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6
회귀자 사용설명서 206화
G.T.O (2)
“환자를 여기까지 오게 했네… 미안해서 어쩌지, 자기?”
“놀리지 마. 다 알고 있으면서…. 그나저나 여기 다시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괜히 감회가 새롭네. 불러줘서 고마워, 누나.”
“역시 그렇지? 보통 여기로 돌아오는 사람들 반응이 거의 다 그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나를 바라보는 차희라가 시야에 비쳤다.
얼굴은 여전했다. 평소 같이 넉살 좋은 표정을 하고 있었고 왠지 모르게 위험하게 느껴지는 눈동자와 붉은색 입술도 여전했다.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역시 제대로 다듬지 않은 머리카락. 어깨를 넘어 가슴까지 내려와 있는 걸 보니 확실히 오랜만에 만나기는 한 모양인 것 같았다.
저번에 잠깐 본 것을 제외하고는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는 게 처음.
어째서 그동안 그녀가 나를 피했는지 대충은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구태여 그 일에 대해서는 말을 꺼내지 않았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는 차희라의 모습은 꽤나 의외였다.
‘없었던 일로 하려는 건가….’
어쩌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녀의 성격상 맨입으로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 당연.
이유야 어쨌든 간에 차희라가 캐슬락에서 저지른 일은 꽤 큰 실수다.
이쪽에 피해를 끼쳤으니 뭔가 콩고물이 떨어지는 것은 이미 확정된 수순이라는 거다.
어쩌면 이번에 이곳으로 나를 부른 것 역시 그 콩고물과 연관이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이번 튜토리얼 던전을 맡게 된 길드는 엄연히 붉은용병이다. 파란과 붉은용병이 동맹 관계에 있다고 한들, 이런 식으로 나에게 먼저 공개를 하는 것 역시 특혜 아닌 특혜다.
‘어쩌면 우선교섭권도 몇 장 줄 수도 있겠는데….’
확실하지는 않지만 이곳에 온 이상 어느 정도의 혜택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큼. 그럼 이야기를 조금 들어보고 싶은데 괜찮지?”
“어. 뭐, 그렇게 해 어차피 바로 시작할 생각이었으니까. 저녁은 먹었어?”
“아직.”
“그럼 식사라도 하면서 대충 귓구멍에 박아놔. 그리 어려운 이야기는 아니니까.”
“응.”
“여기! 먹을 것 좀 가져다주겠어? 간단한 거면 되니까. 아! 저번에 먹었던 거 있지? 그걸로 가져다 줘.”
“네. 길드 마스터.”
확실히 붉은용병은 다르다.
저번 파란이 튜토리얼 던전을 맡았을 때와는 규모가 다른 것이 느껴진다.
예전의 이상희처럼 길드 마스터가 직접 공략조를 맞이하러 가지 않는 다는 것도 꽤나 신기했던 부분.
이전에 그녀가 나와 정하얀을 찾아왔던 게 얼마나 이례적인 일이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확실히 그때는 최단 시간이라고 했었으니까….’
다르다는 의미는 굳이 이런 의미로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지금 내가 있는 장소가 예전 이상희가 사용했던 장소라는 게 믿겨지지 않을 지경.
창밖으로 보이는 훈련소 또한 이미 완벽하게 단장을 마치고 신입들이 입소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니 문이 열리고 차희라가 주문했던 음식들이 들어오기 시작.
미식을 즐기는 타입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다지 시선이 쏠리지는 않았지만 대충 보기에도 퀄리티가 제법 훌륭해 보였다.
‘이것도 다르네.’
“이것 좀 먹어봐, 자기. 저번에 먹어봤는데 맛있어.”
“그래?”
“응. 와인도 한잔할래?”
“아냐. 그건 괜찮아. 일단 대외적으로는 환자니까.”
“그건 좀 아쉽네. 그나저나 어때? 여기?”
“솔직한 감상?”
“응.”
“정말 놀랐어.”
“조금 더 자세히 말해줬으면 좋겠는데.”
“어째서 사람들이 붉은용병, 붉은용병 하는지 알 것 같은 느낌이야.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파란도 제법 대단해 보였는데 확실히 레벨이 다르기는 다르네. 어느 것 하나 고급품이 아닌 게 없고 길드원의 상태도 그렇고… 기합이 제대로 들어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인데. 누가 보면 훈련하는 게 신입이 아니라 붉은용병의 단원들인 줄 알걸. 이거 과시하는 거 맞지?”
“맞아. 신입도 신입이지만 1년에 한 번 있는 이 이벤트는 우리 길드가 어느 정도인지 타 세력에게 보여주는 자리이기도 하니까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지. 이적시장도 곧 열릴 테고 타 길드 스카우터들도 기죽일 수 있고… 좋잖아?”
“악취미네.”
“원래 정점에 선 사람은 한 번쯤 자기 세력을 과시해야 할 필요가 있어, 자기. 그렇지 않으면 자꾸 쓸데없는 도전자들이 생겨나거든.”
“누나한테 도전하는 미친놈은 린델에 없을 거야.”
