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9
회귀자 사용설명서 219화
귀여운 복수 (4)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 조금 진부한 표현일 수도 있지만 지금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였다.
쏟아지는 사람들의 관심과 시선이 불편하기는 했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자 그것도 곧 적응이 됐다.
물론 저들의 부럽다는 표정을 즐기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이게 단순한 연기라는 사실은 누구보다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었고 이런 것에 크게 가치를 두지는 않았으니까.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주변 사람의 반응이 김기철에게 끼치는 영향이었다.
‘나쁜… 새끼.’
다시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머릿속에서는 계속해서 짜증나는 생각들이 떠오르기 시작.
눈과 귀로 보고 들었던 역겨운 장면과 목소리가 자꾸만 들려오는 것 같아 참기 힘들 정도였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괜스레 울컥 하고 눈물이 쏟아지려 한다.
‘짜증나.’
그 사람 때문에 이런 감정을 느껴야 한다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만약 이번 일을 벌이지 않았다면 지금 이 시간에도 방 안에서 혼자 누운 채 울음을 터뜨렸으리라.
처음에는 이기영 교관과 함께 이런 일을 꾸미는 게 무슨 도움이 될까 싶기는 했지만 확실히 도움이 된다.
적어도 꽉 막혀 있는 답답한 가슴이 잠깐이나마 해방되는 느낌은 기분이 좋다면 좋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간질간질하게 마음 속 구석에 있는 간지러운 부분을 긁어주는 감각.
뭐라고 속 시원하게 말할 수 있는 감정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답답함을 해소시켜준다는 게 중요하리라.
숙소로 들어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을 때 옆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영아.”
들리는 목소리가 누구인지는 뻔할 뻔자.
“왜?”
“왜라니. 너 보고 싶어서 왔지.”
김기철이었다.
언뜻 보면 여유로워 보이지만 얼굴이나 행동 곳곳에 초조함이 나타나고 있었다.
울컥 하고 눈물이 튀어나오려고 한 것도 잠시였다.
자꾸만 부정적인 생각이 떠오르기는 했지만 왠지 모르게 조금은 여유가 생긴다.
아마 저 남자의 표정에 담긴 불안감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리라.
“이 시간에 나와 있으면 안 되는 거 아니야? 교육생들은 12시 이후로는 숙소에서 못 나오게 되어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건 너도….”
“오빠랑 나랑은 상황이 다르다는 거 오빠도 잘 알고 있을 거 아니야. 나는 외출권을 받은 거고 오빠는 무단으로 나와 있는 거잖아.”
“정확히 말하면 무단으로 나와 있는 건 아니야. 나도 일이 있어서.”
“무슨 일? 어디 클랜에 오퍼라도 받았어?”
“뭐. 비, 비슷해.”
“어딘데?”
“중견 길드. 린델이 아니라 캐슬락 쪽에 있는 길드인데 거인 길드라고 알지 모르겠네.”
들은 적이 있기는 있다.
캐슬락 공성전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한 이후로 메이저로 올라오게 된 길드였다.
본래 캐슬락은 작은바위라는 길드가 실권을 잡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기는 했지만….
‘송정욱이라는 사람이 캐슬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후에 올라왔다고 했나….’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이기영 교관님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분명 그렇다.
린델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교육생들이 노리고 있는 길드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으리라.
최근에는 입단 컷도 제법 높아졌기 때문에 냉정하게 생각한다면 김기철의 성적으로는 갈 수 없는 길드였다.
‘답답해.’
조금씩이지만 짜증이 치미는 것은 당연지사.
‘답답해….’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속이 굉장히 답답했다.
물론 이 답답한 기분이 눈앞에 있는 남자가 잘되는 것을 보기 싫다는 저열한 감정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짜증나….’
이런 기분을 느끼는 것 자체가 굉장히 짜증나는 상황. 결국에는 자신도 모르게 툭하고 한 마디를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거기 오빠 성적으로 갈 수 있는 곳 아니잖아.”
말을 하면서도 아차 싶을 정도.
