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
회귀자 사용설명서 202화
이기영의 몰래카메라 (3)
싸이코패스 살인마 정진호.
어떻게 보면 녀석은 2회 차 최대의 피해자였다. 원래대로 미래가 흘러갔더라면 정진호는 지금쯤 머더러 클랜 살인여단을 창설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율리에나의 진짜 주인이 됐을 수도 있고….’
물론 정진호가 율리에나를 사용했을 거라는 건 둘의 궁합이 잘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을 고려한 뇌내망상이지만 녀석이 살인여단을 창설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어째서 내가 그 사실을 아는지에 대한 대답은 뻔할 뻔자.
‘봤으니까.’
실제로 본 것은 아니다. 1회 차의 이기영과 박덕구의 대화에서 내가 당시 여단에 한 발 걸치고 있었다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던 것뿐이다.
박덕구의 만류 때문에 여단에는 가입하지 않았던 것 같았지만 나 개인적으로는 정진호와 친분을 만들어 놨었다는 거다.
녀석이 만들 머더러 클랜 살인여단은 앞으로 1년이나 2년 뒤에 만들어질 비공식 클랜.
자세한 정보는 가지고 있지 않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알고 있다.
여단은 정진호를 주축으로 만들어진 클랜이고, 녀석이 없는 2회 차 에서는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
가상의 머더러 클랜의 이름으로 살인여단의 이름을 빌려온 것뿐이지만 왠지 모르게 어감이 착착 감기는 듯한 느낌은 분명히 있었다.
‘녀석이 없어도 멤버가 어디 가는 건 아니니 창설될 확률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아마 창설된다고 하더라도 이번 회 차에서는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 할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잠깐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와중에도 안기모 녀석은 얼굴을 굳힌 채로 이야기를 이어나가기 시작.
표정에서 느껴지는 긴장감 때문인지 박덕구 역시 귀를 기울인 채로 녀석을 응시하고 있었다.
“머더러 클랜?”
“그렇습니다.”
“린델 근처에서도 그런 놈들이 설치고 있다는 말이요?”
“네. 도시 차원에서 주기적으로 순찰을 돌고 있기는 하지만 머더러 클랜 자체의 수법이 워낙 은밀하고 폐쇄적인 터라… 저희 길드에서도 아직까지 꼬리를 잡지 못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그때 이후로 시간이 조금 지나기는 했지만 백번 조심해도 모자람은 없으니까요.”
“거, 혹시 최근에 모습을 드러내기라도 한 거요?”
“만약에 그렇다면 여기까지 던전행을 나오지는 않았겠죠. 하하하.”
“그건 다행이구만….”
‘밀고 당기는 게 수준급인데.’
조금 고전적이지만 공포 영화의 흔한 클리셰다. 시나리오에는 없었지만 본인의 애드립이 가미된 모양.
긴장감을 한 것 끌어올린 이후 이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수습하려는 모양새가 재미있다.
보통 저러다가 주인공 일행이 봉변을 당한다는 걸 생각해 보면 첫 운을 무척이나 잘 띄운 셈이 된다.
일단 떡밥을 뿌려야 물고기가 잡히는 거니까.
잠깐 시선을 돌린 사이 정하얀과 김예리가 ‘아아. 그렇군요?’라든가 ‘무, 무섭네요.’ 같은 말도 안 되는 연기를 펼치고 있었기 때문에 이쪽도 급하게 말을 이을 수밖에 없었다.
“너무 신경 쓰지 마라, 덕구야. 이미 오래된 일이기도 하고… 혹시 모르니까 조심하자는 의도로 말씀하신 거겠지. 그렇지 않습니까, 기모 씨?”
“네. 하핫. 뭐 그렇습니다. 이미 오래전 이야기죠. 물론 마음에 걸리는 게 없는 건 아닙니다만….”
파티원의 안전을 책임져야 하는 박덕구가 황급하게 말을 이었다.
“마음에 걸리는 게 뭐요?”
‘미끼를 제대로 물어버렸네.’
의심할 여지가 없이 제대로 물어버렸다.
안기모 역시 박덕구가 미끼를 물었다는 걸 인지하고 있는지 이쪽에 신호를 보내기 시작.
저런 눈빛을 보내지 않아도 나 역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는 잘 알고 있다.
“아. 별 건 아닙니다. 정말로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덕구 씨.”
“정말로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요, 기모 형씨.”
“최근에 실종 사건이 일어나는 빈도가 조금 늘어나서 말입니다.”
“실종 사건 말이요?”
“네. 물론 주목할 만한 수치는 아닙니다. 본래 숲에서의 실종 사건은 매년 있었던 인사치례 같은 일이니까요.”
“그런 거요?”
