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8
회귀자 사용설명서 238화
율리에나 각성(1)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한 얼굴들이 시야에 비쳤다.
그야 당연할 것이다.
저딴 게 풀려난다면 세상이 어떻게 될지는 안 봐도 뻔하니까.
아마 그 이후를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살아남을 수 있는 선택지는 이것밖에 없다.
‘부셔야 돼.’
관리인 막스도 균열 박물관에 커다랗게 자리 잡은 시스템을 부수는 건 불가능하다.
플레이어의 입장에 있는 우리 역시 그건 마찬가지.
그럭저럭 시스템에 간섭할 수 있는 이들이 있냐고 한다면 당연히 있다고 대답할 것이다.
‘넌 할 수 있을 거야 그렇지?’
눈 앞에 있는 고대신의 파편은 그게 가능하다.
시스템 안에서 보호받고 있는 신화 급의 무기가 보관되어 있는 전시관을 때려 부술 수도 있고 공략하지 않으면 빠져나가는 게 불가능한 이 던전의 탈출구를 열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일이 잘못된다면 대륙에 커다란 위협을 우리 손으로 직접 풀어버린 게 되겠지만 녀석이 꼭 나쁠 거라는 보장도 없다.
‘고대신님! 믿습니다. 슈바!’
“무슨….”
“반론은 듣지 않겠습니다. 현재로서는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 중에 이게 가장 확률이 높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진심입니까?”
“진심입니다.”
혹시 고대신의 파편이 정신 나간 놈이라면 대륙을 위해서 여기서 작렬하게 희생하는 게 맞다.
일이 꼬였을 때를 생각해 본다면 정말로 위험해질 가능성이 있다. 대륙 전체가 불바다의 휩쓸리고 완전히 부셔져 버릴 것이다.
그렇지만….
‘일단 내가 살아야 돼.’
전형적인 소시민적인 사고방식이지만 이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김현성이야 대륙을 위해 한 몸 불사르는 성격이겠지만 나는 김현성 정도가 되는 위인이 아니다.
내 목숨이 가장 중요하고 내 주위에 있는 이들의 목숨이 가장 소중하다.
얼굴도 모르는 놈들 대신 죽어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는 거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대륙 전체보다 내 주위에 있는 이들이 더 중요하다.
‘희생은 엿이나 먹으라 그래.’
나와 내 주변 사람의 목숨이 대륙에 사는 모든 인간보다 더욱더 값어치 있다.
쓰레기 같은 생각이지만 어쩔 수 없다.
“뭔가 다른 방법은….”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일단은 봉인을 푼 이후에 생각합니다.”
김현성은 살짝 입술을 깨물기는 했지만 내게 무슨 생각이 있다고 느꼈는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만 무슨 뾰족한 수 따위는 없다.
말인즉슨 지금부터 일어날 상황에 대한 대처는 전부 애드립으로 해결해야 된다는 것.
발 한 번 삐끗하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이 무너진다.
그렇지만 사전 설명 따위는 하지 않는 게 당연.
‘일단 우리가 살아야죠’라고 대답하기에는 김현성의 희생적인 성격이 신경 쓰이기 때문이다.
당연하지만 내 목소리에 당황한 것은 원정대원뿐만이 아니었다.
우리가 고대신을 향한 것을 바라보고 있던 관리인 막스 역시 당황하기는 마찬가지.
사실 녀석이 가장 황당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애초에 나올 확률이 적지만 신화 급의 몬스터의 봉인을 완전히 풀어버리려고 한 미친놈들은 수세기 동안 없었을 것이 분명하다.
우리가 처음일지도 모른다고 자신감 있게 말할 수 있다.
-무슨 짓을… 하려는 겁니까.
“무슨 짓이긴. 전부 살아남으려고 하는 짓이지. 어쩔 수가 있나. 던전 안내인이 바보천치인데 탐험가들이야 뭐 뾰족한 수가 있겠어?”
-위험한 생각입니다. 이러지 마시고….
“푸흐흣. 말투가 제법 정중해지셨습니다, 관리인님. 그게 싫으시면 멈추시면 되지 않습니까.”
-말씀드렸지만 저에게 그런 권한은 없습니다. 다, 다시 말씀드리겠지만 확률조작 따위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뭐라고?”
-제가 한 말이 다소 무례한 반응이라고 생각했다면… 사과를 드릴 테니….
“사과는 어디서 받으면 되나? 뒈져서 천당 가서 받으면 되는 건가? 입이나 다물어, 관리인 양반아. 난 뒈져도 혼자는 안 뒈지니까.”
-당, 당신들이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 알기나 하는 겁니까?
“입 다물어, 이 새끼야. 우리라고 좋아서 이러는 거 아니야.”
