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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190화 (189/1,590)

# 1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90화

미련한 놈 (4)

카스가노 유노의 닫혀 있던 눈꺼풀이 열려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눈동자가 보여야 할 곳에 자리한 곳은 검은색 어둠.

공포 영화에서나 보던 장면에 등 뒤로 소름이 돋아날 수밖에 없었다.

‘여기는 쳐다보지 마.’

눈을 뜰 거라면 이쪽을 쳐다보지 말라고 말해 주고 싶다.

그렇지만 카스가노 유노에게는 이쪽의 표정이 보이지 않는 모양.

나와 전혀 다른 걸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에 그녀가 지금 검은색 세계를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 생각해 볼 수밖에 없었다.

그야 이런 생각을 하는 게 당연할 것이다.

갑작스레 입술을 꽉 다문 채 떨고 있는 그녀의 얼굴은 이전과 너무 달랐다.

카스가노 유노가 볼 수 있는 것이 제한적이고 무작위적이라는 걸 생각했을 때.

만약 그녀가 보고 있는 것이 내가 원하는 것이 맞다면 기분이 좋아질 수밖에 없는 상황.

‘나쁘지 않네.’

일단 그녀가 박덕구를 알고 있다는 시점에서 어느 정도 이쪽의 예상이 들어맞았다고 할 수 있으리라.

카스가노 유노와 만나기 전의 1회 차의 내가 어떤 식으로 살았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내 성향을 생각해 보면 1회 차에서도 아마 비슷한 양상으로 흘러갔을 확률이 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처음 소환됐을 당시에 박덕구에게 내가 달라붙어 있었다는 것을 예상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2회 차에서도 한 번 일어난 일이기도 했고 그때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 중에서는 그나마 박덕구가 의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지금은 별 볼일 없지만 녀석의 초기 스탯은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는 걸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이야기다.

‘현성이도 회귀자가 아니었을 테니 접촉하지 않았을 확률이 더 컸겠고….’

그때 당시에도 잠재능력이 높았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김현성과는 지금처럼 딱 달라붙어 있지는 않았을 거라는 거다.

비빌 구석이 없었다면 내 입장에서는 그나마 동아줄인 박덕구를 꽉 잡고 있었다는 게 해볼 만한 추측.

여러 가지 사고를 겪었겠지만 카스가노 유노를 만나기 전까지는 박덕구와 함께 행동했다는 건 쉽게 유추할 수 있다.

물론 그 이후에도 만났었는지, 중간에 떨어진 것은 아닌지, 내가 녀석의 통수를 치지는 않았는지 등.

여러 가지 걱정되는 변수가 있기야 하지만….

‘최소한 박덕구가 날 먼저 버리지는 않았을 거야.’

이것 하나만은 부정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카스가노 유노가 덜컥 내 손을 잡아왔던 것은 바로 그 때.

‘깜짝야.’

나도 모르게 그녀의 검은색 눈을 바라봤을 때, 뭔가가 비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응?’

[외부의 개입으로 인해 제한적인 정보를 열람합니다. 전설 등급의 특성, 마음의 눈의 발동을 확인합니다.]

‘어어어?’

[플레이어 카스가노 유노의 특성, 본질과 과거와 미래를 꿰뚫어 보는 눈이 저항하지 않습니다.]

“뭐….”

이쪽이 뭔가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시야로 쏟아진 것은 카스가노 유노가 항상 내게 말했던 검은색 세계의 모습.

어째서 카스가노 유노가 이곳을 검은색 세계라고 부르는지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정확히 이 상황을 뭐라고 표현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그녀가 보고 있는 것을 내가 훔쳐보고 있다는 게 옳은 표현이리라.

어째서 이런 게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그녀의 기억은 이전에도 한 번 훔쳐본 적이 있다.

그 당시에는 내가 그녀의 목을 조르고 있는 장면이었지만 지금 내 눈에 보이고 있는 풍경에 그녀는 없다.

시야에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는 것은 박덕구와 나.

카스가노 유노가 이전에 말했던 대로 마치 편집되지 않은 영상이나 그림들이 뒤죽박죽 섞여서 보이는 것 같았다.

