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7
회귀자 사용설명서 257화
세상에 나쁜 용은 없다(5)
‘아마 처음에는 격렬한 거부 반응을 보일 확률이 큽니다.’
괜스레 강현욱 박사의 목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하늘이 떠나가듯 내지른 울음소리는 누가 들어도 지금 녀석이 흥분했다는 걸 알려준다.
슬쩍 고개를 들어 녀석을 바라보니 눈에서 불똥이 튀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쟤 왜 저래.’
콧김을 씩씩 뿜으며 이쪽을 바라보는 모습은 조금 무섭게 보일 지경.
지금 당장에라도 이쪽으로 몸을 던질 것 같은 자세였다.
디아루기아도 조금 당황한 듯한 표정을 보인 것은 당연했다.
저 정도로 거칠게 반응할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도 다행이야.’
몸을 날려 저 어미에게 몸통박치기는 하지 않았으니 아직은 생각이라는 게 있는 모양.
물론 지금 당장에라도 몸을 날려 올 것 같은 자세이기는 하다.
그렇지만 참았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 아직 너무 늦지는 않은 것이다.
만약 초장부터 그런 모습을 보였다면 이 숙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심각히 고민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똘똘이도 잘 지냈지?”
“키에에엑!”
똘똘이에게 인사를 건네는 것은 디아루기아와 인사를 한 이후.
뭘 하든 엄마가 첫 번째라는 걸 알아야 한다고 판단한 강현욱의 솔루션이었다.
자꾸만 헥헥거리는 소리를 내며 이쪽을 봐달라는 듯 방방 뛰고 있었지만 머리를 쓰다듬는 것 이외에는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내오고 있지만 눈을 애써 마주치지 않은 채로 디아루기아를 향해 입을 열었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반말로 하고 싶었지만 이게 더 편하다.
다만 친근한 느낌을 듬뿍 담아 이야기하니 눈앞에 있는 용은 욕지기가 올라오는 모양인지 안색이 안 좋아졌다.
‘그야 그럴 만하지.’
당장 나조차도 디아루기아가 보여주는 친근한 모습이 어색해 미칠 지경이다.
물론 인간으로 폴리모프 한 그녀의 외관은 충분히 아름답지만 이쪽의 취향이라고 하기에는 상당히 무리가 있는 게 현실.
애초에 뭐 그런 마음도 들지 않는다.
물론 아주 정상적인 기벽을 가지고 있는 그녀 역시 내가 탐탁지 않아 보이는 것은 마찬가지일 터.
서로가 서로를 이성으로 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당사자가 가장 잘 알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연기를 해야 하니 어려운 게 당연하다.
“아니요. 같이 먹으려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똘똘이는?”
“아직….”
“간단히 식사라고 해야겠군요.”
“안 그래도 당신이 온다고 해서 준비해 놓은 것이 있습니다. 들어가시죠.”
‘어색해.’
정말로 어색해 미치겠다.
최대한 친절한 표정을 유지하며 활짝 웃고 있는 디아루기아의 얼굴도, 그리고 왠지 모르게 한껏 꾸민 것 같은 외관도 무척이나 어색하다.
커다란 뿔을 중심으로 잘 정리되어 있는 머리는 오늘따라 더 찰랑거리고 있었고 화장이 필요 없는 피부에도 뭔가 바른 느낌.
옷차림 역시 조금은 신경 쓴 듯한 느낌이었다.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말이 맞았는지, 린델 광장을 돌아다니는 20대 여성들을 흉내 내려고 노력한 흔적을 여기저기에서 확인해 볼 수 있었다.
‘그리 어울리지는 않지만….’
아무튼 간에 아름답다면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 외관이라는 거다.
똘똘이가 본인을 매력적인 여성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에 충격이라도 받은 것이 분명하리라.
‘분명히 그렇겠지.’
인간의 모습이 이 정도로 변했다고 생각하자 드래곤의 모습은 어떨지 궁금해졌다.
물론 내가 드래곤들의 미의 기준을 평가할 수는 없지만 그녀의 검정색 비늘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을 것이 분명.
아무튼 간에 이 가족 같지 않은 가족은 약간의 어색한 분위기를 유지하며 천천히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똘똘이는 계속해서 육탄공세로 이쪽의 관심을 돌리려고 노력하고 있었지만 조언을 받은 대로 필요 이상의 관심을 주지는 않았다.
물론 아무 반응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대단하네.”
라거나.
“귀엽네, 우리 똘똘이.”
기껏해야 이 정도가 전부다.
평소였다면 박수를 치며 녀석의 이곳저곳을 쓰다듬어 줬겠지만 이전만큼의 열렬한 반응은 보여주지 않았다.