“당연히 린델 애들을 의식하고 벌인 일은 아니야. 일본 애들 있는 실리아는 그렇다고 쳐도 대만 애들 있는 다완은 또 모르지. 보면 알겠지만 붉은용병에서도 제법 무리했어. 기왕 보여줄 거 제대로 보여주자는 식으로 단원들 휘장이랑 장비도 싹 다 새 걸로 교체했고 훈련소 장비도 최신식으로, 몇 달 전부터 중축 공사도 진행했으니 말 다했지, 뭐.”
“그게 나를 부른 거랑 이유가 있는 거야?”
“흐음….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지. 파란과의 동맹이 굳건하다는 걸 보여줄 수 있다는 건 좋은 거니까. 그래도 자기를 부른 이유는 따로 있어.”
“음….”
“예상은 가지?”
“내가 생각하는 이유랑 맞을지는 모르겠는데… 혹시 생산직들 때문에 그래?”
“맞아.”
“틀릴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이네.”
“사실 자기가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생산직에게는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았거든. 솔직히 이야기하면 거의 무관심했다고 하는 게 맞겠네.”
“응. 뭐 그렇지.”
“연금술사야 기껏해야 사제들이 없는 파티에서나 기용할 정도지. 사실 연금술사를 기용한다는 것도 말도 안 되고…. 포션만 사면 되는데 굳이 비전투직군인 연금술사를 파티원으로 들일 이유가 없잖아? 마법사도 없고 사제도 없는 파티에서나 울며 겨자 먹기로 들이는 게 연금술사야.”
“팩트폭력이 심하네.”
“자기 이야기 하는 건 아니야. 대장장이들도 마찬가지지, 뭐. 이미 신성제국에 유능한 대장장이들은 많아. 굳이 모험을 하면서까지 소재와 무기를 초보에게 맡기는 얼간이는 없고…. 그밖에도 시스템이 규정하고 있는 많은 비전투직군들과 생산직의 최후야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거라고 생각해. 길드에는 들어갈 수도 없었고 빈민촌에서 쪽잠자다 칼 맞고 뒤지기 십상이었어.”
“내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바로 맞췄어. 자기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그랬지. 길드의 지원과 자본을 등에 업은 생산직이 어떤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가에 대한 사례가 지금까지는 없었거든. 물론 타 길드에서도 생산직에 대한 투자가 없었던 건 아니야. 자기가 오기 전에도 각 길드마다 몇 차례 시도가 있었지만 모두 꽝이었다는 거지.”
“무슨 말인지 알겠어.”
“상황이 이렇다 보니까 도시에서도 생산직에 대한 지원이 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나봐.”
“그건 조금 의외네.”
“사실 자기 말고도 어디 조그만 동네에서 별빛 조각사인가 햇빛 조각사인가 하는 놈도 나타났었거든…. 그쪽은 그다지 효율이 좋은 것 같지는 않았지만 걔도 길드의 지원을 받은 생산직 중에 하나야. 본전을 뽑지는 못했지만 가능성은 봤다는 거지. 자기가 여기 있는 건 내 개인적인 욕심이기도 하지만 린델의 길드와 클랜 마스터들의 청원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해.”
“으음… 그렇게 된 거였구나?”
“무시해도 별 상관은 없을 것 같았지만 도시 생산직의 질을 올리는 건 나 역시 찬성이거든. 제국에서도 묘하게 원하는 눈치니 말 다했지, 뭐.”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확실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게 된 거였어.’
말인즉슨 나로 인해 생산직에 대한 기대치가 올라갔다는 거다.
실제로 내가 만든 포션 중에서도 상급품은 사제의 치유와 비슷한 효율을 낼 정도로 효과가 좋다.
소모품이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에 고가의 포션이 많이 사용되지는 않지만 사냥을 나가는 파티라면 비상용으로 몇 개씩 들고 다닐 정도.
당연히 린델 내에서도 잠깐이지만 생산직 붐이 일어났었고 아직도 몇몇 길드와 클랜에서는 생산직에 대한 투자를 멈추지 않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수많은 길드와 클랜들이 붉은용병에게 어떤 청원을 했는지는 뻔할 뻔자.
이번 훈련소의 교육에 생산직 과정을 넣어주면 어떻겠냐고 입을 열어온 것이 틀림없으리라.
몇몇 길드의 청원이야 단순히 개소리를 하고 무시할 수도 있을 테지만 린델의 왕으로 군림하고 있는 붉은용병이 수많은 백성의 탄원을 그저 모른 척하기에는 여러모로 신경 쓰이는 점이 많았을 터.
특히나 제국도 묘하게 그걸 바라고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이런 선택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는 거다.
‘성군 납시었네….’
이를 테면 이번을 기회로 권위와 자비를 동시에 보여준다는 것이 차희라의 생각. 이상적인 왕이라는 건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리라.
“붉은용병에 계속 청원하면 누나가 나를 불러올 거라는 걸 생각하고 있었다는 거네. 머리 좋은걸 걔네들도….”