아무튼 간에 내 눈에 보이는 박덕구와 내 모습은 지금과는 조금 다른 모습.

무척 고급스러운 외투와 비싼 장비로 떡칠을 해놓은 지금과는 다르게 초라하기 그지없다.

빈민촌에서 막 올라온 3류 모험자 같은 느낌이라고 하는 것이 맞으리라.

누가 봐도 비참해 보이는 외관을 하고 있는 것은 물론 심지어 내 몸은 정상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거… 미안하오….’

‘뭐가.’

‘오늘 사냥 말이요. 내가 조금 더 잘했어야 했는데….’

‘신경 쓸 필요 없다, 덕구야. 어차피 피차 처음이었고 그래도 보수는 받았으니까.’

‘좋은 파티였는데… 이제부터 안 불러줄 것 같아서….’

‘너는 그런 거 신경 쓸 필요 없다니까. 나머지는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그래도….’

‘걔네들이 생각하는 것쯤이야 이쪽 손바닥 위에 있어. 아, 오늘은 먼저 들어가 봐.’

‘또 뭐 약속이라도 있는 거요?’

‘금마 클랜 부단장.’

‘또 그 여자랑 저녁 먹는 거요?’

‘너무 섭섭해하지 마라. 이것도 다 우리한테 도움되는 일이니까.’

‘그 여자… 별로 소문이 좋지 않던데….’

‘네가 신경 쓸 부분은 아니야. 너는 훈련이나 열심히 해. 알고 있지? 내가 하면….’

‘…….’

‘내가 하면 너는 더 잘할 수 있는 거야.’

‘…….’

풍경이 한 번 더 뒤바뀐다.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린델은 아닌 것 같은 느낌이었다.

최소한 내가 알기로는 저렇게 생긴 사냥터는 린델 내에 없다. 겉모습 또한 제법 모험자 티가 난다.

어느 정도 싸구려 복장을 벗어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박덕구는 전사 그리고 이쪽은 마법사 같은 복장을 하고 있는 것을 보니 검은색 세계의 나도 지휘관 앵무새에게 낚이지 않은 모양.

다음 전직으로 뭘 선택할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연금술사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김현성한테 라무스 터커의 연금학개론을 받지 못했을 테니 내가 연금술사를 선택할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다.

‘형님!’

‘돼지 새끼야! 집중 안 해? 별거 아닌 걸로 뒤 돌아보면 뒤진다고 했지?’

‘그렇지만 형님… 마력이.’

‘내 걱정하지 말고 네 걱정이나 해.’

‘알, 알겠소.’

움직임도 나쁘지만은 않다.

굳이 표현하자면 나는 창을 든 마법사였고 녀석은 어리숙한 전위였다.

주변 파티원들과의 관계도 그다지 나쁘지 않은 듯한 느낌. 클랜이라도 창설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어디에 소속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야무지게 창질을 하며 주문을 외우는 내 모습은 제법 창이 손에 익은 것 같았지만, 박덕구 같은 경우에는 단단해 보이는 외견과는 반대로 잔 실수가 무척이나 많은 느낌.

처음 공포의 정원에 들어갔을 때처럼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했다고 하는 게 맞으리라.

결국에는 전위에서 놓친 몬스터 한 마리가 후위의 사제를 덮쳤고 내가 사제의 앞을 막아서는 게 시야에 비친다.

소형 몬스터에게 제법 아프게 당했지만 창을 휘두르는 것으로 전투는 마무리.

화가 난 사제를 내가 달래고 있고 박덕구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미안하오….’

‘지금 미안하다는 소리가 나와요? 내구 능력치 믿고 따라와 줬더니 진짜….’

‘그… 그게….’

‘저기요. 말 좀 똑바로 하세요. 우물쭈물거리지 말고. 짜증 나네 진짜. 기영 씨 봐서 참는다는 거 알고 있어요? 지금이 벌써 몇 번째인 줄 알아요? 저럴 거면 왜 탱커로 전직 했나 몰라. 캐슬락 쪽에서 사람 구하는 것 같던데… 거기 가서 막일이나 뛰세요. 실리아 애들 때문에 물 안 좋아지고 나서 요즘은 개나 소나 사냥다닌다더니…. 내가 어이가 없어서 진짜….’