대신 디아루기아에게 더 많은 말을 건넸고 더 많은 시선을 보냈다.
물론 그걸 보고 잔뜩 흥분한 녀석이 또 소리를 지르기는 했지만 이곳부터는 너의 영역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해주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식사를 할 때도 마찬가지.
누가 봐도 최대한 디아루기아를 아껴준다는 듯이 행동했다.
똘똘이 자신이 2순위로 밀려났다는 걸 깨닫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식사는 어떠셨습니까?”
“맛있더군요. 덕분에 잘 먹었습니다. 앉아계시면 됩니다. 설거지는 제가 할 테니까요.”
“아뇨. 제가 하겠습니다. 요즘에는 사냥을 나가지도 않고….”
“아닙니다. 제가….”
“그럼 같이 하도록 하죠.”
“정말로 괜찮은데….”
“아뇨. 같이합시다.”
나답지 않은 발 연기.
장담컨대 똘똘이 녀석이 아니라면 속아 넘어가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디아루기아와 합을 맞추는 게 힘들다.
그래도 상황 자체가 나쁘지 않다는 게 다행이라고 말할 수 있는 부분.
단란하게 옆에 서서 접시를 쓱쓱 닦고 물로 행구는 과정은 굉장히 귀찮았지만 어깨가 살짝 닿고 있는 모습 자체는 로맨틱하다.
물론 웃음기가 하나 없이 서로 할 일만 하는 모습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간지럼을 많이 탄다고 했었나.’
이전에 한 번 실험하다 깔릴 뻔한 적이 있기 때문에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거품 묻은 손으로 슬그머니 디아루기아의 손을 매만지자 지금 뭘 하냐는 듯한 눈빛이 쏘아져 들어왔다.
물론 굳이 거부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지금 내 손을 뿌리치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을 터.
살금살금 손등을 긁자 금방 쿡쿡 거리기 시작하는 걸 보니 성공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간, 간지럽습니다. 쿠쿡….”
“하하.”
너무 뻔한 그림이기는 하지만 그만큼 효과적인 그림.
계속 이어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건네기 시작했다.
나는 입을 여는 쪽이었고 그녀는 들어주는 쪽이었다.
보통은 도시에서 있었던 일들이 주를 이루기는 했지만 그래도 서로 소통하고 있다는 느낌은 있다.
‘나쁘지 않은데….’
애초에 오랜 시간 이야기한 적이 그다지 없었던 만큼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 수록 단점보다는 장점들이 눈에 들어온다.
생각보다는 대화도 잘 통하고 의외의 곳에서 죽이 잘 맞았다.
“쿠쿡. 그거 조금 재미있는 이야기로군요.”
“어? 정말 그렇습니까?”
“네. 최근에 들은 이야기 중에 가장 재미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그… 박물관 관리인은 조금 괜찮아 진 겁니까?”
“지금은 잘 적응하고 있습니다. 사실 처음부터 크게 다치지는 않았으니까요. 아무래도 보통 아이보다는 튼튼하니까요.”
“하시는 일은 조금 어떻습니까?”
“이제 막 연구에 들어갔으니 아마 금방 성과가 나올 겁니다.”
“신기하군요.”
“어떤 게 말입니까.”
“한 장소에서 여러 방향으로 마력 홀로그램을 송출할 수 있다는 것 말입니다. 예전부터 인간은 그랬었죠. 신기한 물건을 많이 만들어내고는 했습니다. 저는 사실 인간들에게는 그다지 호의적이지는 않았지만 그들에게서도 배울 점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건 조금 신기하군요. 제국의 옛 고서를 찾아보면 드래곤은 마법 수준이 상당히 뛰어나다고 기술되어 있는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보통 그런 오해를 많이 받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시면 답을 찾으실 수 있으실 겁니다. 저희 종족은….”
“음… 필요하지 않겠군요.”
“네. 필요하지 않습니다. 물론 배울 수는 있습니다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용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런 이들은 대부분 인간 세상에 관심이 많죠. 물론 이들은 다른 어른 분들에게 별종 취급을 당하기 십상이고요. 어떻게 보면 인간들은 참 대단합니다.”
“어떤 의미로 말씀하시는 건지 모르겠군요.”
“말 그대로의 의미입니다. 그들은 약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발전합니다. 무구를 만들고 마법을 배우고 새로운 것들을 계속해서 찾아 해맵니다. 물론 그 욕구가 부정적인 결과를 만들어낼 때도 많았지만 이로운 결과를 가져올 때도 분명히 있었죠. 솔직히 말하면 당신에게도….”
“네?”
“아무것도 아닙니다….”
“네?”
