릭서를 만들거나 현자의 돌을 보는 건 아마 모든 연금술사의 꿈일 겁니다. 언젠가는 꼭 이루어질 거라고 믿습니다. 당장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제가 드래곤에게 선택받으리라는 것도 예상하지 못했으니 언젠가는….”
“으음 그렇지. 생각해 보니 드래곤의 선택을 받았다고 했지…. 내 평생에 용을 실제로 본 적이 한 번도 없어, 같이 오는 것은 아닌지 기대했는데 아쉽게 됐군.”
“네. 예상하시고 계시겠지만 제가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그야 그렇겠지. 그들은 감히 인간위에 있는 존재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으니까.”
“다만… 이 자리에서 조금이나마 보여드릴 수는 있습니다. 물론 완전한 용은 아닙니다만.”
슬슬 떡밥을 뿌리자 역시나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이쪽을 쳐다보는 얼굴이 보였다.
빅터하르트 영감이 입을 열었지만 단호한 황제의 말에 조용히 자리에 앉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쓸데없는 짓은 삼가….”
“아닐세. 빅터하르트… 이기영 명예주교는 그럴 사람이 아니야.”
“송구합니다.”
나를 언제 봤다고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간에 갑작스러운 신뢰도의 상승이 기분 나쁠 리가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내가 용을 볼 수 있다는 건가.”
말보다는 직접 눈으로 보는 게 확실할 것이다.
“그럼 허락하신 걸로 알고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황제 폐하.”
파칙 하고 손에 불꽃이 튀어 오르자 널찍한 응접실에 한쪽 벽면에서 천천히 용의 얼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파직 파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점점 형태를 만들어가는 드래곤의 머리는 누가 봐도 비현실적이다.
“그워어어어어….”
방 안에 들어올 수 있을 정도로 다운그레이드되기는 했지만 커다란 눈과 위협적인 이빨 그리고 거대한 뿔은 어딜 봐도 흑암룡의 모습이다.
황제뿐만이 아니라 타 도시에서 온 8좌의 일원, 심지어는 샤를롯트까지 입을 벌리고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치한 쇼맨십이다.
정하얀의 마법이 내가 가지고 있는 기술보다 전장에서 쓸모 있다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심지어 김현성이 짐심으로 검을 휘두른다면 저 용의 머리는 깔끔하게 잘려나갈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선보인 연금술이 비주얼에서 먹고 들어간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허… 허허….”
기가 차는지 조용히 웃고 있는 황제.
“이, 이런 건 어, 어떻게….”
말을 잊지 못하는 황녀.
“연금술입니다.”
내 가치를 입증받기 위한 작은 이벤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