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4
회귀자 사용설명서 204화
영웅은 만들어진다 (2)
경험치는 이미 옛날 옛적에 채워졌다.
박덕구의 몸에서 터져 나오는 황금색의 빛은 너무나도 눈이 부셔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을 정도.
드래곤 알케미스트로 전직했을 때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뿌듯함이 배가 됐다.
‘해냈어!! 슈바!!!’
이 모든 기획과 무대가 의미 없는 일이 되는 건 아닌지 내심 걱정한 것은 당연지사.
그러나 이번 일의 마무리는 상상했던 것보다 더 훌륭하다.
사실 카스가노 유노와 함께 검은색 세계를 보지 못했다면 이번 기획은 애초에 떠올리지도 못했을 것이다.
당시 수많은 마법과 화살의 폭풍 속에서 박덕구가 나를 감싸 안았을 때, 검은색 세계의 이기영이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주목한 것.
물론 녀석이 튼튼한 몸을 가지고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지금만 봐도 내구 능력치와 체력 능력치는 훌륭한 수준이다.
그렇지만 그게 박덕구가 이쪽을 살릴 수 있다는 말이 되지는 않는다.
녀석이 아무리 튼튼하다고 한들 육체는 부셔지게 마련, 도시를 쓸어버렸던 수많은 마법의 틈에서 녀석이 나를 살릴 수 있었던 것은 단순한 기적과는 거리가 멀다.
아마 그 당시에도 지금과 같은 일이 벌어졌을지도 모른다.
내 가설이 맞다면 애초에 녀석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거다.
박연주의 검을 방패로 받아내는 와중에도 빛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당연.
눈을 아프게 했던 빛이 사그라진 후에야 박덕구의 상태창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
‘좋아!’
[플레이어 박덕구의 상태창과 재능수치를 확인합니다.]
[이름 - 박덕구]
[칭호 - 없습니다. 조금 더 노력하셔야겠네요.]
[나이 - 23]
[성향 - 단순무식한 열정가]
[직업 - 신념의 방패 - 전설 등급]
[직업효과 - 기초 검술 지식 습득]
[직업효과 - 기초 방패술 지식 습득]
[직업효과 - 중급 방패술 지식 습득]
[직업효과 - 고급 방패술 지식 습득]
[직업효과 - 고급 마력 운용 지식 습득]
[능력치]
[근력 - 70/성장한계치 영웅 이상]
[민첩 - 35/성장한계치 희귀 이하]
[체력 - 81/성장한계치 영웅 이상]
[지력 - 29/성장한계치 희귀 이하]
[내구 - 90/성장한계치 영웅 이상]
[행운 - 29/성장한계치 일반 이하]
[마력 - 28/성장한계치 일반 이상]
[총평 - 내구 스탯이 90에 도달했습니다. 마력 능력치와 민첩 능력치는 여전히 별다른 성장이 없었지만 높은 체력 수치와 내구 수치가 전설 등급의 직업 ‘신념의 방패’와 궁합이 좋아 상위로 올라갈 수 있을 정도의 성장을 이루어냈습니다. 내구와 체력의 성장 한계치가 눈에 밟히기는 하지만, 이하가 아닌 이상 판정을 받은 만큼 본인의 노력 여부에 따라 조금 더 올라갈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군요. 물론 죽을 만큼 고생하겠지만요. 응원과 격려를 아끼지 말아주세요.]
‘대박…. 내구 스탯 구십?’
어처구니가 없어 헛기침이 나올 정도였다.
총평의 말대로 중요 스탯이 90을 돌파했다는 건 상위로 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것과 다름없다.
물론 상대적으로 다른 능력치들은 형편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지만 그래도 전설 등급의 직업과 내구 스탯 90을 찍었다는 건 분명히 의미가 있다.
게다가….
‘고급 마력 운용 지식?’
눈앞에 있는 박연주, 차희라, 고인이 되어버린 이토 소우타, 빅터하르트 영감이나 김현성 같은 이들만 가지고 있는 고급 마력 운용 지식을 습득한 것 또한 놀라울 정도로 당황스럽다.
