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4
회귀자 사용설명서 224화
수료식(2)
정체모를 두려움에 불안해하고 있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그야 나였어도 저런 모습을 보였으리라.
내가 그녀였다면 이 시간 이후로는 절대로 파란과 연관되는 않으려고 할지도 모른다.
근처에도 가지 않는 것은 물론 린델을 떠나 다른 도시로 옮길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녀 역시 머리가 있다면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
그만큼 정하얀은 그녀에게 커다란 트라우마로 자리 잡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 자리에 정하얀은 없었지만 나와 얽히는 것 자체를 싫어할 확률이 높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녀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나와 전혀 상관없는 일이다.
직업으로 흑마법사를 선택했다는 게 조금 더 중요하게 다가왔다.
‘흑마법사.’
어째서인지는 이유를 물을 필요도 없다.
[흑마법사-희귀 등급-흑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원거리 직업입니다. 흑마법은 기존에 가지고 있는 마법상식을 완전히 뒤집는 새로운 차원의 마법입니다. 악마에게 힘을 빌려온다는 개념 때문에 일부 종교집단에서는 흑마법에 강한 반발을 느끼기는 하지만 그 파괴력만큼은 다른 직업군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기초 흑마법 지식을 습득합니다. 마력이 4 올라갑니다.]
‘요것 봐라….’
이미 마력 회로가 망가진 그녀가 그나마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이었을 테니까.
마력에 대한 친화력을 강압적으로 요구하는 마법사와는 달리 흑마법사는 그나마 마력의 영향을 덜 받는 클래스 중에 하나다.
나 역시 흑마법사와 연금술사 사이에서 무척 고민했던 기억이 있다.
당시에 박덕구는 흑마법사를 추천했었고 김현성은 연금술사로 전직하는 것을 추천했다.
전자 쪽이 더 좋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라무스 터커의 연금학개론이라는 영웅 등급의 아이템에 낚여 연금술사를 선택했던 것이 지금 여기까지 오게 된 것.
그렇지만 가끔 생각나는 것이 있기는 하다.
‘연금술사가 아니라 흑마법사를 선택했었다면 어땠을까.’
물론 지금도 나쁘지는 않다.
내가 생각해도 과분한 대접과 대우를 받고 있었고 개인적인 성취도 훌륭한 수준이니까.
고유 전설 등급의 직업을 얻은 것은 물론 많이 모자란 무력도 어느 정도는 채워졌다.
그렇지만….
‘흑마법사도 나쁘진 않았을 거야.’
간혹 그런 생각이 들기는 한다는 거다.
만약 흑마법사를 선택했다면 신성 제국에서 움직이기 불편했겠지만 저 영역은 내가 모르는 미지의 영역이다.
궁금하기도 하고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있는 와중에 내 쪽을 바라보고 있는 한소라가 입을 열어왔다.
당연하지만 무척 당황한 듯한 모습이었다.
“저… 말씀하신 거… 맞, 맞나요?”
“네. 잠깐 마차에서 내리세요, 한소라 씨.”
“아….”
불안하기는 불안한 모양.
그 표정과 얼굴을 확인하자 그녀가 이쪽에 복수하기 위해 흑마법사를 선택한 것은 아니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그야 그렇겠지.’
그녀가 아무리 날고 긴다고 한들 정하얀에게 뭔가 해를 끼친다는 발상 자체가 무리다.
‘조금 다행인가.’
둘은 이미 레벨이 다르고 그 레벨차이는 메워지지 않는다.
그 누구보다 그녀가 그걸 가장 잘 알고 있으리라.
고개를 끄덕이며 출발을 기다리는 마부에게도 말을 전했다.
아직도 온몸에 붕대를 감은 채 쩔뚝거리며 마차에 내린 그녀가 불안 한 듯 나를 바라보는 게 시야에 비쳤다.
“먼저 출발하셔도 됩니다. 이분은 파란에서 린델로 데려가도록 하죠.”
“네. 알겠습니다, 이기영 님.”