‘아… 이거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가희 씨. 평소에는 이렇지 않은데 오늘은 조금 컨디션이 안 좋은 것 같아서.’

‘기영 씨 봐서 참는 거예요. 기영씨 봐서….’

‘아마 시간이 조금 지나면 적응할 겁니다. 일단 지금은 아무 문제가 없으니 진행을… 제가 나중에 밥이라도 한번 사겠습니다.’

‘점심이요? 저녁이요?’

‘물론 저녁입니다.’

‘그럼… 조금만 더 참아 보도록 할게요. 아. 그리고 혹시 길드 제의는 생각 좀 해보셨어요?’

‘아직은 따로 할 일이 있어서… 하하…. 일이 끝나면 곧바로 확답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기다릴게요.’

다시 한번 배경이 변했다.

이번에는 사냥을 끝내고 돌아오는 도중인 것 같았다.

‘형님….’

‘그러니까 내가 뒤 돌아보지 말고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말하지 않았냐. 이 돼지야.’

‘그… 그게… 미안하오….’

‘미안해할 필요 없다. 어차피 사냥이 진짜 목적도 아니었고… 결과적으로는 제법 쏠쏠하게 챙기게 됐으니까.’

‘어디 가는 거요?’

‘네가 알 필요 없어.’

‘혹시 정진….’

‘입 닫아.’

‘미… 미안하오.’

‘너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말고 따라오면 돼. 나머지는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아직은 한 발 걸치고 있는 것뿐이고 네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니까. 이게 다 날아오르기 위한 과정이라는 거야.’

‘그래도… 적당한 길드에 들어가는 게 더….’

‘넌 그냥 닥치고 하나만 기억하면 돼. 내가 하면….’

‘나는 더 잘할 수 있다.’

‘바로 그거야. 그리고… 네가 한 말은 조금은 더 생각해 보마. 덕구야.’

‘거… 고맙소.’

그 외에도 여러 가지 것들이 보인다.

별로 쓸모 있는 장면은 아니지만 녀석과 술을 마시는 거라든지, 소리를 지르는 장면이라든지, 발로 녀석을 차는 모습이라든지.

여러 장면이 사진 같이 휙휙 지나가기 시작했다. 꽤나 중요한 장면처럼 보이는 것들도 있어 안타까울 정도였다.

‘잊지 마라, 덕구야.’

‘알고 있소.’

계속해서 눈에 보이는 것들을 보는 와중에 재미있었던 것은 지금보다 더 지난 시점의 미래에도 녀석의 성장치는 그다지 높지 않아보였다는 것.

설마설마 했지만 이 자식은 시간이 조금 흐른 뒤에도 크게 성장하진 않았다.

‘잊지 마라.’

‘알고 있소. 형님이 하면….’

‘그럼 됐어.’

녀석이 미래에 어떻게 성장하는지가 궁금했지만 시야에 비치는 것은 쓰잘 떼기 없는 기억들이다.

‘힘드냐?’

‘형, 형님은 어떻게 그렇게 냉정할 수 있는 거요.’

‘죽여야 사니까 냉정해질 수 있는 거야. 별거 아니라고 생각해. 여기는 원래 죽이고 죽이는 장소니까. 잊지 마. 내가 하면….’

‘형님이 하면… 나는 더 잘할 수 있다.’

‘바로 그거야.’

다시 한번 풍경이 뒤바뀌고 난 다음에 보인 것은 녀석이 날 들쳐 업고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장면이었다.

제법 고급스러워 보이는 옷을 입고 있는 나는 피를 흘리고 있었고 녀석 역시 괜찮은 갑옷을 입고 있다.

조금 많이 스킵이 된 것 같기는 했지만 나쁘지 않은 자리에 앉기는 한 모양.

린델은 아닌 것 같았지만 제법 성공한 것 같기는 했다. 피를 흘리지만 않았다면 조금 더 만족스러웠을 것이다.

‘형님 내 목소리 들리쇼?’

‘그래….’

‘거 죽으면….’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뒈질 생각 없으니까.’

‘미안하오, 형님. 미안합니다.’