덕구의 마력 능력치는 겨우 28.
마력 운용 지식을 습득하는 데 마력의 크기나 양은 상관이 없는 모양이다.
지금 당장은 사용하기 어려운 지식이겠지만 녀석이 계단 하나를 오르는 데 많이 도움이 될 것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물론 그 어떤 것보다 제일 황당했던 것은 내구 능력치의 폭발적인 증가다.
가장 최근에 확인했을 때만 해도 80을 넘지 못했던 내구 능력치가 어째서 90이 되었는지는 뻔할 뻔자.
아마 전직 보너스를 받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신념의 방패 - 전설 등급]
[고대부터 신념의 방패라는 것은 직업의 이름이 아니라 위대한 전사들을 기리기 위해 만든 칭호였습니다. 타인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던진 전사들만이 신념의 방패라는 칭호를 얻었고 그들은 전사의 무덤에 안치되어 수세기의 세월 동안 고대 전사들의 존경을 받아 왔습니다. 이 위대한 영웅들이 내린 의지가 계승되어 신념의 방패의 칭호를 플레이어 박덕구의 직업으로 판정합니다. 내구 스탯이 15 올라갑니다. 내구 능력치를 제외한 모든 스탯이 1 하락합니다. 영웅들의 축복을 받습니다. 고급 방패술을 습득합니다. 고급 마력 운용 지식을 습득합니다. 신념의 방패의 특수 직업효과로 전설 등급의 특성, 숭고한 희생을 개화합니다.]
[플레이어 박덕구의 특성을 확인합니다.]
[숭고한 희생 - 전설 등급]
[일정시간 동안 선택한 대상에게 끼치는 외부의 충격과 피해를 대신 받아냅니다.]
‘사기!!’
개화할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너무 해버린 상황.
15나 올라가 버린 내구 능력치 그리고 외부의 충격과 피해를 대신 받아낸다는 특성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녀석의 발목을 붙잡았던 낮은 민첩 수치가 ‘숭고한 희생’으로 해결된 것과 다름이 없다.
손이 닿지 않는 곳의 피해를 직접 받아내면 되는 거니까.
이게 녀석이 원한 성장 방향과 같을지는 모르겠지만 녀석은 지금 전 대륙에서 가장 훌륭한 고기방패로써의 전직을 마쳤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
철컹! 하는 소리와 함께 내 눈앞에 투병한 방패가 생겨나기 시작. 아마 이게 박덕구의 특성 숭고한 희생이리라.
‘맞으면 안 되겠는데.’
위엄 넘치는 녀석의 모습을 응원하면서도 걱정되는 게 있기는 하다.
검정색 검이 대미지를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박덕구가 알기라도 한다면 일이 매우 심각해진다.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렸기 때문에 이게 몰카라는 것은 무조건 숨겨야 한다는 거다.
단순히 특성만 생긴 것이 아닌지 박연주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어서 나에게는 상처가 생기지는 않았지만 검정색 검이 내게 박히는 순간 이 몰래 카메라는 끝난다.
‘그건 안 돼.’
아무리 녀석을 위한 일이었다지만 박덕구가 느낄 배신감이 어느 정도일지 상상도 하지 못하는 부분.
시선을 마주친 박연주에게 계속해서 이제 그만 사라지라고 고개를 까닥거릴 수밖에 없었다.
내 고갯짓에 박연주도 고개를 슬그머니 돌린다.
그러나 이제 그만 돌아갈 거라고 생각했던 내 생각과는 다르게 불행하게도 그녀가 고개를 돌린 곳에 자리한 것은 정신을 잃고 있는 김예리.
‘슈바….’
내 고갯짓을 김예리를 공격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인 모양인지 그녀의 검정색 검들이 김예리를 향해 쏘아져 나가기 시작했다.
박덕구의 몸이 황금색으로 빛나는 걸 보고서도 이제 다 끝난 거라는 걸 인지하지 못한 모양.
김현성과의 만남을 조건으로 걸었기 때문인지 열정이 남다르다.
