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7
회귀자 사용설명서 177화
본능에 충실한 암사자(4)
안전한 후방에서 손가락질만 하면 끝날 줄 알았던 수성전을 생각해 보면 개고생을 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괜스레 서러워졌다.
그래도 어느 정도는 상황이 정리가 된 것 같은 느낌.
사실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이제야 겨우 상황이 원위치로 변했다고 말하는 것이 맞다.
여전히 불안요소는 많다. 미리 무너지기로 예약되어 있었던 서쪽 성벽과 최소 전설급으로 분류될 레이드 몬스터의 존재가 바로 그렇다.
물론 처음 하울링이 들리고 난 이후에 시간이 조금 지났다는 걸 떠올려 보면 기존 병력이 충분히 잘 버텨주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김현성이 합류한 성벽 쪽은 다시 한번 활력을 얻을 것이고 어쩌면 무난하게 수성전이 마무리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항상 최악을 생각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
전황이라는 건 언제 어떤 식으로 뒤바뀔지 모른다. 차희라가 그랬고 새끼 몬스터의 하울링이 그랬다.
‘보험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아.’
성공적으로 이 위기를 풀어나가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머리를 굴려야 한다는 것.
할 수 있는 게 한정적인 나는 계속해서 사용할 수 있는 패들을 떠올려야 한다.
괜스레 침을 삼키며 전방을 바라보자 앞에서는 여전히 괴수 대격돌이 진행되는 도중.
샤오린도 충분이 강하기는 하지만 어째서 그녀가 차희라를 죽일 자신이 없다고 했는지 대충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전설 등급의 아이템 울드는 확실히 위력적이다.
채찍질 한 번에 요란한 소리와 함께 작은 건물들은 휩쓸려 나갈 정도. 그렇지만 차희라는 처음 기습 이후에 다음번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크르르륵!!”
쾅! 쾅! 하는 요란한 소리보다 한 발자국 빠르게 움직여 계속해서 공격을 피해내는 움직임은 90의 민첩 능력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의 능력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이성이 날아가고 본능만 남은 상태에 있는 인간이기 때문에 보여줄 수밖에 없는 움직임. 내 눈으로 보건데 저건 그냥….
‘감각이야.’
감각이며 본능이다.
이미 수련으로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정하얀처럼 그녀 역시 천재의 한 종류인 셈. 물론 저 정도까지 올라간 플레이어 중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를 찾는 게 더 빠를 것 같기는 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중에서도 차희라는 확실하게 비상식적이다.
샤오린이 어떻게든 이전의 거리를 유리하며 그녀를 묶어놓으려고 하고 있지만 우리 속에서 풀려난 맹수가 조련사를 따를 리가 만무, 눈으로 보기에도 위협적인 상황이 몇 번이나 지나갔는지 모른다.
‘잘 버티는데?’
특성이 유지되는 시간이 거의 다 끝나갈 때 즈음에 차희라가 그녀를 찢어 죽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결과긴 하지만 지금 저렇게 죽어버리면 굳이 그녀를 이쪽으로 부른 이유가 없다.
‘조금만 더 버텨! 이년아!’
내 생각과는 다르게 자꾸 거리를 허용하는 듯한 느낌.
마력의 존재 때문에 무기의 단점을 조금은 상쇄시킬 수 있지만 그래도 채찍이라는 무기의 특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근접전 같은 경우에는 불리한 것이 당연.
특히나 상대가 근접전의 스폐셜리스트라는 차희라라면 더욱더 그렇다.
도망치려는 조련사를 끝까지 물어뜯으려 바로 앞까지 달려드는 짐승이 결국에는 채찍을 든 멍청한 여자의 품까지 파고들었을 때, 샤오린 그녀가 그 자리에서 자신의 무구를 놓아 버리는 것이 보였다.
뭔가 기묘한 자세를 잡은 이후에는 차희라의 팔을 쳐내고 오히려 팔꿈치로 그녀의 명치를 가격.
‘권법?’
누가 보기에도 엄청난 힘이 실린 모양인지 반대쪽으로 튕겨져 나가는 게 차희라의 모습은 다분히 비현실적.
‘슈바…. 뭔 권법이야….’
보통 저런 무기를 들고 있는 사람의 경우에는 근접전이 약하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
저런 모습을 보여주니 황당한 반응이 나오는 게 무리가 아니리라.
‘쟤 왜 저렇게 세?’
아무리 성장 중이라고 하지만 천하의 김현성 역시 저 차희라에게는 애를 먹었다.
전설 등급의 무구를 이용한 중장거리전부터 초 근접전까지 완벽하게 몸에 익히고 있는 샤오린은 누가 봐도 강자라고 분류할 수 있는 종류의 인간.
능력치는 조금 밀리는 것 같기는 했지만 고인이 되어버린 이토 소우타보다도 저쪽에 조금 더 점수를 주고 싶을 정도였다.
그 차희라를 밀어 붙이고 있는 거였으니까.