조금 심하게 말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조금 일그러지는 김기철의 표정을 보니 왠지 모르게 답답함이 가시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
“오빠 성적으로는 길드가 아니라 클랜 단위로 알아봐야 되는 거 아니야?”
이런 말을 하면 안 된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뭔가에 홀린 것처럼 움직이는 입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심하게 말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기는 했지만 답답함을 해소하기 위한 말이 저도 모르게 쏘아져 나가고 있다.
“계약금이랑 연봉도 없이 가는 거면 그만두는 게 좋아, 오빠. 이기영 교관님한테 들었는데… 그런 경우는 정식 길드원이 아니라 몬스터 사체 운반 같은 일에 쓰일 가능성이 높다더라.”
“너….”
“전부 오빠 위해서 하는 말이야. 연봉이랑 계약금은 얼마나….”
“꽤 돼.”
“정말?”
“응. 아영이 너랑 같이 가겠다고 말하니….”
“나는 동의한 적 없는데. 왜 그걸 오빠 마음대로 결정해?”
기가 차서 제대로 말도 나오지 않을 지경.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너. 정말로 파란으로 갈 거야?”
“그게 뭐 어때서. 계약금이랑 연봉 모두 최고로 대우해 준다고 하셨어. 복지 문제도 다른 대형 길드를 웃도는 수준이고.”
“같이 들어가자고 한 건….”
“나는 같이 들어가겠다고 말한 적 없어. 어디까지나 오빠 혼자만 그렇게 생각했었던 거지.”
“거기 소문 별로 좋지 않은 거 몰라? 이기영이라는 사람.”
“교관님이 왜? 처음에 이기영 교관이랑 친해지는 게 좋을 거라고 말한 건 오빠 아니었어? 오빠가 그렇게 하라고 했잖아. 그리고 절대로 나쁜 사람처럼은 안 보이던 걸. 그 사람, 오빠가 아는 것보다 훨씬 대단한 사람이야.”
“나도 들은 게 있지만… 여자관계도 복잡하고…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했어. 이기영 교관이 얻은 권력…. 그게 정당한 방법으로 만들어질 수 있었을 것 같아? 겨우 연금술사가?”
‘복잡한 건 너도 마찬가지잖아.’라는 목소리가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걸 애써 꾹 눌러 담을 수밖에 없었다.
“지구도 아닌데 이곳에서 그게 흠이야? 오히려 당당해서 좋던데. 어디서 몰래 헛짓거리 하는 것도 아니고 다들 알고 있는 이야기인데…. 능력 있는 사람은 대부분 그렇게 한다더라.”
“그래서… 그게 좋아 보인다는 거야?”
“좋아 보이지는 않지만 나쁘지도 않아. 그 사람… 능력 있는 사람이고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이기영 교관이 너한테 보내는 관심이 진짜일 거라고 생각하지 마, 아영아. 네가 너무 착해서 세상을 잘 모르나 본데… 그게 다….”
“관심이 진짜건 아니건 그게 중요해? 내가 입고 있는 옷이 전부 다 합쳐서 얼마일 것 같아? 아마 오빠는 모를걸. 오빠는 평생 일해도 내가 걸치고 있는 것 중에 아무것도 사지 못할 거야. 나도 그냥 평범한 건 줄 알았는데 이 반지 있잖아. 2만 골드짜리라더라.”
눈앞에 있는 남자의 표정이 구겨질 때마다 속 안에 꽉 뭉쳐 있던 답답한 감정이 조금씩 떨어져 나가는 느낌이다.
틀림없이 저 감정의 정체를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열등감.’
지금 저 남자가 보이고 있는 건 분명 열등감이었다.
“너… 그 사람이랑… 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더니…. 내가 몸이라도 팔았을 것 같아?”
“똑바로 이야기해. 유아영, 너….”
“그랬으면 어쩔 건데?”
다시 한번 얼굴이 구겨지는 것이 보였다.
뭔가가 등 뒤로 찌릿찌릿 오는 것 같은 느낌에 몸을 부르르 떤 것은 당연지사.