“예. 저번 분기에 들어온 신입들이 슬슬 자신감이 붙을 시기니까요. 덕구 씨와 기영 씨의 동기 분들 말입니다. 보통 처음 들어온 1년에 능력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니….”
“아.”
“무리한 원정은 도시에서도 지양하고 있기는 하지만 보통 말을 듣지는 않습니다. 대륙에 들어온 지 1년도 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제국 8좌에 선택된 두 분들 덕분인지 저번 분기의 신입들은 유난히 자신감이 넘쳐서 말입니다. 하하하. 물론 기영 씨를 탓하는 건 아닙니다. 일어난 사고들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선택이니까요.”
“이유가 그것뿐인 게 확실한 거요?”
“정말로 신경 쓰실 일은 아닙니다. 물론 단순히 신입들이 기운이 넘친다고 보기에는 빈도가 조금 잦긴 했습니다만 이미 그 건에 대해서는 붉은용병에서 수색을 끝마쳤으니까요. 이미 몇 차례나 수색을 돌아봤지만 머더러 클랜이 머물렀던 흔적 따위는 없었습니다.”
“붉은용병이라면 믿을 만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미심쩍어 보이는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생각 없이 사는 녀석인 줄 알았는데 미간을 구기고 있는 걸 보니 자신 나름대로 머릿속에 들어가 있는 정보를 정리하고 있는 모양이다.
김현성이 없어서 그런건지, 아니면 생각보다 감이 좋아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미끼를 제법 거칠게 물었다.
이쪽의 안전을 책임질 사람이 자신밖에 없다는 게 여간 신경 쓰이는 모양이다.
물론 김예리라는 전위가 있기는 하지만 그녀는 어디까지나 암살자 라인이다.
전투에 들어갔을 때 그녀가 후위를 신경 쓴다는 것 자체가 일이 꼬였다는 걸 의미한다는 거다.
단순히 놀러 온 것 치고는 표정이 너무 심각해 웃음이 다 나올 정도였다.
“그럼 슬슬 일어나자.”
“형님.”
“응?”
“아, 아무것도 아니요.”
되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이야기하려고 한 것이 틀림없으리라.
이 자리가 화해의 자리가 아니었다면 어쩌면 그 말을 직접 내뱉었을지도 모른다. 자꾸만 불길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저런 모습은 좋네.’
개인적으로는 무척 마음에 드는 모습. 항상 걱정하고 최악을 떠올리는 건 정말 마음에 든다.
물론 행동하지 않았다는 것에서 마이너스 점수를 주기는 했지만 일단은 합격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계속해서 길을 걷는 와중에도 홀로 심각해지고 있는 녀석 덕분에 파티원 전체가 그 영향을 받고 있는 듯한 느낌.
개인적으로 경계 수준을 높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던전에 거의 다 왔을 즈음에는 다시 한번 이것저것 이쪽을 향해 질문을 던지기 시작.
이 던전의 출처에 대해서였다.
“형님. 이 던전은 어디서….”
“글쎄. 본래 출처는 확인 안 해서 이 길드, 저 길드 건너서 매입한 거야. 마지막으로 가지고 있었던 건 검은백조였고.”
“그렇구만.”
“왜. 뭔가 문제라도 생길 것 같아서?”
“아니, 그런 건 아니요. 뭐 혹시 검은백조 길드는 그… 여단인가 뭐시긴가 연관이 있는 거요?”
“조금씩 연관이 되어 있겠지, 뭐. 당시 녀석들이 활동하던 시기에도 검은백조는 여전히 린델을 대표하는 거대 길드 중에 하나였으니까. 혹시 아직도 여단에 대해서 신경 쓰는 거야?”
“딱히 그런 건 아니요. 뭔가 조금 불길해서….”
“인상 좀 풀어도 된다. 나도 충분히 조심하고 매입한 거니까. 벌써 몇 년 지난 일이고 여단에서 굳이 이 시기에 린델을 노릴 이유는 없어. 물론 이유가 있어서 행동할 놈들은 아니지만….”
“형님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만… 왠지 모르게 자꾸…. 거, 나는 뭐 조금 그렇지만 형님은 이제 도시 내에서 중요한 사람 아니요.”
“응?”
“제국을 대표하는 8명 중에 한 명이라는 건 상징적인 의미도 있으니까. 그냥 왠지 모르게 사고가 터질까 봐 걱정이 된다 이 말이요. 끄응. 생각 안하려고 해도 이상하게 자꾸만 신경 쓰인다니까.”
녀석의 예감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말을 잘하지 못해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뭘 불안해하고 있는지도 이해가 간다.
아마 제국 8좌라는 내 위치와 일이 벌어진 타이밍이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리라.
확실히 시기상 안전하다고 하기에는 어렵다.