그렇지만 차희라를 밀어붙이고 있다는 판단은 내 개인적인 생각에 불과한 모양, 대미지를 먹인 것 치고는 별로 표정이 좋지 않은 그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자연스럽게 샤오린의 시선을 따라가니 보이는 것은 싸구려 무기 두 개를 한 손에 하나씩 들고 있는 붉은 짐승. 운 좋게도 처박힌 곳이 무기 상점인 모양인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차희라가 무기를 사용하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은데….’
분명히 처음이다. 직업의 효과로 고급 쌍수 무기 지식을 습득한 그녀가 어째서 자신의 무구를 들고 다니지 않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간에 전투의 양상이 조금 달라질 것 같은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아니 어떻게 봐도 무기를 든 쪽이 들지 않은 쪽보다는 강할 것이다.
그걸 알고 있기 때문에 그녀도 긴장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 괜스레 샤오린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저러다가 저거 죽는 거 아니야?”
자연스레 나온 혼잣말.
뒤 쪽에서 내 말에 대답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위험할 겁니다. 확실히 그녀는 강합니다만….”
“깜짝이야!”
“아… 이거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생각보다 빨리 오셨군요.”
뒤쪽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김현성에게 주문한 붉은용병. 뒤를 돌아보니 이쪽을 바라보며 입을 열고 있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현재 성벽 쪽에 병력의 여유가 많지는 않아 단원 여섯 명을 데리고 왔습니다. 저희가 함께해야 할 일이 있다고 와서 찾아왔는데…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대충 알 것 같군요.”
“네. 저 채찍을 든 여자가 지금 희라 누나를 막고 있습니다만 혹시라도 다른 사고가 나지 않도록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혹시라도 다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어서….”
“아마 그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만… 일단 마스터를 지키는 것은 저희 일이기도 하니 감사한 마음으로 명에 따르겠습니다. 그보다 저 여자 쪽은?”
“그녀 말고 그녀의 부하들도 있는 걸로 확인됩니다. 숫자는 약 다섯 명. 공화국 쪽으로 보이는 사람들이지만 일단은 저희 쪽에 협력하기로 했으니 그들의 안전 역시 신경 써주시면 좋겠습니다. 특히나 폭주가 끝나기 전까지 죽지 않도록….”
“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보통 저 상태에 접어든 마스터는 말리기가 쉽지 않으니…. 이성이 되돌아오기 전까지는 오히려 저 여자를 지원해야겠군요. 조금은 다행인 것 같습니다. 도시로 오지 않았거나 저 여자가 없었다면 다른 사고가 터졌을 겁니다. 최근에는 저러신 적이 없었는데….”
‘원인이 나라고는 말 못 하지.’
“예전에는 저렇게 폭주한 적이 있었습니까?”
“대륙에 떨어지신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수차례 있으셨고 붉은용병을 창단하고 자리 잡으신 이후로는 딱 한 번입니다. 물론 그때는 지금 같은 느낌은 아니었습니다만….”
“그때는?”
“적 아군 가릴 것 없이 공격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지금은 적어도 아군은 구별하고 있다고 전해 들었으니 다행이로군요.”
만약 그런 상황이었다면 이쪽도 앞뒤 가리지 않고 캐슬락을 빠져나갔으리라고 장담할 수 있다.
차희라도 차희라지만 궁금한 것은 성벽의 소식.
단원을 바라보며 입을 열자 곧바로 말을 받아오는 녀석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군요. 아. 현재 수성전 상황은 어떻습니까?”
“괜찮습니다. 전설급의 네임드 몬스터가 나타나기는 했지만 공격에는 조금 소극적이더군요.”
“아하….”
“아직까지는 영웅 등급의 몬스터나 하위 종들을 보내올 뿐 성벽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은 해오지 않고 있습니다. 녀석이 본격적으로 밀고 들어온다면 저희 역시 커다란 피해를 감수해야겠지만 이전의 전투에서 아군 마법사들이 마력을 많이 아껴놓은 덕분에 수성전에는 여유가 있습니다. 제1성벽 쪽에서 한꺼번에 몬스터들을 해치운 게 확실히 효과가 있었던 터라….”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보면 예상할 수 있었던 상황, 네임드 몬스터가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건 예상 외였지만 그것 말고는 전부가 계산 안에 있다.
아니, 사실 어째서 녀석이 움직이지 않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대충 답이 나온다.
조금만 생각해 봐도 아주 손쉬운 문제.
입꼬리가 올라가지 않는 것이 이상한 상황이리라.
‘여유롭게 움직일 수 있겠는데….’
지금까지는 힘들었지만 지금부터는 제법 편하게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이쪽이 준비한 보험은 완전히 들어맞았다.
“서쪽 성벽은 조금 어떻습니까?”
“서쪽 성벽 역시 별 다른 문제가 없었습니다. 사망자가 다수 나오기는 했지만 예비 병력을 빠르게 투입해 빈자리를 메울 수 있었고… 물론 다른 쪽 성벽에 비하면 전력이 밀리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혹시 서쪽 성벽에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아뇨. 말씀을 들어보니 괜찮을 것 같군요. 혹시 문제가 생긴다면 동쪽 지역으로 대피하시면 됩니다.”