-이기적인 인간들. 이 썩어빠진 인간들! 네놈들이 수호자님들이 걸어놓은 봉인을 부술 수 있을 것 같아?
“글쎄. 내가 볼 때 위대하신 고대신의 파편님에게 검을 들이미는 것보다는 가능성이 있을 것 같은데… 응? 우리 박물관 관리인 막스는 어떻게 생각하려나.
-디아루기아! 당신은 알고 있지 않습니까! 정말로 저 존재가 세상 밖으로 나와도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
이쪽과는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지 디아루기아를 들먹이며 입을 여는 꼴은 가관.
디아루기아도 뭔가 표정이 어둡기는 하다.
나야 드래곤에 대해 자세히는 알지 못하지만 균형을 바로잡는 존재들이라고 녀석이 언급했던 것을 보면 그녀는 저게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는 걸 원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역시나 나에게 말을 걸어왔지만….
“저….”
“우리 똘똘이가 애미 애비 없다고 놀림 받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네 마음대로 해, 여편네야.”
어머니는 강하다.
입술을 꽉 깨물고 있는 디아루기아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그 모습을 보고 관리인 막스는 다시 한번 뭐라고 소리를 내지르는 중.
애초에 저렇게 당황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는 게 즐겁다.
관리인의 표정이 구겨지면 구겨질수록 이쪽에는 희소식이라고 할 수 있다는 거다.
‘가능성이 있어.’
균열 수호자들이 걸어놓은 봉인은 내부에 충격에는 어떨지 몰라도 외부의 충격에는 유약하다.
‘이건 가능해…. 분명히 구멍이 있는 거야.’
저 정도의 존재를 봉인하고 박물관 탐험가들을 위한 시험으로 내몰았다.
그들도 고대신의 파편과 같은 신화적 존재라고는 해도 저런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오류가 생기지 않을 리가 없다.
물론 내 생각은 단순한 추측일 뿐이고 만약 내 말이 맞다고 가정해도 저걸 깨부수는 게 쉽지는 않겠지만 아까 했던 말대로 놈을 한 시간 동안 상대하는 것보다는 훨씬 그럴 듯한 계획이라는 거다.
일단은 빠르게 오더를 내리는 게 더 중요했다.
“관리인 막스의 개소리는 모두 무시. 디아루기아는 브레스를 준비하고 가장 화력이 큰 마법을 동시에 쏟아붓습니다. 현성 씨와 연주 씨도 가능하다면 폭발이 끝난 뒤에 직접….”
“알겠어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자살해 달라는 주문과 다름이 없지만 일단 둘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
[3. 2. 1.]
[전투가 시작됩니다.]
공격이 날아 들어오기 전에 먼저 부셔야 한다.
예상대로 곧바로 봉인을 쥐어뜯으려 하며 발광하기 시작하는 고대신의 파편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보는 것만으로도 덜덜 떨려오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공포감이 온몸에 드리운다.
그렇지만 압도적인 공포감이 사라지는 것은 순식간.
“!!!!!!!!”
적어도 외관으로는 무척 듬직해 보이는 그녀가 현신한 것이다.
압도적인 크기의 뿔과 덩치, 그 위용은 누가 봐도 탄성을 내지를 정도.
이전에 본적이 있었던 거대한 모습으로 변한 그녀는 커다랗게 숨을 들이마셨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어처구니없는 마력이 집결하고 있다.
저 브레스의 여파가 이쪽에 끼치는 것만으로도 이쪽에게는 대미지로 다가올 것이다.
그렇지만 모든 화력을 집중해야 하는 만큼 보호 마법을 펼칠 여력은 없다.
‘충격파는 내가 막아야 돼.’
충격의 여파는 용의 꼬리를 소환해 막는다.
그것만으로도 부족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저것 신경 쓰기에는 상황이 마땅치가 않다.
주머니에 있는 용숨결 물약을 일부 남겨놓은 채 마력을 주입하자 위이잉 하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
정하얀 역시 주문을 내뱉었다.
그녀가 진심으로 주문을 외우는 것을 보는 것은 처음.
디아루기아와 비교해도 결코 밀리지 않을 정도의 마력이 집결된다.
모두가 정하얀을 놀란 눈으로 바라볼 정도였으니 다른 말은 필요하지 않으리라.
다른 마법사들 역시 주문을 외우고 심지어는 선희영 같은 사제들 역시 화력을 집중하기 위해 기도문을 외운다.
‘가능해.’
분명히 가능하다.
신호탄은 디아루기아의 브레스.