‘뭐가 미안해.’

‘내가 한 말 때문에….’

‘됐다. 별로 네 말을 따른 건 아니었으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계산에 착오가 있었던 것뿐이야. 그 위선자새끼들을 조금이라도 믿은 내가 잘못한 거지. 덩치만 큰 돼지는 별 잘못 없다.’

‘그래도 나 때문에… 나 때문에… 형, 형님 생각대로… 했어야 했는데….’

‘그래, 돼지새끼야. 너 때문인 거 같으니까 빨리 튀기나 해. 이렇게 후회하는 거 보니까 다음번에는 조금 더 잘할 수 있겠네. 응?’

여러 가지 마법이 떨어지고 창과 화살이 날아다닌다.

나를 들고 정신없이 뛰고 있는 박덕구의 모습은 정말로 필사적으로 보였다.

저런 모습을 보이는 게 당연할 거라고 생각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정황상 박덕구가 나에게 어떤 제안을 했고 나는 그걸 받아들인 것 같았으니까.

결과적으로 일은 꼬인 것 같았지만… 모르긴 몰라도 녀석이 내 브레이크가 되어주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무튼 간에 이 추격전은 꽤나 오랜 시간 지속되고 있는 것 같다.

박덕구는 계속해서 몸으로 화살을 막으며 포위망을 벗어나려고 했고 한 손에 들린 검으로 자신의 길을 막는 녀석들의 머리를 부셔버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한계는 온다.

추격자들은 막을 수 있어도 하늘 위에서 떨어지는 수많은 마법과 화살 다발을 막을 수는 없었으니까.

‘버리고 가라는 말은 못 하겠다. 돼지야.’

‘형님이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소.’

‘그래도 이만 두고 가는 게 좋을 거다. 몸뚱이는 무식하게 튼튼하니까. 너는 살 수 있겠지. 뭐… 조금 무섭기야 하지만 별로 후회되는 인생은 아니었는데… 네가 복수만 해주면 신날 것 같은데….’

‘거 동정심 유발해서 버리지 못하게 하려는 수작 아니요?’

‘이 새끼는….’

‘아무리 뭐라 해도 안 버리고 가니까 개소리 하지 마쇼. 형님은 내가 살리니까.’

‘이빨 치지 말고 내려 놔.’

‘허풍이 아니라 진짜라니까. 형님은 내가 살릴 거요. 거, 기억은 나는 거요?’

‘뭐가.’

‘형님이 내 목숨을 얼마나 많이 구해줬는지. 기억하냔 말이오.’

‘나는 별로 네 목숨을 구하려고 움직인 적은 없다. 네가 싹수 있어 보였고 그래서 너를 케어해 준 게 다야….’

‘꼭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소. 형님이 뭐라 말하든 간에 형님이 나를 구한 건 마찬가지니까. 정신적인 부분에서도 그렇고 육체적인 부분에서도 마찬가지요. 못난 동생 때문에 몇 번이나 칼을 대신 맞아줘서 고마웠소.’

‘네가 죽으면 안 되니까… 그럼 투자한 게 얼만데… 돌려받아야지.’

‘던전에 갔을 때도 변호해 줘서 고마웠고 나를 선택해 줘서 고마웠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나는 형님한테 구해지기만 한 것 같다니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정말로 그런 기억밖에는 없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신세진 것 밖에 없다… 이 말이요. 그러니까 이번에는 내 차례라는 거요.’

‘같이 뒈질 거다….’

‘내가 분명히 형님은 살릴 거라고 이야기 했소. 잊지 마쇼. 형님.’

‘뭐.’

‘형님이 할 수 있으면… 나는 더 잘할 수 있소.’

‘…….’

‘형님이 할 수 있는 건 나는 더… 잘할 수 있소.’

‘…….’

‘형님이… 할 수 있으면… 나는 더….’

‘…….’

‘더… 잘할 수 있소….’

‘…….’

‘형님이… 할 수 있으면….’

‘…….’

‘할 수… 있… 소….’

‘…….’

‘있… 소….’

‘…….’

‘…….’

그리고.

나를 찾아온 카스가노 유노의 얼굴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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