“아마 파란에도 엄청나게 갔을 거야. 자기가 연구실에 틀어박혀 있을 때 즈음? 여기저기에서 괴롭히기도 하고 로비도 많이 받았을 걸. 우리 소중한 연금술사를 연구에만 집중할 수 있게 나름대로 배려해 준 거겠지.”
“괜히 고맙네.”
“애틋하네. 혹시 해서 물어보는 건데 둘이 사귀는 건 아니지?”
“뭔 소리야?”
“아냐. 그냥 도시 내에 묘한 소문이 돌아서… 이상한 책도 돌고….”
“헛소문이야.”
“그럼 다행이고 아무튼 간에 이렇게 됐다는 거야. 물론 걱정하지 말라고 큰소리 뻥뻥 쳐놓기는 했지만 자기가 싫다면 그다지 강제할 생각도 없고.”
“아니 굳이 싫은 건 아니야.”
“이유가 있어?”
“생산직의 질을 높이는 건 솔직히 찬성이야.”
“그건 의외네.”
“물론 시장을 독점하고 있는 내 입장에서는 안 하는 게 이득이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야. 솔직히 말하면 아직 제대로 된 시장이 형성되지도 않았거든. 이름난 판매자도 나 하나뿐이고 내 포션은 제법 고가로 분류되니까. 굳이 예를 들자면 쓰는 놈만 쓴다는 거지.”
“아아아….”
“어차피 가난한 파티나 클랜에서는 내 포션을 살 여력도 없어. 사제도 없이 사냥을 나가서 뒈지는 놈들은 어차피 내가 만든 상품을 이용할 수 없다는 거야. 그래서 만든 게 저가형 모델이기는 한데… 브랜드 이미지 문제도 있고 어차피 공장을 돌릴 거면 상등품을 돌리는 게 이득이라.”
“음… 이해되네. 밑바닥에서 깔아주는 친구들이 있어야 시장이 더 활성화된다는 거지?”
“맞아. 원래 포션이라는 게 소모품처럼 인식이 돼서 이미지가 좋지는 않지만 한 번도 안 마셔본 놈은 있어도 한 번만 마셔본 놈은 없거든. 밑바닥 친구들이 사냥에서 돌아온 이후에 성과를 챙기고 점점 성장한다면 어떻게 될 것 같아? 계속 저가형 모델을 사용할 것 같아? 자기 목숨이 달린 일인데?”
“어차피 종착지는 메이드 바이 이기영이라, 이거야?”
“맞아. 명품 좋아하는 건 여기나 지구나 똑같기도 하고… 구매자들은 신뢰할 수 있는 기업을 원하니까. 잘난 척하는 건 아니지만 나는 연금술사로서 독보적이야. 단언컨대 내가 살아 있는 동안 경쟁자가 나타날 확률은 제로야. 뭐, 이런 이유도 있고 도시 차원의 복지 문제도 있고 내 이미지 문제도 있고 여러모로 나쁘지는 않아. 궁금한 건 나한테 지금 당장 뭔가 떨어지는 게 있느냐는 거지. 맨입으로 청원하지는 않았을 거 아니야.”
“물론 떨어지는 건 있어. 일단 자기 개인에게 돌아갈 보상금. 길드와 클랜에서 교육비를 명목으로 골드를 지급할 거야.”
“나이스!”
“좋아하네?”
“최근에 돈이 급한 일이 있었거든. 붉은용병에서는 뭐 없어?”
“너무 노골적인 거 아니야? 자기?”
“큼….”
섭섭하다는 듯 테이블을 두드리는 차희라가 눈에 보이기는 했지만 맨입으로 강의 뛰는 건 사절이다.
“물론 붉은용병에서도 사례금이 있을 거야. 개인적으로 챙겨줄 것도 몇 개 있기도 하고… 이건 자기가 일을 안 해도 줄 생각이었지만… 그리고.”
“그리고?”
“우선교섭권도 파란에게 일부 양도할 생각.”
“몇 장?”
“그전에 이번 공략조가 몇 명인지에 대해 물어봐야 되는 거 아니야?”
“아, 맞네.”
“이번 튜토리얼을 던전을 공략한 친구들은 총 열네 명. 우리가 줄 수 있는 우선교섭권은 다섯 장. 이 정도면 엄청나게 무리한 거야.”
“열네 명이나 돼?”
“원래 이정도가 보통이야. 자기네 파티가 특별했던 거지. 그래서… 할 거야 말 거야?”
“누나 조금 무리한 거 아니지?”
“무리한 거라고 말했잖아. 사과의 의미도 있으니까 신경 쓰지 마.”
“뭐에 대한 사과이려나….”
“전부 다 알면서 이죽거리지 마. 그런 표정 지으면서 쳐다보지도 말고. 빨리 대답이나 해. 할 거야? 말 거야?”
싱글 생글 웃으며 묘한 표정을 보내자 빠르게 대답을 재촉하는 차희라의 얼굴이 보였다.
제법 귀여운 것 같은 느낌. 당연하지만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