“한소라 교육생은 저희 마차를 타고 같이 가는 게 좋을 것 같군요. 따라오시죠.”
“…….”
“이런저런 이야기라도 나누면서 말입니다. 아, 다리가 조금 불편하신 걸 깜빡했네요. 천천히 오셔도 됩니다.”
“…….”
조금은 어색한 분위기.
계속해서 침묵을 유지하던 그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온 것은 교육생을 실은 마차가 시야에서 사라진 뒤였다.
“이기영 교관님….”
“네?”
“제가 혹시 무슨 잘못을 했나요? 저… 뭔가 혹시 실수한 것이 있다면 사,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아아…. 그런 것이 아니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솔직히 말하면 뭐 그 일은 벌써 잊었습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이기영 교관님이 아니라 기영 씨라고 불러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만…. 파란 부길드 마스터라 부르셔도 상관없고 뭐, 칭호는 아무거나 괜찮습니다.”
“네?”
“이제는 교관이 아니니까요.”
“아니요. 그게 아니라….”
“아… 그 일 말씀이시군요. 그건 말 그대로의 의미입니다. 당신에게는 큰 해프닝이었겠지만 저는 그다지 마음에 두고 있지 않다는 겁니다. 이미 벌도 받을 만큼 받은 것 같고 사과도 한 번 받은 적이 있으니까요.”
“그럼 왜….”
“글쎄요. 제가 왜 당신을 불러 세웠을까요. 하필 수료식이 끝난 다음에 말입니다.”
“…….”
“쉽게 유추할 수 있으실 겁니다.”
“혹시… 죽….”
“함께 파란으로 갑시다.”
“네?”
“함께 파란으로 가자고 말씀드렸습니다. 대우는 나쁘지 않을 겁니다. 연봉도 괜찮은 선에서 잡아 드릴 거고 계약금도 남들만큼은 해드리겠습니다. 물론 유아영 씨나 이창렬 씨 만큼은 아니겠지만 타 길드와 비교했을 때 섭섭하지 않으실 겁니다.”
“네?”
“복지 내용이나 다른 부분은 카탈로그를 읽으면서 확인해 보시면 되고 계약 기간은….”
“아….”
“계약 기간은 종신입니다. 원래는 이런 경우는 흔하지 않고 제국법상으로도 허용되지 않는 범위 내에 있는 게 맞지만 뭐, 당신만 입 다물고 있으면 아무도 모를 테니까요.”
“아니 저는….”
“해야 할 일이 조금 많을 겁니다. 일단 기초 연금 지식 정도는 가지고 있으실 테니 연금 실험실에 부실장 자리에 앉힐 거고…. 아! 파란에서 신설한 제2파티의 후위를 맡으실 테니 그것 역시 염두에 두셔야 할 겁니다.”
“저는… 마력이… 그리고 다, 다리도….”
“다리는 별로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후위에게 요구하는 건 민첩함이 아니니까요. 문제는 마력 쪽인데… 고장 난 마력 회로는 시간이 조금 걸리겠지만 고칠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한 번 알아보도록 합시다. 물론 그래도 후유증은 남을 테지만 어차피 당신한테는 마력 회로가 살아있는지 살아 있는지 않은지에 대한 여부가 그다지 상관없지 않습니까.”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지… 저는….”
“한소라 씨. 우리 거짓말은 하지 않는 걸로 합시다. 제가 어떻게 알았는지 무슨 방법을 썼는지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마시고 그냥 고개만 끄덕이세요. 어차피 당신이 혼자 어디서 싸돌아다니는 것보다는… 신성 제국의 명예주교라는 호칭을 달고 있는 제 옆에 있는 게 조금 더 안전할 겁니다.”
“…….”
“제국이 자랑하는 이단심문관들의 갑작스러운 방문을 받고 싶지 않으시다면 말입니다. 그냥 조용히 계약서에 사인하세요. 파란은 인재를 가리지 않습니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비밀이나 장애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는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당연하지만 이미 창백해질 대로 창백해진 얼굴이 보였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상황이 꼬였다는 건 충분히 인지하고 있으리라.