‘이런 미친!’
“안 돼!!!”
순식간에 김예리에게 쏘아져 나가는 검정색 검들.
박덕구 역시 깜짝 놀라며 손을 뻗어봤지만 닿지 않는다.
결국에는 특성을 다시 한번 발동시키는 게 맞다고 생각했는지 누워 있는 김예리를 투명한 방패가 가로막는 것이 보였다.
‘제기랄!’
저 검이 방패에 닿는 순간, 이 모든 게 연기라는 게 들통 날지도 모른다. 재빨리 연금술을 펼치려고 했을 때 시야에 들어온 것은 김예리 대신 검을 받아내고 있는 안기모.
‘아직도 안 죽었었구나! 저 새끼!’
“나이스 안기모….”
설정상 약간의 숨이 붙어 있었던 모양.
나도 모르게 중얼거릴 정도였다.
“어으으으윽….”
“기… 기모 형씨!”
“아직 어린 아이를… 죽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굳이 이런 설정에 저런 대사를 집어넣지 않아도 충분히 감동적이고 극적이다.
열정이 넘치는 것은 박연주뿐만이 아니다. 안기모 저 자식도 이번 연기에 지나치게 몰입해 있다.
‘이제 그만.’
너무 과한 건 안 하느니만 못하다.
박덕구에게 감동과 처절함을 선물해 주고 싶은 두 배우의 열정은 이해하지만 슬슬 위험 수치를 넘어가고 있는 모습에는 침을 삼켜 넘길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정말로 끝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박덕구가 안기모에게 정신이 팔린 사이에 박연주에게는 사정없이 오케이 사인을 보내기 시작.
드디어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박덕구는 눈에 띄게 강해졌다.
지금까지의 노력을 보상이라도 받은 것처럼 그동안 밀린 능력치를 모두 받은 것은 물론 전설 등급의 특성과 직업 역시 얻었다.
그렇지만 박연주를 이길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모든 공격을 막아내고 있는 걸로 봐서는 어떻게 비벼지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녀석의 역할은 저런 대인전이 아니라 후위를 보호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박연주는 진심이 아니었으니까.’
어설프게 박연주가 당하는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는 이런 결말을 맞이하는 게 좋다는 거다.
그녀도 괜찮은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는지 슬그머니 몸을 뒤로 빼기 시작.
물론 그녀가 몸을 뒤로 빼는 데에는 그럴 듯한 이유가 있어야 하는 게 당연.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검은백조.’
우리를 구조하기 위한 구조대가 찾아온 것이다.
‘놓치지 않습니다.’
‘레인저들은 곧바로 추적을 시작 합니다.’
‘나머지는 부상자들을 신속히 옮겨주세요.’
따위의 목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고 검은백조가 자랑하는 정예 레인저들이 자신들의 길드 마스터를 따라 사라졌다.
사제들이 순식간에 달라붙는 것이 시야에 비치는 것은 물론 이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는 검은백조 길드원들이 보인다.
가슴에 검이 꽂힌 채 기절한 척하고 있는 정하얀이나 김예리 대신 검을 받아낸 안기모.
정말로 기절해 있는 것 같은 김예리에게도 두세 명의 사제들이 붙기 시작.
갑작스러운 지원군의 등장에 박덕구는 잠깐 멍하니 사태를 파악하고 있었지만 녀석이 제정신을 차리기 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당황하고 있는 녀석에게 검은백조의 정예길드원이 입을 여는 것이 보였으니까.
“파란의 박덕구 씨? 사고 경위에 대해서 물어볼 게 있습니다.”
“뭐… 뭐?”
“이제 안심하셔도 됩니다.”
“어, 어떻게? 아니 이게 뭐요?”
“구조 신호를 보고 왔습니다.”
“아… 아… 구조 신호…. 형님은? 형님이랑 누님은 무사한 거요? 예리는?”
“일단은 저희 측의 사제들이 치료 작업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잠, 잠깐 얼굴 좀….”
“한시가 위급한 상황입니다.”
“같, 같이 움직일 거요. 같이! 이것 좀 놔 보쇼!”