“흘려들으셔도 됩니다.”
“아니. 그러지 말고 말씀해 주시죠, 임자.”
“그런 호칭은 지, 징그럽습니다.”
“아이가 보고 있습니다.”
“…….”
“…….”
“정말로 궁금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디아루기아.”
“별것 아닙니다. 앞선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당신 역시 대단하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그 용 숨결 물약이라는 것도 이전에 만든 혈청도…. 당신이 다른 인간에 비해 신체 능력이나 마력 친화력이 부족하다는 걸 생각해 보면 더 그렇죠. 굳이 나쁘게만 보이지는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첫인상과 다르게요?”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울분이 터지니 언급하지 말아주셨으면….”
“아. 알겠습니다. 풉.”
“풉.”
내가 살짝 웃자 디아루기아도 슬그머니 웃음을 터뜨렸다.
저건 연기가 아니다.
첫 만남이 생각나자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가 터져 나온 것이리라.
그렇고 그런 과정을 거쳐 여기까지 온 걸 떠올려보니 본인도 황당한 모양이다.
인간과 함께 가정을 이루고 인간들이 사는 곳에 사는 자신의 모습은 분명히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진짜 속마음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이곳에서 사는 삶도 썩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은근히 분위기 좋네.’
역시 괜한 연기하는 것보다는 자연스러운 쪽이 더 좋다.
어느 순간부터는 똘똘이의 우렁찬 비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이 분위기를 이어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든 것은 당연지사.
살짝 손을 들어 디아루기아의 머리를 넘기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바라보는 얼굴이 보였다.
‘예쁘긴 예쁘네.’
커다란 뿔 때문인지는 왠지 모르게 분위기가 묘하다.
얼굴이 묘하게 붉어진 것을 보니 조금 당황한 것 같았지만 이정도 애정 표현은 상관없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아마 지금쯤 속으로는 똘똘이를 위해 화목한 가정을 만들어줘야 된다고 결의를 다시금 다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정도면 충분히 화목한 것 같은데….’
조금 더 확실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이마에 뽀뽀하도 해줘야 되나 고민했을 때 똘똘이가 내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엄마에게 떼어내려고 하는 모습이 보였다.
‘얘는….’
“끼이이잉. 끼이이잉… 끄에에엑!”
용납할 수 없다는 듯이 힘으로 나를 떼어놓으려는 모습이 가관이다.
몸에서 힘을 빼면 녀석에게 끌려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격렬한 저항이었다.
“끄에에에에엑!”
심지어는 그 커다란 눈에서 이러지 말아달라고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얼굴은 누가 봐도 비련의 여주인공이었으며 도둑고양이에게 남편을 빼앗긴 아내의 모습이었다.
‘이거 니 엄마야, 똘똘아.’
“끼이이잉… 끼잉….”
울컥 울컥 튀어나오려는 눈물을 보이는 것은 물론 자꾸만 지어미를 노려보는 꼴은 가관.
혹시나 강현욱의 진단이 틀렸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이건 필요한 일이다.
‘아암. 필요한 일이고말고… 가정의 기강을 바로 잡아야지.’
천 리도 한 걸음부터.
지금에야 당장 엄마에게 아빠를 뺏기기 싫다고 난리를 치겠지만 계속해서 반복적인 학습을 하다보면 녀석도 깨닫는 것이 있을 것이다.
걱정되는 것은 ‘디아루기아가 녀석의 눈빛을 견딜 수 있느냐’겠지만 결의에 찬 표정을 보니 충분히 감내해 낼 수 있을 것처럼 느껴졌다.
“엄마랑 이야기하고 있잖니, 똘똘아. 자꾸 이러면 안 된다.”
“끄에에에에엑!”
“쓰읍! 계속 그렇게 떼쓰면 못써요.”
“끼이이잉… 헥헥… 헥.”
어떻게든 시선을 끌어보려는 듯 내가 소싯적 가장 좋아했던 방방 뛰기 포즈를 선보였지만 눈물을 가득 머금은 채 저러고 있으니 가슴만 쓰라릴 뿐이었다.
“자꾸 이러면 안 돼요. 가끔은 혼자 있을 수도 있어야지.”
디아루기아도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용기를 내 입을 열었다.
“디, 디아루리아. 아빠 말 들어야지?”
확실히 단호한 어머니의 표정.
바로 그거라는 듯 디아루기아를 바라본 채로 고개를 끄덕였을 때였다.
“싫… 싫어!!!”
익숙하지 않은 목소리에 다시 한번 뒤를 돌아봤을 때, 내 눈에 비친 것은 디아루기아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여자아이.
“어? 똘똘이?”
더 이상 이 애칭을 사용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외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