콰지지지지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쏘아져 나간 빛은 순식간에 지면을 갉아먹으며 고대신의 파편을 억류하고 있는 쇠사슬에 쇄도해 나갔고 마찬가지로 정하얀의 앞에서도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구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무척이나 느릿하게 다가간 구체는 천천히 빨라지며 마치 빨려 들어가듯이 봉인에 적중.
그 외에도 이것저것 여러 마법들이 봉인의 쇠사슬을 두드리고 있었다.
귀를 울리는 굉음이 들려온 것은 당연지사.
고막이 찢어질 것만 같은 소리가 들려오지만 김현성과 박연주는 폭발의 여파를 뚫고 들어간다.
단일로 가장 큰 대미지를 줄 수 있는 만큼 약해진 부분을 비집고 들어가 해결해 줄 것이다.
다른 이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 같았지만 내 눈에는 김현성과 박연주의 모습이 확실히 비친다.
걸려 있던 신성 보호막이 벗겨지고 피부가 찢겨지면서도 검을 놓지 않고 마력을 한 손에 집중한다.
폭발의 충격파를 감당하는 것도 충분히 부담스러운 일일 터.
상태가 좋지 않은 것 같기는 했지만 튀어나오려는 핏물을 억지로 들이 삼키며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깨질듯 말듯 깨지지 않을 상대로 보이는 봉인의 쇠사슬을 보니 괜스레 짜증이 울컥 치솟아 올랐다.
‘죽으면 안 된다! 현성아!’
“덕구야, 현성 씨랑 박연주 회수 준비.”
“아… 응! 알, 알겠소.”
“사제들은 최대한 신성력 밀어 넣습니다. 희영 씨, 기모 씨! 제가 가리키는 위치에 집중적으로 신성력 밀어 넣어 주세요. 마법사들은 방어 마법 상시 준비하고 박덕구 포함한 전위들은 안쪽으로 진입. 디아루기아는 다음 꺼 준비되면 바로 쏴.”
“형, 형님도 가는 거요?”
“응.”
말할 시간이 없다.
어차피 김현성이 뒈지면 나도 뒈진다.
거대한 무언가가 우리를 덮쳐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파편?’
거대한 촉수 중에 하나.
아직 우리를 타깃으로 인식하지 않고 그저 몸을 푸는 것처럼 느껴졌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이쪽은 숨을 죽여야 된다.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을 때 나는 멍하니 위를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다.
‘뒈지나.’
다행히 그 공격을 막아낸 것은 디아루기아.
‘제길.’
기분이 좋지만 나쁘기도 하다.
날아 들어오는 촉수를 향해 브레스를 쏘아 보낸 것.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저딴 게 여기에 적중했다면 내가 뒈지는 것은 물론 틀림없이 전멸이었을 테니까.
다시 한번 충격파가 휘몰아쳐 몸이 뒤로 밀려날 뻔 했지만 박덕구가 나를 붙잡아줘 굴러가는 것은 피해낼 수 있었다.
다시 한번 여러 가지 마법이 쏟아지고 김현성과 박연주는 그 안에서 봉인의 쇠사슬을 부수려 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렇지만….
‘모자라.’
턱없이 모자라는 것은 아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화력을 집어넣으면 될 것 같은데 제대로 부셔지지가 않는다.
‘제길.’
뭔가 어디에선가 화력을 끌어올 수 있는 부분이 있는지 머리를 굴리는 것은 당연지사.
하지만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다.
괜스레 손에 들린 검을 바라보게 된 것은 바로 그때.
“율리에나?”
방법은 이것뿐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
“율리에나! 나의 율리에나여!”
“…….”
“깨어나시오, 율리에나. 아아아, 나의 율리에나! 그대가 필요하오! 율리에나! 나에게는 그대가 필요하오!”
미친 사람 같겠지만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했다.
셰익스피어의 희극에나 나오는 톤으로 입을 여는 것은 의외로 수치스럽다.
그렇지만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이뿐이다.
“아아아, 율리에나! 나의 사랑! 율리에나 깨어나시오. 제발! 제발 이 상황에 처해 있는 나와 내 동료들을 구원해 주시오! 나의 사랑 율리에나!”
‘제기랄.’
“율리에나! 제기랄! 율리에나는 개뿔!!”
이딴 것에 의존하려고 한 것 자체가 실수.
전멸이라는 그리기 싫은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였다.
뭔가….
굉장히 오랜만에 들어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아아아아아아! 게드릭! 나의 게드릭! 나의 게드릭!!
“어어어?”
-아아아아아! 나의 사랑 게드릭! 나의 모든 것! 내 전부! 내 삶의 등불이며 희망! 내 삶의 구원자. 나의 영원한 꽃! 게드릭! 드디어! 드디어! 드디어 당신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나의 게드릭!
*후기
막스: 안… 안 돼! 박물관이! 내 박물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