신입들을 맞을 준비로 대형 길드와 중견 길드들의 경계가 소홀해지는 타이밍이었으니까.
만약 어떤 집단이 불특정 다수를 노리거나 나를 노린다고 가정한다면 일을 터뜨리기에 꽤나 좋은 환경이 마련되었다는 거다.
파란의 이기영이 던전을 매입한다는 소문이 린델 내에 은은히 돌았고 도시 내에 들어가 있던 여단의 끄나풀이 그 정보를 습득.
신성 제국의 명예주교이며 제국 8좌의 죽음을 여단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
물론 박덕구의 입장에서는 단순한 망상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애초에 우리가 던진 조각 하나는 여단에 대한 정보뿐이었고 아무 것도 없는 상황에서 퍼즐을 맞춰 나가기에는 다른 정보가 너무나도 부족했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녀석이 이쪽에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완성된 퍼즐을 머릿속으로 대충이나마 그리고 있으니 계속해서 다른 조각을 찾으려고 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녀석이 찾고 있는 조각이 내가 그린 그림과 맞는지 맞지 않는지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지만 솔직히 박수라도 쳐주고 싶었다.
‘이 자식, 성장했구나.’
아무 생각 없이 쫄레쫄레 이쪽을 따라다녔던 예전의 모습과는 확연히 다르다.
박덕구는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성장하고 있다.
별 것 아닌 계기였지만 그걸 확신할 수 있었다. 아무튼 간에 녀석이 느끼고 있는 불안감은 계속해서 증폭되기 시작.
중간 중간에 공포 영화의 예고편 같은 느낌으로 계속해서 떡밥을 뿌리는 안기모의 역할이 결정적이었으리라.
정하얀과 김예리가 굳이 입을 열지 않은 게 확실히 도움이 됐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박덕구의 의심이 많아졌기 때문에 나는 계속해서 불안해하는 박덕구를 달랬고 정하얀과 김예리도 괜찮을 거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안기모는 여단에 대해 괜히 이야기를 꺼냈다면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공포 영화의 주인공 무리처럼 범의 아가리 속으로 머리를 들이미는 완벽한 그림이 그려졌다.
보통 이런 종류의 영화에서 사고가 언제 처음 일어나는지는 뻔할 뻔자.
‘안전할 거다.’라는 의식이 저도 모르게 머릿속에 자리 잡혔을 때 시작된다.
확실히 박덕구 역시 알 수 없는 불안감을 계속해서 뒤로 곱씹고 있었을 타이밍이 최고의 타이밍이라는 거다.
‘이제 슬슬 나올 때가 됐는데.’
위치상으로도 시기상으로도 지금 타이밍이 딱이다.
기습으로 시작해도 좋고 길을 잃은 척 다가오는 모험가의 행색도 괜찮을 것 같은 느낌.
이 부분은 이지혜가 온전히 기획한 부분이기 때문에 나로서도 궁금함이 앞선다.
던전에 거의 당도해 마지막 정비를 하며 이제 막 진입할 준비를 하고 있었을 때, 시야에 비치는 것은 차가운 인상을 하고 있는 여자 한 명.
‘저건가?’
아마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누가 봐도 이상한 광경이다.
누가 봐도 그녀의 모습은 길을 막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거… 누구… 요? 혹시 여기 혼자 온 거요?”
박덕구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을 때도 대답은 들려오지 않는다.
불안해하는 박덕구 녀석과는 반대로 이쪽은 조금 김이 빠진다.
‘한 명이 뭐야?’
확실하게 준비해 놓을 거라며 걱정하지 말라고 호언장담을 하던 이지혜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검은백조의 정예라도 보낸 건 아닌지 기대한 것과는 다르게 보내온 것은 딸랑 한 명.
혹시 몰라 주변에 마력을 보내봤지만 이지혜가 준비한 건 저 여자 하나가 맞다.
물론 연기이기 때문에 누가 오든 별로 상관은 없지만 그래도 긴박함이 조금 부족한 느낌은 있다.
‘쯧.’
폭발적인 살기가 갑작스럽게 장내를 뒤덮은 것은 바로 그때였다.
‘어?’
손과 발이 덜덜 떨려오고 나도 모르게 자꾸만 뒷걸음질을 치게 된다.
이전에 차희라에게도 한 번 맞아본 적이 있는 것 같은 감각.
‘어….’
폭발적인 마력이 장내를 휘감는 순간 이지혜가 누구를 보내줬는지 깨닫게 된 것은 당연지사.
차희라와 동수로 평가받고 있는 린델 내의 또 다른 강자.
제국 8좌의 일원.
김현성에게 목을 매고 있다는 검은백조의 길드 마스터.
‘박연주?’
내가 미처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박덕구의 커다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도망쳐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