선택지에 거절이라는 답안은 없다.
반 협박을 담아 말했으니 아마 내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충분히 깨달았으리라.
‘쟤는 나름대로 똑똑하니까.’
“하얀이는….”
“딸꾹.”
정하얀이라는 이름을 내뱉자마자 딸꾹질을 하는 모습은 가관.
아마 나보다는 정하얀 때문에 파란으로 오고 싶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당신이 먼저 헛짓거리를 하지 않는 이상 그녀가 당신을 먼저 건드리는 일은 없을 겁니다. 아! 마침 한 장 가지고 있었던 게 있었네요. 일단 사인부터 하세요.”
“죄송합니다. 잘, 잘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딸꾹. 제발 이… 러지 말아주세요.”
“아니, 밑에 연봉이랑 계약금 적혀 있지 않습니까. 당신한테도 좋은 이야기.”
“살려주세요. 제발… 다른 건 전부 괜찮으니까. 전부 제발… 제발….”
“아이… 죽인다는 게 아니라니까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제발 가고 싶지 않아요. 제발….”
“계약금 조금 더 얹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런 게 아니라… 제발… 교관님, 제가 멍청했었습니다. 그러니까.”
“정말로 괴롭히려는 게 아닙니다. 일단 사인부터 하세요.”
바지를 부여잡는 꼴은 가관이다.
그녀가 평생 동안 일해도 만질 수 없는 돈을 준다고 하는데도 이런 모습을 보인다는 게 어째서인지는 알 것 같지만 내 생각보다 정도가 심하기다.
그렇지만 그녀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는 뻔할 뻔자.
아마 범의 아가리로 얼굴을 들이대는 심정이겠지만 애초에 선택지 같은 건 없다.
‘얘는 진짜 쓸 만하겠는데….’
희라 누나의 말이 맞다.
살아남으려는 의지도 충만하고 나름대로 필사적인 부분도 존재한다.
어떻게 생각해 보면 이창렬이나 유아영보다도 기대가 되는 인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
‘후위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계약서에 이름을 서명하는 한소라의 모습을 보니 왠지 모르게 뿌듯한 기분이 든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타이밍에 맞춰 파란의 깃발이 있는 곳에 합류한 유아영과 이창렬도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김현성이 이들을 인솔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이들을 인솔한 것은 함께 온 길드 직원.
‘김미영 팀장?’
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김미영 팀장, 이거 오랜만입니다.”
“네. 부길드 마스터. 정말로 조금 오랜만에 뵙는 것 같네요.”
“현성 씨는?”
“길드 마스터께서는 검은백조의 박연주 님과 업무상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죄송하다고 말씀하시고 인솔을 부탁하시더군요.”
“음….”
정말 빠져도 제대로 빠진 모양.
아마 김현성도 상황이 난처할 거라고 생각했다.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니까.’
조금 이상했던 것은 선희영도 눈에 띄지 않았다는 것.
내가 주위를 둘러본 것을 확인한 것을 봤는지 제법 눈치 빠른 그녀가 입을 열었다.
“희영 씨 역시 검은백조의 마차에 타서 함께 오시기로 하셨습니다.”
“아! 정말로 업무상으로 할 이야기가 있었던 거였군요.”
“예. 물론 오늘 저녁까지는 린델에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환영회 겸 다함께 식사를 하신다고 전해 달라 하시더군요.”
“네.”
“그보다 이쪽은….”
“갑작스럽지만 영입하게 됐습니다. 행정팀을 귀찮게 해서 죄송합니다만 제2파티에 꼭 필요한 인재라고 생각해서 말입니다.”
“아….”
슬쩍 한소라를 바라보는 김미영 팀장의 시선이 그녀의 한쪽 눈과 다리에 머물렀다.
물론 그중에서도 가장 오래 시선이 머문 곳은 극도로 불안해하고 있는 얼굴이었다.
그렇지만 그다지 신경 쓰지는 않는 모양.
나를 믿는 만큼 적극적인 지지를 보내주는 것이다.