뭉쳐 있던 감정이 통째로 떨어져 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러면 안 된다는 생각을 조금씩 하면서도 마치 알콜중독자가 술을 찾는 것처럼 멈출 수가 없다.
“너!”
“그 사람… 있잖아. 대단한 건 재력이랑 권력뿐만이 아니야.”
“그게 무슨 뜻이야.”
“모든 면에서 오빠 같은 사람이랑은 비교도 안 된다고. 꼭 내 입으로 이야기해야 돼? 여자로 태어나서 기쁘다고 생각이 든 건 처음이었다니까.”
“유아영!”
핏발이 선 눈과 부들부들 떨리는 얼굴이 보였다.
‘이런 뜻이었구나.’
이기영 교관님이 했던 말이 괜스레 떠오르기 시작했다.
‘본래 저런 남자가 게거품을 무는 상황. 자기 거라고 생각했던 여자를 다른 남자한테 빼앗기는 상황이거든요.’
처음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정확히 무슨 상황을 말하는지 몰랐지만 지금 이렇게 눈으로 직접 확인하니 이기영 교관님이 무슨 뜻으로 말한 것인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등 뒤로 계속해서 찌릿찌릿거리는 감각이 느껴지는 것은 물론, 가슴 속에 뭉쳐 있는 답답함이 한꺼번에 터져버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기분 좋아.’
저 열등감에 찌든 얼굴이, 괴로워하는 것 같은 얼굴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답답함이 가신다.
조금 더 심한 말을 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괜스레 입술을 오물 거렸을 때 든 생각은 하나.
‘이대로 끝내도 되는 걸까.’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생각이다.
그렇지만 이 남자가 괴로워하는 걸 조금 더 오래보고 싶고, 오랫동안 길게 보고 싶다.
지금보다 더 괴롭게 만들어 주고 싶다.
계속해서 머릿속으로는 이와 비슷한 생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나도 괴로웠어.’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저 사람도 괴로워야 돼.’
그게 맞다.
‘너도 배신당한 기분이 어떤 기분인지 알아야 돼.’
다시 한번 이기영 교관님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지나가는 듯한 목소리로 흘려들으라는 듯 말씀하시기는 했지만 왠지 모르게 머릿속에서 계속해서 맴도는 목소리였다.
‘복수는 기분이 풀릴 때까지 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찝찝하다고 하거나 의미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한 번도 제대로 된 복수를 해보지 못한 사람들이에요. 정말 제대로 된 복수를 하면 말입니다. 가슴이 뻥 터질 정도로 기분이 좋답니다.’
확실히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다.
조금 더 이 기분을 느끼고 싶다. 조금씩 조금씩 아껴서 느끼고 싶다.
결국에는 천천히 그 사람을 바라보며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화나서 해본 말이야. 실제로 그런 적은 없어.”
“너….”
잠깐이지만 무척 안심하는 듯한 표정이 눈에 보인다.
“…….”
“…….”
“아영아.”
“왜?”
“너 요즘 좀 이상한 거 알아?”
“…….”
“내가 요즘 좀 섭섭하게 해서 그런 거야? 혹시 잠깐 떨어져 있는 시간을 가져보자고 해서 그래?”
“몰라….”
“다 너를 위해서 한 말이었어. 나는 네가 가지고 있는 가능성을 믿었고 내가 네 앞길을 막고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거든. 그렇지만 지금 네 모습을 보니 확실히 요즘 네게 너무 소홀했던 것 같다.”
개소리.
당연히 거짓말이라는 건 알고 있다.
“미안해, 아영아.”
“…….”
그렇지만 자꾸 입꼬리가 올라간다.
당연하지만 진심 어린 사과를 받아서 기분이 좋은 것이 아니다. 한 번 더 그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이다.
“지금은 오빠 얼굴 보기 싫어.”
“미안하다. 정말로… 그래도 이거 하나 만큼은 알아줬으면 좋겠어.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거.”
“일단 들어갈게.”
“아영아! 유아영!”
“그리고….”
“응?”
“사과는 받아들일게, 오빠. 내일은… 오랜만에 같이 밥이나 먹자.”