“네. 알겠습니다.”
“혹시 음성 증폭 마법이 가능한 마법사분이 계십니까?”
“아… 네.”
마법사 스쿼드가 약한 붉은용병임에도 불구하고 구태여 마법사 한 명을 끼워 놓은 것을 보면 이쪽에 내가 있다는 걸 듣고 신경을 조금 써준 모양, 우리 회귀자의 세심한 배려가 돋보였다.
‘좋네.’
“마법사 한 분을 제외한 다른 분들은 제가 방금 말씀 드렸던 임무를 수행해 주시면 됩니다. 혹시 폭주상태가 끝난 이후에 희라 누나는….”
“다른 부작용은 없습니다. 곧바로 이전과 같은 상태로 돌아오신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건 다행이로군요. 그럼 신호는 이쪽에서 보내겠습니다.”
“무슨 신호를?”
“희라 누나한테 들으시면 될 겁니다. 저는 지금부터 작은바위 길드 하우스로 갈 겁니다. 안전할 것 같으니 호위는 해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한 명 더 데려가시지요.”
아무래도 이쪽의 안전에 꽤나 신경을 써주는 것 같았다. 차희라의 명령 때문이라지만 고마워지는 것이 사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니 곧바로 전사 한 명과 마법사 한 명이 이쪽으로 달라붙었다.
‘남은 시간 15분.’
나를 위해 열심히 싸워주시고 계시는 샤오린 님 덕분에 싸움 구경도 하고 편하게 몸을 이동시킬 수 있다는 게 기분 좋기는 좋다.
이렇게 호위를 받을 수 있다는 것도 마음이 편해지기도 하고… 붉은 용병의 마법사 한 명이 바깥으로 나가기 전 간단한 환상 마법을 걸어주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차희라에게 발각될까 걱정된 모양인 것 같지만, 이미 차희라는 이쪽에 관심이 멀어져 있다.
조용히 바깥으로 나오자 여기저기에서 폭음과 굉음이 들려온 것은 당연지사.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쪽의 상황은 무척이나 여유롭다. 기분도 무척 좋아진다.
어째서인지는 뻔할 뻔자.
‘퍼즐 조각이 전부 모인 것 같았으니까.’
조금 빠르게 달리기 시작하자 배경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
샤오린과 열심히 치고 박고 있는 차희라는 잠깐이지만 이쪽의 존재를 잊은 것이 확실해 보였다.
물론 내가 사라졌다는 걸 깨닫고 조금 화가 난 모양인지 아까보다 더욱 커다란 굉음이 들려왔지만 내가 신경 쓸 타이밍은 아니다.
‘남은 시간 10분.’
“혹시 안고 달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예. 물론입니다.”
체력적 부담을 짊어지게 될 전사한테는 미안하지만 이편이 조금 더 빠르다.
서쪽 지역에서 작은바위의 길드 하우스에는 거리가 있으니 시간이 조금 더 걸릴 것이다.
‘남은 시간 2분.’
김현성이였으면 벌써 도착했을 시간. 민첩이 아닌 내구와 힘에 투자한 전사니 이정도의 속도로 뛰어주는 것도 용하다.
배경이 조금 뒤바뀐 이후에는 작은바위 길드 하우스를 점거하고 있는 사랑스러운 붉은용병이 눈에 보이기 시작.
희라 누나 쪽은 정신을 차렸는지 서쪽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폭음이 줄어들었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난 이후에는 왠지 이유를 알 것 같은 차희라의 절규 소리가 들려온 것 같은 착각이 들기는 했지만 저건 안 들리는 척하는 것이 나으리라.
작은 바위의 길드 하우스에 가까워지자 단원 한 명이 이쪽을 마중 나왔고 나는 녀석을 향해 곧바로 말을 이었다.
“계셨군요?”
“아, 이기영 님.”
“별일 없으십니까?”
“예. 그것보다 이곳까지는 무슨 일로….”
“갓 태어난 몬스터의 새끼, 이곳에 있지요?”
약간 쓰레기 같기는 했지만 최고로 효율적인 방법.
붉은용병의 단원들이 우물쭈물거리며 새끼를 꺼내오는 것이 보인다.
조금은 용처럼 생긴 것 같은 모습. 차이점이 있다면 날개가 돋아나 있지 않은 것 정도였다.
정확히 말하면 앞다리 쪽에 뭔가가 붙어 있기는 하지만 누가 봐도 날기 위해 만들어진 기관이 아니다.
뭐, 사실 겉모습 따위는 상관없다.
이쪽이 입마개를 풀자 녀석의 구슬픈 울음소리가 도시를 가득 메운 것은 당연지사.
“키에에에에에에에엑….”
콰아아아앙! 하는 소리와 함께 서쪽 성벽을 박살낸 어미가 정확히 내가 있는 쪽을 바라보는 것이 눈에 보였다.
“노려보면 어쩔 건데 이 자식아! 푸흐하하핫!”