“예. 도착한 이후에 곧바로 입단 수속 밟고 길드 조합에 신고하도록 하겠습니다. 계약서는….”
“지금 막 계약했으니 확인해 주시고 적혀 있는 것보다 10% 정도만 더 얹어주세요. 지금 생각해 보니 조금 싸게 데려온 듯한 느낌이 있네요. 그러고 보니 창렬 씨랑은 함께 튜토리얼 공략에 임했었지요?”
“네. 부길드 마스터. 그렇지만….”
“여러 가지를 고려했으니까 충분히 믿고 따라와 주셔도 됩니다. 몸 상태가 조금 안 좋기는 하지만 충분히 제 역할을 해낼 겁니다.”
“네, 이기영 님.”
붉은 복면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이창렬이 무슨 표정을 하고 있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기분이 안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도 아는 사람이 한 명 들어온다는 일이 나쁘지는 않은 모양.
물론 저 녀석보다 더 기분 좋아 보이는 표정을 하고 있는 건 유아영이었다.
한소라에게 잠깐 시선이 뺏겨 걱정했었는데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일이 더 잘 풀린 모양인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아영 씨는… 이기철 일은 잘 해결됐습니까? 그러고 보니 도와드렸어야 했는데… 죄송하군요. 갑자기 일이 생겨서.”
“아뇨. 굳이 도와주실 필요는 없었어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충분히 후련했거든요. 옆에 있는 김미영 팀장님도 도와주셨고… 물론 아직 조금 더 하고 싶은 게 남아 있기는 하지만… 그건 나중에 따로 말씀드려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얘는 너무 맛 들린 것 같은데….’
도대체 김미영 팀장이 뭘 어떻게 도와줬는지, 또 앞으로는 뭘 하려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직도 더 복수할 게 남았다고 생각하는 게 조금은 무서웠다.
‘그래도 나쁘진 않아.’
전체적으로 조금 불만이 있었던 이번 차수에서 그나마 괜찮은 파티를 꾸린 것 같은 느낌이다.
유아영, 이창렬, 한소라.
저기에 경험 많은 안기모를 집어넣는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밸런스 있는 파티 하나가 완성될 것이다.
뭔가 전부 모아놓고 생각해 보니 하나씩 나사가 빠진 것 같은 느낌이고….
사실 안기모에게 이들을 맡긴다는 게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녀석은 전위와 후위가 가능한 성직자다.
충분히 능력이 있고 앞으로도 성장할 여지가 남아 있다.
‘제대로 키워봐도 되겠는데….’
물론 이들이 길드에 녹아들기 위해서는 해결해야 될 문제가 많기는 하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문제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을 때 마차 한 대가 이쪽으로 들어오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조금 의외였던 것은 마차에 타고 있는 한 사람의 존재.
“오빠!”
밝은 얼굴로 손을 흔들고 있는 정하얀이 시야에 비쳤다.
아마 마중 나온다고 이곳으로 향한 것이겠지만 별로 반가운 타이밍은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뒤에서 이상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
고개를 돌린 곳에 위치한 사람은 당연히 한소라다.
정하얀을 바라보며 몸을 부들부들 떠는 모습이 보인다.
“앗… 아아아아아앗… 앗!”
경기를 일으키는 것으로도 모자라 휘청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것은 전력으로 축축해지는 그녀의 하체.
바지 끝에 걸린 노란색 물줄기가 뚝뚝 떨어지고 있는 모습은 왠지 모르게 가슴을 아프게 했다.
‘아직도 이러는 건가.’
그동안 보지 않았기 때문에 조금 나아졌을 거라고 예상한 것은 어디까지나 내 착각에 불과했다.
심지어는 자신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지 여전히 ‘앗! 아아’라는 효과음을 내며 시원해지고 있는 모습이 조금 불쌍하다.
내 생각보다 상황이 조금 더 심각하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
밝은 얼굴로 손을 흔드는 정하얀을 보니 괜스레 등 뒤로 소름이 돋았다.
‘너…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잘… 잘못했….”
‘무슨 애를 파블로프의 개로 만들어놨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