내 몸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마차로 옮겨진다. 제법 넓은 마차인지 김예리와 안기모, 김예리도 차례차례 마차로 들어오기 시작.
마치 구급차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마차를 보니 검은백조가 내 생각보다 괜찮은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슬그머니 왼쪽 눈을 뜨니 덕구 녀석이 우리가 마차 안으로 차례차례 들어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물론.
콧물과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말이다.
“끄어어어어엉… 형니임….”
참아왔던 울음이 터진 모양인지 나를 비롯한 연기자들이 마차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걸 보고 허공에 손을 뻗고 있다.
“끄어어어어어엉…. 꺼으어어억… 누님 죽으면 안 됩니다. 죽으면… 아니, 나도 같이 갈 거요! 나도 같이!”
이제야 모든 일이 끝났다는 게 실감이 나는 모양.
지원군의 등장에 여단의 흉수는 도망쳤고 죽어가는 동료들이 다시 한번 눈에 보이는 것이다.
“이거 놓으라니까! 형님! 형님! 말 좀 해보쇼. 말 좀! 끄어어엉….”
“이러시면 안 됩니다, 박덕구 씨. 환자들은 지금 한시가 급한 상황입니다. 최대한 안정을 취해야 하는 상황이에요!”
“끄으으으윽어어엉… 우리 형님 좀 살려주쇼….”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제발 살려주쇼. 제발. 끄으으윽… 예리야! 안기모 씨!”
“마차에 가까이 다가오지 마세요! 안정을 취해야 된단 말입니다!”
“끄어어엉으으윽… 제발 살려주셔야 합니다. 선생님, 제발….”
“네. 믿어주세요.”
울음소리가 얼마나 서럽게 들리는지 괜스레 나도 눈시울이 붉어질 지경.
이미 밖에서는 박덕구를 진정시키기 위한 의료 전문가들과 사제들의 목소리가 섞여서 들려오고 있었다. 그럼에도 진정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이 문제.
“끄으으으윽….”
계속해서 들려오는 울음소리가 너무 거슬린다.
“흉수가 다시 마차를 찾을 수도 있습니다. 덕구 씨는 마차의 안전에 신경 써주세요.”
결국에는 저 말이 나온 뒤에야 잠잠해지는 걸 보니 마지막까지 책임감 하나는 강하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밖에서는 계속해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고 마차의 문이 닫히자 누워 있던 네 명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기 시작.
뭔가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이 얼굴에 들어와 앉은 것이 느껴졌다.
‘내가 아주 잘 알고 있는 표정이지.’
평소 자주 느끼는 감정을 저들도 느끼고 있다고 생각하니 뭔가 감회가 새롭다.
안기모의 얼굴에는 뭔가 완벽하게 해냈다는 뿌듯함이 공존하고 있었지만 그뿐이다.
저 꼴을 보고 민망하지 않을 리가 없다. 녀석 역시 일말의 양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중에도 가장 심각한 것은 김예리.
‘깨어 있었구나.’
무척 충격 받은 듯한 김예리의 얼굴에는 지독한 죄책감이 서려 있었다.
네 명의 죄인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로의 표정을 살피고 있었을 때, 김예리의 작은 목소리가 마차 안에 울려 퍼졌다.
“다음부터는. 안 할래. 너무… 쓰레기 같아.”
“수고했다…. 그래도… 성공이야.”
너무나도 숙연한 분위기 속에서 수고했다는 말을 내뱉는 것도 제법 힘들다.
“이기영 아저씨.”
“응.”
“우리 잘한 거 맞지?”
살짝 고개를 끄덕였지만 긍정적인 목소리가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는 않았다.
아직도 밖에서 꺼억꺼억거리는 소리가 조금씩 들려왔기 때문이다.
순진한 김예리는 아직도 죄책감을 이겨내지 못한 모양.
그녀를 위해 천천히 입을 열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김예리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원래 살다보면 어쩔 수 없는 일도 있는 거야.”
“으응… 알겠어….”
아직도 얼굴에는 수심이 드리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