살짝 뒤를 돌아보며 입을 여는 순간 조용히 미소 짓고 있는 김기철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괜스레 등 뒤가 다시 한번 찌릿했다.
* * *
차희라의 방 한쪽에 비치된 쇼파에 앉아 문서를 훑어보고 있었을 때 옆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위는 아직도 안 뽑았어? 자기?”
“응. 2파티 만들어야 되는데… 도통 쓸 만한 애들이 없네. 기왕이면 신입으로 뽑으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이 경력직으로 데려와야 되나봐.”
“아마 조금 있으면 마도 길드에서 나오는 마법사도 조금 있을걸. 재계약만 하지 않으면… 우리 쪽에서도 몇 명 데려오려고 하는데 그쪽에서 알아봐.”
“그런 것보다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쪽이 키워보고 싶어서. 불순물 없는 상태로.”
“아. 그런 거 좋지. 그래서 신입을 뽑는 거기도 하고….”
확실히 경력직도 괜찮기는 하지만 같이 커야 할 두 명의 신입이 더 있는 만큼 후위 역시 신입으로 데리고 오고 싶었다.
최근까지도 계속해서 마음의 눈을 키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거다 하는 사람이 없는 걸 보면 아무래도 이번에 마음에 드는 신입을 데려오는 건 힘들 것 같았다.
보통 마법사라는 게 마법에 대한 이해력, 마력에 대한 재능 그리고 필사적인 노력을 삼박자로 겸해야 하는 만큼 쓸 만한 이들이 흔하지 않다는 건 이해하고 있었다.
정하얀의 반의 반만 되더라도 받아들였을 것이다.
“후우….”
“바쁜 와중에도 그런 장난치는 건 조금 즐겁나 보네.”
“은근히 재미있어.”
“그건 자기 마음인데…. 유아영 일은 우리 세컨드한테 말한 거지?”
“아… 응. 대충. 하얀이는 지금 린델에 있으니까. 뭐, 괜찮지 않을까 싶은데? 누나는 괜찮아?”
“나는 원래 이런 거 좋아해. 조금 통쾌한 맛이 있잖아. 여기에 즐길 거리가 많은 것도 아니고… 나는 저런 공주님 대접 받기에는 너무 잘나신 몸이라 저런 종류의 카타르시스는 느낄 수가 없잖아? 대리만족이나 하는 거지 뭐.”
“왜, 공주님 대접 받고 싶어?”
“너 요즘 많이 기어오른다. 응?”
실실 입꼬리를 올리자 곧바로 역시나 곧바로 제제가 들어왔다.
조금 움찔한 것도 사실.
동등하게 말을 하게 된 지금도 여전히 차희라는 무서운 면이 있다.
‘그야 그 꼴을 봤으니까….’
붉은 눈을 하고 침을 흘리며 미친년처럼 다가오는 모습이 아직도 선했으니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너 방금 그때 상상했지.”
“아니야… 누나.”
“표정만 봐도 알아. 내가 잊으라고 하지 않았어?”
“잊으라고 말한다고 잊을 수 있는 게….”
변명 아닌 변명을 하고 있었던 바로 그때였다.
문이 열리며 길드 직원이 보고사항을 알렸다. 며칠 전부터 오라고 전문을 날렸는데 이제야 도착한 모양.
간만에 똘똘이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이기영 님. 저… 손님이 오셨습니다.”
“제 방으로 안내해 주세요. 조금 있다 찾아가겠다고 전해주시고요.”
“저기… 문이 너무 좁아서 들어올 수 있을지….”
“네?”
“그… 실례지만 밖으로 나가셔서 직접 확인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네? 아니 그럴 필요는… 디아루기아가 함께 있는 거 아니었습니까? 지금 도통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가 안 되는데….”
“키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엑!”
평소와는 다른 우렁찬 목소리.
자연스럽게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가 창문 아래를 내려다보자 뭔가 익숙하지 않은 형상을 한 괴생명체가 시야에 비쳤다.
‘똘똘이?’
마치 대형견, 아니, 맹수라도 되는 것 같은 크기.
순간적으로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똘똘아… 너 왜 이렇게 자랐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